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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11/04
 
과제로 내 주는 서평 및 영화평을 읽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창의적이고, 솔직하고, 비판적이고, 개인의 경험이 풍부히 담긴 글 중 좋은 글만 모아보려고 합니다.좋은 서평을 써 준 학생들에게 글을 게시한다는 동의/허락을 일일이 구하지 못했지만, 흔쾌히 양해해주리라 믿습니다.^^

매트릭스란? :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4학년 박창민

2008.12.21 19:10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6 주소복사

매트릭스(Matrix)가 의미하는 것은?

 

지리교육 박창민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이 유대인 비평가는 잠깐 한나 아렌트의 남편 노릇도 했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그의 대책없는 페시미즘(염세주의)이 견딜 수 없어서” 그와 헤어졌노라고 술회했다. 아내를 질리게 한 안더스의 비관주의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이 현대판 묵시론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격차’(Diskrepanz)를 걱정하는 하이데거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 철학적 우려는 오래전부터 SF영화를 위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안더스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새로운 존재층을 만들어낸다. 가령 안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쌍둥이빌딩이 실시간으로 불탈 때, 그 영상은 ‘가짜’ 하기도 뭐하고, ‘진짜’라 부를 수도 없다. 이렇게 가상도, 현실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 부른다. 실제로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래로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관념적인 팬텀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령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의 머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 사진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 영상, 즉 내가 아닌 남이 본 영상들로 짜여져 있다.

‘팬텀’을 재료로 세계를 짜는 원리가 바로 ‘매트릭스’다. 철학자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인 것처럼, 대중매체는 세계를 세계로 제시할 때 ‘매트릭스’라는 선험적인 틀을 사용한다. 가령 <조선일보>를 생각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아끼면, “대통령, 꿀 먹은 벙어리인가”, 대통령이 말을 흐리면, “대통령 입장을 확실히 하라”, 대통령이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 “대통령, 입이 헤프다”. 이렇게 세계는 미리 짜여진 선험적인 틀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건은 원본의 형태로는 더이상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도라는 형태로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본이 아니라 외려 복제의 형태로서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질 때, 현실은 팬텀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자리를 내주고 점차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누가 짠 것인가? 이 세계는 과연 누구의 표상인가? 오래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꿈이 너희의 표상이다.” 누굴까? 이 말을 한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히틀러다.

그렇다면 우리 세계의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교사가 되기 위한 집단이다. 미래의 교육을 위해 배우고 있고 교사가 되는 절차인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단계를 거친다.

‘참교육’ 이란 무엇인가? 흔히 사범대재학중인 학생들은 참교육이라는 구호를 외쳐댄다. 새내기들은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참교육이라는 담론에 세뇌된다. 참교육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것인가? 새내기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학교에서 담임교사, 그 외 학과교사를 욕하면서 스트레스해소, 농담거리로 삼았던 이들(전부 그렇지는 않겠지만.^^)이 참교육을 외친다. 정작 학생들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현장에서 수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을 욕하며 지적하며 때린다. 술 자리에서 왜 교사가 되겠는가? 라는 말이 오가면 방학이 있어서, 편해서 정년이 보장되니깐, 라는 말이 오가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진정한 교육을 실현 시키겠노라’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포장하는 현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상태로 살고 있는 우리는 매트릭스에 갇혀 살고 있다고 하겠다.

 

영화속에 나오는 수많은 인간을 양성하는 인큐베이터같은 역할을 한다. 사회화에 필요한 지식 기능 등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은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없어져야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강의를 듣는 모든 학생들은 “그런일은 일어나서는 안돼!!”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현실에서 살기 위해서 교사라는 직업은 꼭 필요하니깐.,,,

 

존 말코비치되기: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2학년 윤희주

2008.12.21 19:02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5 주소복사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보고

71988 윤희주

 

처음에 영화를 보고 한순간 멍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의식과 도대체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평소에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었지만 이런 류의 영화는 잘 접해보지 못했기에 오랜시간의 정리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이고 무의식은 무엇일까? 의식은 내가 자각하는 것이고, 무의식은 내가 자각하지 않지만 내가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 쉽게 말하면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소소한 습관들을 예로 들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원래의 존말코비치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크랙이 문을 발견함으로써 크랙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존말코비치의 무의식을 살펴보고 심지어는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말코비치의 무의식이 타인에게 지배받고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시점은 나의 습관을 자각하는 순간처럼 무의식을 자각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크랙이 말코비치의 몸을 빌려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은 무의식이 말코비치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반부에 맥신과 라티의 추격장면에서 나오는 말코비치의 여러 면들, 이것들도 말코비치가 지금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코비치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처럼 타인이 나의 무의식을 보거나, 혹은 지배하진 않을 것이다. TV에서 가끔 나왔던 최면같은 경우 무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비과학적인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상황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은 언제나 내 어딘가에 있다. 종반부에 나왔던 상황들, 말코비치가 어렸을 때 놀림을 받고, 충격을 받고 또 자학을 하는 모든 상황들은 무의식속에 남겨져 관음증과 같은 의식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은 항상 의식을 사정권 내에 두고 있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이걸 해야해. 하지말아야 해 해도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포비아나 트라우마 같은 무의식적 행위를 멈출 순 없다. 이런 점에서는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고도 볼 수 있다. 허나, 의식이라는 것도 참 신기해서 무의식이 이끄는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 것 같다. 무의식적 행위를 극복하려는 의식의 노력은 오히려 무의식이 이끄는 것 보다 더욱 강력하게 신체를 지배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신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또 신체도 나름의 능력제한을 두어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을 제한한다. 결국,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정신과 육체적인 면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 모두 자신의 힘겨루기를 하다가 어떤때는 의식이, 어떤때는 무의식이, 어떤때는 신체가 주도권을 잡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에 대해서 다뤘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또 이 영화에서 말코비치가 자신의 무의식에 사람이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무의식으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가면 거기에서 수많은 말코비치들이 나와 말코비치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말코비치의 무의식에 말코비치가 들어갔다는 것도 어찌보면 웃긴이야기다. 하지만 거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짧은 생각으로 말하자면 내 안에는 수많은 무의식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자기 나름대로 떠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이 말코비치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말코비치의 의식을 보았는데, 말코비치가 들어온 이상 더 이상의 의식은 없고 무의식만 존재한다. 그 무의식들의 혼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의식과 무의식의 측면에서만 몇가지 이야기해보았다. 이 영화에서 의식과 무의식 이외에도 더 많은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내용보다도 나는 말코비치를 통해서만 사랑과 자아실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크랙, 그리고 말코비치를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은 라티, 그리고 말코비치의 외부적인 모습을 보고, 그 정체성이 누구인지 상관치 않고 사랑하는 맥신[물론 크랙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이용했다는 측면이 강한 것 같지만]. 이러한 주인공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좀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사실 영화보고 이렇게 머리아프게 상상해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처음에는 정말 뭐 이런게 다있나라는 생각밖에 안들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무심코 흘렸던 것들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스타일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화를 볼때보다 다시 생각할 때 더 재밌는 영화였다.

존 말코비치 되기: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명지

2008.12.21 19:01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4 주소복사

-‘존 말코비치’를 보고-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김명지

 

이 영화는 제목그대로 '존 말코비치'라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해 사람들이 존말코비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정체성, 무의식, 잠재의식 ,욕망 등에 대해 담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명확하게 이 영화의 의도하는 바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너무나 철학적인 질문들이 많아서 답도 잘 모르겠고, 참 난해한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15분간 존말코비치 속으로 들어가 그의 감각을 느낄수도 있다. 이영화에서 무의식이라는 단어와 연관되는 장면은 크게 세 부분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크레이그의 부인 로테가 말코비치의 뇌속에 15분간 들어간후 무의식속에 잠재되어있던 자신의 남성성의 정체성을 찾는 부분, 두 번째는 크레이그가 존말코비치의 의식을 차지해 존말코비치 진짜 자신은 무의식속에 갖혀버리고 나중에 크레이그가 그에게서 빠져나왔을때 조금의 시간동안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부분에서 잠깐 언급되었다. 무의식속에서 말코비치는 크레이그의 인형극의 인형들처럼 조종당했다. 또 마지막으로 로테, 멕신이 말코비치안으로 들어갔을때 그 안에서 말코비치의 유년기 청년기 시절이 보였는데 그당시 따돌림, 오줌싸개 등으로 불리던 소심한 아이였던 모습이 그의 무의식이었다. 지금은 잘나가는 영화배우로서 당당한 척하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서는 아픔이 묻어나 있고, 애써 그럼 점을 묻고 살기 위해 점점 더 그것을 무의식속에 가둬 놓고 의식속의 현실에서는 명예, 부라는 욕망을 추구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았을때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무의식이란 의식이 없는 상태,즉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각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런 상태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가치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 또 나에게 있어 무의식의 상태일때는 언제일까? 언제 나는 무의식임을 느낄까? 영화에서처럼 나 또한 무의식 중에 타인에 의해 순간순간 지배받는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을까?

 

나에게 있어 무의식은 꿈속에서 많이 나타났던 것 같다. 의식속에서는 애써 지우고 싶어했던 것들이 꿈속에서 많이 나와서 괴로웠던 적도 있다. 그래서 나도 점점 무의식을 최대한 의식에 개입되지 않게 꾹꾹 억누르려 했던 것 같다. 단적으로, 의식적으로는 나는 부족함이 없고 항상 완벽한 알파걸로서 행동하려하지만 내 무의식속에서는 부족함, 열등감 등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무의식으로 곤란을 겪었던 적,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무의식이 표출되는 바람에 곤란을 겪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평상시에 되도록 속내를 내 비추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편인데 내 주량 이상의 과한 알콜을 섭취하다보니 술로 인한 무의식이 입밖으로 표출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동안 하고팠던 말들을 다 내뱉어 버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내 머릿속의 필름은 끊겨 있었는데 말이다. 대체로 나의 무의식의 경우에는 되도록 감추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는데, 가끔은 무의식이 의식에 개입되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까봐 두렵기도 하다.

 

영화얘기로 넘어가서 영화에서의 인형과 크레이크가 들어가서 조종하는 존말코비치는 공통점이 있다. 꼭두각시인것이다. 존말코비치는 인형과 같이 무의식인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놀아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의 존말코비치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육체는 존말코비치이지만, 정신은 크레이크라면 이건 말코비치인가? 크레이크인가? 영화에서는 그때의 말코비치의 진짜 주체는 크레이크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는 정신적인 세계를 육체적인 면보다도 중시한다. 의식만이 진짜 나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이건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 인듯 하다.

 

무의식의 세계는 알수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김명지되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한번 들어가서 내가 진짜 누군지, 내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쯤 알고 싶다. 무의식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무의식도 나도 내 일부분이기에 너무 억누르려고 하지 않고, 무의식의 신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또한 내가 그동안 무의식에 대해서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렇지 무의식에서도 긍정적인 나의 무궁한 잠재적 능력을 끌어낸다면 내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흔히 의식과 무의식은 빙산에 비유된다. 밖으로 보이는 빙산, 즉 의식은 전체 빙산의 1%정도인데, 나머지 99%의 빙산은 무의식이라 한다. 99%잠재되어 있는 나의 무의식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나의 참모습, 매력을 끌어내어 진짜 내 자신을 발견해보고 싶다. 

고양이를 부탁해: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이복련

2008.11.19 16:29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55 주소복사

영화‘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서본 인천의 사회 지리학적 모습

 

이복련

 

영화‘고양이를 부탁해’는 인천이라는 공간속의 스무살 태희와 그 친구들 지영, 혜주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했던 건 아마 내가 열다섯이었을 때로 기억한다. 20대는 물론 10대의 끝도 보이지 않았던 때라, 이 영화가 절실히 와 닿거나 특별히 공감되는 그 어떤 것도 없었지만, 그저 2시간 남짓의 시간동안 영화에서 줄곧 전달하려는 무언의 메시지와 분위기에 취해 20살이 되면 꼭 다시 한 번 봐야지 했던 영화였다. 그리고 스물 한 살, 11월 초순 찬바람이 제법 거세질 무렵 이 영화를 다시 보았다. 이제는 동생이 되어버린 태희와 지영과 혜주, 그리고 그들이 아직도 살고 있는 영화 속의 인천을 말이다.

 

영화는 2000년대 초반 인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계절은 겨울. 특히나 카메라 렌즈가 지영의 집을 향할 때면 삭막한 겨울의 느낌을 온연히 담아낸다. 영화 속에서 태희는 그 큰 눈을 껌뻑거리면서 인물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그 한 중간에 서있다. 영화 초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태희의 연락을 주도로 이들은 만나게 된다. 태희의 연락 없이는 이들은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낼 런지도 모른다. 혜주와 지영은 미묘한 갈등관계에 놓여있고 그것이 영화 중반 표면으로 드러나 버리기도 하지만, 그 때에도 지영은 어느 한편에 서 있기보다는 이쪽저쪽을 저울질 해가며, 갈등을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이렇듯 혜주와 지영 그리고 비류와 온조와 모두 가장 원만히 연결되어있는 인물이다. 즉, 태희라는 인물의 시선과 움직임을 통해 영화가 전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인천이라는 공간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 영화를 들여다보자면, 우리는‘지영’이라는 인물에 주목해야 한다. 영화 초반, 지영은 다 쓰러져가는 건물들 틈새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한다. 이름은‘티티’.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채 잔뜩 움츠려서 살아가고 있는 그녀는 고양이 티티에게서 왠지 모를 연민과 공감대를 느끼며, 티티 에게 많은 애정을 쏟게 된다. 그리고 영화 후반, 할머니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며, 티티를 조문 온 태희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태희는 다시 티티를 비류와 온조에게 맡기고, 지영과 함께 인천을 벗어나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떠난다. 지영과 태희의 재회, 그들이 후에 인천으로 다시 되돌아 왔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의 인천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인천. 그들에게 있어서 - 특히 지영- 인천은 주인에서 주인을, 손에서 손을 오가는 고양이들처럼 안정되어 정착하지 못한 채 불안감이 스며있는 그런 공간 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바쁘게 우리의 주인공들을 지나쳐 간다. 신 국제공항 건설 또한 한창이다. 하지만 단편적인 스틸컷이 아닌 지영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인천은 바싹 말라버린 낙엽과도 같이 삭막하기 그지 없다. 금방이라도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부서져 내릴 것만 같다. 지영 뿐만 아니라 이 영화 속에는 도시적 화려함과는 별개로 절대적으로 외롭고, 절대적으로 배고픈 이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지영과 태희 사이를 가로 질러가던 한 노파가 그러하였고, 태희에게 말을 걸며 다가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 인천이라는 공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인천과 서울의 거리는 지하철로 29개역이 소요되고, 시간은 약 1시간 남짓 걸린다. 그만큼 인천과 서울은 가깝다는 얘기다. 인천과 서울의 지리적 근접성. 이것은 인천이라는 도시를 이만큼 발전시켜 놓은 이유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정체시켜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1시간만 앉아있으면 서울에 도착한다. 서울에서 직장을 잡고 그 생활에 누구보다 만족하고 있는 지영이 아무렇지 않게‘너네가 서울로 와!’했던 것처럼, 서울과 인천을 잇는 지하철이 생기면서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일은 이미 도시에서 다른 도시를 향해간다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렇듯 서울로 통하는 교통이 편리해짐과 동시에 인천은 성장을 계속해 왔다. 하지만 인구의 절반이 밀집되어 있고, 기업의 본사와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로의 연결성은 인천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게 하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인천이라는 공간속에서‘in 서울’이 차지하는 의미는 커져만 갔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모두 누구라 할 거 없이 하나같이 서울로의 진출을 꿈꾼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울은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손끝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공간이다. 경제적인 문제에서 같은 조건에 놓여있다고 하였을 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광주에서 서울로 대학을 진학을 희망하는 것과 인천의 수험생이 서울로의 대학을 희망하는 것은 심적으로든 표면적으로든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인천의 고등학생들에게 서울의 대학들은 이미 자신의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비해 광주에서 서울로의 대학을 진학하기를 희망하는 것은 좀 더 큰 포부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지리적은 근접성은 차이가 일차적인 이유겠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러한 근접성을 전제로 갖게 되는 두 도시간의 지리적인 연결성이 이러한 차이의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미 인천이라는 공간속에서 서울은 저 멀리 피어있는 아지랑이 같은 공간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실제하며,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때론 그렇기 때문에 영화 속에서 혜주가 그랬던 것처럼 서울로 향하고, 그 안에서 적응해서 새로운 (혹은 그렇다고 믿는)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어버리 기도 한다. 서울에서 직장을 잡아 그 곳 생활에 적응해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 지금 그들이 인천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으로 저것을 되뇌이고 있으리라. 혹은 저것이 지금 그들이 바삐 인천의 거리를 걷고 있게 하는 이유이자 원동력기도 할 것이다. 때문에, 인천은 어느 순간부터‘인천’이라는 도시의 자립성 보다는 서울과 원활히‘연결’된 공간으로서의 인천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부여되었다. 이는 너나 할 것 없이 서울로의 진출과 그 속에서의 동화를 꿈꾸게 되었고, 점차 인천이라는 도시의 내부적 안정성과 정착성은 조금씩 허물어지게 되었다. 조금만 더 가면 서울인데, 라는 생각에 인천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만족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인천의 겨울을 더 춥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계속 지내고 살아갈 터전이 아니라, 더 큰 곳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잠깐 머물러 있는 곳. 그것이 영화 속에서 보여 지는 인천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지금 닥친 현실에 허덕여 더 큰 곳을 차마 볼 수조차 없는 지영과 같은 사람들을 조금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다.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떠나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남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은 다 떠나고, 만족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남는 상황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 결국 지영과 태희 역시 그들이 20년 동안 살았던 인천을 떠나 인천하늘을 가로 지른다. 결국 그들도 인천을 떠났다. 오히려 혜주보다 더 멀리. 인천의 차디찬 겨울 속에 남은 건 티티를 부탁받은 비류와 온조 뿐이었다. 신국제공항이 건설되면서, 인천엔 서울이 아닌 좀 더 넓은 곳을 향하는 좀 더 큰 창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영과 태희도 그 문을 통해 인천을 떠났다. 이 문이 종전의 것과 다른 것은 목적지가 눈앞에 보이지 않고, 손을 뻗고 발뒤꿈치를 들어도 닿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문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들이 어떤 목적 때문에 공항에 내려 게이트를 통과해 인천 땅에 발을 내릴지라도 그들에게는 그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게이트를 통과해 인천 땅을 떠나게 된다. 하루면 수많은 사람들이 인천이라는 공간을 오고 가지만, 인천은 그 속에서 점점 더 외로워지고 있다. 정착지가 아닌 스쳐가는 곳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신공항이 건설됨에 따라 인천은 세계적인 허브공항으로서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세계로 통하는 문이 되어주고 있는 인천이라는 도시는 한편으론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을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태희, 혜주, 지영. 20살이 되고 나서 그들은 변했다. 그들의 삶은 불안정하고, 그 삶속을 방황한다. 무엇이 그들을 변하게 만들었는가? 인천이라는 도시 속에 그들에 주목해 영화를 감상해본 결과 그들은 항상 언제고 변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20살이 그들이 변하게 만들었다기보다 20살이라는 나이가 그들을 변해 볼 수 있게 한건 아닐까? 어슴프레 자고 있다가 한 번의 쓰다듬는 손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처럼. 인천이라는 공간 속을 그들은 언제고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티티는 인천에 남게 된다. 서울로 보냈던 티티는 다시 돌아왔지만, 인천의 비류와 온조는 티티를 안아들었다. 영화 속이 아닌 실제 인천을 삶의 터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인천은 그저 다른 도시와 별반 다른 것이 없을 것이다. 군중속의 고독을 겪고 있는 인천이지만 아직은 고양이를 부탁한다며 문을 두드려 볼 수 있는 곳이 많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고양이를 부탁해: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김아리

2008.11.19 16:19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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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부탁해』

- 영화감독이 보여주려고 하는 인천이라는 도시의 사회 지리적 특성은 무엇인가 -

 

김아리

 

 

영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다섯 명의 친구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평범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며 주류사회와는 다분히 차이가 있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주변화되어 주류사회로부터 소외 아닌 소외를 당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소외는 전혀 외롭지 않았다. 혜주, 태희, 지영, 온조와 비류, 미얀마 노동자들, 태희를 좋아하는 뇌성마비 장애인. 이 모두가 주류사회와 떨어져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아가려 노력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데 필요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인천이라는 배경을 설정하여, 이 둘의 대비 관계를 보다 더 세밀하게 연출하고자 한다. 허나 그들의 삶이 이런 이중적인 잣대 속에서 관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오히려 차별적인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발전되지 않은 인천의 시민들은 이 영화를 보며, 서운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는 것이 불현듯 스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영화는 절묘한 백그라운드와의 호흡이 중요한 영화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주인공들의 특징을 더욱 잘 묘사하는 것이 바로 서울과 대비되는 인천이다. 영화는 여타의 영화들이 ‘대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것과 달리, ‘특별히’ 인천을 배경으로 택하였다. 지금의 인천은 수도권이라는 이름하에 서울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크게 발전하였으나, 발달되기 전 인천은 서울으로 가지 못한 사람의 보루이기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지금도 교육에 있어서 인천에서 서울로의 향도는 있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한창 발전되고 있는 인천의 모습을 20대의 주인공들과 오버랩 시키며 영화는 극을 이끌어 간다. 영화에서는 인천이 부흥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무너져가는 지영의 집, 공사현장, 연기 나는 굴뚝을 보여주며 인천을 묘사하고 있다.

불과 한 시간 떨어져 있을 정도로 인접해 있지만 서울과 인천은 별개의 세계처럼 보인다. 증권사와 벤처 회사로 빌딩 숲을 이루는 테헤란로와 시커먼 연기가 피어나는 공장 굴뚝, 복잡하게 얽힌 철주가 떠오르는 인천이라는 공간은 ‘분리’의 인상을 준다. 중심부와 인접했지만 명확히 나뉘어진 주변부의 느낌은 다섯 아이들의 삶과 포개진다. 서울과 인천 이라는 지리적 좌표의 차이만큼이나 ‘고양이를 부탁해’는 열린 공간과 닫힌 공간이라는 짝을 적절히 활용한다. 허물어져 가는 집 꼭대기의 닫힌 창문에 갇힌 지영의 처지는 고층 빌딩의 거대한 유리 속에 갇힌 혜주, 답답한 맥반석 체험실에 틀어박힌 태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정재은 감독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느낌을 살릴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 ‘로케이션의 승리’라 할 만한 공간감을 얻어냈다고 한다.

정말이지 영화 속에서 인천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도시로 그려진다. 태희는 틀에 박힌 삶을 살며, 지영이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현실의 벽에 부딪혀있다. 온조와 비류도 길거리에서 노점상을 하는 조금은 편안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혜주는 서울에서 증권사 사원으로 입사하여 이상적인 삶을 꿈꾸려하지만, 저부가가치를 갖고 있는 낮은 인간으로 평가되며 벽에 부딪혀 꿈은 좌절되고 만다. 혜주는 인천이 싫다며, 서울을 고집하고 서울특별시민이라는 칭호에도 강한 자신감을 가진다. 이는 인천이라는 혜주의 원래 고향을 버리고 서울의 시민을 추구하는 것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왜 고양이를 부탁해인지 이유를 찾아보니, 정재은 감독은 “개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고양이는 마이너리티고 소외된 동물”이라고 말했다. 야생동물과 애완동물의 ‘사이’에 놓인 고양이의 처지는 어른도 아이도 아닌 중간자의 위치에서 제 꿈을 다 펼치지 못하는 다섯 친구들의 모습을 닮았다. 들어오고 나가는 이주민들이 많은 ‘인천’이라는 공간(그곳에는 바다와 하늘로 열린 항구와 공항이 있다)도, 밀입국자들의 부유하는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위의 글을 읽어보니, 주인공들의 디테일한 감정을 묘사하기에 인천과 고양이가 큰 역할을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의 중간에 을씨년스러운 인천의 풍경을 보여주며 출현하는 미친 여자. 미친 여자도 어쩌면 인천이라는 도시. 즉 아직은 미발달된 이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불쌍한 한 인간이 아니었을까.

 

얼마 전에 ‘영화 속의 도시’라는 책을 읽었었다. 그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영화는 이미지를 재현해내는 가장 탁월한 양식이다. 하지만 영화는 현실 도시의 총체적인 모습을 그래도 닮고 있지는 않다. 현실의 도시와 영화 속에 재현된 도시는 동일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도시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방식과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도시를 경험하고 인식하는 방식 또한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속의 도시. 즉 ‘고양이를 부탁해’의 ‘인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인천의 모든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인천을 이해하는 탁월한 양식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 같다.

영화 속에 묘사된 인천의 모습에서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인천은 동북아의 허브로 해양으로 하늘로 뻗어있는 중심지가 되었다. 어른을 시작하는 주인공들의 마음은 미발달상태의 인천의 모습처럼 조금은 갑갑하고 은둔적, 폐쇄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적 도시로 도약하는 인천의 모습은 이제 그 주인공도 어둠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조금은 답답하고 어두웠던 인천을 탈피할 수 있는 탈출구가 서울이었다면, 이제 인천에도 스스로 내재적 발전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내면적 의미를 살펴보기 보다는 외면적인 재미와 흥미에 치중했던 나인데, ‘고양이를 부탁해’는 현재 20대를 살아가며 동시에 지리를 전공하고 있는 나에게, 인천의 지리적인 면도 조금은 신중하게 고찰하게 할 수 있게도 해주었고, 내 삶을 좀 더 깊게 조명해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롭고 잔잔하기만 했던 이 영화는 클라이막스는 없지만, 은은함의 감동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리고 영화에 대해 파헤쳐 보려고 인천의 역사와 산업 등에 대해 검색했던 나의 수고에 작은 목소리로 칭찬해주고 싶다.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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