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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로 내 주는 서평 및 영화평을 읽는 것은 정말 즐겁습니다. 창의적이고, 솔직하고, 비판적이고, 개인의 경험이 풍부히 담긴 글 중 좋은 글만 모아보려고 합니다.좋은 서평을 써 준 학생들에게 글을 게시한다는 동의/허락을 일일이 구하지 못했지만, 흔쾌히 양해해주리라 믿습니다.^^

장소와 장소상실: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현선

2008.12.21 18:33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3 주소복사

책이름 :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책지은이 : 에드워드 렐프 Edward Relph

작성자 : 김현선

 

 

어렸을 적 티비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에 대한 연속극 따위를 본 것 같다. 병원 침대에서 막 깨어난 환자는 가장 먼저 ‘여긴 어디지요?’라고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물음은 그 다음이다. 또한 만화 등에 나오는 우스갯소리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형이상학에 의하면 존재하다 혹은 있다는 모든 사물의 본질이자 공통점이다. 있음과 관계되는 말은 많겠지만, 가시적인 공간을 차지함도 있음이라고 말할 때 연상되기도 한다.

‘장소와 장소상실’이 핵심 개념으로 장소를 택하고, 장소에 대해 철학의 분과인 현상학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위의 상황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본 지리학 서적과 다르게, 지리적 개념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시작한다. 현상학적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산만할 정도로 다양한 관점으로, 장소를 한 가지 술어로 정의하려는 의도를 배제하며 논의는 진행된다.

사적으로 쓰이지만 본질적으로 실존과 맞닿았으며, 저자가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지리적 개념인 장소는 학적 지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환기시킨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장소들은 의미로 충만하며 지리학은 장소의 의미, 장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일상이 지리적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나의 경험을 지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저자가 공간에 대한 의식을 분류할 때 언급한 개념 중 지각 공간은 아마 내가 걷는 전남대학교의 캠퍼스, 몇 달에 한 번 가는 고향과 그 길에 거치는 터미널, 내가 사는 고시원 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년기에 자아 발견의 기초가 되며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안정감과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공간’에 대한 추억은 여수에 살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빗댈 수 있으리라. 7살도 되기 전에 여수의 달동네에서 산 적이 있는데, 경사진 마을 앞은 항구였다. 비릿하고 짠 바다바람과 생선 냄새로 찌든 회색 콘크리트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향수와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뿌리 뽑힘과 장소에 대한 관심’이라는 제목이 붙은 내용을 읽을 때는 운 좋게 사주팔자가 맞아떨어졌을 때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나의 문제를 설명할 말이 떠올랐다. 그 동안 나는 계속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소속감을 느껴도 좌절되었다. 그리고 고향을 이상화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가 식물 같다고 생각했다. 강진에서 뽑혀 광주에 심긴 식물. 10년 간 자라던 곳에서 뿌리 째 뽑혀 낯선 토양에 적응해야 하는 식물. 나는 뿌리 째 뽑혔다는 말을 곱씹으며 조선 시대가 모든 점에서 현대보다 혹독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주장은 아니지만 이 책에 인용된 내용에 따르면, 그 때 떠올린 뿌리 뽑힘은, 장소와 장소가 중요한 이유 그 자체라고도 하는 인간과의 유대에서 뿌리 뽑혔기 때문이라고 지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한다. “오늘날의 집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현상이다. 집이 주택과 동일해졌다. 다시 말해서 집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집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금전적 가치로 쉽게 측정되고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집을 ‘거주할 수 있는 기계’로 여기는 상황이나 무장소성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대의 집이 처한 상황을 전적으로 대표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를 상정하기보다 논의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저자의 태도로 미루어 그런 의도로 집어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자 어머니가 떠올랐다. 10년 동안 같은 곳에서 살기를 고집한 어머니는 아마 집을 ‘거주할 수 있는 기계’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몇 십 년 간 감옥에 살던 죄수는 어느 날 가석방을 당한다. 그는 친밀한 장소에서 낯선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졌다고 느낀다. 사회는 너무 변했고 자신은 감옥에서보다 무능한 사람 취급을 당한다. 범죄를 저질러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마저 하지만 결국 자살한다. 이 죄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마 책에서 설명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17세기, 18세기 의사들은 노스탤지어가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책의 주인공인 하이디도 자기가 살던 시골에서 도시로 떠난 뒤 몽유병에 걸리고 시름시름 앓는다. 장소는 나의 어머니에게는 애착의 대상이었지만, 더 나아가 죄수나 하이디에게는 떠나면 죽을 수도 있는 물고기의 바다와도 같았나 보다.

 

이렇게 감정을 이입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추상적이고 광범위하며 비정형적인 방식으로 쓰여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저자가 경직된 논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장소의 진정성과 비진정성에 대한 부분에서 저자의 어조는 확고해진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는 대중적인 장소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는 상징이나 의미, 합의된 가치가 아니라 멋대로 합성해서 만들어진 조잡하고 경박한 상투성에 기초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작된 이미지를 지닌 채 해당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른바 진정성이 부족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에 부여하는 가치가 입장에 따라 상이함은 저자도 말한 부분이다. 같은 달동네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고 지저분하고 비좁으며 비슷비슷한 집들이 몰개성하게 들어선 장소라고 느껴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집들과 거리의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자아를 구성하는 의미 깊은 장소일 수 있는 것이다. 장소의 진정성도 장소 자체가 가지기 보다는 장소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성질이 아닐까? 물론 대중적 이미지는 장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나 이해가 없이, 단지 조작된 이미지일 뿐이며 심하게는 선입견이라고 말해질 수 있지만 말이다. 대중적인 장소이미지가 허구성 때문에 저자로부터 비판받는다면, 허구적이지 않은 대중적 이미지는 그럼 비판받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대해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자연적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장소와 관련한 정체성을 장소의 정체성과 장소에 대한 정체성이라고 구분하는 부분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어떤 것에 대한 정체성이 아닌 어떤 것의 정체성은, 다른 것으로부터 그것을 구분해낼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인 동일성과 통일성을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주체로서 정체성을 느끼는 것처럼 장소도 스스로 정체성을 느끼는 것일까? 장소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느낌 안에서만 정체성을 가진다. 게다가 인간이 고유하고 절대적인 정체성을 가진다고 말해도 반발이 있는데, 장소가 가진 정체성이라니. 내가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일까.

 

아무튼 지금까지 읽은 지리학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인문학적인 책이었다. 경제철학, 역사철학, 사회철학 같이 지리철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면, 아마 이 책이 그 분야에 잘 들어맞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지리학적 발견이나 지리학의 역사를 통해서만 지리학이 무엇인지 알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지리학에 접근한 책은 처음이라 좋은 경험이 되었다.

 

장소와 장소상실: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아리

2008.12.21 18:23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2 주소복사

장소와 장소상실(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논형)

 

 지리교육과 김아리

 

우리는 평소에 장소 그대로의 본질을 간과한 채 장소의 외연적인 모습만을 ‘인증’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혹은 장소의 본질을 잊고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책에서의 중요도의 순으로 우리는 장소를 평가하고 관망한다. 장소는 그의 실존적 내부성을 무시당한 채, 그 가치를 평가절하 당하기 일쑤이다. 장소의 피상적인 의미 만에 중점을 두는 세태가 일반적인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장소 안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장소감은 어쩌다 얻은 멋있는 기술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말한 이안 나이른처럼 장소감이 우리와 지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 모습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장소와 장소상실」의 초점은 우리가 살고 있고 날마다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알게 되고 경험하는 일상의 환경과 상황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즉 장소의 현상에 대한 탐구이며 장소경험의 다양성과 강도를 밝혀보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장소와 장소상실의 모습을 확인하며 무장소에 대한 태도와 이러한 태도가 경관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탐구한다.

장소는 지리학의 현상학적 기초를 이루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래서 투안은 지리학 최초의 로맨스는 장소와의 어떤 생생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지리학은 장소를 알게 하고 장소를 만들도록 하는 모든 분야의 경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공간은 다양하다. 공간은 형태가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또 직접 묘사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공간을 느끼고, 알고 또 설명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장소감이나 장소 개념이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공간이 장소에 맥락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그 의미를 특정한 장소들로부터 얻는다. 공간과의 관련에서 볼 때, 장소 역시 상호 연관된 의미 복합체이다. 장소는 단순히 어떤 상황에서나 한결 같은 무차별적인 경험현상이 아니다. 장소는 인간의 경험이나 의도 폭만큼이나 광범위한 미묘함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장소로 구별해내는 공간의 특성은 우리의 의도를 유혹하고 집중시키기 때문에 다양하게 분화된다. 모든 장소는 서로 겹치고 서로 섞이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건물이든 자연물이든 확실히 외관이 가장 뚜렷한 장소의 속성 중의 하나이다. 외관은 실체적이며, 묘사할 수도 있다. 장소가 경관으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이유가 시각적 특징이 인간 활동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의미에서이든 아니면, 인간의 가치와 의도를 반영한다는 다소 미묘한 의미에서이든 간에, 외관은 모든 장소들의 중요한 특성이다.

공동체와 장소 사이의 관계는 사실 매우 밀접해서 공동체가 장소의 정체성을, 장소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며, 이 관계 속에서 경관은 공통된 믿음과 가치의 표출이자, 개인 상호간의 관계맺음의 표현이다. 모든 장소와 경관은 개인적으로도 경험된다. 우리의 태도, 경험, 의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우리만의 고유한 환경으로부터 장소와 경관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경관이란 개별적인 동시에 공동의 맥락을 통해 경험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장소들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이고 특별한 의미로 정의되고,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소들이 불러 일으키는 것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그 당시 나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는 장소의 정확한 특징보다 그 장소들의 분위기를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그리고 특정한 어딘가에 의미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학적인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장소는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 때문에 장소에 대한 진정한 책임과 존경이 존재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또는 특히 감동적인 경험을 가졌던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장소를 의식하고 있다. 개인은 장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도시나 경관의 물리적 외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경험, 눈, 마음, 의도 속에도 존재한다. 모든 개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 장소에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정체성은 상호 주관적으로 결합되어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장소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집단에 가지는 그 장소에 대한 정체성이다. 특히 장소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내부인으로서 경험하는가, 외부인으로서 경험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장소를 그 세부적 내용으로만 생각한다면 엄청나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양성 속에서 공통 요소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의 장소 경험은 직접적이고, 완전하며 대게 무의식적이다. 장소 경험이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하더라도, 장소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요소들의 결합 속에서 경험된다.

장소정체성의 주요 요소는 장소에만 적용되지 않고, 지리, 경관, 도시, 집 등 모든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발견된다. 그러나 장소의 본질을 이런 것들보다는 외부와 구별되는 내부의 경험 속에 있다. 어떤 장소의 안에 있다는 것은 거기에 소속된다는 것이고 그 곳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더욱 깊이 내부에 있게 될수록 장소와의 동일시, 즉 장소에 대한 정체성은 더욱 강해진다. 내부에서 어떤 곳을 경험한다는 것은 당신이 장소에 둘러싸여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 정체성 없는 장소는 없다.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 일생동안 계속되는 인간의 장소에 대한 정체성과 장소 자체의 정체성은 점진적이고 섬세한 형태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얼마나 성취할 것인가는 자신의 문화적, 개인적 가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과 관찰의 감수성에 달려 있다. 대중적 정체성만을 알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선입견이나 기성의 태도가 항상 직접 경험보다 더 중시된다. 따라서 이들은 대중 매체가 제공해온 기성의 정체성이나 선험적인 정신적 도식의 틀에 사로잡혀 장소를 관찰하며 이것과 실제 장소가 불일치할 경우는 아예 무시하거나 아무렇게나 설명해 버린다. 장소 정체성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나, 그것은 항상 다른 장소에 대립하여 바로 이 장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기분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장소감이란 무엇보다도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있다는 느낌이다. 이 소속감은 고향, 혹은 지역이나 국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현대의 도시 거주자들은 자기 장소에의 소속감을 갖기도 힘들며, 쉽게 자기 집을 더 좋은 조건의 집과 바꾸기도 한다.

진정성은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완전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양한 강도의 진정성으로 장소를 경험할 수 있듯이, 장소는 다양한 정도의 진정성을 가지고 창조될 수 있다. 한쪽 끝에는 무의식적인 설계 전통을 통해 한 문화를 전체적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의식적인 시도가 있다. 진정한 장소 만들기의 가능성은 감소했지만, 장소에 있어서 그런 순수한 자기표현의 가능성과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산업 시대 이전의 무의식적이고 수공업적인 문화의 특징이었던 지방색이나 다양한 장소와 경관이 사라지고 있으며 이미 소멸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보편적이고 익숙한 것이 되었다. 밋밋한 경관은 의도적인 깊이가 결여되고 평범하고 평균적인 경험의 가능성만을 제공한다. 다양한 경관과 의미 있는 장소가 결핍된 일종의 무장소의 지리가 나타날 가능성을 나타낸다. 또한 우리가 현재 무장소성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장소감을 상실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현재의 획일화현상이 이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점은 광범위한 스케일로 획일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어느 곳에서나 장소 경험이 빈약해지게 된다.

다양성이 인류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이제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모방하지 않아도 비슷해지고 있다. 약간의 무장소성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존재해왔다. 그리고 장소에 대한 관심의 결여가 맥락을 파악하고 비교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한, 이러한 무장소성은 장소감에 필수적이다. 무장소성은 일종의 태도이며, 이러한 태도가 점점 지배적인 현상이 됨에 따라 깊이 있는 장소감을 가지거나 장소를 진정하게 창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집의 의미는 이동성의 증가와 이동성과 연계된 기능의 분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감상에 젖거나 상품화에 의해서도 약화되어왔다. 부동산업자들도 더 이상 주택이 아닌 집, 즉 비싼 집 ․ 상류층 취향의 집, 아파트를 팔기 시작했다.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는 관광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관광을 할 때 장소에 대한 개인적이고 진정한 판단은 거의 항상 전문가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의견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관광이라는 행위나 수단이 방문하는 장소보다 더 중요해 지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안내책자에 표시된 별표가 몇 개인지만 확인하고는 서둘러 다음 장소로 향한다. 그들은 그 장소를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비진정성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여행의 목적은 독특하고 다양한 장소를 경험하기 보다는 그 장소를 수집하기 위한 것 같다.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는 여러 가지 프로세스를 통해 전파되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매체가 무장소성을 직간접적으로 조장한다. 이 매체들은 장소들이 서로 비슷해 보이게 할 뿐 아니라, 비슷한 느낌을 주며 똑같이 무감동한 경험을 하도록 장소의 정체성을 약화시켜버린다. 이 프로세스들이 그 자체로 반드시 무장소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이런 것들이 경관을 변하시키는 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미 있고 다양한 장소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데는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길은 본질적으로 20세기의 창조물이며, 인간의 교통수단이 연장된 것이다. 이 길은 장소들을 연결시키지 않고 주변 경관과도 관련이 없다. 일반적으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것 같지만, 우선적인 요구 조건은 장소를 연결시키거나 장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출발지로부터 막연하게 어딘가로 가는 것이다. 길, 철도, 공항은 경관과 함께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경관을 위압하고 가로질러서 경관을 토막 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무장소성의 표현이다. 이들 교통수단은 다양한 생활방식과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대규모 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 무장소성의 확산을 조장한다.

획일적인 상품과 장소는 획일적인 욕구와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며, 역으로 사람들이 획일적인 욕구와 취향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획일적인 상품과 장소에 의한 것이다. 타자지향장소의 극치는 아마도 환상적인 디즈니랜드, 가공적인 역사 공원, 미래 지향적인 박람회 같은 엄청나게 거대한 오락공원일 것이다. 디즈니화로 인해 실제 지리 환경과 거의 관련이 없는 부조리하고 인공적인 장소가 역사, 신화, 현실과 환상의 초현실적 조합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디즈니 월드와 그와 유사한 것들은 세계 곳곳에서 모아온 역사와 모험을 가장 상상력이 풍부하고 조형적으로 만들어 내보이며, 이것들을 암시적이든 명시적이든 기술공학적인 유토피아전망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환상적인 가짜 장소들은 단순히 가족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며,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몇 안되는 것으로 간략히 처리해 버리기 쉽다.

이런 환타지 랜드는 단조롭고 타락하고 무능력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기분 좋게 미소 짓는 영감의 장소이다. 이에 더하여 그런 곳들은 미리 보장된 흥분, 오락, 흥미를 제공하는 유토피아를 어느 정도까지는 진짜처럼 보여준다. 반면에 이런 곳은 우리가 직접 여행을 해보거나 상상해 볼 기회나 노력을 소용없게 만들어 버린다. 사실 디즈니화는 현대 서구 문화의 주류에서 볼 때 우연히 발생한 피상적이고 제한적인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자연과 역사를 객관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대중적이고 키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디즈니화는 그런 지배를 가능하게 만든 기술적 성취에 숨겨진 어떤 태도를 독특한 모습으로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미래화는 주목할 만한 무장소의 형식이다. 새로운 스타일과 테크닉을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계속해서 장소를 파괴하며, 마침내 시간과 전통이 장소에 부여한 진정성까지 부인해버리기 때문이다.

광고나 포장이든 아니면 상품 자체이던, 대량 생산과 관련된 기업들은 결코 기회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러한 활동은 획일적인 취향과 유행을 강요함으로써 그러한 대중문화를 유지 창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실 국가는 공공 주택이나 자원 관리 같은 부문에서 대기업과 같은 많은 기능을 한다. 이런 국가적 표준화가 법률상에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법률 역시 직간접적으로 토지 이용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개발과 입법을 통제하고 있다. 국가나 지방 정부는 경제 발전과 공간 계획에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장소 만들기나 장소파괴에 엄청난 영향을 행사한다. 국가는 근대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기술과 산업, 경제 체제에 보조적 존재로서 기술과 산업경제체제 역시 무장소성에 대한 적잖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진정한 경험과 관련된 장소의 의미와 다양성의 깊이가 대부분의 현대 문화에서는 크게 약화되었다. 점차 의미 있는 장소들이 사라지고, 무장소의 지리를 향하고 있으며, 밋밋한 경관, 의미 없는 건물 패턴들이 늘어가고 있다. 무장소의 지리에서는 개개의 장소들이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이미지로 경험되며, 사회 및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불명료하고 불안정한 배경으로만 경험된다. 장소와 무장소간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지리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무장소의 전반적인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장소성을 현재적 경관이라는 동시대적 맥락위에 올려놓고 경관 경험의 주요 측면들을 밝혀야 한다. 무장소성은 이러한 현대경관의 맥락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경관의 본질적 부분이며, 그 산물이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현대 경관은 일반적인 편리성과 고도의 효율성의 지리를 갖추고 있다. 비록 그 깊이와 다양성이 부족하고, 과거의 지리를 모두 말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경관이 최근의 현상이기 때문에, 그 특징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든가 편리성과 효율성이 반드시 부조리와 무장소를 야기한다거나, 혹은 현대 경관에서는 매우 의미 깊은 장소들이 생겨날 전망이 없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일상생활은 더 이상 일정한 범위를 가지는 장소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전통적 의미의 장소에 대해 어떤 애착이나 정체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소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장소는 우리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력과 파급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장소든 무장소든 일상생활에서 삶에 시나브로 스며들어, 우리는 장소가 바뀌는 행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저자의 무장소의 지리가 그냥 필연적이고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경관의 한 특징에 불과하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전통적 장소성이 뿌리 뽑히고 그 뿌리 뽑힌 장소를 우리는 흡사 진짜라는 신념을 가지고 현시대를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한다. 저자가 말한 장소의 진정성도 우리는 어쩜 잃어버린 채 살지는 않는가 말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장소의 창출을 시도하고 있다. 흔히 자본과 권력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를 가지는 이러한 새로운 장소들의 창출과 홍보는 때로 은밀하게 이루이지지만, 때로 매우 노골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이른바 장소마케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들은 가시적인 정체성을 자극한다고 할지라도 장소의 뿌리내림, 즉 존재론적 안전감을 제공하지 못한다. 다른 한 사항은 복원되어야 할 미래의 장소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미래 장소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력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기초한 미래의 장소를 실현하기 위하여 실천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진정한 장소성은 장소의 외형적 환경의 본원과 이에 대한 의도적 의미부여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한 실천과정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재형성되는 것이다.

장소의 의미는 그 물리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덧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관 경험의 근본적 토대는 점점 더 무장소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다. 무한한 수요의 결과가 될 끊임없는 장소 박탈에 대항할 가장 좋은 무기는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키는 것과 무장소성을 초월하는 데에서 찾아야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장소를 만들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고, 그런 장소들을 개조하고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장소에 진정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장소가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뿌리와 배려를 허용하게 될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아마도 가능 할 것이다. 장소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면, 뿌리 뽑히고 점점 높아지는 지리적 이동성과 무장소로 인한 정신적인 결과와 도덕적 문제를 우리 모두가 정말 걱정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진정으로 장소 만들기를 위한 접근 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장소는 생활세계가 직접 경험되는 현상이고 개인과 공동체 정체성의 중요한 원천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깊은 유대를 느끼는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끄집어냄으로써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장소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믿어왔던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수단의 개입으로 어떤 연유로 말미암아 변화가 초래되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물론 해결책은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그의 주장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그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던 일들이 공간을 통해, 우리가 믿는 장소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장소에는 완전히 무심했던 우리에게 반성적 성찰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지침이 아닌가 싶다. ‘장소 그 자체가 나’라는 말처럼 장소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훌륭한 매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협한 지적․사회적 관행이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장소를 음미하려는 노력을 동반해야할 것이다.

 

 

※참고자료

- 【장소와 장소상실】(에드워드 렐프 지음, 논형, 2008, 서울)

-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장소성의 상실과 복원】, 최병두

지리사상사 강의노트: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4학년 박창민

2008.12.21 18:07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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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사상사 강의노트 서평

 박창민

 

4학년을 마치며 잠시 생각해 본다.

지리의 오늘날 사회에서 학문으로서 인정 받고 있을까?나는 지리가 정말 흥미 있나?

지리학이 많은 발전은 한것은 사실이다. 많은 학회, 도서관의 지리서적들...하지만 내가 지리를 전공하는 입장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생각해보면 아니다. 취업난에 허덕이고 경영대와 의대 치대, 법대등의 그늘에 가려 지리는 어떻게 보면 선생님의 진로가 아니면 취업하기 힘든 과목인 것이다. 지리를 전공하면서 16,7세기와 같이 지리학이 인정받은 시기로 돌아갔음 하는 맘이 든것도 사실이다. 사회에서는 역사만 부각되는 현실이 더욱 싫었다.

두 번째 질문, 나는 지리에 흥미있어냐 하면, 흥미있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부끄럽지만 책을 통해서가 아닌 게임을 통해서이다.

일본의 코에이사의 ‘대항해 시대’ 라는 게임은 지리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게임속에 나오는 주인공이 포르투갈, 에스파냐의 국적을 갖고, 황금의 나라 지팡그, 세계 각지의 보물을 찾고, 무역을 하는 비록 어린시절 한 때 흠뻑 빠진 게임이지만, 이 게임,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3학년 무렵이 되어서야 느꼈다. 지리사상사 강의노트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지리학의 전성기인 신항로 개척이 아닌 그 후 국가주의, 근대 시기부터 현대의 패러다임을 알기 쉽게 나타낸 책이다.

근대 지리학의 시작을 독일에서 출발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독일은 지리학에 사회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독일 정부가 그러한 지지를 아끼지 않은 이유는 바로 지리가 독일 민족주의의 이념적 토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리를 통한 국토의식이 독일 민족주의의 토대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리라는 과목을 통해 독일이란 영토가 하나의 등질지역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 줌으로써 인위적인 국경으로 분열돼 있던 상황을 극복하고 유럽 안에서의 내분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지리학자도 없고 지식이 정리되지 않는 상황 즉, 지리학이란 분야에 대한 어떤 체계적인 연구가 없는 상황이여서 제대로 된 지리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리학과 교수를 임용할때에도 3가지 분야의 교수들이 임용되어 각자 주장하는 이념과 사상이 달랐다. 지질학과, 역사학과, 생물학과가 각각 그것이다. 지질학과와 역사학과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평행선을 그었으나 그 사이에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 것은 생물학과의 공이 컸다. 라첼같은 생물학과 출신들은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그것이 바로 독일 근대 지리학의 성격을 규정짓는다. 하나의 생물로서 인간은 바라보는 것이 바로 근대 지리학의 시작이다. 그런 입장이 라첼로부터 시작해서 독일 지리학을 규정짓는 가장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18세기 말까지 자연과학 만능주의와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가 19세기 부터는 이성보다 감성을 강조하며 인문학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낭만주의 사조가 나타났다. 이 낭만주의에서 지리학의 대표적인 두 사람이 바로 훔볼트와 리터이다.

훔볼트는 여행이 아닌 답사의 형식을 처음으로 체계화 시켰다. 특히 남미지역을 답사하며 남긴 『남미답사기』는 후에 진화론을 제창한 다윈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훔볼트를 자연지리학의 아버지라 하지만 그의 주전공은 식생지리학이여서 그런지 정작 지리학에서는 그의 이론이 잘 다뤄지지 않는다. 훔볼트는 식물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나무 하나하나가 아니고 숲을 보듯이 그렇게 생태계를 중심으로 해서 지역을 인식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견해는 후대의 지리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리터는 훔볼트보다는 넉넉하지 못했던 가정환경 때문에 해외지역으로 답사를 가본 일이 거의 없었지만 그가 저술한 지역지리서인 『에르트쿤데』는 상당히 잘 쓰여진 책으로 호평을 받는다. 지리학에 있어 리터부터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리터가 바로 지리학이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던진 가장 최초의 학자이기 때문이다. 지리가 하나의 학문으로서 의미가 있을까 이런 문제를 직접 글로 쓰고 고민했던 사람도 리터이다. 리터는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라고 하는 전제 위에서 총체성이 지역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목별로 나열하는 지역지리를 넘어서야만 지리학이 하나의 학문으로서 정립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총체성을 파악하지 못하면 지리학은 학문으로서 독자적인 논리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1859년 훔볼트와 리터가 사망하고 그 해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된다. 쿡 선장의 북극항해로부터 과학적 탐사와 답사의 전통이 생겨나서 포르스터를 겨쳐서 훔볼트, 다음 다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진화론이 미친 학문적인 영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든 사물을 시간의 변화라는 틀에서 바라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유기체와의 비유나 유추를 통해서 사물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이제 인간과 사회현상도 생물에 비유하여 생각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다시피 하였으며, 학문연구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생물 종과 환경이라는 다윈 진화론의 틀에서 생물 대신에 국가와 사회를 대입한 것이 바로 라첼의 환경결정론이다. 흔히 생각하는 환경결정론, 즉 기후와 지형 때문에 민족성이 어떻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몽테스키외가 집대성한 것이다. 라첼은 민족성이나 주민의 기질 차이 등은 지리적 현상으로서,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고 지리적 연구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문화의 전파, 확산 과정과 이동 경로를 지리학의 주요 연구대상으로 정립한 것도 라첼의 큰 공헌이다. 라첼은 환경에 대한 적응과 문화가 확산되고 이동되는 것, 그 두가지를 통해서 생활공간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는 생활공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한 사회집단이 지표상에서 운동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그 과정 가운데 하나는 적응이고 또 하나는 확산과 이동이다. 라첼은 국가도 생물에 비유하여 국가 유기체설을 주장하였다. 국가의 영토가 늘어나고 축소되고 하는 흥망성쇠의 과정 자체를 생물체가 출생에서부터 사멸에 이르는 과정으로 그렇게 비유해 파악하려 했던 것이다.

20세기 지리학의 흐름은 사상적으로 보면 환경론에서 지역론으로, 리히트호펜에서 헤트너로 넘어간다. 헤트너는 지리학의 본질이란 지역지리라고 확신하였다. 헤트너는 계통지리학은 법칙정립적인 학문이고, 지역지리학은 개성기술적인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계통지리학의 법칙들이 지역지리학 연구에 활용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였고, 궁극적으로 지리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지역지리학이라고 생각했다.

2차대전 이후 전쟁후 통계학의 발달과 더불어 지리학에서도 지역지리에서 계량지리로 현대화된다. 그 역할을 하는 학자는 쉐퍼로 그의 논문 지리학에서의 예외주의라는 논문은 지리학을 계량혁명, 일반화를 이끌게 된다. 이후 논리 실증주의를 비판하면서 인간주의 지리학과 맑스주의 지리학이 등장한다.

 

지리의 악용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지리가 꼭 필요했다. 민족애 조국애, 향토애 등등 어느 장소, 국가에 소속되 있고 소속감으로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근대의 지리는 통치자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필요했었다. 독일의 경우가 그러했고 이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의 경우 북부와 남부의 빈부의 차와 이질감은 오늘날도 상당하지만 통일전의 경우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통일 후 하나의 국가의 국민을 만들기 위해 악용된 점이 지리 였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다. 과거의 경우 하나가 되기 위해 교육을 통해 주입을 시켰다면 현대는 스포츠를 통해서 하나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2008올림픽에서 보여준 한국의 경기는 모든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데 기여했고, 역시 통치자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들과 대통령은 이를 이용해 선수들과 같이 국민들도 하나가 되어 열심히~~ 라며 격려했던 걸 본 것 같다. 또한 중국의 경우 올림픽 개최를 통해 과거와 같은 중화사상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여러 소수민족과 경제발전에 소외된 사람들을 하나로 만드는데 가장 큰 수혜라 할 수 있겠다.

지도는 지리의 충분조건이다. 다시 말해 가장 지리답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지도라 할 수 있는데, 지도를 통해 지리가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 맥킨더의 심장지역이론이 그 예이고 또한 독일에 의한 체코의 침공,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그 예이다. 제국주의 국가는 정복, 침략의 구실을 찾기 위해 어떠한 명분이라도 동원을 하였고 그중 하나가 지도상의 영역의 경계, 형태였다는 것이다. 한국의 통일을 바라건 바라지 않건 하나의 나라가 분리된 것도 지정학적인 이유였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 속에서 힘의 균형에 의한 분리, 주한 미군의 한반도 주둔, 체첸, 그루지아 사태를 보면 아직도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의 힘에의한 지배와, 지리의 힘을 알 수 있다.

환경결정론과 진화론에서 보여주는 환경에 순응하는 인류, 이는 선진국, 제국주의의 지배를 당연시 받아야하는 이론으로 악용되는 점이 근대의 지리학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한다.이러한 고정관념이 아직도 지리를 가르쳐야하는 학부생들에게 뿌리깊게 박혀있고, 많은 학생들과 일반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2008올림픽이 열리게 전 태릉선수촌을 방문하여 선수들을 격려하는 대통령을 티비에서 봤다. 당시 수영선수들을 격려하는데, 경기장 시설에 대한 애로사항을 들으면서 말레이시아보다 시설이 낙후됐다는 건의보다는 그런 나라에서도 수영을 하냐는 말을 보면서 어쩌면 국가의 대통령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런 편견을 갖고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대로 미국과 일본의 원수를 만나면 굽신거리는데 말이다. 이는 그만큼 진화론적인 사고가 이미 고정관념 속에 뿌리 깊다는 점을 나타내는 한 예이었던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고정관념에서 탈피했다고 자신했지만 그것은 수업을 들을때 뿐인 걸 느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면 중국 유학생들이 굉장히 많은데, 왜 이런 애들이 여기에 오는 걸까, 그들이 중국어로 대화하며 지나가면 눈살찌푸리고, 임용을 보기 전 고시원에 나와서 살면서 옆방에 중국 유학생이 살자 왠지 문단속을 더욱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리학의 현대적인 경향이 비판적 사회공간으로 흐르지만, 여전히 지리학이 악용되며 이를 고치는 것이 숙제이다. 하버드대학에서 지리학이 폐과되며 지리학의 학문적인 권위가 많이 실추된 것은 부인 못한다. 지리학의 부흥을 위해서, 지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많은 지리학자와 지리교사들의 지리학의 바른길을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장소와 장소 상실: 20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명지

2008.12.19 20:43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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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

65529 김명지

 

이번 학기동안 유달리 장소라는 단어를 많이 들었다. 지리교육론 시간에 들은 장소감의 개념부터 해서, 자본주의와 관련한 무장소성, 광주답사를 통한 광주의 진짜 장소는 무엇인가 등등,,, 그리고 어느 순간 관심을 가지게 된 장소마케팅이라는 분야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이 모든 생각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특히나 장소마케팅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책에서는 장소마케팅 부분을 거짓장소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이런 주장이 너무 이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저자의 말에도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마케팅과 관련해서 내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부분은 축제라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축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함평 나비축제가 계기가 되었는데, 나비라는 것은 다른 곳에서 들여왔기에 꾸며진 공간일 수 있으나, 이제는 함평 주민들조차 그것에 만족하고 군민들의 자발적 협조로 꾸며지고 축제자체가 그들의 삶과 직접 관련성을 갖춘게 되었으니 이 곳은 이제 그들에게 의미 있고, 그들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삶의 터전이 되었다. 또한 나비축제라는 것은 2008년 깡촌이었던 함평을 엑스포가 열리는 곳으로 바꿔 놓았을 정도로 세계적인 생태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이렇게 블루오션을 개척해 장소마케팅을 해 놓은 함평의 사례를 볼때 이런 나비축제라는 공간이, 나비축제라는 장소마케팅이 주민들에게 단순한 공간이 아닌, 그들의 삶의 터전이며 그들에게 매우 의미있는 곳이 아닐까? 물론, 장소마케팅에서 함평축제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일수도 있겠지만, 주민들이 참여하는 공간으로서의 장소마케팅도 있는 것인데, 단순 그러한 장소는 재현된 공간, 거짓된 공간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저자도 말했듯이 세상에 완벽히 참된 공간은 없다. 그러나 이렇듯 참된 공간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조차도 외면하진 말았으면 한다.

지리교육론 시간에 교수님께서 누군가에게 너의 장소감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신 적이 있다. 그러나 지목당한 학생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역시 그 질문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나의 진짜 장소감이 무엇일까? 교수님께서는 장소감이란 마음속의 ‘코라’라고 하시면서 장소에서의 지리적 사상에 대한 지식과 장소 안에 거주하는 인간이 의미를 부여한 세계가 결합하여 생성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장소감에는 장소에 대한 지식, 장소와의 일체감, 입지감, 존재를 위한 생존 공간을 만들고 지키려는 영역감,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 소속감과 애착까지 포함하는 장소소속감, 장소에 대한 호기심 등이 포함되며 크게는 장소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과 관심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 장소감으로는 향수, 소속감 등이 있고 지리교육에서는 향토애, 국토애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러면서 개인의 정체성은 장소에 대한 소속감을 통하여 획득된다. 따라서 진짜 나를 알기위해서는 내가 어떤 장소에 소속감을 느끼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크게는 광주라는 곳, 그 중에서도 문흥지구, 7년간 살아온 광주집, 15년간 살아온 고향집인 무안, 내가 다니고 있는 전남대 사범대학 건물(지리교육과 강의실, 학회실 등), 사이버공간(싸이월드 미니홈피).... 내가 가장 장소감을 갖는 곳은 광주집, 또 미니홈피 공간이었던 것같다. 나를 씁쓸하게 했던 것은 학회실이었다. 학회실이라는 장소는 지리교육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갈수 있는 곳이지만, 1학년 때부터 자주 가지 않았던 곳이라 그런지 가면 나 스스로도 어색해하고, 벗어나고픈 공간이 되버린 것 같다. 이처럼 학회실은 나에게 공간일 뿐이지 장소는 아닌 것이다. 이제, 크게 봐서 나에게 광주의 장소감은 무엇일까? 지리는 경험의 학문이기에 광주의 장소감을 느끼려면 답사를 통해 느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학기 동안 광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경관을 보고 광주의 장소를 거주민의 삶과 관련하여 생각해보았다. 특히 재개발지구에 관해선 장소라는 측면에서 볼때 안타까운 점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주거환경개선사업 학동 2지구(학동 8거리)가 생각난다. 이곳은 총 5개의 팔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중심의 팔거리에서 서서 보면 모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사통팔달된 형태를 띠고 있고 길 사이사이로 주거지가 들어서 있어 전체적인 주거지의 모습은 협소하게 밀집해 있다. 5개의 팔거리중 한 곳에는 정각이 세워져 있어 어르신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중앙의 팔거리에서는 당산나무로 추정되는 제법 큰 나무가 드리워져 있었으며 마을 회관은 아니지만 주민들간의 왕래가 잘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광주라는 도시에서는 흔치 않은 주민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팔거리 주거지역은 일본에 의한 것인데 군국주의 시절의 일장기를 이곳에 형상화시켜 만든 것이라 했다. 처음에는 그런 의미의 팔거리라면 조금 꺼림칙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팔거리라는 특이한 장소에 사람들이 느끼는 애착을 생각하니 형태 쯤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일제에 의해 계획된 주거지로서 팔거리라는 특이한 주거지, 피난민 촌의 형태까지 남아있는 이곳이 머지 않아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인해 사라진다고 한다. 직접 살고 있는 주민의 입장이 아니라 제 3자의 입장이지만 광주광역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일제에 의해 개발된 팔거리라는 특이한 주거지 형태가 남아있는 곳이 과연 몇 곳이나 될까를 생각하면 아파트를 짓기 위해 이곳을 없앤다는 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답사 중에 만난 어르신들 역시 팔거리를 밀고 아파트를 짓는다는데 대해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팔거리 정각에서 만난 어르신 중에서는 오래 사신 어르신들에 대해서 경로잔치도 없이 이주하게 한다고 하여 서운한 감정까지 내비치신 어르신까지 계신다고 하셨다. 이에 대해 우리 답사팀도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팔거리 주거지 형태를 없애는 것이 타당한가를 가지고 차량 안에서 약 30분 이상 대화의 시간을 가지기까지 했다. 팔거리를 보존하는 것이 가치 있는 짓인가, 과연 누구를 위한 주거환경개선사업인가, 주거환경을 개선한다는 것이 무조건 밀어버리고 아파트만 짓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주거환경만 좋아진다면 살던 집,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길 같은 것들은 모두 버려도 상관없는 것인가? 팔거리를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는 행위는 이제 주민들에게 옛 추억을 지워버리고,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진짜 거짓된 장소를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아파트가 들어오면 예전의 당산나무에서 서로 얘기하던 그런 장소는 옛 추억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파트가 들어오면 사람도 또한 바뀌게 될 것이다. 책에서도 나온 것처럼 장소를 빼앗기고 장소에서 뿌리뽑힌 사람들의 항의는 장소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많은 경관 계획과 재개발이 이것을 명백하게 무시한 채 진행된다는 사실은 우려할만한 일이다. 특징적인 장소들을 부주의하게 없애버리는 장소훼손의 무장소화, 규격화된 경관 만들기는 지양되야 할 것이다.

팔거리 답사를 통해 장소감을 형성하는 것은 개인이 그 곳의 물리적 환경과 맺는 관계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맺는 상호 작용이라는점, 장소란 본질적으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고, 장소의 외관이나 경관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장소를 공동체의 한사람으로 경험하든 개인적으로 경험하든 거기에는 보통 긴밀한 애착, 친밀감이 생기고 이런 애착이 장소에 뿌리를 내리게 한다. 또한 장소에 애착을 갖게 되고 그 장소와 깊은 유대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이다. 이렇게 뿌리를 내리는 것은 하나의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기에 이런 장소에 애착을 가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야 말로 장소에 대한 돌봄과 아낌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이런 종류의 애착이 나에게는 강한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의 집은 하이데거의 말처럼 주택과 동일해졌다. 집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고, 단순 금전적 가치로 측정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따라서 현대인은 집 잃은 존재,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애착을 상실한 면도 보인다. 집이라는 장소는 인간 존재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활동에 대한 맥락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에 대한 안전과 정체성을 제공한다.

 

책을 보다 보니 피해야 할 장소에 대한 정체성으로는 대중적 정체성이란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집단과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발전해왔다기보다는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에 의해 주어지며, 사람들에게 기성품으로 공급되고, 대중매체, 특히 광고를 통해 살포되는 것으로, 이런 정체성은 가장 피상적인 장소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을 내세워 마치 완벽한 생활공간인 양 광고하는 아파트들이 대표적일 것이다. 이런 것들이야 말로 가짜 장소들로 이루어진 가짜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중적 정체성은 장소에 토착하지도 않고 소속감도 없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장소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는 집보다는 조건의 집과 바꾸고 있는 듯 하다.

 

장소감과 참된 장소만들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진정한 장소감이란 무엇보다도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다. 이 소속감은 집이나 고향 등에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장소감은 개인의 정체성에 중요한 원천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에 대해서도 정체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경향은 주위 환경과 경관을 고려하면서 다양한 의도와 가치의 상호 작용을 반영하는 진정하게 창조된 장소와는 유리된 채, 진정성이 없는 비장소적인 도시 영역·범세계적인 경관, 그리고 무장소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 나타나고 있는 무장소성의 모습을 살펴보자. 우선 무장소성이란 쉽게 말해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각 지역과 장소의 고유한 특성들이 사라지고 개성을 잃어가는 현상을 말한다. 또한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가 무장소성을 만들고 있다.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는 본질적으로 장소감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진정하지 못한 장소에 대한 태도는 ‘키치’라는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키치는 장소가 물건으로 취급되는 진정하지 못한 태도이다. 이 경우 대개 인간은 장소로부터 소외되고, 하찮은 것이 중요하게 되고 중요한 것이 하찮게 되며, 환상적인 것이 현실이 되고 진정한 것이 평가 절하된다. 이런 사고에서 오늘날 주택이란 ‘거주를 위한 기계’로 취급되고, 사실상 시장성 있는 교환 가능한, 센티멘털한 ‘상품’이 되어버렸다. 또한 관광객을 위한 표준화한 장소경험도 문제이다. 다른 누군가가 구경할 가치가 있다고 정해준 예술 작품이나 건축물을 관람하는 가이드 여행은 진정성이 없다. 이런 점에서 답사도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틀린 것이다. 실제 섭지코지라는 올인촬영장에서 관광객들은 주위환경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고, 그 장소를 경험하지 않는다. 단순히 올인촬영장에 방문했다는 것, 나중에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말하기 위한 것에만 관심이 있다. 여행의 목적이 독특하고 다양한 장소를 경험하기 보다는 그 장소를 수집하기 위한 것 같다고 한 점은 너무 공감됐다. 나 역시 여행을 통해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경험하기 보다는 사진 찍는데에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답사때 울룽도 주민들과 인터뷰를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걸 보면 경험하고, 인간 삶, 삶의 터를 이해하고 오는 것이 여행의 진짜 목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는 테크닉과 기술로 무장소성이 되어 가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을 위해 단독 주택을 고층의 사무실로 대체하고, 수력 발전소 건설을 위해 인디언의 땅을 수몰시키는 행위들. 이처럼 장소는 효율성에 침해되어 사실상 아주 부수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생활과 가치보다 추상적, 경제적, 공공적 이익을 강조하는 접근의 편협성은 심각한 비진정성이다. 이것은 기술을 우선시하는 계획으로서,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알고 경험하는 장소와는 유리된 것이고, 장소를 아주 가볍게 보아 무시하고 말살하는 것이다.

무장소성을 직,간접적으로 조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매체들은 장소들이 서로 비슷해 보이게 할 뿐 아니라, 비슷한 느낌을 주며 똑같이 무감동한 경험을 하도록 장소의 정체성을 약화시켜 버린다. 매스컴, 대중 문화, 대기업, 강력한 중앙 권력,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경제 체제가 바로 이런 매체들이나. 매스 커뮤니케이션부터 보자. 옛길은 분명히 하나의 장소로서, 여행자를 경관 속으로 직접 끌어들이고 사회적 접촉을 하게끔 만드는 기본적으로 장소가 연장된 것이었으나, 오늘날의 길, 철도, 공항은 경관을 위압하고 가로질러서 경관을 토막내므로 그 자체로 무장소성의 표현이다. 교통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대면접촉의 필요를 줄이고, 이로 인해 장소에 기반한 공동체의 중요성이 감소했다. 요약하자면 매스 커뮤티케이션은 경관의 획일성을 증가시키고, 일반적이고 표준화된 취향과 패션을 조장하고, 장소의 다양성을 감소시켰다.

대중문화는 말 그대로 하자면 대중의 문화이나 실상은 대중 자신이 개발 고안한 것이 아닌 위로부터 일반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획일적인 상품과 장소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서브토피아 경관, 디즈니화, 박물관화, 미래화가 가져온 타자 지향적 장소에서 나타난다.

책에서는 타자 지향 장소들로 관광을 들었다. 틀에 박힌 관광 건출물과 인공 경관, 가짜 장소라는 측면에서 장소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원주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관광코스에서도 출퇴근하는 원주민만 있을뿐 더 이상 그들의 진짜 삶이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보면 공감이 되기도 했다. 또한 관광의 경관을 타자 지향 건축물이라고 불렀다. 이런 건물들은 그 안에서 살아가고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가짜 장소는 어디에나 만들 수 있는 자본의 논리에 씁쓸하면서도 휴식처를 갈망하는 현대인들. 내가 가장 가고싶어하는 곳은 하와인데, 그 이유는 하와이 해변이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학생인 나로서는 돈 부담이 되어 하와이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중국 하이난에 가는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나 역시 타자 지향적인 장소를 가보고자 했으며, 관광을 할때 유흥만을 즐길뿐 주민들의 생활상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았다. 이런 나같은 사람이 많으니깐 거의 모든 관광이 키치적이고 타자 지향적인 장소가 되어가는 듯하다. 이런 타자 지향 장소의 극치를 보여 주는 것이 디즈니랜드였다. 인공적인 장소이며 환상적인 가짜 공간이었다. 역사의 보존, 재구성, 이상화로서 '박물관화'라는 문제점도 있었다. 몇 년 전 안동하회마을을 엘리자베스여왕이 방문했고, 류시원의 집에서 영국 여왕을 위한 잔치를 열었는데, 사실 그집은 원래 하회 마을에 있던 집이 아니라 서울에서 철거되는 일제 시대 한옥을 안동으로 가져 온 것이라는 점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마을로 유명한 안동마저도 박물관화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짓 정체성보다는 정체성이 없는 편이 나은 것인지는 차차 생각해보아야 겠다. 미래화는 의식적인 미래적 경관, 장소만들기로 대규모 국제 박람회가 대표적이다. 이것 또한 '국제적'이면서 무장소적인 것이 된다고 하였다.

오늘날 ‘장소의 소멸’ 또는 ‘장소성의 상실’에 대한 우려가 증대하고 있다. 이러한 공간성의 상실을 초래한 자본주의 발달과정은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장소의 창출을 시도하고 있다. ‘장소마케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장소들은 가시적인 정체성을 자극한다고 할지라도 장소의 뿌리내림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지만, 함평 나비 축제의 사례나 볼리비아의 소금호텔관광만 보더라도(자연환경인 소금호수를 이용한 주민들의 삶과 연관된 장소마케팅) 어느정도 희망은 있는 듯하다.

 

내가 꿈꾸는 진정한 장소만들기는 공동체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대의 몰개성적 지역과 장소가 만들어져가고 있는 시점에서, 무장소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들의 의도적, 창조적 지역 및 장소만들기가 의욕적으로 진행된다면 희망은 있다. 이는 거주민들의 정체성을 함양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자본을 유치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장소마케팅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과 장소의 차별화 전략은 세계화 시대의 치열해진 지역간 경쟁에서 낙후되지 않기 위한 지역주체들의 경쟁력 강화 전략이므로, 장소를 파괴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경쟁력을 키우는 방법을 키우도록 머리를 한번 굴려봐야겠다. 의식적으로 진정으로 장소 만들기를 위한 접근 방법을 탐구해 볼 것이다.

 

장소의 획일화, 상품화된 가짜 장소인 무장소성이 아닌 거주민에게 의미있고, 경험으로 가득찬 참된 공간을 만드는 것은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로 남게 되었다. 앞으로는 장소에 정체성을 느끼고, 경관의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또한 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장소를 알게 하고 장소를 만들도록 하는 모든 분야의 경험에 관심을 가져야 겠다. 그래서 나도 관광에 관심이 있는 만큼 피상적인 경관이 아닌 인간의 삶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을 모색해 봐야겠다. 또한 앞으로 어떤 장소를 경험하든 감정이입적 내부성을 키우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 장소를 의미가 풍부한 곳으로 이해하며, 그곳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내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우리는 공간 안에서 살아가고, 공간 속에 우리의 인성을 투영하며, 공간에 감성의 끈으로 묶여 있다. 즉, 공간은 단순히 지각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앞으로 재개발 등 도시계획을 한다면 도시공간의 경험을 위한 계획을 해야 할 것이다.

 

공간은 객관적 차원이고, 장소는 주관적 차원으로 개인이 의미를 부여한 공간으로, 같은 공간이나 개인에 따라 의미, 무의미한 곳이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장소를 볼때 너무 겉핥기식으로 보고 있진 않을까? 우리는 파리의 에펠탑을 보면서 아름다운에 넋을 빼앗기고 환성을 지르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이 있다. 에펠탑을 지을 당시엔 공사기술이 발전되지 않아, 광대들이 고공에서 철탑을 하나하나 쌓았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이 있었고, 겨울철에는 너무 추워 만지면 붙어서 손가죽이 찢기는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다음번에 관광차 파리에 간다면 에펠탑에 여전히 남아있는 살점들을 보아라. 우리에게 단순 아름다운 곳이, 그들에겐 고통의 장소일 수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봤음 싶다.

 

*참고자료

[세계화 시대의 세계지리 읽기], 옥한석, 한울, 2005

[지리교육학의 이해], 서태열, 한울, 2005

 

동방견문록: 08년 1학기 지리교육과 박초영 (지리사상사)

2008.11.21 14:55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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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세계의 중심

박초영

Ⅰ. 들어가는 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중고등 학교시절 사회 시간만 되면 단골로 등장하는 책이다. 이 책으로 인하여 유럽 사람들이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신항로 개척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내용은 우리나라의 보통 중등교육과정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과서에서 소개된 책들에 대해 그 저자와 이름, 간략한 내용만 알고 넘어갈 뿐 실제로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분야의 전공자가 아닌 이상에야 그냥 그런 책이 있으려니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성경 다음으로 최고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책이고, 이 책의 발간이후 유럽인들의 동양에 대한 사고가 넓어지고, 지리상 발견시대를 만들어낸 촉진제의 역할을 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저서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마르코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저술할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의 사고에 미친 영향과 한시대의 지배적인 사고가 개인의 공간 인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려고 한다.

 

Ⅱ. 몸말

 

1. 당시의 시대 배경

 

마르코 폴로는 1254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324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아버지인 니콜로와 숙부인 마페오를 따라 동방여행길에 오른 것은 그가 15살인 1271년의 일이다. 그리고 그는 1298년 지중해를 두고 벌어진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해상권 다툼 싸움인 쿠르졸라 해전에서 제노바에 포로로 잡혀 감옥살이를 하면서 피사의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나기 전까지 약 25년 동안 당시의 유럽인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던 동방을 여행하게 된다.

5세기의 로마제국 멸망 이후 줄곧 ‘암흑시대’였던 유럽은, 12세기를 전후한 시점부터 어둠속에서부터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오늘날보다 온화했던 기후, 그리고 삼포제 농법, 물레방아, 새로운 쟁기와 멍에, 역축(役畜)으로서의 말(馬)의 사용 등 농업 기술의 진보는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켰고, 이로 인한 인구 증가는 다시 경작지 확장의 원동력으로서 작용하였다. 또한 11세기부터 서유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영주 직영지가 축소·소멸되고 농민들의 부역의 부담이 줄어들면서 영주에게 부역 대신 생산물이나 화폐를 지대로 바치는 새로운 형태의 장원제가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 경제적 성취 욕구를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도시가 부활하였고, 동방과 서방, 그리고 남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육·해상 교역로를 따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움직임은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더욱 활발해 지게 되는데, 그 전까지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힘이 막강하여서 철학, 과학, 건축 등 모든 것이 신앙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던 유럽은 11세기부터 13세기 까지 이루어진 십자군의 원정으로 인하여 서서히 변화하게 된다. 십자군 원정이 처음 시작될 때에는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탈환하자는 종교적인 목적을 지니고 시작하였으나, 그 이면에는 전쟁을 통하여 교황권을 공고히 하고 교회 세력을 확장시키려는 교황의 의도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넘어서 새로운 땅과 전리품을 획득하기 위해 참가하는 영주와 기사들,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고 그 사이에서 이권을 챙기려는 상인들, 그리고 신분해방과 부채 탕감을 목적으로 하는 농노들이 있었다. 모두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것이다.

비록 이런 십자군 원정은 이교도인 이슬람의 수중에서 성지를 탈환하자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이후의 유럽과 중동의 역사 및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경제적·정치적으로 가장 혜택을 많이 보았다. 초기에는 아말피, 베네치아, 바리만이 동방과의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 피사, 제노바 같은 다른 도시들도 지중해 무역 활동에 함께 동참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의 해양 도시들은 십자군에게 무기 및 식료품 등을 대여해주는 조건으로 안티오키아, 베이루트, 트리폴리, 예루살렘, 키프로스, 알레포, 콘스탄티노폴리스,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다른 여러 도시들에 위치한 주요 무역 거점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는 무역 확장을 위한 전위로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기에 이르렀으며 유럽의 시장들에 철, 모피 등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을 공급하였다.

마르코폴로는 이렇게 외부와의 교류가 활발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상인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던 당시의 분위기가 마르코 폴로의 긴 동방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한 매개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 원정이 실패하게 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주도해온 교황권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되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던 교황권이 약해졌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중세적 통합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서유럽은 더욱 가속적으로 분권화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유럽의 동질성을 부여해왔던 종교적 통합의 중심마저 약화되자 각 나라들은 왕권이 강화되어 각자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길로 나선 것이다. 그리고 약화된 교회의 힘은 사람들의 사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나 자유로운 분위기의 베네치아에서 상인의 아들로 나고 자란 마르코 폴로는 더더욱 이전까지의 교회중심적 사고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동방견문록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이기는 했지만 전처럼 기독교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신봉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모두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종교에 흥미를 보이고 심지어는 그것들이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보다 나을 수 있음을 인정하기도 한다.(대칸의 궁전에서 신기한 재주를 부리는 마법사들의 이야기 등) 이것은 이전까지의 사고를 비추어 볼 때,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있다.

또한 서유럽은 십자군 전쟁 중 이슬람과 비잔티움에서 약탈한 물건들로 발전했다.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동방의 물품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그리스 로마시대의 저서들이 아랍어에서 다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새로운 지식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시의 발달된 아라비아 과학기술들도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15세기의 르네상스와 발견시대가 이루어지는 기반이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십자군은 기독교가 아닌 종교에 대한 증오를 불렀고 근 1000년동안의 유대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다. 그리고 근 사백여년 동안 우호적이던 기독교와 이슬람이 적대적으로 되는 시초이기도 했다. 이는 동방견문록의 여러 필사본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당시 동방견문록은 엄청난 인기를 끌어서 여러 필사본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지식인 그리고 특히 필사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회 수도원의 수도사들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필사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기독교적 상식이나 교리와 어긋나는 많은 부분들이 수정되고, 이교도가 언급되는 부분에서는 교회 중심의 입장에서 그들을 비하하는 표현들로 각색을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2. 마르코 폴로가 바라본 세계

 

동방견문록의 원제는 ‘세계의 서술’이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 서술하고 있는 장소는 원나라, 서양의 입장에서 본 동방, 그리고 현재의 중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세계’가 바로 원나라, 동방이었던 것이다. 그는 어릴 때 고향인 베네치아를 떠나와서 인생의 절반 정도를 원나라에서 보낸다. 사람들은 그의 책에서 ‘수백의, 수십만의’ 라는 서술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여 그를 ‘백만 선생’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활발한 항구도시이기는 하지만, 중국에 비하여 면적이나 인구수도 적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베네치아에서 성장한 그가, 광활한 원나라의 광활한 초원이나 대지, 많은 인구 수, 풍부한 물자를 보고 다르게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의 교회 중심의 세계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이전까지 중세의 기독교에서는 교회가 모든 생활의 중심이었고, 신을 전지전능한 유일한 존재로 보았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방문했던 대부분의 지역들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자세히 관찰하며 그것을 후에 기록으로 남긴다. 특히 다른 종교에 관련하여서는 그것을 포용하는 태도는 아니지만, 자신과는 다른 하나의 문화로 여기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이 후에 이 책이 인기를 얻었을 때, 사람들이 지금까지 교회에서 진리라고 주장하였던 지구의 형태에 대한 인식을 극복하고 새로운 항로 개척을 할 수 있도록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유럽 중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오랜 기간을 원나라에서 살아왔고 칸에게 충성을 바쳤지만, 대부분을 관찰자적 입장에서 서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방문한 지역들의 문화를 유럽의 문화에 비추어 보아 어떤 곳은 바람직하고 어떤 곳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어떤 곳은 독특하고 유럽지역과 비교했을 때 어떠하다는 등의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의 책의 원제가 아닌 널리 알려진 이름인 ‘동방견문록’이라는 명칭 또한 유럽 중심적인 개념이다. ‘동방’이라는 말은 유럽의 기준에서 봤을 때 동쪽 이라는 의미로 자신들을 중심에 두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유럽 중심적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동방견문록이 미친 영향

 

당시의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를 ‘백만 선생’이라고 불렀다.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던 프레스터 요한의 땅인 동방을 다녀왔다는 그는 온갖 신가한 풍습과 거대한 도시, 엄청난 인구, 진기한 보석에 대해 이야기 했다. 유럽 밖의 세상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13세기의 유럽인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으며, 믿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 반신반의 했을지라도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동방견문록은 순식간에 유럽 전역에 다양한 언어로 필사되어 퍼졌으며, 유럽 사람들은 동방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하는 13세기의 중국은 몽골족이 세운 강력한 정복왕조로서 남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 서쪽으로는 카스피 해를 넘어 남 러시아까지 거의 중앙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광대한 제국이었다. 이슬람 상인들과의 교역도 활발하였으며 화폐가 널리 유통되었고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역참제도까지 정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럽인들에게 문화적인 충격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연구의 폭을 넓히기도 하였다.

마르코 폴로가 언급한 동방의 이색적인 모습들은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또한 그가 묘사한 동방의 풍부한 물산은 유럽인들의 욕심을 자극하여 강렬한 탐험의지를 심어주었다. 그래서 15세기를 전후로 하여 유럽의 많은 탐험가들이 아시아 대륙 혹은 인도를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 이다.

콜럼버스는 라틴어로 번역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책 여백에 일일이 주석을 달아가며 탐험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책속에 나오는 지역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탐험을 떠났다. 물론 그가 도착했던 곳은 동방견문록에는 나오지 않는 신대륙인 아메리카 였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그 땅이 인도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바스코 다가마는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의 후원을 받아 최초로 인도 항로를 개척하였다. 당시 아시아와 인도 등지에서 생산되는 향료는 아랍을 통해 유럽까지 먼 길을 통해 왔으므로 상당히 귀하고 값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가 여행했던 아시아와 인도 지역에는 그런 향료가 풍부하게 있었다. 그런 인도의 풍부한 향료를 다른 지역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가지고 올 수 있다면 엄청난 이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탐험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본인의 저서의 직접적인 영향과 이러한 그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간접적인 영향을 통하여 마르코 폴로는 유럽사회의 전반적인 사고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요즘처럼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여 어디서나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에는 책 한권이 가지는 영향력이 그 때처럼 크지는 못하다.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이 책 한권이 가지고 있는 파급효과가 그만큼 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본 세계로 ‘원나라’를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의 중심은 여전히 유럽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조금 뒤 떨어진다거나 자신이 보았던 것과는 다른 문화와 풍습에 대하여는 미개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 자신이 살아왔던 유럽의 세계보다 더 크거나 정비가 잘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발달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그 중심에 유럽의 사회를 놓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 질 수 있는 서술인 것이다.

그의 책의 파급 효과가 컸듯, 이러한 그의 유럽중심적인 생각 역시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마르코 폴로가 서술한 동방은 유럽보다 정비가 잘 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지역들은 물자가 풍부하기는 하지만 유럽보다 미개한 문화를 가진 곳으로 묘사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가서 그들보다 우월한 힘을 보여주기만 하면 쉽게 그곳을 정복하고 풍부한 물산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은 유럽인들에게는 신항로 개척과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성과를 거두게 되지만, 반대로 ‘개척’과 ‘발견’의 대상이 되는 아프리카와 인도, 아메리카의 거주민들에게는 ‘침략’과 ‘약탈’이라는 비극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Ⅲ. 나가는 말

사전에서 ‘역사’라는 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볼 수 있다. 역사 [歷史, history], 인간이 거쳐 온 모습이나 인간의 행위로 일어난 사실이나 그 사실에 대한 기록.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라는 단어를 인간과 관련된 일에 한정하여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 발생하여 인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 과거의 사실들은 역사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자아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라고 하여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 즉 ‘환경’에서의 영향에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러한 ‘환경’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자연환경, 가정환경, 그리고 개인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사회적 환경 또한 이 중 하나이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을 만드는 것은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구성원들의 사고이다.

아무리 현대의 사회가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있고, 정신적 가치가 해이해 졌다고 하여도, 모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사람들의 무의식중의 사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역사를 특정한 시대에 기준을 두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쇠퇴하기도 하는 것으로 가정을 한다면 역사가 발전하는 특정한 시대에는 그 시대에 활약하는 뛰어난 영웅이 등장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웅이 등장하여 역사를 지금보다 나은 일정한 위치에 끌어놓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수준이 계속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영웅을 지지하여 역사의 흐름을 지지해 주는 구성원들의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아무리 특정 시대에 영웅이 나타나 역사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고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 구성원들의 사고인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이러한 역사의 발전 단계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를 바꾸어주는 데에 일조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럽중심적인 사상 또한 당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유럽중심적인 팽창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주는 것들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어릴 때의 교육일 것이다. 특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대해 이해하는 학문인 ‘지리’는 더더욱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지리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학생들에게 어떻게 바르게 주변을 이해하는 태도를 심어줄 수 있을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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