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2
|
3
|
4
|
5
|
6
|
7
|
|
8
|
9
|
10
|
11
|
12
|
13
|
14
|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29
|
30
|
|
|
|
|
|
|
|
오늘 |
전체 |
|
| 방문자 |
48 |
112297 |
|
| 구독자 |
0 |
40 |
|
| 댓글 |
0 |
226 |
|
| 참조글 |
0 |
98 |
|
|
|
|
|
|
|
짬짬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강의내용을 올리려고 합니다.
|
Cloke, P., I. Cook, P. Crang, M. Goodwin, J. Painter, and C. Philo, eds., 2004, “Doing ethnographies”, in Practising Human Geography, Sage, New York, 169-205. 에서 주요 내용을 요약하였음.
1. 도입: 민족지학(민족지)이 어째서 지리적 방법론이 될 수 있나? 지리학이 문자 그대로 earth(geo)-writing(graphy)이라면 민족지는 people(ethno)-writing(graphy)로서 인류학과 관련되어 있다. 서구의 (인류학) 연구자들은 멀리 떨어진 비서구세계에서 작고 고립적인 사회를 택해 1년 이상 머무르면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대화하고 그들의 일상에 참여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고, 묘사하고, 스케치하고, 사진을 찍는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집약적이고 미세한 연구 방법을 통해 ‘내부자’의 관점에서 그들의 세계관, 생활양식 즉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민족지는 이처럼 유럽 제국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러한 방법에 기반한 인류학과 지리학은 제국주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민족지는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다. (1)민족지는 사람을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고 지식을 가진 에이전트(agent)로 파악한다. (2)민족지는 세밀하고, 장기적이고, 귀납적이고, ‘몰두적인’ 방법론으로서 사회질서와 생활양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뿌리내리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3)민족지는 여러 연구방법을 절충해서 사용하지만, ‘필수적으로’ 참여관찰과 같은 장기적인 기간이 요구되는 조사가 동반된다. (4)참여관찰은 (외부의) 사람들이 연구대상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동시에 연구대상자는 그러한 (외부의) 시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동시에 관찰하고자 한다. (5)민족지는 연구 지역 내외에서 연구자의 말과 행동 간의 불일치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6)따라서, 민족지의 핵심적인 연구 기기는 바로 연구자 자신으로서 낯선 연구대상 지역에서 배우게 되는 행동과 그에 대비하여 자신의 익숙한 기존 행동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과정에서 당연적(taken-for-granted) 세계관, 자아성찰, 생활양식, 지식, 관계, 윤리, 기술, 정치 등이 상호 조우하게 된다. 따라서 민족지는 연구지역의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간주간적(intersubjective)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특히 민족지 방법론을 구사하는 초보자들은 기존의 자신의 태도, 습관, 감정, 감수성, 감각, 세계관, 선호도 등을 “탈학습하는(unlearn)” 것이 중요하다. 훌륭한 민족지학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성찰적이고 사교적이다. 오늘날 민족지는 현대 인문지리학의 핵심적인 연구방법이 되었지만 실제로 이러한 방법론을 구사한 문헌은 소수다. 논문의 경우를 보면 미국지리학회지(Annals of the Association of American Geographers)의 3.8%, 그리고 Society and Space의 5%만이 여기에 해당되며, 지난 30년간 출간된 민족지적 단행본은 대부분 박사학위 논문연구를 수정, 출간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는 지리학계의 민족지에 대한 회의론, 학술재단이 연구비 프로포절에 요구하는 ‘뚜렷한’ 연구결과, 그리고 연구 수행의 실제적 어려움 등이 포함된다. 많은 경우 인문지리학의 질적 방법은 몇 차례의 면담 혹은 기껏해야 “단기적(short-term) 민족지”를 수행할 따름이다. 대개 지리학계에서는 민족지가 1960년대의 계량혁명과 실증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1970년대 이후의 인간주의(humanistic) 지리학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지리학에서 민족지 연구는 역사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는데, 예를 들어 Titus Coan은 1899년 ‘Hawaiian 민족지’ 연구를 수행하면서 유럽 문명이 휩쓸기 이전 하와이 폴리네이시아인의 자연, 습속, 언어, 종교, 예술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1900년대 초반 The Geographical Journal에 실린 논문의 60%가 ‘탐험과 지도화’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지리학에서 사실 민족지가 핵심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통은 남성지배적 학계에서 ‘적절한’ 지리학 혹은 인류학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많은 여성들의 여행기와 탐험에 관한 기록들도 포함한다. 우리는 본 장에서 민족지는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관한 기초적 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대신, 민족지를 간학문적 논의에 기여하는 하나의 ‘장기적이고 뚜렷한 지리적 실천’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지리학에서 민족지가 상당히 오랜 지적 전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학계의 성격변화에 따라 상당히 변화해왔다고 본다. 오늘날 참여관찰은 새로운 유행을 타고 지리학계에 신선한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첨단의’ 민족지는 과거의 오랜, 선구자적 연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음을 지적한다. 2. 지리학의 인간주의 민족지 인간주의(humanism)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19세기 후반 Peter Kropotkin, H.J. Fleure, Paul Vidal de la Blache의 인문지리학파, Carl Sauer의 버클리 문화지리학파, J.K. Wright의 ‘geosophy’, David Lowenthal의 지리적 인식론에 관한 저술 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연구는 외부의 세계와 우리 머릿속의 그림 간의 관계, 그리고 인간 에이전시와 외부 구조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1970년대에 유행했던 실증주의 지리학, 즉 공간과학은 인간과 외부 공간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지만, 인간주의 지리학자는 인간과 외부가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이들은 계량주의자와 공간분석가 집단이 인간과 인문 환경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지적하면서 인문지리학의 이론적 재무장을 요구했다. 인간주의 지리학자들은 훗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사르트르와 같은 현상학자와 실존주의자들의 저작에 주목하면서 주체-객체의 분리에 도전했다. 이들은 한 개인의 목표, 의지가 세계에 대한 경험 및 지식과 분리될 수 없음을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개인의 목표, 의지, 경험, 지식, 신체적 움직임 등을 통해 특정 장소에 어떻게 의미가 집약되는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구체적인 민족지적한 연구로 발전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많은 인간주의 지리학이 성찰적인 ‘철학’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인간주의 지리학은 공간에 대한 인간 경험의 ‘본질’, 생활세계의 ‘본질’, 그리고 공간과학에 있어서 인간성의 본질적 속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적, 내향적, 이상주의적, 관념적 과정은 경험적 검증에 의존하지 않았다. 이는 인간주의 지리학이 이러한 본질주의적 접근으로 인해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중시하는 사람의 일상 경험과 상당한 거리를 두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민족지 연구는 ‘원리적인’ 측면에서 인간주의 지리학과 관계하지만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주의 지리학의 민족지적 연구 성과는 한 줌도 되지 않으며, 위에서 언급한 현상학적 방법이나 철학에 몰두된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세 가지의 문헌이 예외적으로 언급할만한데, (1) David Ley, 1974, The Black Inner City as Frontier Outpost, (2) Graham Rowles, 1978, Prisoners of Space?, 그리고 (3) John Western, 1981, Outcast Cape Town이다. 이들은 모두 미국의 도시사회지리학 분야에서 연구된 박사학위 논문연구로서, 지리학에서 민족지적 연구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 (1) The Black Inner City as Frontier Outpost 이것은 1972년 Penn State University에서 David Ley가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으로서, Ley는 당시 ‘인종화된 불평등에 대한 급진적 관심’에 초점을 두었다. Ley는 필라델피아의 Monroe에 있는 흑인 게토 커뮤니티에서 6개월간 연구를 수행했고, 이후에 2년 6개월 동안 커뮤니티 단체를 위해 프로포절을 쓰는 일을 했다. 그는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116명의 거주자에 대한 질문지형 설문조사를 수행했고 많은 지역 신문기사와 비공식적 문헌들을 검토했다. 그는 프랑스의 인문지리학파를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독해하고, 시카고 도시생태학파를 민족지적 관점에서 해석했으며, 행태과학과 환경심리학을 현상학과 결부시키는 절충적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또한 James Cook의 여행기, 인공지능학, 시저의 갈리아전쟁(Gallic Wars)에 관한 자서전 등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이러한 사실은 Ley가 최근 지적했던 것처럼 그 자신이 ‘관념적으로 매우 바쁜’ 상태였음을 의미하며, 이는 방법론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1970년대에 Palm은 Ley의 연구가 ‘실증주의 과학의 엄격성과 경험적 기술의 통찰성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극찬을 하기도 했다. Palm은 나중에 자신의 표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였다고 기록한다. Ley의 연구 결과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외부인이 흑인의 게토 커뮤니티 지역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가를 대중매체와 학술문헌에서 검토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내부인의 시각에 기반하여 커뮤니티를 조사한 부분인데, 커뮤니티가 ‘갱 영역화’에 의해 어떻게 나누어져 있는지, 그리고 이로 인한 주민생활의 복잡성, 불신, 단절, 의심, 불확실성 등을 민족지적 관점에서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그는 첫 번째 부분에서 백인 연구자와 매스미디어가 흑인 게토에 대해 가지는 편견과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흑인 게토는 ‘백인들의 이미지’, 즉 백인적 재현임을 비판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흑인 게토 커뮤니티가 흑인의 백인에 대한 적대적 통일체가 아님을 지적하면서, 게토 내부의 다양한 사회단체, 공동체, 그리고 갱 등이 내적 방어의 기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공동체 자체를 ‘개체화(individuation)’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Ley는 참여관찰을 통해 흑인 게토 커뮤니티의 ‘재현’과 ‘실재’가 분리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Ley는 이 논문의 단행본 후기에서 자신이 이러한 분리를 ‘실천적인 차원에서도’ 실행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고 적었다. Ley는 과거에 ‘사회과학자의 임무는 혼돈에서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1998년 Ley는 자신의 연구를 상기하면서 참여관찰 초기에 자신이 연구 대상자들을 집단화(grouping)했던 과정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자신의 지식이 필라델피아 현지에서의 일상적 삶에서 매일매일 도전받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당시 Ley가 논문에서 결론 내렸던 연구 성과는 연구대상지역의 현실에서 도출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음의 3가지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 연구자의 관념적 분석틀에서 비롯된 (민족중심적인 혹은 제한적인) 가정들 - 지역 주민의 입장에서 신기할 수밖에 없는 (혹은 외부인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연구자의 현전 - 주로 커뮤니티에서 상당히 활동적인 정보제공자와의 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Peter Jackson은 1998년 Ley의 책이 민족지와 급진적 반-인종주의를 구체적으로 진전시켰다는 점에서 하나의 고전으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2) Outcast Cape Town Western은 195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결과 소위 인종간 혼인(miscegenation)의 결과로 형성된 ‘혼혈인(colored)’의 내부도시 커뮤니티를 연구했다. 케이프타운의 주민들은 실제 노르만계 백인에서 아프리카 흑인에 이르기까지 인종적으로 외형적 연속성(phenotypic continuum)을 형성하고 있지만,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의 법률에 기초해서 백인-갈색인(Brown)-흑인(Black, Bantu)의 뚜렷한 계층적 범주로 이들을 구분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종의 공간적 격리는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왔었기 때문에, 이들 유색인종은 원래의 거주지에서 뿌리 뽑혀 흑인 거주지역과 백인 거주지역 사이의 소위 ‘완충지대’로 재이주하게 되었다. Western은 이것이 ‘소름끼치는 주제’라고 생각하면서, 이러한 과정의 역사, 정당화의 과정, 효과를 세밀하게 포착했다. 한편으로 그의 논문은 역사적 증거, 통계, 개별 면접조사에 기초하여 ‘객관적인 관찰자’의 위치성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연구대상과 밀착된 상태에서 솔직하고, 독창적으로, 완곡적이면서도 강력한 민족지적 연구를 수행했다. 그의 연구에 대한 어떤 비평가는 ‘자신이 여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방식으로 열정적인 진지함을 보여줌’으로써 지리학계의 지리학자와 대학원생 뿐만 아니라 다른 비지리학자들에게도 널리 읽히게 되었다고 본다. de Blij는 이 연구 성과에는 수고로움이 배여 있고, 핵심을 찌르는 분석이 스며있으며, 처절하고 탐험적인 과정에서 이루어진 인문지리학의 훌륭한 연구 성과물이라고 극찬한다. Western은 원래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연구 지역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초기에 부룬디를 연구하고자 했는데, 1970년대에 30만 명이나 살해한 대량학살로 인해 자신의 연구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는 1974년 7월 남아프리카를 처음으로 방문했던 때를 상기하면서, ‘당시에 도시 내부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기초해서 혼혈인들이 살던 지역이 비워지고 재개발이 이루어지던 과정을 샅샅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사악한 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감지했었다’고 기억한다. 1999년 Western은 자신의 연구에 두 명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기록한다. 첫 번째는 Robert Coles가 1973년 UCLA에서 했던 민족지에 관한 강연이었는데, 그 때 Western은 “도시지리학자로서 저도 그런 직접 경험에 기초한, 그리고 나 자신의 말로 표현하는 (내 목소리가 담긴) 연구 (please-tell-me-in-your-own-words research)를 수행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했었음을 상기한다. 둘째는 그가 케이프타운에서 처음 만났던 남아프리카의 시민운동가인 Victor Wessel로서 “그는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고, 나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도록’ 자극했었다”고 기록한다. David Simon은 케이프타운에서 자란 지리학자로서 1999년 Western의 연구를 새롭게 조명하면서 당시 대학원생으로서 Western의 연구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표현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당시에 인문지리학을 처음으로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Ley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Western의 연구는 슈츠(Alfred Schutz)의 사회학적 현상학의 시범적 연구였다. 그는 케이프타운에 대한 외부인들의 ‘재현’과 케이프타운의 현실 사회지리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또한, 그의 연구 방법론은 Ley와 마찬가지로 절충적이고 ‘바쁜’ 것이었다. 그의 연구방법론은 지리학자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기술, 즉 지도학적, 계량적, 문학적, 시각적 방법과 다양한 자료의 동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의 연구로 인해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학생들은 ‘그 곳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으로서 중요한 정치적 교훈을 함축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비가시적인 구조적 권력 및 권력의 실행이 전적으로 결정론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또한, 학생들은 사회적 분리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공간이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15년이 지난 후의 비평가들은 이 연구가 ‘사회관계가 공간을 형성하면서 동시에 공간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도시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어떻게 시민들을 새롭게 만들어 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Western의 민족지는 구조화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통찰력을 시대적으로 앞서 보여주었고, 아직 인간주의 지리학이 성숙하기 이른 시점에 연구가 수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적으로 인간주의적인 관점에 기여하게 되었다. 즉, 그의 연구는 인간주의와 관련된 문헌에 많이 의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정체성과 장소 사이에는 쉽게 풀리지 않는 복잡한 관계의 실타래로 얽혀있다는 점을 구체적인 연구를 통해 드러낼 수 있었다. (3) Prisoners of Space? Ley와 Western의 연구가 그야말로 인문지리학의 고전이라면, Rowles의 연구는 훌륭한 민족지적 연구이면서도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경우이다. Rowles의 연구는 귀납적, 경험적인 방법에 기초한 까닭에 많은 수고로움이 배여 있는데, 그는 주어진 자연환경 내에서의 개인이 어떠한 전체론적 인식을 갖게 되는지를 분석했다. 그의 연구는 설명과 일반화를 넘어선 소설적인 글쓰기를 시도했고, 한 개인이 지닌 사소하고 단순한 환경 인지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Rowles의 글쓰기가 시도했던 세밀한 민족지적 기술방식은 이후에 보다 현실적인 이론을 태동하는 전환점이 되었고, 사람들의 생활 경험을 고려한 공간 계획의 출현에도 기여했다. 이러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Rowles의 연구는 Ley나 Western에 비해 지리학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이는 아마 그가 인간의 노령화과정을 연구하는 학제간 분야로서 노인학(gerontology) 전공자로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Rowles는 인간주의 지리학의 온상이었던 Clark 대학에서 인간주의 지리학자인 Anne Buttimer를 지도교수로 학위논문을 썼다. 그는 인간주의 지리학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주의 지리학의 내향성, 추상성을 뛰어넘고자 시도했다. 그는 Ley나 Western과 마찬가지로 특정 집단에 대한 외부의 단순한, 추상적인, 정형화된 재현에 도전하기 위해 내부자의 시각에서 민족지적 방법론을 선택했다. 그러나 Ley와 Western이 기존의 많은 지리학자들처럼 근린지구나 커뮤니티 스케일에서 연구를 수행했던 반면, Rowles는 보다 미시적인 스케일에서 연구를 수행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를 통해서 Rowles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분리와 주관적 지식과 객관적 지식 사이의 구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경험적 연구를 전개할 수 있었다. Prisoners of Space는 데카르트적 세계와 생활세계 공간 사이의 차이를 탐험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노인의 지리적 삶이 위축되는 것은 노화의 (자연적) 과정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라는 기존의 행태주의적 가정을 민족지적 방법을 통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었다. Rowles는 미국 동부 해안가의 익명의 도시에 있는 노동계급 근린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대기, 지리적 경험, 일상생활 세계를 연구했다. 처음에 그는 상당히 많은 연구대상자를 조사하려고 했지만, 연구의 과정에서 지속적인 관계를 가진 이들은 5명의 노인이었다. 그는 ‘초기에 많은 연구대상자를 섭외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근심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히려 나의 연구에 행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기술한다. 그는 연구대상자와 3년에 걸쳐 장기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속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그의 논문 중 한 장인 ‘개인 간 지식’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가 이 부분을 다 쓰기 전에 2명의 연구대상자가 사망했지만 다른 두 사람과 초안을 함께 읽으면서 토론을 해 나갔다. Rowles는 Western과 마찬가지로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을 조사했다. 그러나, Western의 연구에서 사람들은 강제적 이주로 인해 장소에 대한 애착이 표면 위로 드러날 수 있었지만, Rowles의 경우 연구대상자들은 초기 단계의 경우 이러한 경향을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Rowles가 관심있는 노년에 관한 학술적 문제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Rowles는 연구 초기 단계에서 경험한 이러한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연구 계획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고, 연구대상자들의 긴 여행 이야기나 자서전적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훨씬 덜 집중화된, 장기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연구대상자들과 함께 산책하고, 집에서 담소하고, 친구를 만나고, 술을 마시고, 커뮤니티 행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페이스에 그들을 맞추려고 하는 대신에 자신을 그들의 페이스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런 연구과정에서 Rowles는 메모하기, 사진 찍기, 스케치 지도 그리기, 녹취하기 등의 방법을 사용해서 기록을 정리하면서, 느린 속도로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풍부함과 복잡성을 학습해 나갔다. 그는 결론적으로 그들의 노년기 삶이 Winchester가에 개인의 신체적 기억, 자서전적 기억, 그리고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애착을 갖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Rowles는 노년층이 육체적, 인지적 기능의 쇠퇴로 인해 삶의 공간이 자신들 가까이로 좁혀진다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이며, 오히려 생물적, 경제적,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노년층은 정신적 역동성과 창조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주체-구조의 관계는 중요한 정책적 함의를 가지는데, Rowles가 이후에 주장하는 것처럼 노인들도 요양원이나 양로원이 아닌 ‘자기가 그 동안 살아 온 장소에서 늙어가고픈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에 기여했다. 3. 지리학의 신민족지 위에서는 1990년대 초반 영미계 지리학계에 불어 닥친 ‘문화적 전환(cultural turn)’ 이전에 수행된 민족지적 연구 사례를 살펴보았다. ‘문화적 전환’은 1990년대 초반 인문지리학 분야에서 문화연구 및 문화 관련 분야의 많은 개념을 활용했던 다양한 흐름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용어이다. 이는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퀴어이론, 반인종주의, 포스트식민주의 이론, 정신분석학, 사회심리학, 문화연구, 과학연구, 사회인류학 등의 다양한 관점을 포괄하는데, 몇 가지 주요 개념들만 나열하면 차이, 정체성, 체현, 언어, 지식, 텍스트, 담론, 이미지, 의사소통, 가치, 관점, 행위자/구조, 권력관계, 저항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1) 다양한 사람들이 세계와 자신의 장소를 이해하는 방식, (2) 시공간에 있어서 일상적 생활의 루틴화 과정, (3) 체현, 기억, 감정, 느낌 등이 장소와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관심을 둔다. 이러한 연구는 과학적 합리성을 거부하고 연구자의 성찰성(reflexivity)을 강조하며, 분석/감정이입, 내부자/외부자, 사상/기쁨, 육체/정신, 개인/맥락 등과 같이 사회의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한다. 물론 인간지리학은 인간을 강조하면서도 권력관계나 젠더관계 등을 무시했긴 했지만, 이러한 문화적 전환기의 인문지리학이 질적 연구 방법론을 채택하는 데에 인간주의 지리학이 기여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지리학자들은 지역경제가 지역사회의 실천에 어떻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연구했고, 정치지리학자들은 경계 형성과 배제의 과정에서 신민족주의와 정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자 했으며, 도시지리학자들은 도시 내부의 문화적 부흥과 생활양식을 열정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소비지리학자들은 유통체계를 연구하는 대신에 소비의 공간을 문화적 입장에서 분석하기 시작했다. 지리학의 문화적 전환은 동시에 ‘민족지적 전환(ethnographic turn)’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이 시기 사회 및 문화 지리학자들은 인류학과 사회학으로부터 페미니스트 민족지와 같은 새로운 접근방법을 수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지리학의 ‘신민족지(new ethnographies)’라 지칭하면서, 이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음을 제안한다. (1) 연구대상 커뮤니티의 범주화(Categorizing subject communities)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족지를 ‘사람들 기술하기(people writing)’로 정의하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원래 이러한 ‘사람들’은 도서관이든 연구실행 과정이든 애초에 만날 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민족지학자들은 사람들을 범주화함으로써 어떤 범주의 사람, 어떤 범주의 문화, 어떤 범주의 민족, 어떤 범주의 공동체 등으로 (단수화하여) 기술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간적, 시간적으로 고정되고 고립된 단일한 사회문화적 단위를 가정하는 것이 과거의 민족지적 연구의 특징이었다. 문화적 전환(cultual turn)의 영향을 받은 지리학자들은 이처럼 세계를 범주화된 사람과 문화로 구분하는 것에 비판적이며, 인간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같다는 인간주의 지리학자들의 가정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렇다면 집단적, 개인적 정체성과 일상적 공간/장소와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일까? 분명 민족지적 연구는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 가장 적합한 방법론이다. 그렇지만, 도대체 사람, 문화, 커뮤니티의 내적 동학을 민족지적 방법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연구 대상의 경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누구에 의해서 설정되어야 할까? 이러한 접근방법이 기존의 연구와는 다른 어떤 연구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리학과 인류학에 있어서 민족지적 전통은 역사적으로 서로 얽혀있다. 그러나 지리학이 문화적 전환기를 맞이하면서 이러한 상호 얽힘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문화적 전환을 논의함에 있어서 미국 문화지리학의 초유기체론을 비판했던 James Duncan을 빼놓을 수는 없다. Duncan은, 소위 ‘원시적 농촌 지역에 대한 답사’를 기치로 1970년대까지 20세기 미국의 문화지리학을 주도했던 버클리 대학의 Carl Sauer 및 제자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Sauer는 40여 편의 박사학위논문을 지도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라틴 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연안 지역을 연구지역으로 정했으며,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답사를 통한 직접적인 경험과 현지 사람들의 언어를 배우도록’ 가르쳤다. 그렇다면 Duncan이 이러한 종류의 문화지리학에서 문제시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Duncan은 1980년의 논문을 통해 왜 지리학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지리학에 눈을 뜨라고 주장했던 것일까? Duncan의 문화지리학이 기존의 문화지리학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폄하하는 일부 지리학자의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문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980년 초유기체론에 대한 Duncan의 주요 비판은 ‘문화를 하나의 사물’로 인식하는 관점, 즉 문화물신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Duncan에 따르면 Sauer와 그 제자들은 문화가 인간의 일상적 행위와 분리된 독립적 실체라고 주장했다. 즉, 문화는 인간에 영향을 미치고, 문화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문화는 내적 논리와 법칙에 따라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 때 개인인 단순히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문화를 실어 나르는 매개자, 담지자, 혹은 메신저의 역할을 수행할 따름이다. 그래서 Sauer의 지리학은 인간 개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람들은 문화에 대해 수동적이며, 문화적 관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문화에 관한 초유기체적 이론이 지리학계에 들어온 것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Sauer가 같은 대학의 인류학자인 Alfred Kroeber와 Robert Lowie와 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이미 1940년대에서부터 인류학계에서는 어떻게 개인들이 제도를 유지, 창조함으로써 거꾸로 환경을 바꾸어 나가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처럼 문화의 초유기체론이 많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이미 오래전부터 거부되고 공격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문화지리학자들은 문화에 관한 많은 대안적인 정의를 세대와 세대를 거쳐 무시하면서 초유기체적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해왔다. 이러한 과정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대학의 세계지역지리 과목의 강의 교재 발간을 통해 세대를 거쳐 이어졌고, 결국 많은 지리책들이 지도 상에서 세계 인구를 몇 개의 등질적 문화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기술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기 시작해서 많은 지리학자들이 이러한 전통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문화유기체론은 학술적으로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대중들이 문화를 이해하는 방식에 여전히 강력히 자리 잡고 있다. 많은 대중들은 여전히 영국 문화, 이슬람 문화, 게이 문화, 청소년 문화, 흑인 문화, 도시 문화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구분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문화 간의 이동 혹은 문화 간의 혼합에 매료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소위 ‘문화주의(culturalism)’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문화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문화적 특징은 ‘실재’하는 것으로 사람들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분석 가능한 대상이며, 따라서 문화는 설명의 독립변수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특징으로 한다. 문화에 대한 이러한 당연적 주장이 더욱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정의가 순진무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Peter Jackson(1989)에 따르면, Los Angeles Times는 1989년 5월 12일자에서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도시 내부에서 번잡한 지역에 거주하는 것은 그들이 문화적으로 인구과밀지역을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이 신문은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정치적 지위의 불확실성이나 히스패닉계 이주자의 빈곤을 통해 이들의 혼잡한 거주지를 설명하는 대신에, 이들이 확대가족과의 동거를 선호하기 때문에 가구당 구성원 수가 많아져서 인구 과밀의 거주지가 형성되었다고 강조했다. 즉, 이 신문 기사에서는 히스패닉의 ‘문화’가 히스패닉 거주공간의 ‘과밀(혼잡)’을 설명했던 것이다. 초유기체론이나 이와 관련된 문화에 대한 대중적 설명 방식은 바로 이처럼 불필요한 분리, 위험, 적대감을 강조함으로써 누구나 문화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은폐하고 지역주의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이러한 설명은 상이한 문화라고 간주되는 것들 사이의 상호연결성뿐만 아니라 문화가 정치, 경제 등과 맺고 있는 상호 관계도 은폐한다. 범주화는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또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한 많은 이론들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뒷받침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화의 결과 많은 지리학자들은 모든 범주와 이론은 사회적 구성물로서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구축하고, 유지하고, 정당화하고, 변형시킨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케이프타운에 관한 Western의 논문만큼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자, 그렇다면 지리학의 새로운 민족지 연구자는 범주화의 정치가 갖는 이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람, 문화, 커뮤니티 혹은 그 외의 다른 사회집단을 연구할 수 있을까? 우선, 1989년 신문기사를 분석한 Jackson의 연구로 되돌아가보자. 여러분 자신이 1984년 LA에 살고 있는 대학(원)생이라고 생각해 보아라. 여러분은 도시사회 지리학에 매료되어서 이 분야에서 논문 주제를 찾고 있다고 생각하자. 우연히 Los Angeles Times를 읽다가 바로 Jackson이 분석한 그 신문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토픽이다. 계단을 오르기 전의 현관 앞에 다다른 것이다. 그 신문기사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그동안 읽은 여러 가지의 문헌을 떠오르게 할 것이다. 여러분이 공부하면서 읽은 문헌 중에 Duncan의 1980년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면, 신문기사를 보고 의구심이 들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기사가 바로 문화에 관한 초유기체적 이야기임을 파악하고, 신문기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 토픽을 확장시켜 Los Angeles의 주택 문제를 좀 더 조사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히스패닉계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근린지구에 들어가서 베이스캠프를 차려라. 히스패닉 근린지구가 낮설다면 문지기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아마 커뮤니티 활동가가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자, 이제 여러분은 다른 공동체의 외부자로 전입할 준비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혹시 여러분이 고민하고 있던 초유기체적 관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히스패닉계 공동체와 그 외부를 분리하고, 히스패닉계 공동체를 등질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그들과 우리’라는 관념을 재생산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한 문화와 다른 문화의 사이는 항상 문지기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 않은가? 마치 David Ley가 필라델피아에서 연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점차 시간이 지나 더 많은 주민과 대화하고, 그들과 더 어울리고, 그들의 일과 더 관계할수록 이러한 혼란은 계속될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커뮤니티 혹은 문화를 단일하고 등질적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Pamela Shurmer-Smith가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들 중에 우리의 삶의 “모든” 측면을 공유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여러분이 이야기하는 주민들은 사실 나이, 젠더, 재정상태, 직업, 종교적 믿음과 실천, 언어, 정치, 취미, 취향, 삶의 경험 등 다양한 소속의 형태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1세대, 2세대, 3세대 등 이주 세대에 따라서도 소속의 형태가 다르고, 같은 히스패닉이라고 할지라도 멕시코인인가, 과테말라인인가, 니카라과인인가에 따라서도 다르다. 또, Doreen Massey가 지적하는 것처럼 겉보기에는 단일한 장소감과 응집력있는 정체성을 가진 것 같지만,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장소에 따라 그리고 외부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여러분이 연구하려고 하는 ‘그들’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어렵게 한다. 존재론적 의미에서 대답하자면, 이러한 집단적 범주 그 자체는 무의미하지만, 이러한 범주가 실제 생활세계에서 정의되고, 전개되고, 이용되며, 경합되는 방식은 정말 심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즉, 이러한 범주가 문제적이지만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러한 범주는 머리를 맞대 탐구되어야 한다. Don Mitchell(1995)이 지적하는 것처럼 문화는 사람들에 의해 소유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수한 환경 하에서 경합되는 권력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연구계획과 연구실행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첫째, 연구자는 범주화된 집단의 삶을 정형화된, 대중적인, 문화주의적인 관점에서 설명하는 방식에 도전해야 한다. 이 때 민족지적 연구는 특정한 배경 하에서 벌어지는 범주화의 권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어떻게 이러한 과정이 사람들의 자기-범주화의 일부분이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으며, 더불어 ‘아래로부터의’ 추가적 혹은 대안적 범주들을 발견할 수 있다. 둘째, 민족지적 연구를 단순히 문화와 문화 사이를 이동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 통해 이동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셋째, 이러한 네트워킹을 상세하게 기록해 두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며 이는 연구과정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를 잘 기록해두면 한 장소 이상의 다중적 장소들에서 경계를 가로질러 민족지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민족지적 연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네트워킹에 관한 것이며 연구실행의 처음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민족지학자는 네트워크를 통해 어떻게 작업할지를 배워야 하고, 적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고정관념을 발견할 때 그 흐름을 따라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대안적인 해석을 보다 의미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연구단계를 표준적인 단계로 나누는 방식 그리고 읽은 후에 쓰는 방식과 같은 연구계획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다. 가능한 한 빨리 네트워크 관계를 형성해서 자신의 사고에서 문화주의적 싹을 뽑아내는 것이 연구의 과정에서 직면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손실을 최소화하는 길이다. (2)추상적 이론과 일상생활의 관계짓기(Relating abstract theory and everyday life) 1980년대의 문화적 전환은 이론의 중요성을 더욱 배가시켰다. 이는 Nigel Thrift(1983)와 같은 지리학자들이 1970년대에 평행선을 달려왔던 지리학계의 두 흐름, 인간주의 지리학(인간의 상호작용의 특징을 이해함으로써 장소의 일반적 특징을 포착하려는 지리학)과 맑스주의 지리학(자본주의의 일반 작동 법칙을 이해함으로서 장소를 이해하려는 지리학)을 통합하려는 움직임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 전자는 인간 에이전시를 강조하는 자원론적 입장이며, 후자는 구조의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결정론과 관련되어 있다. 1980년대에 등장한 구조화이론은 바로 이처럼 일상적 삶과 추상적 이론의 상호 얽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고, 이러한 연구에서 민족지적 연구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구조화이론의 주창자인 Anthony Giddens(1984)는 ‘구조는 순진하게도 유기체의 골격 내지 틀, 혹은 건물의 골조와 같은 이미지로 착상되어 인간 행위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고 비판한다. 대신 그는 인간 에이전시의 원인과 결과를 일으키는 구조가 동시적으로 이원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하나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행동방식과 존재양식에 대한 메시지를 통해 당연적인 것으로 루틴화되며, 다른 하나는 사회의 체계성(systemness)을 통해 확장된 인식과 조정을 통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구조와 에이전시는 동일한 것을 의미하며, 이는 사람들의 일상적 활동에 의도적, 비의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민족지적 연구에게 있어서 이러한 구조화 이론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구조화이론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동방식과 존재양식에 관한 메세지를 학습하는가? - 이러한 메시지는 어떻게 행위 경험을 루틴화하는 결과로 강화되는가? - 이러한 메시지에 담긴 지식이 당연적 ‘실천 의식’을 어느 정도까지 구성하는가? - 이러한 지식은 어느 정도로 지리적, 육체적으로 뿌리내리고 있는가? - 참여관찰을 통한 장기적, 상황적, 체현된 접근은 어느 정도까지 실천 의식을 담론 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민족지적 연구는 ‘끝나지 않은 세계에서의 인간 에이전시의 잠재력’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생활에 있어서 결정성보다는 ‘행위에 미치는 효과성’에 주의를 기울인다. 따라서 이러한 연구는 당연적 세계를 끄집어내서 의문시하고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의 인문 지리를 구성하는 집합적인 과정에 사람들이 어떻게 참여하게 되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구조화이론의 이러한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현재로서 이는 지리적 관점에서 다소 약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구조화이론을 근거로 한 제도 분석이나 전략적 행위에 관한 분석은 에이전시와 구조 사이의 이원성을 이론적인 수준에서 방법론적 수준으로 전환하는 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사례가 Paul Willis의 민족지적 연구물인 Learning to Labour(1983)라고 할 수 있겠다. Nigel Thrift는 Willis의 저작이 사회적 행위의 의도적 결과와 비의도적 결과에 관한 구조화이론의 주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비평한다. 이 저술은 일부 노동계급 학생들이 학교의 권위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어떻게 정신노동에 대해 저항하는지를 보여준다. 육체노동은 정신노동과 반대되는 특질, 가령 공격성, 단결, 남성성, 날카로운 유머로 대변되며, (노동계급의) 자유에 대한 긍정적 확인이다. 이러한 저항으로 인해 노동계급 학생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노동계급 직업을 받아들인다. 곧 그들은 자신들의 억압을 자발적으로 껴안는다. Thrift는 Willis의 저술이 지니는 기능주의적 측면을 비판하는 대신에, 한 무리의 젊은 남성들이 학교에서 일터로 이행하는 과정을 추척하여 (중산계급의 가치를 다 같이 함께 거부함으로써) 구조적 종속에 대한 상징적 반대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Willis는 민족지적 연구방법을 통해 전통적 맑스주의 이론에 입각하여 계급구조적 사회에 관한 추상적인 논의 속에서 학생들의 삶과 선택을 맥락화하고자 했다. Willis 책의 절반은 섬세한 민족지적 기술이며, 나머지 절반은 집약도 높은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이전시는 경험적인 것으로, 구조는 이론적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바로 그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Marcus는 Willlis의 저술에 대해 Thrift보다 더욱 비판적이었는데, ‘이 책은 단순히 기능주의적 질서라는 기존의 관념 속에 현실세계의 뒤엉킴을 삽입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Willis가 강조하는 ‘비의도적 결과’는 기껏해야 ‘에이전트는 자신들의 행위를 다양한 맥락에서 수행한다’는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원성을 고려한 민족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Marcus and Fisher(1986)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연구가 구조적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어떤 부류의 집단이 아니라 상이한 공간 상에 걸쳐 있는 ‘체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1986년 Marcus는 체계로서 다국지적(multi-locae) 민족지의 가장 명백한 탐구 대상은 시장,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분배, 소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1995년과 1996년의 글을 통해 맑스주의만이 다국지적 민족지학의 연구에 유일한 이론체가 아니라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관점에서도 잘 수행될 수 있음을 주장했다. 포스트구조주의의 핵심적 믿음 중 하나는 지배적인 범주화와 이분법적 분리는 불안정화되어야 하고 ‘비억압적 정치’의 창조를 위해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Donna Haraway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아/타자, 정신/신체, 문화/자연, 남성/여성, 문명/미개, 실재/표상, 전체/부분, 에이전트/자원, 창조자/피조물, 능동/수동, 옳음/그름, 진실/환상, 신/인간 등의 이분법은 모두 체계적으로 여성, 유색인, 자연, 노동자, 동물 등을 지배하는 논리였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범주화를 거부하는 방법은 ‘상호연결된 양식을 지닌 새로운 이론화’이며, 이것이 오늘날 많은 비재현적 이론들(non-representational theories)에 지리학자들이 매료되는 지점이라고 주장한다. Thrift에 따르면, 이러한 이론화는 다음과 관련되어 있다. - 구조화 이론의 장점은 새롭고 보다 향상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 새로운 형태의 연구가 요구되고 있는데, 이는 이론을 특정한 맥락에 적용하는 연구가 아니라 이론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이 텍스트와 맥락, 그리고 사실성과 허구성의 융합을 통해 수렴시키는 것이다. - 참여관찰은 이러한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수단으로 촉망받고 있다. 비재현적 이론은 주로 특정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일상적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 비재현적 이론의 옹호자들은 인문지리학에서의 질적 연구 방법이 사람들의 감각적 삶의 영역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간주해왔고 행위보다 지식을 우선시함으로써 (무의식이 아닌) 의식에 기반한 모델에 의존해왔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새로운 연구 수행은 단어(담론적 의식)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서 비합리적인 일상적 삶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의식의 작동방식, 신체의 전인지적(pre-cognitive) 실천, 그리고 일상생활의 감각적 경험 등이 이러한 영역에 해당된다. 따라서 비재현적 이론은 비전문가도 충분히 상세한 방식으로 민족지적 방법론을 수행하여 글쓰기를 할 수 있고 또 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비재현적 이론은 민족지적 연구자로서 우리의 연구계획의 경계를 더 밀어 붙일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수행되는 참여관찰은 관찰자뿐만 아니라 관찰대상자 모두 에게 ‘놀랄만한’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현재까지 비재현적 이론은 어느 정도의 진전을 보여 왔는데, 이의 사례가 Bruno Latour가 Aramis: The Love of Technology에서 수행한 ‘놀랄만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발전된 ANT(actor-network theory)라고 할 수 있다. ANT는 기든스가 포스트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전면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부분에까지 도달했으며, 행위의 문제를 한 개인의 차원을 넘어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다른 행위자들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특정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ANT에서 에이전시는 개별 인간 주체의 활동 그 이상으, 행위의 능력이 비인간적 행위자나 인간-기계의 결합체와 같은 ‘기능적 집합체’에 의한 것임을 지적한다. 즉, 행위의 능력은 ‘이질적 네트워크 상의 부분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생성되는 일종의 관계적 효과’이다. 따라서, ANT에서 구조는 어떤 외부에 있는 혹은 위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놓인 사람, 인공물, 규칙, 생명체들의 복잡한 얽힘이며, 세계를 가로질러 형성된 관계의 그물조직이다. 이러한 설명이 살 점 하나 없는 아마 ANT의 골격일 것이다. ANT에 기반한 많은 경험적 연구들은 일상적 삶의 세속적, 상황적 복잡성을 분석함으로써 이분법적 틀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연구는 특정한 사람들, 사물들, 메타포, 계획, 이야기들, 실생활과 자서전 등에 초점을 둠으로써, 연구자가 연구대상자에게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연구대상자들이 연구자에게 설명할 수 있도록 행위와 관계망의 상호작용에 개방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론은 선입관을 바탕으로 연구지역의 현장 데이터를 가두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보다 가벼운 기분으로 실제 연구지역을 설명할 수 있게끔 착상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 경제, 조직, 기술 등에 기반한 거시적 설명은 이미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들고, 생산적이지도 않으며, 사회는 그러한 설명에 준비되어 있지도 않고, 비효율적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존의 급진적 연구 성과의 축적에 상당한 토대가 되었던 ‘저항과 순응’이라는 관점은 탈중심화될 필요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소위 ‘맥락’이라는 안전벨트를 두르고 궁극적으로 사회의 질서와 사회의 구조를 설명하는 이론화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즉, ANT는 연구대상을 질서화하려고 하지 말고 연구대상이 어떻게 질서화되어 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Aramis를 포함하는 많은 연구들이 실제로 장기간의 참여관찰과 같은 방법에 기반한 민족지적 연구를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 가령, Aramis만 하더라도 참여관찰의 연구 방식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 정책/계획문서, 보도자료, 자문보고서, 메모와 같은 문서화된 연구자료(archive)와 사진, 지도, 도표와 같은 도상학적 자료, 그리고 인간 행위자에 대한 심층면접기록 등을 기초로 하고 있다. 만약 민족지적 연구가 연구 대상이 다중적인 공간을 가로질러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설명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연구방법은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행히 이러한 문제의식은 최근 지리학계에서 과정-지향적인 질적연구 방법론을 구사하는 연구들에 의해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3)성찰적일 것(Being reflexive) 지리학의 문화적 전환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학문의 구성’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즉,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가 수행하는 연구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를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학문적 영역 내에서의 ‘지식과 담론의 사회적 구성’ 그리고 이에 뿌리 내리고 있는 권력관계는 열띠게 논의되고 있다. 지리학계 내부에서는 우리가 속한 환경, 우리의 위치, 우리의 가치, 그리고 우리의 연구주제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우리는 어떤 렌즈를 통해 지식에 접근해야 하는지, 지리학적 연구수행과 연구주제의 선택에 있어 누가 포함되고 누가 배제되는지,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인지, 그리고 이론과 정치, 사고와 행동 사이의 관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등에 관한 심층적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McDowell, 1992). 이러한 질문은 대답되기가 어렵고 당혹스럽지만, 이러한 질문으로 인하여 지리학계에서는 사회적으로 배제된, 주변화된 집단에 대한 질적연구가 점차 번성하고 있다. 이는 지리학계에 많은 ‘비주류적’ 구성원들이 가시화된 덕분이기도 하고, 자아와 타자의 분리에 대한 본질주의적이고 단순한 설명에 대한 비판이 차이의 정치와 문화에 관한 논의에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의는 정체성을 어떤 범주로 간주하기보다는, 부분적이고, 완결되지 않은 불완전성으로 파악하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내가 너임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에 대한 관여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연구는 페미니즘, 반인종주의, 포스트식민주의와 같이 다양한 정치적 선택이 나타난 것과 관련되어 있다. 많은 지리학자들이 주변화된 목소리와 이야기를 발견하고 중심화함으로써 현 상태를 불안정화하거나 기존의 지식을 새롭게 정의하고자 해 왔다. 이는 Philo(2000)가 일컫는 것처럼 지리학계에 새로운 양가성을 창조함으로써 기존의 편견과 보수성을 날려 없애버리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끈 원동력의 핵심에는 바로 페미니스트 민족지가 있다. 이와 같은 민족지적 전통은 지리학에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논리적으로 극단적인 정치를 지향하는 연구나 주변적이라고 간주되기가 어려운 사람들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명시적으로 간섭주의를 지향하는 연구는 (정치적) 참여 행위, 활동가적 연구, 그리고 해방적 연구를 지향한다. 이러한 연구자들은 연구대상자에 대한 공감의 수준을 넘어 전문적인 기술과 접촉을 통해 주변화 된 사람들의 투쟁에 관여하여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한다. 또한, 어떤 연구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고 권력이 없는(powerless) 사람들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인문지리학이 설명하려는 보다 넓은 과정을 그늘에 가리운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에는 부유하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가 수행되고 있다. 많은 지리학자들의 이러한 문제의식과 실천을 통해 다른 사회과학자와 마찬가지로 더욱 성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성찰성은 민족지 연구자의 미시적 수준의 행위를 거시적 과정과 연결시키는데, 다음의 세 가지에 관심을 둔다. (1)민족지가 뿌리내리고 있는 개인 간 관계를 구조화하는 권력관계가 조사되는데, 이는 연구자가 누구에 대해 그리고 무엇에 대해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그리고 무엇이 연구자에 대해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연구자와 연구대상자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등에 관한 성찰을 수반한다. (2) 지리적 제도, 전통, 관점, 그리고 이들이 다른 문화에 관한 지식을 생산하는 데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관심을 둔다. 예를 들어, 지리학계의 제도와 전통은 상당히 제한적인 범위의 학생들을 유인하며, 이 학생들은 이들의 연구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특수한 사회적, 학계적 네트워크를 통해 연구를 수행한다. (3) 보다 넓은 차원의 문제들로서 위와 같은 문제들이 사람의 이동이나 정보의 흐름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접촉을 비균질적으로 조직화하는 방식을 문제 삼는다. 어떤 사람들은 성찰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자기도취적 연구를 낳아 정말로 중요한 문제를 드러내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자기-성찰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민족지적 연구계획과 연구수행을 새롭게 사고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첫째, 연구계획을 수립하기 전 단계에 대해 글을 써봄으로써 자신의 연구 방향이 자신의 일상적 경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열정, 동기, 관심, 정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연구를 활력을 불어넣고 연구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둘째, 어떤 연구가 아무리 ‘저기 밖의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연구가 연구자와 지도교수가 형성하고 있는 네트워크를 이용함으로써 이루어지므로 연구자와 지도교수가 연구의 외부가 아닌 연구의 일부분을 구성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연구수행은 다음과 같은 장소들에서 이루어진다. - 대학 혹은 NGO와 같이 신뢰 관계에 기반한 접촉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곳 -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진입할 수 있는 공간 혹은 사회집단 - 직업 혹은 자원봉사자로서의 활동 - 대가의 지불이 필요하지 않은 이벤트나 캠페인 - 생소한 단체나 조직에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을 통한 접근 - 가족, 친구관계, 동호회 네트워크에 관한 혹은 이를 통한 연구 이는 우리가 ‘현지(field)’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 언제 그리고 어디서 연구자가 현지에 있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민족지적 연구에는 연구대상자뿐만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를 주고, 연구비를 지원하고, 연구를 지도하고, 연구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도 연구의 성공적인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민족지 연구자에게 다음의 몇 가지 팁을 제공하고자 한다. 1. (연구수행 전에) 있는 그대로를 남김없이 기술하는 이야기 몇 가지를 읽어 보아라. 2. (연구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 위의 이야기들을 읽을 때 방법론 텍스트와 병행하여 읽어라. 3. 지리학계의 민족지 방법론의 역사와 친숙해져라. 4. 참여관찰 연구 결과를 읽어라. 5. 독서, 연구수행, 그리고 글쓰기를 병행하라. 4. 결론 오늘날 지리학계의 경우 많은 학생연구자들에게 ‘이론을 잘 파악하고 문헌리뷰를 철저히 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철저한 현지조사의 수행’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연구수행의 과정보다 연구수행의 산물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현지조사노트의 작성은 특정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연구가 어떻게 진행 중인지를 성찰하게 하며, 연구의 초점을 유지하게 하고, 다음 과정의 연구계획을 수립하는 데에 꼭 필요하다. 현지조사노트는 민족지 연구뿐만 아니라 모든 연구에 필요한데, 왜냐하면 모든 연구는 참여와 관찰이 동반되고 연구수행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Kathy Bennet은 영국 농촌지역의 어떤 농장에 관한 현지조사노트를 작성하면서 무엇을 기록해야할지, 어떻게 기록해야 할지,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그의 지도교수는 단순하게 ‘그냥 계속 쓰라’고만 했다. 사실, 현지조사노트는 의미를 생산하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으로서 일차적 경험에 기초한 창조적인 글쓰기의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픽션과 같다. 그리고 연구과정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면서 연구과정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현지조사노트는 연구대상에 대한 기록과 해석이 서로 중첩, 교차되어 있기 때문이다.
|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trackback/10/387
|
|
|
|
|
|
|
|
|
|
오늘날 “담론(discourse)”이라는 개념은 비판이론, 문학이론, 사회학, 지리학, 심리학, 언어학, 철학 등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이들 여러 분과학문들간의 대화를 이끌기도 하는 중요한 매개가 되고 있습니다. 담론이란 무엇일까요? 담론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담론이 지리학, 특히 사회지리학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이 질문들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볼까합니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담론은 원래 ‘대화(conversation)’, ‘언술(speech)’, ‘말과 글의 형태로 표현된 생각의 재현’ 등 사전적인 의미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일방적인 진술이라기보다는 화자와 청자의 일종의 상호작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전을 찾아보면 담론은 ‘의견의 교환’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요. 따라서 담론은 인간과 동떨어진 언어학적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 사회의 지리와 역사에 조건되어 있는 사회적인 산물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오늘날 담론이 사회비판의 핵심 개념으로 등장한 것은 프랑스 태생의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던 미쉘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영향에 의한 것입니다. 푸코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소위 서구 맑시즘이라고 불리우던 유럽 좌파의 운동이 의문시되고 새로운 사회 운동에 대한 열망이 증폭하던 시기였습니다. 푸코는 노동운동을 넘어 죄수, 호모섹슈얼 등과 같이 사회의 그늘에 가려져있던 사람들의 인권 운동에 앞장을 서기도 하였고 알제리의 독립운동에도 관여하였지만, 그의 사상은 그 스스로 밝히듯 맑시즘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담론”이라는 개념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 정치적 의미가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1796년 드 트레이시(Destutt de Tracy)라는 프랑스의 한 계몽사상가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형이상학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새롭고 엄격한 과학적 사상”으로 정의하면서 새로운 근대로의 이행기에 있어서 대중을 계몽하기위한 확고한 기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긍정적 개념으로써의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들어와 맑스에 의하여 진정한 과학과 대비되는 “허위의식”으로 비판받았습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한 시대의 집단적인 의식을 규정하고 형성하는 관념 체계인데, 이는 인간 존재의 실제 물질적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는 까닭에 허위의식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권리를 보장하는 체계이다”라고 했을 때, 이는 국민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실제로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크게 자본가와 노동자의 필연적인 대립관계에 의해 계급화되어 있다는 점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국가라는 것은 이러한 계급관계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자본주의 체계를 보장하는 체계로 볼 수 있고, 이러한 까닭에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위와 같은 진술은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데올로기를 맑시즘에서 분리하여 구조주의와 접합함으로써 이데올로기의 개념을 사회비판 전반으로 확장한 것은 프랑스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Louis Althusser; 1918-1990)의 공헌입니다. 먼저 잠깐 구조주의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구조주의 흐름은 흔히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1908-1991)라는 프랑스의 사회인류학자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는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브라질에 체류하면서 내륙의 원주민 부족 사회에 대한 문화 연구를 통해 1955년 자서전적 형태의 <슬픈 열대>라는 저술을 펴냈습니다. 이 책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유럽의 선교사, 식민주의자, 플랜테이션 지주로 대표되는 서구 권력이 “나름대로의 문화적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브라질의 열대 원주민 사회를 파괴하고 상업화했던 과정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슬픈” 열대이지요. 자, 레비스트로스가, 환경결정론적 사고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우월한 서구, 백인들이 미개한 사회를 문명화해야 한다는 식민주의적 사고를 반박하기 위해 택했던 전략은 무엇일까요? 레비스트로스는 “미개한” 원주민 사회도 서구와 못지 않은, 혹은 서구와 공통된 문화적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열대 지역의 미개함하면 우리는 식인 풍습을 쉽게 떠올립니다. 사실 많은 식인 풍습은 헐리웃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잡아다가 꼬챙이에 매달고 장작불위에 구워먹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의 몸의 일부를 부족의 의식적 형태의 하나로 뜯어먹는 행위입니다. 얼핏보면 잔인하고 반문명적이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식인 풍습에서 사실 죽은 조상의 몸의 일부를 먹음으로써 그들의 덕 혹은 힘을 자신들에게 내재화하고자 하거나 죽은 적의 시체의 살점을 먹음으로써 그들의 힘들을 중화시키고자 하는 주술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근대 유럽 세계에서는 정신병자, 범죄자, 혹은 죽은 시체를 두렵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하여 격리, 고립시키지만, 원주민 사회에서는 오히려 이들을 자신들의 신체에 내재화하는 상반된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죠. 자, 이렇게 접근한다면, 서양이든, 동양이든, 브라질 내륙의 원주민 사회든 모든 문화에 공통된 사회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겠죠?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사회적 질서를 “심층구조”라고 하면서 이는 모든 인간 사회에 공통적인 질서로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무의식이란 자연과 문화의 경계를 결정짓는 잣대가 되고, 인류에게 공통된 사회적 무의식의 공통된 기초는 “근친상간 금지”에 있다고 보았죠. 그러나, 그의 근친상간 금지는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이었다기 보다는, 근친상간 금지가 하나의 사회적 규칙으로 작동하면서 어떻게 친족관계와 그에 따른 사회의식이 형성되는가에 주목하였습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데카르트와 같은 사회로부터 동떨어진 객관적, 이성적 “주체”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이었습니다.
다시 알튀세로 되돌아갑시다. 알튀세는 (특히 그의 후기 철학에 있어서) 맑시즘에 갖혀있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을 구조주의라는 방법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하고자 합니다. 그의 철학적인 질문을 쉽게 바꾸면 다음과 같죠. 왜 자본주의 국가에서 모든 노동자들은 집합적인 노동계급의식을 가지지 않는가? 라는 것이죠. 즉, 왜 많은 노동자들은 맑시즘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무장되기 전까지는 유기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과학적 노동계급의식을 가질 수가 없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이제 이데올로기는 알튀세에 의하여 지배계급의 이념으로써 단순히 정치적인 수사나 진술을 통해 나타나는 허위의식으로 진짜 과학적 의식, 즉 맑시즘을 은폐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배 계급의 이념이 일반 대중들의 공통된 무의식을 형성하는 재현(representation) 체계라고 정의됩니다. 우리가 태어나지요? 그런데,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스스로 정의하기 이전에 우리를 둘러싼 사회에 의하여 먼저 내가 누구인지 불려집니다. 이를 알튀세는 호명 혹은 소환 (interpellation)이라고 합니다. 내 개인의 이름 뿐만 아니라, ‘너는 나의 딸이다’, ‘너는 어린이이다’, ‘너는 한국인이다’, ‘너는 소비자이다’, ‘너는 학생이다’ 등으로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이전에 이미 남들이 나를 호명해 주어야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죠. 호명은 나의 주체적 의식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내가 그 호명된 주체로써 무엇을 해야하는지 그 실천까지도 이미 규정하는 것이지요. 이는, 반대로 볼 때 호명이라는 것이 단순히 ‘언어적인 표현’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도록 되어 있는 사회 규칙에 의하여 즉 ‘돈을 주고 물건을 소비하는 실천’,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읽는 실천’, ‘한국말을 사용하는 실천’, ‘학교에 나가 공부를 하는 실천’ 등에 의하여도 발생하게 됩니다. 결국 호명-실천-호명-실천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호명된 주체로써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이는 근대적인 주체, 즉 데카르트적 주체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데카르테에서는 주체가 객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주체는 객체를 인식하는 이성적 주체이지만, 알튀세에 따르면 주체라는 것 자체가 사회구조라는 틀 내에서 이미 객체의 의해 특정한 주체로 규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말씀드리죠. 알튀세의 비판가들은 다음과 같은 난점을 지적합니다. 예를 들어, 남들이 나를 ‘한국인’이라고 호명할 때 왜 나는 나를 한국인이라고 받아들이는가? 혹시, 이러한 질문은 내가 ‘너는 한국인이야’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주체가 이미 선험적으로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질문은 이데올로기에 따라 주체가 타자의 호명에 의해 구성되지만, 역설적으로 타자의 호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와 동일시하게끔 하는 선험적인 주체로서의 내가 사회구조 밖에 이미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지젝(Slavoj Zizek)은 오히려 이러한 모순 자체가 미완성된 알튀세 이데올로기론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나를 한국인이라고 호명하면 나는 단순히 ‘음…나는 한국인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음… 내가 한국인이라면 도대체 나는 다른 한국인들과 무엇이 다르지?’라는 주체적 의식의 잔여분(residue or leftover), 즉 내가 한국인임을 알면서도 동시에 다른 한국인들로부터 구분짓고자 하는 주체적 과정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적 ‘의지’(will) 혹은 ‘신념’ (faith)가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호명이라는 과정에 의해서 주체가 구성이 될 때, 나는 그 호명 자체에 의해 주체로 구성된다기 보다는 그 호명 자체가 완전히 흡수하지 못하는 “잉여의 나 (혹은 나의 잉여분)”에 의하여 주체가 구성된다는 것이죠.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지적입니다. 수업시간에 우리는 흔히 자기 소개를 다음과 같이 하죠. ‘저는 이화여대 사회생활학과 4학년이구요, 지금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어요’라고 자기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그죠?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진짜” 나의 정체성은 이와 같이 타자에 의해 호명된 것에 있다기 보다는 그 뒤에 혹은 앞에 “덧붙인” 언술에 있습니다. 가령, ‘수업 듣게 되어서 좋아요’, ‘학교를 조금 쉬었어요’, ‘어학연수를 다녀왔어요’ 등 혹은 우스개소리를 한다던가 평범함을 짐짓 가장한 독특성과 같이 “특정한” 이화여대 사회생활학과 4학년생으로 말이죠. 즉, ‘나’와 ‘이화여대 사회생활학과 4학년’ 사이에는 이데올로기가 메우지 못하는 인식의 거리가 있다는 것이고, 이 간극이 호명이 내재화되는 과정에서 메워지는 것이 주체화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지젝에 따르면 주체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호명에 따라 내가 수동적으로 “완전히”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호명을 따름과 동시에 그 호명에 의해 완전히 주체화 되지 않는 (혹은 되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의지의 반영이라는 것이죠.
그럼, 담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세 가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데올로기가 “과학” 혹은 “진실”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쌍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이데올로기가 항상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는 경제 혹은 물적 관계에 대하여 항상 이차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알튀세는 이미 주체가 타자에 의해 ‘허위적으로’ 호명된 어떤 ‘산물’이라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특정한 사회의 ‘허위적 구성물인 알튀세 그 자신’이 ‘주체는 타자에 의해 호명된 어떤 산물’이라는 ‘진실’을 알 수 있느냐는 것이죠. 푸코는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모든 진술들 혹은 사상들은 동일한 지위와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즉, 어떤 하나의 진술이 다른 진술이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절대적으로 판가름할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절대적인 비판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본인의 진술을 포함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어떤 한계 내에 조건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메트릭스의 경우 초현실적인 가상세계(우리가 사는 일반 세계)와 비현실적인 현실세계(기계에 의해 인간이 사육되는 세계) 두 개의 세계가 있죠? 그렇지만, ‘비현실적인 현실세계’가 또 다른 가상세계인지는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네오를 포함한 그 누구도 기계에 의해 지배당하는 그 세계를 넘어서보지 못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푸코는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 그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에, 어떤 주체가 자신이 주체라는 것을 가능케 하는 어떤 것,즉 ‘주체성’(subjectivity)에 관심을 가집니다. 가령, 성성(sexuality)라는 것은 “성(sex)의 차이에 따른 특성 혹은 성적인 행위에 있어서의 관심사”로서 생물학적, 유전적, 해부학적, 생리적, 심리적 요인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회적 경험, 다른 사람과의 관계 등 여러 가지 요소들에 의해여 나타나는 독특한 차이들입니다. 18-19세기 유럽이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에는 여러가지 성성들에 (페티쉬즘, 옷갈아입기, 이성 흉내내기 등) 대한 지식의 축적이 이루어졌는데, 유독 ‘동성애’라는 것에 대해서 강한 사회적 거부감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남자-여자의 이분법과 남녀간의 성역할에 따른 분업이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근대 담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 이전에는 ‘동성애’라는 것은 개인들이 지니는 여러가지 성성 가운데에 하나였던 것이, 근대에 오면서 ‘상상된 정상적, 표준적 인간’과 분리된 ‘동성애자’라는 주체로, 그것도 비정상적이고 위험스럽고 더러운 주체로,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아… 재 호모래 (혹은 레즈비언이래)’라고 할 때 우리는 이미 근본적으로 남성의 시선을 갖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서구에서는 아주 예외적이지만, 한국의 경우 여고생 뿐만 아니라 여대생들도 여성들끼리 손잡고 다니는 경우를 흔히 봅니다. 그래서 종종 한국에는 왜 그렇게 레즈비언이 많냐는 오해아닌 오해도 듣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보면 여성들끼리 손잡거나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걷이 당연한 성성의 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한국의 경우 남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정에서 사회에서 “사내자식이…” “남자가…”등의 담론속에서 ‘외로움을 이겨내야 하는 독립성’을 요구받습니다. 까닭에 동성간에 손잡고 다니는 행위 등은 자연스러운 성성으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감시”받고 금지되고 억압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성적 억압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이 됩니다 (남아의 자위행위는 모순적이게도 호모섹슈얼에 대한 사회적 억압이 생산해낸 호모섹슈얼리티의 한 형태죠?). 이와 같이 푸코는 <성의 역사>라는 유명한 저술에서 주체란 ‘주체가 만들어지는 그 과정 자체’라는 입장에서 사회적 담론을 통해 주체성을 해부하는 전략을 택하는 것이죠.
주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면서 푸코는 규율(discipline)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에서 푸코는 유럽의 경우 18세기에 일어난 형벌제도의 변화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근대성에 대한 비판의 관점에서 풀어내고자 합니다. 그에 따르면 18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절대 왕정의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육체에 대해 잔혹한 형벌을 공개적으로 가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1757년 파리 성당의 중앙문에서 공개 처형된 국왕 시해범 다미앙의 경우, 교수대 위에서 전신을 단근질 당한 후, 국왕을 살해했을 때 칼을 잡았던 오른쪽 손은 황산에 태워버리고, 그 다음 그의 사지는 세 필의 말에 의하여 산산이 찢겨 졌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잔인한 형벌은 18세기 말과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더 이상 육체적 고통 자체가 형벌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범죄자에 대한 교화와 감시가 더욱 중요한 것으로 변화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근대성이 형성되면서 나타나는 형벌체제의 인도주의화로 설명되곤 했지만, 푸코는 이러한 인도주의 개혁이 사실은 보다 엄밀하고 정교하게 처벌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사회적 통제와 권력을 일상생활 깊은 곳까지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통제와 감시를 극대화하려는 목적하게 이루어졌음을 주장합니다. 즉, 전근대사회에서는 잔인성은 있었을 망정 개인들 하나 하나에 대한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들이 없었던 반면, 근대에 들어오면서 감옥을 위시하여 (정신)병원, 학교, 군대, 공장, 회사 등 다양한 사회 권력 기구들에서는 인간의 신체를 철저히 규율화함으로써 사회의 “보편적 질서”에 순응하게끔 하여 근대적 주체를 만들어 내고자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근대화의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이었던 목표는 노동하는 인간, 과학과 제도와 국가의 권력에 순응하는 인간 등 근대적인 주체를 생산해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광기와 문명>이라는 저술에서도 푸코는 17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광기와 이성적 인간에 대한 대립이 없었으며, 오히려 광기는 특정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 등으로 해석되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이성적 인간이 보편적, 절대적, 정상적 인간으로 간주되기 시작하면서 이성과 비이성의 분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유럽 전역에 걸쳐서 부랑인, 극빈자, 범죄자, 실업자와 정신 이상자를 함께 수용하는 정신병원이 대규모로 건설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정신병원은 애초 의료기관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행정기관으로써 근대적 사회 질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자들을 격리하여 도덕적인 정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하게 노동을 통해 그들을 규율하고자 했었습니다. 이후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병자는 부랑인, 범죄자들로부터 다른 곳으로 격리되어 수용되는데, 푸코에 따르면 이는 의학적 진보에 따라 치료를 하기 위한 것이었던 게 아니라 그들을 재교육하여 “정상인”의 가치를 내면화하는데에 주안점이 있었다는 점을 분석합니다. 결국, 광기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성의 시대로 대표되는 근대는 ‘보편적 진리의 세계로의 진보’라는 담론을 통하여 개인들의 일상세계 깊은 곳까지 권력을 뿌리내리게 함으로써 사회통제, 질서유지, 규율을 형성하고자 했던 하나의 담론이었다는 것이죠. (법과 도덕, 담론, 상호감시 / 공공공간과 사적공간의 boundary 넘기)
살펴보았던 것처럼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공통점은 둘 다 권력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는 그 뿌리를 맑시즘에 두고 있는 까닭에 정치경제적 관계를 일차적인 것으로 보고, 따라서 자본가 계급 그리고 국가의 ‘위로부터의’ 권력을 강조합니다. 반면, 푸코는 “Power is everywhere”라고 선언했던 것처럼 모든 사회관계에 모든 주체들간의 관계에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즉, 푸코에게서는 “권력”이라는 것은 ‘권력관계’ 자체를 의미하며, 이는 담론을 형성하여 주체를 생산해내는 과정의 “전제 조건”이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권력은 항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집단이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간 혹은 집단들간에 서로 밀고 당기고 투쟁하고 타협하는 대상이 됩니다. 가령, 식민주의는 ‘미개한 흑인’들을 문명화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사상 혹은 과학”에 바탕을 두고 있고, 이는 식민주의자와 식민지인이라는 불균등한 이분법적 주체를 만들었지 않았습니까? 이는 어떻게 보면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담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식민지배를 받던 사람들에게도 당연시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식민사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알제리의 경우 혹은 필리핀의 경우 많은 원주민들이 프랑스나 미국에서 서구의 교육을 받고 “문명화”되어 자국에 옵니다. 그런데, “문명화”된 자신 조차도 모국에서 백인들의 까페, 공원, 레스토랑 등에 출입하지 못하고 불평등하게 지배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겠죠, “왜 우리는 너희가 만든 그 교육, 문화에 의해서 문명화되었는데도 너희와 차별 대우를 받아야 하느냐?”라고 말이죠. 이는 식민주의라는 담론이 식민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거꾸로 피식민지인들이 자신들의 권리와 평등을 찾고 식민주의 자체를 해체할 수 있는 중요한 사상적 도구가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결국, 푸코가 “Where there is power there is resistance”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담론이란 지배와 저항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습니다. ‘성역할’이라는 담론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겠죠? 아이는 여성에게서 태어나고 따라서 여성은 육아를 담당해야 한다는 담론을 통해서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공공/사적 공간으로 이분화되었었지만, 요즘처럼 아이를 갖지 않는 가정 혹은 결혼관계를 맺지 않고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이 많아지는 경우 “아이도 없이 남성과 똑같은 노동강도와 시간으로 일하는데 왜 임금이 낮은가?”라고 반문하지 않습니까? 이는 여성이 남성중심으로 형성된 담론을 통하여 그 남성중심주의 자체에 도전하는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종적인 예를 한가지만 더 들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백인, 흑인, 황인 뿐만 아니라 좀 더 세부적인 인종 집단의 구분은 근대 유럽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예전에 배웠지만, 라틴 아메리카 혼혈인의 경우 뮬래토는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 메스티조는 백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 사이, 그리고 잠보는 흑인 아버지와 인디언 어머니 사이의 자식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혹은 인디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명칭은 있었을까요? 대답은 “노”입니다. 이는 정신분석학과도 관련이 되어 있지만, 백인은 흑인을 덜 발달된 인간을 의미하는 “아들”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미국의 경우 많은 흑인 노예들이 그 남자 주인의 성을 따랐다는 것이 그 한 예가 되겠죠? 따라서,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섹스를 한다는 것은 프로이드주의에서 보면 근친상간이요 아버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혼혈 인종에 대한 명칭 자체는 현실의 투명한 재현이라기 보다는 위와 같은 사회적 억압을 통해 형성된 담론적 구성물이 되는 것이죠. 오늘날 많은 헐리웃 영화들에서도 백인남성과 흑인 혹은 동양 여성의 정사신은 많지만, 흑인 혹은 동양 남성과 백인 여성의 정사신은 거의 없죠?
마지막으로 실천의 문제를 봅시다. 이데올로기는 ‘현실’과 ‘재현’, 즉, ‘사실의 세계’와 ‘허위의 세계’에 대한 구분에 근거하고 있지만, 담론에서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실-재현의 세계에 대한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흔이 우리들은 생물학적인 특성과 전혀 관계가 없으면서도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운전을 잘한다”고 듣고 또 그렇게 믿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남성의 공간지각력, 판단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과학적인 이야기로 이를 정당화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남성의 두뇌가 목표지향적으로 되어 있어서 현재 자체에 민감한 여성들보다 남성의 교통사고 확률이 높다고도 합니다. 즉,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진술들 자체도 담론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로 운전하다보면 진짜 여성들이 더 미숙한 것 같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운전을 잘한다”고 남성, 여성 모두 믿고 있기 때문에,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운전할 기회가 더욱 많고 경험이 많은 것이죠. 여성들은 이러한 믿음때문에 운전할때 남성들보다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이처럼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운전을 잘한다”라는 담론, 그리고 이 담론에 대한 믿음이 실질적으로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운전을 잘 하는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여성들과 남성들을 통계적으로 조사해서 어느 쪽이 운전을 잘 하는가를 조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담론화되어 있는 여성과 남성의 운전습관 및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실제로 참이 무엇인지 대답하기 힘들다는 것이죠. 따라서, 푸코는 “there is no prediscursive providence which disposes the world in our favour.”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현상을 이해할 때 담론은 이해의 “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다 넓은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근대 과학의 시작은 대개 “분류학”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분하는데, 사실과도 같은 이와 같은 사계절의 구분은 실제로 사계절이 뚜렷한 유럽의 입장에서 계절을 구분하여 지구 보편으로 확장시킨 담론이 되는 것이죠. 생물학에서, 특히 린네의 식물 분류학에서, 분류 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종-속-과-목-강-문-계가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실제로 식물-동물 종의 구분은 이미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원주민들에 의해서도 음식, 의학적 가치, 생태적 특성, 상징 특성 등에 의하여 이미 그 분류 체계가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린네의 식물 분류학은 이와 같은 지역의 문화와 깊게 연관되어 있는 식물들의 이름을 근원적으로 바꾸었습니다. 특정 식물의 명칭이 바뀌고, 그 바뀐 이름이 보편화된다는 것은, 단순의 명칭의 문제를 떠나 원주민에 토착적인 지식 체계와 문화를 없에면서 유럽의 지식으로 그 사회를 재구성하고 뿌리내리게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많은 식민지들은 ‘지식이 발달하지 않은’ 사회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죠.
요컨대, 담론을 분석한다는 것은 특정한 진술들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사회의 권력관계와 구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작업입니다. 이는 지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샤인(Richard Schein)이라는 한 지리학자는 “경관이란 물질화된 담론”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경관이란 자연-인간의 상호관계의 결과”라는 담론은 경관 분석의 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경관에 깃들여져 있는 사회적 권력관계를 은폐하는 구실도 했었던 것이죠. 담론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특정한 장소, 기념비, 건축물, 마을, 지역, 국가 등에 깃들여져 있는 권력 관계를 분석할 수 있고, 또 그러한 권력 관계가 어떻게 독특한 경관을 형성했는지 또 특정한 공간 관계가 어떠한 사회 담론을 형성했는지는 오늘날 중요한 사회지리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2005. 9. 26. 박경환
|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trackback/10/135
-
haylee 2008.10.29 07:37 [72.137.240.25]
-
안녕하세요교수님
저는 캐나다에서 공부하는 고등학생입니다
discourse 잘 읽고갑니당~
답글쓰기
-
-
주인장 2008.10.29 08:54 [168.131.49.212]
-
안녕하세요? 아직 고등학생인데 담론과 지리학에 관심 있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교포나 유학생이라면 hybrid identity라는 주제가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좋은 실마리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본인의 꿈을 잘 가꾸어 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메시지 남겨줘서 고마워요.
답글쓰기
-
-
Bean Noh 2009.02.26 12:12 [163.152.128.240]
-
안녕하세요. 최근 사회지리학, 특히 노동지리학 쪽으로 관심을 갖게 된 대학원 생입니다. 쓰신 글 너무나 재밌게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답글쓰기
-
-
philgeog 2009.03.01 02:04
-
도움되었다니 감사합니다. 노동지리라면 Andrew Herod의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답글쓰기
-
-
Bean Noh 2009.04.04 20:14 [165.132.78.137]
-
앗 제가 오랜만에 들어와서 이제 답글 달아주신 것을 확인했네요. 감사합니다. 꼭 찾아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쓰기
-
-
주인장 2009.04.07 12:48 [168.131.49.212]
-
네~ ^^
답글쓰기
-
-
한혜경 2009.04.16 21:52 [59.23.210.208]
-
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경북대학교 지리학과 재학중인 학생입니다 ^^
경제 지리를 배우고 있는데 우연히 블로그를 알게 되어서 들어왔더니
제가 배우고 있는 수업에 무척 많은 도움이 됬어요
자료 잘 읽고 갑니다 ^^
자주 들릴게요
혹시 전남대 교류학생으로 가게된다면
교수님 수업 꼭 듣고 싶네요 ^^
답글쓰기
-
-
주인장 2009.04.16 22:24 [211.176.120.139]
-
반가워요. 경북대 지리학과에 계신 훌륭한 교수님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니 마냥 부럽습니다.^^ 학과와 전공에 자부심을 갖고 지리를 좋아하시길 바랍니다. 뭔가를 좋아하게 되면 훌륭한 결과는 자동적으로 뒤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교류학생으로 오게되면 저 뿐만 아니라 우리 학생들 모두 열렬히 환영해 줄 겁니다. 화이팅!!!
답글쓰기
-
|
|
|
|
|
|
|
|
|
|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본대면 “모더니즘-이후” 정도가 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이후”의 정도가 저마다 틀리겠지요. “포스트”라는 용어 자체가 앞의 것과는 다르다는 “단절”을 의미하면서도 앞의 것의 다음이라는 “연결”을 동시에 의미하는 까닭에, 사람들이 저마다 이 단절과 연결의 사이의 직선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점을 찍을 때 저마다 틀릴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 자체에 대한 거부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이 어떤 카테고리안에 억압되어 있는 다양성, 혹은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이던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이 TV에 처음 데뷔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한 방송국의 TV 연예 프로그램이었는데, 프로그램의 제일 마지막에 신인가수를 초대하여 노래를 들은 후 4명의 심사위원이 점수를 매기면서 평을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난 알아요”라는 곡을 부르면서 7.8이라는 최악의 점수와 더불어 탐탁치 못한 심사자들의 평을 들었었죠. “저는 노래를 들을 때 우선 가사가 문법적으로 맞는지를 봅니다”라고 하던 어떤 심사자, “안무는 남성적인데 멜로디는 여성적이다”며 노래를 폄하했던 어떤 작곡가도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그 방송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중반까지 가요계를 평정하며, 단순한 아이돌 스타가 아니라 “저항”, “권력에의 도전”, “문화혁명”과 같은 코드로써 기호화되어 전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삐딱함, 일탈, 파격, 부조화, 도전, 파괴, 반항 등의 코드는 너무나 일상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뭔가 “부조화스런” 음악은 일렬로 “점수”을 매겨가면서 멜로디와 안무가 “조화”드러운지, 가사가 “문법”적으로 맞는지를 보는 권위 및 권위적인 시선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모던한 의미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10점 만점짜리 음악이라는 어떤 규준에 대해 심사위원의 권위에 의해 그 아래 어디 쯤에 위치되어야만 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사실 현실은 그 음악을 “다름”, “파격” 혹은 “새로움”으로 받아들이면서 서태지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던 것이죠.
독재군사정권이 뚜렷했던 90년대 초 이전에는 사회의 민주화가 워낙 시급했던 터라 “적”과 “우리” 라는 이분법이 뚜렸했고 따라서 “운동”으로 일컬어지던 대학생의 정치참여는 그래야만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학교에 입학하였던 시기는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던 시기였던터라 신입생들은 운동을 하느냐 혹은 마느냐의 고민을 깊이 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1992년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되고 독일도 통일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의심받고, 혹은 거부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에 정말 사회주의 운동이 필요한지, 어떤 사회운동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고 운동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어떻게 보면 운동권이 되기 싫은 변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한 선배의 말이 기억이 납니다. “운동이 뭔지를 알려면 운동을 해보아야 안다”는 것이었죠. 그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적 위치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꾸어 물어볼께요.남성의 몸으로 여성이 사회적으로 겪는 다양한 차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백인의 몸으로 흑인이 겪는 인종차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혹은, 보다 근본적으로 내가 진정 타인을 100%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해 혹은 지식을 이야기하는 순간 어떤 “객관적”, “절대적”, “과학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를 선험적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객관성 혹은 절대성은 누가 판단하고 누가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있을까요? 이해 혹은 지식이라는 지극히 객관적인 용어 자체도, 구체적으로보면 이해하는, 판단하는 주체가 누구냐라는 차이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은 이와 같은 객관성, 절대성, 규준성, 과학성 등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죠. 모더니즘에 철학적 기반이되는 근대철학은, 중세 말기에 등장한 프랑스의 철학자인 데카르트(1596-1650)에서 출발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세는 신이 지배하는, 아니 보다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신의 말씀을 평민들에게 전달하여 주는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the Word already existed. He was with God, and he was God)”. 말씀(The Word)이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처럼, 말씀은 절대적인 진리요 인간이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위로부터의 권력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성성으로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중세 뿐만 아니라 근대 철학을 관통하는 서구의 “말씀 중심주의”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 데카르트는 신을 통하지 않고서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신의 말씀인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세계는 당시 지리상의 발견 등을 통하여 기존의 성경적 지식에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경험적 지식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살던 당시는 갈리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았던 시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는 신학적 굴레를 벗어나고 절대적 이성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생산하기 위하여 신을 끌어들였다고도 할 수 있겠죠. 중세는 모든 진리가 신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까닭에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직 즉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전략적인) 철학적 질문은 “신의 말씀에 의존(refer)하지 않고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진리를 내가 알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라고 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어찌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것 같으나 이와 같은 혁명적인 사고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에게 묻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기 자명한 진리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수학, 기하학, 자연과학적인 “객관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합니다. 모더니즘은 이와 같은 근대철학에서 출발합니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개발을 통하여 즉, 과학적인 사고와 지식의 축적을 통하여 인간이 신의 진리에 종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더니즘은 하버마스(W. Harbermas)가 “모더니티 프로젝트”라고도 명명하였던 18세기 동안에 몽테스키외, 볼테르, 그리고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루소 등과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힘을 업고 전면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계몽”이라는 말 자체는 종교적 권력의 어두움에 묻혀있는 세계를 과학적 이성적 세계로 열어젖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 권력으로부터 탈피하여 절대왕정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던 왕권은 이와 같은 계몽사상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어떻게 보면 유럽의 식민주의는 이와 같은 내적 종교적 권력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전략적인 것으로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연에 대한 이성적 사고와 과학적 “지배”를 통하여, 인간을 미신의 세계에서 해방하여 굶주림,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공간과 시간을 보는 관점이 혁명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상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공간적인 인식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육체가 땅에 발붙여 살아온 사회속에서 생겨나는 문화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발달하게 되면서 원근법, 투시도법 등과 같이 어떤 공간을 객관적, 과학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지구를 칼로 사과조각을 자르 듯 위선과 경선으로 나누고 영국 그리니치를 본초 자오선의 중심으로 삼아 수학적인 기호를 부여하는 것이 대표적이겠죠. 공간계획도 격자형, 대칭형으로 조성함으로써 공간적 질서감을 주는 것도 이에 해당되겠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간적 경험은 자신의 육체가 속한 자연 및 사회의 변동 흐름에 따라 달리 느끼는 것이고, 시간이 가지는 의미도 사회의 템포에 따라 다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을 12개월, 한달을 30일, 시간을 24시간으로 쪼갤 뿐만 아니라 분, 초의 단위 까지도 쪼개면서,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을 갖게 될 정도로 선형적 시간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공간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미학을 생각해보면서 우리의 사회의 다양한 모더니즘을 읽어 봅시다. 우리는 “바빠서 힘들다”고 하면서도 왠지 바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죠? 게으른 사람을 보면 뭔가 “부족한” 혹은 “개선되어야 할” 사람으로 비쳐지지는 않던가요? 그러나, 버트란드 레셀이 근대 형성시기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에서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이 바쁨에 대한 미학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인간의 소외 및 경제적 불균등을 양산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모더니티라는 것은 결국 유럽의 근대 권력층, 특히 왕정, 근대철학자, 과학자집단 및 부르조아지 계급이 서로의 이해관계속에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프로젝트”라는 것이죠. 오늘날은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그것이 얼마나 특수한 상황에서 형성된 특수한 사회문화적 작품이었던가를 모르지만, 그 시작은 굉장히 시간, 공간 특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창조적 파괴”라고도 일컬어지는 근대화의 흐름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생활집단 및 그 공간을 “유토피아”를 향한 절대적 믿음하에 통일적이고 질서정연한 사회 및 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이었지요. 이 속에서 모더니즘은 유럽의 낭만주의 사조를 생산하기도 합니다. 루소는 데카르트의 언명을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고 치환함으로써 모더니즘으로의 전화를 과학화의 과정 뿐만 아니라 미학적, 예술적 차원으로 변화시킵니다. “개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상된 개념”이지 개인 속에는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더니즘은 기존적으로 미학적인 주체로서의 예술가 자신을 하나의 일반적인 개인으로 놓고 자신의 주체적 의식, 감각, 감성, 의미 및 사회와의 관계 등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모더니즘은 기계화, 산업화, 도시화, 시간과 공간의 객관화, 기술적 변화, 대중문화화, 등질화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 변화속에서, 사라져가는 전통사회, 공동체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하거나 지식인 집단의 전위(아방가르드)로서 예술가들이 가지는 영원불변한 것에 대한 지향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모더니즘 작품은 이러한 까닭에 대부분 대중성과 깊이 유리되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면서도, 어떤 유토피아적 영원성, 불변성을 개인의 심미주의적 태도를 통해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모더니즘은 1차, 2차 세계 대전 이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성 및 그에 근거하는 과학적 진보가 유토피아를 형성하기는 커녕 수 백만명의 살상과 사회의 파괴를 야기했기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했던 유토피아는 흑인 및 황인종의 세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축적된 부에 기반한 것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백인”들만의 상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들이 이성 및 과학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사회의 진보와 유토피아를 이야기했던 18, 19세기에, 이미 수백, 천만의 비백인들이 무참히 살상되었고 그들의 사회와 문화가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죠. 결국, 모더니즘은 개인주의, 이성에 대한 믿음, 사회진보에 대한 의지에서 출발하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철저히 집단적인 권력, 비성적인 정치,군사적 권력, 그리고 다른 사회에 대한 침략에 기반한 괴물같은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기 위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다른 개발도상국가의 “파괴”는 쉽게 생각할 여유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죠. 어쨌든, 세계대전 이후 이성에 대한 직접적인 회의와 비판을 드러내는 실존주의, 현상학적 흐름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만, 모더니즘은 “영웅성”으로 대표되는 전간기 (세계대전 이전) 모더니즘과 달리 전쟁이후에는 특히 건축 등의 분야에서 합리주의적, 기술중심주의적, 표준적은 성격을 띠며 “보편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후간기 모더니즘은 결국 1968년을 전후한 신좌파, 반모더니스트 운동들에 의하여 비판받게 되고, 이후 포스트모던적 예술양식으로 얼굴을 바꾸게 되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 프로젝트가 상상해온 개념들 즉, “인간의 합리적 이성”, “보편적 인간”, “인간의 진보와 그 역사성”, “절대적인 지식”, “객관성” 등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둡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여러 차원에 접근할 수 있겠는데, “차이”를 드러내는 현상 혹은 철학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서구의 “말씀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근본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서구 근대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구성을 통하여 신으로부터 인간을 독립시키려는 데카르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철학”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어렵고,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많은 개념들은 사실 이와 같은 “언어”라고 하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하여 인간이 이성을 통하여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으로써 인간 사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시공간적 맥락하에 형성된 사회와 문화의 부산물입니다. 우리가 사전에서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본다고 가정합시다. 사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차이는 “같음의 반대. 똑같지 않음” (영어사전의 경우) 등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동의어와 반의어는 사전상에서 어떤 개념을 가장 쉽고도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동일성”이라는 용어를 찾으면 어떨까요? “차이가 없음”으로 정의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어떤 개념은 서로가 서로를 정의하고 있는 까닭에 항상 그 의미가 다른 개념에 대한 참조(reference)를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이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죠. 여성은 남성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그 의미가 획득되지 않습니다. 낮이라는 것은 밤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정의가 되는 것이죠. 서양이라는 것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동양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것이 언술이 의심할 수 없는 명제라고 하였는데, 누가 “나”라는 것은 뭐지? 문장속의 “나”는 글을 쓰는 “나”와 똑같은가?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항상 똑같은가?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무슨 생각을 한다는 거지? 등으로 물을 수 있을 터입니다. 결국,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라는 것, 즉 언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획득하며 그 의미라는 것도 항상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천재적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언어게임 그 자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어게임? 즉, 우리말로 하면 말장난이죠. 정체성(identity)이 오늘날 주요 사회이론의 핵심적인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러한 언어적 배경에 있습니다. “Identity”는 그 사전적 의미에서 두 개의 대립적인 의미를 동시에 의미합니다. 하나는 “독자성, 개성”이라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일함, 동일시 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정체성이란 다른 실체와의 절대적 “동일성”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의 독특성, 유일무이성, 차이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어떤 사물, 개인, 집단, 국가, 사회, 문화의 정체성은 다른 것들과의 비교를 통해 인식되는 동일함과 차이의 논리에 따라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령 “개”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개라는 것이 고양이와 “다른” 어떤 속성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개라고 인식하지만, 반대로 “개”라는 카테고리에는 진돗개, 삽살개, 푸들 등 다양한 하위 개념들의 차이를 무시한 채 일반화하여 “개”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언어를 사용할 때에는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어떤 카테고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혹은 억압되어 있는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어에 배여있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은 한국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미국인을 의미하고 어떤 한국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자는 일반적인 미국인, 일반적인 한국인이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미국인, 일반적인 한국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여성? 남성? 어린 아이들? 흑인? 백인? 등등 우리는 실제로 “일반적인 미국인”을 가리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거대서사(grand narratives)는 그 속에 드러나지 않는 차이를 항상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과학적인 진술과 일상적인 언어 행위 모두를 아우르는 언술에 내재되어 있는 권력은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말장난”은 너무나 보편화되고 일상화되어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인 차이에 바탕을 둔 당연하고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남성과 여성의 구분 및 그를 둘러싼 많은 인식은 “생물학적”인 차이에에 바탕을 두는 대신 “사회적” 차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름에 의하여 서로 참조되고 또 정의되지만, 실제 언어생활에서 우리가 “남자는 다 늑대야”, “여자애들은 소심하고 잘 삐져” 등 이야기할 때에는 전혀 이와 같은 생물학적 참조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결국,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죠, 사회적인 까닭에 사회권력관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어서, 모든 언어관계는 권력관계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되는 것입니다. “담론”을 처음 이야기했던 푸코는 이것을 거꾸로 이야기하지요, “모든 권력관계는 언어관계”라고 말이죠.
자,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지리학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상(혹은 현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태도(주의)”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중대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개괄하는데에 유용하기때문에 일단 여기서는 대상과 태도로서 구분하여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포스트모던지리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태도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그 토대에 관심을 둡니다. 보통, 유연적 축적, 포스트포디즘 등으로 대변되는 축적 체제 변화에의 관심이 그 하나가 되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부류의 연구들은 이와 같은 경제체제의 변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포스트모던한 사회, 공간구조, 경관, 도시 등을 형성하게 되는지에 또한 관심을 둡니다.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라는 저술에서 공간이 생산되는 세 가치 차원의 틀, 즉 “공간적 실천”, “공간적 재현”, 그리고 “재현된 공간”을 통하여 이러한 공간변화과정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IT 기업들은 기술혁신을 일으키는 정보, 지식의 네트워크 형성이 중요한 까닭에 본사나 연구개발기능 등은 도시 내부에서 입지하여 다른 기업들과 산업지역을 형성하지만, 실제 IT 제품을 제조하는 것은 노동비와 지대 등 고정비용이 저렴한 도시 외부에 입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간적 실천). 공학, 건축, 설계, 지리(경제지리) 등 공간적 재현을 다루는 학문에서는 도시 내에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벤처기업단지 혹은 첨단산업지구를 형성할 수 있을까를 “과학적 지식”을 가장한 공간 담론을 생산하지요. 가령, 네트워크가 잘 발달되려면 정보, 통신 하부구조 뿐만 아니라 적절한 휴식공간도 필요하고, 정부기관이 주변에 입지해서 기업들을 지원해야 하고, 고급 인력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에 대학교나 연구소가 있어야 한며 심지어 빌딩의 내부구조나 외관도 그에 걸맞게 효율적이면서도 첨단성을 상징하는 독특한 건축이어야 한다는 등의 담론을 생산합니다 (공간의 재현). 마지막으로는, 이와 같은 재현이 공간화되어 나타나는 양식이 될 터인데, 도시 내에서 기존의 다운타운 근처에 기업본사가 입지한 것과는 달리 도시의 여러 곳에 새로운 산업중심지구가 형성되고, 건물의 양식도 기존의 길쭉한 사각형의 모습이 아닌 전면 유리로 되어있으면서 꼭대기가 길쭉하게 변형되거나 불규칙한 건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건물들 사이의 한 가운데에 스타벅스같은 까페나 공원이 나타나기도 하겠죠(재현된 공간). 르페브르에 의해 제시된 이러한 공간의 변증법은, 빈부격차의 증대, 파트타임 노동의 증가, 기업의 수직적 분화, 기업의 수평적 협력확대, 다품종소량생산, 제품주기의 단축, 노동시장의 다변화, 지방의 분권화, 작은 정부, JIT 생산방식, 출퇴근의 유연화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유연화의 결과 및 특색이 가져온 공간적인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모더니즘은 선형적 시간의 흐름에 기반한 유토피아적 사고에 의하여 시간이 우선적이었고 따라서 전통적-모던이전의 공간을 모던화하려는 욕망이 있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양식에서는 오히려 공간성을 중요시하여 시(공)간적으로 서로 상이한 것을 특수한 목표하에 한 공간안에서 재현하는 “꼴라쥬”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더욱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이는 특정 공간의 장소감을 새롭게 재현함으로써 소비자와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전략의 일환인 경우가 많지요. 더군다나 제품의 수명주기뿐만 아니라 공간적 수명주기도 빨라져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공간감대신 인위적으로 빨리 재편되는 공간의 재현도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제머슨(Jameson)이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의도된 깊이 없음”이라 하겠죠? 하비(Harvey)는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도시경관의 분절화, 파편화, 그리고 탈맥락화등은 실물자본주의와 분리된 금융자본주의가 과잉축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감행하는 “공간적 돌파”의 일환의 결과라고 보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차원은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지리에 접근하는 것이겠는데, 이는 푸코(담론-권력과 지식의 관계), 데리다(해체-무의미의 의미), 부르디외(취향, 상징/문화자본), 리오타르(언어게임), 보드리야르(시뮬레이션/초현실성), 들뢰즈/가타리(욕망) 등 일련의 사회이론(social theory)에 대한 관심과 참조를 통하여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그에 억압되어 있는 차이가 공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데에 관심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지리학에서는 “주변성(marginality)”라는 용어가 중요하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한 언어게임의 기반이 되는 “이분법”은 수평적인 관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불균등학 권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봅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에는 단지 차이들만이 있을 뿐이며, 어떠한 긍정성도 그 내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데리다는 “차연(차이와 연기의 혼합)”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일상 언어를 포함한 철학적 용어들은 그 의미가 고착되어 있는 것이 이분법적 관계에 의하여 대립되는 것과의 비교를 통해 항상 의미가 연기가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남성-여성의 이분법은 그 자체가 수평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불균등한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죠. 남성은 자신이 정의되기 위해서 항상 그 거울로써 “여성”을 필요로 합니다. 이 때 여성의 의미는 남성의 의미와 동시에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과 “무엇이 어찌어찌 다르다(틀리다)-부정"이라고 자기 인식을 한 후에 비로소 그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이죠. 앞의 요한복은 1장을 잘 보세요. 말씀(Word)은 그녀(she)가 아니고 그(he)입니다. 차이에 관계에서 하나는 권력을 지닌 주체의 입장에 서고 하나는 타자의 입장에 서게 되며, 주체의 자기 인식은 항상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죠. 따라서 타자는 항상 주체가 지니는 속성들 중 무엇을 결핍(부족)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남성-비남성이 되는 것이죠. 마치, 백인-유색인의 이분법처럼 말이죠. 거꾸로, 여성-비여성 혹은 아시아인-비아시아인 하면 어떻습니까? 적절한 이분법이 아닌 것 같죠? 태도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와 같이 사회에 억압되어 있는 타자들 및 타자성(여성/여성성, 홈리스, 호모/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소수민족, 장애인, 비만인, 자연/생태, 농촌, 슬럼, 유곽-집창촌, 이슬람, 더러움의 공간, 귀신의 공간/유령의 집, 무덤, 질병의 공간, 교도소, 정신병원 등)의 형성에 개입되는 권력의 본질과 그 사회공간적인 과정에 초점을 두어, 모더니티 프로젝트가 보편화된 이후 우리 사회를 생산해 온 주류 혹은 권력(이 때의 권력은 정치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상적 권력관계를 의미)을 해체, 비판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이분법적 언어의 권력 구조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형성한 사회공간적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상(객체적 입장)과 태도(주체적 입장)로서 구분하였는데 실제로 이 둘의 구분은 모호하기도 하고 상호 구성을 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무엇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 그 무엇이 되어보아야 안다”는 말을 상기할 때에, 어떤 대상을 주체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주체가 객관적인 위치에 서있지 않은 까닭에 대상에 대한 왜곡 혹은 이해의 부족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특정한 사회, 문화, 그리고 언어게임속에서 살아온 나와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보다 직접적으로, 제가 이제까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렇다면 제가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이것을 이야기 한것인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는지 내가 혹은 그 누가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글속의 “나”와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여러분과 읽는 “나”가 모두 동일한 나일까요? 포스트모더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누구나 주체이기도 하고 객체이기 때문이죠. 영화 메트릭스에서 항상 주인공 네오가 선택-운명 두 가지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나는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항상 그 선택은 객체로서 나에게 이미 주어진(조건지어진) 것들 사이에서의 선택이기도 하지요.
2005. 10. 26. 박경환
|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trackback/10/133
-
임치홍 2008.12.16 20:14 [58.141.104.117]
-
교수님, 건강하시죠? 우연히 블로그에 오게된 이후에 종종 들러 좋은 글 많이 읽고 있습니다. 예전에 쓰시던 이메일 계속 쓰시나요?
답글쓰기
-
-
주인장 2008.12.16 22:42 [168.131.49.212]
-
그래 잘 지내고 있냐? 지난번에 다시 들르랬더니 그냥 갔구나. 내년에 보자.
답글쓰기
-
|
|
|
|
|
|
|
|
|
|
식민주의(colonialism)이란 무엇일까요? 식민주의라는 말은 농장(farm) 혹은 정주(settlement)를 뜻하는 로마어 ‘colonia’에서 비롯되었는데,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식민주의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A settlement in a new country ... a body of people who settle in a new locality, forming a community subject to or connected with their parent state; the community so formed, consisting of the original settlers and their descendants and successors, as long as the connection with the parent state is kept up.
위의 사전적인 정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민주의와 뉘앙스가 많이 틀린데, 이는 식민지본국 사람들이 정주하기 전부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배’와 ‘저항’의 관계도 들어가 있지 않죠. 또한 “새로운” locality라고 하였는데 이는 낡은 것 혹은 원래 있던 것에 대한 파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또한,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 필연적인 정치적, 군사적 불평등 관계 등은 위의 사전적인 정의에 배제되어 있습니다. 사실, 상당한 수의 유럽 및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colonialism"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시각만큼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 영역의 확장, 미개한 사회/지역의 개척, 황무지나 미개척지로의 도전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식민주의는 16세기 이후의 유럽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2세기에는 중앙아시아와 대서양 연안까지 확장되었고, 칭기스 칸은 13세기 몽고대륙에서 뻗어나가 중국,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동과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또한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 문명 또한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멕시코를 포함한 많은 부족국가를 지배하기도 하였죠. 그렇다면 왜 유럽의 식민주의도 오랜 식민주의 역사가운데에 하나 아닐까요? 유럽의 식민주의와 다른 식민주의를 구별하는 뚜렷한 차이가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 가운데에 하나를 맑시즘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유럽의 식민주의는 서유럽의 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났는데, 이는 다른 식민주의 역사와 달리 단순히 피지배사회의 부와 자원을 약탈하는 것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피지배 사회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버림으로써 식민지본국과 식민지간에 체계적인 불균등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흐름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식민지-노동과 raw material 공급 및 시장, 식민지본국-설탕 및 직물 제조업). 즉, 식민주의가 없었다면 유럽의 자본주의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제국주의(imperialism)는 무엇일까요? 제국주의는 원래 ‘명령’ 혹은 ‘절대적 권력’의 의미에 기원하는데, 사전적인 정의로는 ‘황제(emperor)의 전제주의적 지배’로 되어있습니다. 옛날의 로마제국부터 오스만-투르크 제국, 그리고 가깝게는 대한제국이 그러한 예가 되겠지요. 그러나 20세기 초 맑시즘을 발전시킨 레닌과 카우츠키에 의해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였습니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모순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성장’ 즉, 끊임없는 자본주의적 공간을 생산함으로써 존립할 수 있는 체제인데,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자본의 축적이 극도에 도달하게 되면 제한된 공감으로 말미암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 간에 피할 수 없는 충돌, 즉 ‘제국주의전쟁’이 발생하게 되어 자본주의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죠. 이와 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공간적인 관점에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제국 본국에 뿌리를 두어 공간적 지배와 통제를 파생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식민주의는 그 결과로써 식민지에서 나타나는 지배와 통제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제국주의는 오늘날의 세계화라는 제국주의(see Hardt and Negri's Empire) 혹은 미국의 제국주의에서 볼 수 있듯 공식적인 식민지 관계가 없이도 기능할 수 있지만, 식민주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언제나 “post”라는 말이 함축하듯 후기식민주의는 형식적 식민주의를 “벗어났다”는 의미와 “이후”라는 의미 둘 다 있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백인 미국인들의 경우 식민주의라고 하면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기를 떠올리는데, 이러한 경우는 벗어났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죠. 뉴질랜드나 호주의 경우도 비슷하겠죠? 그러나 미국 원주민이었던 어메리칸 인디언들이나 뉴질랜드 혹은 호주의 원주민의 경우는 어떨까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식민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까요? 오히려 이들에게는 유럽인의 사고방식과 가치를 지닌 백인들의 계속되는 지배라는 의미에서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즉, 식민주의에 의해 모든 식민지 거주민들이 동일한 억압, 착취를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 농민, 여성 계층 혹은 유색인종과 같은 주변적 집단들에 이러한 억압이 집중되는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주의에 토대를 둔 많은 식민지 이후의 독립국가들 경우 지배자의 위치만 달라질 뿐 실질적인 지배를 받는 집단들에게는 ‘식민지이후’에 있어서 식민주의와의 연속성이 더욱 강할 수도 있겠죠. 즉, 후기식민주의라는 것은 식민지본국-식민지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관계(이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 내에 내재되어 있는 혹은 그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외연적 맥락 둘 다와 관련된 다양한 후기식민주의적 현상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후기식민주의적인 사회가 식민주의 이전 시기에 대해 가지는 단절성입니다. 즉, 한 번 식민주의가 사회문화적으로 식민지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면, 식민주의가 끝나더라도 그 사회를 식민주의 시기 이전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죠. 즉, 한국의 경우 일본의 식민주의시기에 뼈대가 형성된 철도망과 항구도시에 의한 기본적 경제공간구조, 교육제도, 주소체계, 지식체계 등을 완전히 새롭게 재편할 수 있을까요? 보다 넓은 차원에서는 일본 식민주의에 담긴 서구중심주의적 자본주의 문화와 가치를 그 뿌리부터 뽑아내고 전혀 새로운 후기식민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체제 자체도 식민주의의 산물이 아닐까요? 유명한 페미니스트 후기식민주의 문화 비평가인 Gayatri Spivak 은 이와 같은 ‘pre-colonial’한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것을 복구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제국주의에 갖힌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pre-colonial’한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항상 후기/식민주의의 역사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거나 상상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죠. 요컨대, “postcolonial”이라는 용어는 어떤 사회에 대한 ‘평가(eval uate)’나 ‘판단’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어떤 사회를 ‘기술하는(describe)’ 태도 혹은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지난 500여 년 동안 지구상 대륙의 85% 이상이 유럽/서구 백인 사회에 의해 지배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배가 오늘날 비공식적인 양식으로 보편화, 일반화된 세계 현실을 볼 때, 후기식민주의는 특정 국가, 지역, 사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과 같이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창(window)’이 되는 것이죠. 후기식민주의 연구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탈식민지화(decolonization)의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써 어떻게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혹은 극복이 식민주의적 인종, 문화, 언어, 계급 관계에 도전하거나 이를 변형시키는가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서구의 탈식민주의 연구를 중심으로 어떻게 주체와 문화가 탈/식민지화의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혹은 담론을 통해 생산되는가라는 보다 구조주의적인 차원의 문제의식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두 문제의식은 보통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차원에서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습니다. 먼저 이데올로기의 차원을 봅시다. 1854년 영국이 인도에서 발표했던 교육조치는 “영국식 교육이 인도 원주민들에게 노동과 자본에 의한 놀라운 결과를 가르칠 것이고 그들이 우리(영국)를 모방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에 눈을 뜨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도의 개혁가였던 Raja Roy는 이러한 교육이 인도를 “암흑”으로부터 구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는 지배자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들이 스스로가 열등하고 미개한 주체들이라는 자기인식을 하게끔 합니다. 또한, 이러한 식민이데올로기는 식민지본국에서 white working class들을 길들이는 방식이 되기도 하였죠. 이과 같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자 인간을 노동-자본의 관계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 근대화이자 발전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의미에서 세재르(Cesaire)라는 아프리카의 흑인 운동가는 사람은 “식민화=물화(thing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라는 리얼리티를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격자(인종이나 계급 등)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객체화하는 것이죠. 그리고 유럽과 그 타자(other)의 관계는 자본주의(개인주의적)와 비자본주의(공동체적, 협력적)의 차이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Franz Fanon이라는 그의 유명한 저술 “Black skin, white masks"라는 저술에서 식민지인들은 단순히 유럽에 의한 노동착취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유한 문화의 사망과 매장에 의해 형성된 열등성으로 가득찬 영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심훈의 상록수나 이광수의 흙와 같은 “계몽”소설뿐만 아니라 기독교과 깊이 관련된 농촌계몽운동, 나운규의 문화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 민족계몽운동, 과 같은 식민주의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이러한 운동이 말하는 “계몽”은 무엇으로부터의 무엇을 향한 계몽이었을까요? 담론의 차원에서는 전 시간에 설명했던 오리엔탈리즘, 즉 비유럽사회 특히 근동(Middle East)지방에 대한 상상의 지리가 유럽의 소설가, 탐험가, 정치인, 철학자, 학자집단, 예술가 등에 의하여 ‘지식'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문화적, 물질적 체계에서 잘 드러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 혹은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그 나라, 지역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이라 이분법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이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은 리얼리티로써 존재하는 그 나라 및 지역의 특성 자체가 아니라, 나 혹은 우리들의 주체적 입장에 비추어보았을 때에 가능한 판단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은 주체의 위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분법에 기초한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동양, 문명-자연, 발전-미개, 질서-혼돈, 청결-더러움, 도덕-비도덕, 자유-억압, 평등-불평등, 동적임-정적임, 이성-비이성 등을 파생한 상상의 지리학은 세계의 준거집단으로서 유럽의 집단적 주체성을 형성하는 거울이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비대칭적 이분법으로서의 동양에 대한 지식이 형성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동양에 대한 지식접근을 방해했던 지리적, 물리적 장애(산맥, 바다)와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정신적 장애 둘 다에 의한 것이겠죠. 다양한 차이를 지닌 비유럽 사회를 하나의 등질적인 사회로서의 ‘동양’으로 생산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재료가 되었던 것은 그리스에서 비롯되는 동양에 대한 고전적 지식, 여행가들의 이야기, 신화, 종교적, 성경적 지식, 그리고 예술가들의 시각적, 텍스트적 재현 등이었습니다. 결국 리얼리티로서의 ‘동양’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서구 유럽인들의 정신에는 동양이 있었던 것이죠.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유럽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동양이라는 외부의 타자뿐만 아니라 내부의 타자도 필요로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즉 남부 이탈리아처럼) 한국에서 오랫동안 ‘전라도’라는 상상의 지리가 내적인 타자생산의 결과였던 것처럼 말이죠. 폴란드, 체코와 같은 동구 유럽 국가들도 오랫동안 유럽의 타자였고 특히 아직까지도 종종 비아냥과 경멸의 대상이 되는 ‘유태인’들은 지금까지도 타자로서 남아있죠 (참고, How the Jews became white?). 이탈리아(한국과의 비교)인과 아일랜드인들도 서구유럽에서는 아직까지도 열등한 타자로서의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담론에서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오리엔탈리즘과 완전히 결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차이일 수도 있겠죠. 서양-동양의 이분법이 서양의 구분임을 알면서도 이것이 보편화된 지식-권력으로 자리 잡게되면서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 지식적 독창성의 뿌리 혹은 권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죠. 18세기 유럽은 내적으로 ‘인종’에 관한 담론이 과학적인 지식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당시에는 과연 인종적 차이가 기후와 같은 환경의 산물인지 아니면 생물학적, 자연적 결과인지가 큰 쟁점이었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환경결정론적 사고와 인체측정학으로서의 인류학이 발전하면서 유럽인들은 흑인들을 열대가 아닌 다른 지역에 옮겨 놓아도 그 후세들의 ‘흑인성’은 재생산된다는 점을 발견하고 인종은 ‘생물학적 진실’ 즉, 과학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동시에 검은 피부는 그들의 작은 두뇌와 야만성과 미개함을 상징하는 양식이 되는 것이죠. ‘인종’의 발견은 성(gender) 차이와도 결합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의 인류학적 연구들은 ‘새로운 과학적 인체측정학(anthropometry)’에 따르면 두뇌를 비롯한 해부학적 특성에 있어 백인(Caucasian) 여성들은 백인 남성들보다 오히려 아프리카 남성들과 유사하다고 보았습니다. 당연히 흑인 여성들은 가장 미개한 인종으로 간주되었죠. 유럽의 잔인한 식민주의 정책이 아프리카 부족사회와 그 문화를 뒤엎으면서 18~19세기에는 많은 흑인들, 특히 흑인 남성들이 정신분열증적 증세를 보였습니다 (왜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전과 같은 경우 농촌 마을 마다 ‘미친’-사회병리적 현상으로써- 사람이 있지 않던가요?). 이 때 식민주의의 사회병리학적 담론은 흑인 여성들이 자의식조차 형성할 수 없는 극도의 원시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흑인 남성들만큼 ‘미치는’ 사례가 드물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미치는 것은 정신구조의 일정한 복잡성(complexity)이 있어야 가능한데 흑인 여성들은 이러한 자아인식 능력조차 없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그 때까지만 해도 ‘과학’이었다는 겁니다. 또 이와는 정반대로 여성/여성성과 대지(land)가 동일시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등 비유럽세계는 서구 남성 탐험가들의 발견을 기다리고 그들의 침투를 맞이하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앞서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 그림에서 볼 수 있듯 말이죠. 지식-권력의 차원에서 반드시 서양이 인식의 권력 주체가 되고 동양이나 식민지 사회가 침묵하는 인식의 객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많은 교량과 댐을 건설하고자 했는데 사실 이는 원주민의 지식과 조언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죠. 근대적 관개시설 및 댐건설의 아버지라는 영국의 Cotton은, 그가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을 “문명화된 야만인”이라고 하면서 ‘전투’에 있어서는 전문가이지만 댐이나 가옥을 건축하고 수리하는 데에는 매우 열등하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갠지스강과 브라마푸트라 강의 하류에 형성된 범람원이나 삼각주에는 두터운 모래층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층위에 가옥을 짓거나 교량 및 철도를 건설하는 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지식과 고문없이는 불가능했었다고 고백합니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인들이 기니만의 정글, 기후, 지형, 병/해충 등과 같은 고유한 지리적 장애를 극복하면서 내륙의 노예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토착 원주민들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 필수적이죠. 그래서 대부분 초기 유럽인들은 원주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일부 소수를 다수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그들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교활해지기도 하지요 (르완다, 브룬디-벨기에 Hutu와 Tutsi족의 관계). 한편, 이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프랫(M. Pratt)에 따르면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훔볼트와 같이 유럽과 신대륙을 문화-자연, 발전-미개 등으로 이분화했던 사고는 실제 식민지 정착민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의해 지배-종속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이에 도전하는 문화적 차용, 교환 및 타협과 같은 다양한 상호작용을 낳았다고 봅니다. 프랫은 이를 접촉역(contact zone)에서 일어나는 ‘문화변형(transculturation)’이라고 개념화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종적, 문화적 격리와 비대칭적 권력의 이분법이 발생한 것은 이와 같은 문화적 교변을 억압하고 식민주의적 지배-종속의 관계를 자연화하기 위한 것이죠. 문화교변이라는 점에 착안한 관점은 혼성성(hybridity)이라는 새로운 후기식민주의의 정치를 파생하기도 합니다. 키버드(Kiberd)에 따르면 번역(translate)라는 말은 사실 “정복(conquer)”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번역을 해 보면 알겠지만 사실 한국어 한 문장에 담겨있는 의미뿐만 아니라 뉘앙스와 맥락까지를 그대로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존칭어와 조사에 의해 독특한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한국어의 고유한 독창성 때문이죠. 식미주의자와 식민지 원주민의 관계도 지식 및 문화의 ‘번역’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접촉역에서 발생하는 문화교변은 식민주의담론에 의해서 불균등한 권력관계로 나타나는데, 이 때 원주민의 문화와 지식을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고체계로 이해할 수 없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이를 분류하고, 기록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것으로 “번역”을 한 것이죠. 예를 들어,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이자 식민주의시기의 군인 James Cook 선장과 그의 부하들은 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 일대의 섬을 탐험하면서 원주민들의 식인문화(cannibalism)를 발견하고 이것을 일기나 탐험기 등의 일부로 기록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 연안 부족사회에서는 인류학적으로 식인문화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Cook과 그들 일행은 어떻게 보면 식민문화를 발견하기 이전에 식인문화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먼저 있었겠죠,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태평양 연안 섬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야만성과 미개함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베예스케르(Obeyesekere)에 따르면 하와이 원주민들의 경우 오히려 공격적이고 전투에 능한 Cook과 그 일행들로부터 위협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잡아먹을 식인종으로 간주하였다고 합니다. 즉, Cook과 그 일행들이 각종 무기들과 더불어 누더기 옷과 악취나는 몸 그리고 반쯤 굶주린 상태로 하와이에 하선한 후 원주민들에게 식인종에 대해 묻는 것을 보았던 하와이 원주민들은 그들이 실제로 하와이 원주민들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실제로 하와이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비이성적인 유럽인의 행위는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미개함과 잔임함으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하와이 원주민들중 마오리(Maoris) 족의 경우는 “의식적으로” 식인문화를 재현하여 유럽인들대한 잔인함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침범에 도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접촉역에 있어서 정치가 단순히 식민지-피식민지인의 이분법적 도식에 의해 보편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학은 이와 같이 식민주의, 그리고 식민주의의 결과로 파생되어 오늘날 보편화된 서구중심사회를 형성한 식민주의적 담론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식민지본국-식민지의 관계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적 맥락하에서 다양한 문화초변적 현상들이 식민주의적 담론을 생산하고, 다시 식민주의적 담론이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교류를 생산하는 변증법적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서 혼성성의 정치(the politics of hybridity)가 최근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의 가운데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2005. 11. 1 박경환)
|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trackback/10/108
|
|
|
|
|
|
|
|
|
|
하비(D. Harvey)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자본의 한계(Limits to Capital, 1982)>는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맑스(K. Marx)의 저술 <자본(Das Kapital)>의 한계를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자신 체제의 한계를 내부에서 영원히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의 한계는 다음의 세 가지 기획에 토대를 두고 있다. 첫째는 출간 당시 팽배해있던 맑스주의에 대한 기계적, 정태적 해석을 극복하고 맑스의 <자본(Das Kapital)>을 변증법적으로 읽어내는 것이다. 둘째는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을 공간 차원으로 확장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지리적 속성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는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자본주의가 본연의 유연성과 기민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절대로 초월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비의 <자본의 한계>는 25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 인문지리학의 많은 연구 주제들을 아우르는 우산이자 이를 파생한 모태이다. 이들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불균등 지리적 발전 - 공간적 조정 - 영역적 조절 - 자본축적의 장벽으로서 건조환경 - 투자자본의 3가지 회전 - 시공간 압축 - 로컬 기업가주의 - 장소간 경쟁 - 장소와 스케일의 (사회적) 생산 - 지대격차와 도시재개발 - 자본주의 경제의 불안정성 - 재구조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비의 유물론적 역사지리관은 오늘날 (재미있게도) 매우 변증법적인 과정을 통해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페미니스트 이론 등과 접합하며 흥미로운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맑스를 공간화하려는 하비의 기획은 바로 여기에서 언급할 공황론의 세 토막(cut)에 있다. 맑스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을 뒷받침하는 것은 노동과 (노동으로부터의 잉여가치 전유를 통해 생겨나는) 자본이며, 자본의 성장은 곧 자본주의의 물적성장과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장기적, 주기적 공황은 그 내부에서부터 이러한 자본의 상각을 일으킴으로써 장기적으로 축적된 자본을 사멸시키고 다시 축적을 가속화하는 리듬을 반복한다. 곧 자본주의가 표면적으로는 좌표상에서 우상향을 향하는 매우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발전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자본주의는 "축적을 위한 축적"의 과정을 추구하면서 마주치게되는 자신의 위기를 공황을 통해 (일시적으로) 극복하고 다시 축적을 반복한다. 요컨대 자본주의는 호황과 불황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 자신의 축적한 가치를 상각하고 다시 착취와 축적을 반복하는 황량한 사막의 세계와도 같다는 것이다.
하비는 맑스가 자본주의의 주기적 공황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특히 금융과 지리적 측면 이 두 가지를 간과한다는 측면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면서, 금융과 지리가 어떻게 자본주의적 위기를 조정(돌파)하는 수단이 되는가를 분석한다. 역으로 말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지리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위기를 조정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비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자신의 위기를 조정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이다. 한 가지는 맑스가 <자본>에서 언급했던 것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자본주의의 시간적, 공간적 차원들이다.
첫째는 과잉축적에 따른 감가(가치절하)를 통한 위기극복 방식이다. 자본가들의 이윤은 가치법칙에 따라 노동을 임노동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잉여가치를 전유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들은 임노동을 최소화하여 생산성을 향상하기 위해 새로운 기술들을 경쟁적으로 도입한다. 이러한 과정은 소위 더 많은 생산을 통한 경제적 "성장"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이들은 곧 소비자들이기도 하다) 가처분소득이 점차 줄어들어 구매력이 감소하게 된다. 하비에 따르면 이러한 과잉축적의 위기는 다음과 같은 현상으로 표출된다고 지적한다. - 과잉생산: 상품을 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창고와 진열대에 쌓이는 재고들 - 유효수요의 부족: 소비자들의 실질 구매력 감소 - 유휴자본: 공장폐쇄. 시중에 넘쳐나나 흐르지 않는 돈줄 - 잉여노동력의 증가: 실업의 증가 - 이자율 하락: 돈은 막대하여 쌓여 있으나 투자할 곳이 없다! 결국 재구조화를 동반하는 공황이 발생하게 되면 고정자본(기계, 설비, 건물 등)에 대한 감가(가치절하)를 요발하게 되어 오랜시간에 걸쳐 축적되어 온 자본은 (이는 곧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기도 하다) 순식간에 증발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는 곧 새로운 축적의 싸이클의 시작이 된다.
둘째는 시간적 조정을 통한 위기극복 방식이다. 분업화된 대량생산은 장기간 이윤을 발생시키지 않는 막대한 자본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각종 생산시설과 기계와 같은 고정자본과 아울러 도로, 철도, 전력, 사무실 등과 같은 건조된 환경을 포함한다.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막대한 자본이 투여되는 투자 초기와 본격적인 생산이 이루어져 이윤을 발생하는 기간 사이의 시간적 차이에 따른 모순이 발생한다. 이는 자본가에게 초기 투자비용을 제공하는 금융제도가 유동성을 제공함으로써 시간적 유연성을 제공함으로써 조정된다. 금융제도와 아울러 막대한 학부구조와 공공성이 강한 하부구조는 기업이 금융을 통한다고 할지라도 단독으로 수행할 수 없는 거대한 사업이자 그 효용성이 공적 속성을 띠므로, 이는 중앙정부가 주도적으로 투자, 건설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공간은 특유의 '공간적 관성'을 지니고 있는데, 일단 투자한 건조환경은 집적의 불이익과 같은 다양한 불경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쉽게 초기의 투자비용을 회수하거나 투자된 건조환경을 갖고 이동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기술적 발전으로 인하여 더 효율적인 건조환경이 생성될 경우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요컨대, 고정자본과 건조환경이 지니는 모순에 대한 시간적 조정은 영구적인 조정이 아니라 일시적 조정에 머무르게 된다.
셋째는 공간적 조정을 통한 위기극복 방식인데, 하비는 크게 네 가지의 공간적 조정을 제시한다. 첫째, 토지시장은 건조환경이 공간적으로 재구성되어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될 수 있도록 유연성을 제공한다. 리카르도나 튀넨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하의 토지는 초과이윤과 자본축적에 대한 장벽으로 간주되지만, 하비는 마치 금융이 시간적 조정을 수행하는 것처럼 토지시장은 공간적 조정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자본축적에 기여한다고 이해한다. 두 번째의 공간적 조정은 내수시장의 포화를 극복하기 위한 자본주의의 공간적 팽창으로써, 이는 공간적 영역을 넘어 새로운 지역, 국가를 자본주의적 시장으로 변환, 개척하는 과정이다. 세번째의 공간적 조정은 직장과 거주지, 생산지와 시장 등은 생산공간과 소비공간 사이의 거리마찰을 최소화함으로써 자본의 회전과 잉여가치의 축적을 가속화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은 교통 및 정보통신기술의 혁신을 가져오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 공간의 크기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급속히 감소한다. 맑스와 같이 하비는 이처럼 생산-소비 공간 사이의 이동이 가속화되는 과정을 '시간에 의한 공간의 괴멸'이라고 한다. 네번째의 공간적 조정은 특정 공간에서 자본축적이 안정적,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제도적으로 조절하는 영역적 거버넌스이다. 이는 특정 지역/공간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다양한 제도, 법률, 제도화된 이데올로기(혹은 담론) 등을 포함한다 하겠다. 이는 이후 조절이론가들에 의해 보다 정교히 발전되거나 특정 도시/지역의 기업가주의, 성장연합에 대한 논의로 확대, 발전된다. 그러나, 물리적 공간에서 자본주의적 공간은 무한히 팽창할 수 없으며 (물론 가상공간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적 공간을 창출하기도 하지만) 금융과 마찬가지로 부동산도 미래의 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되어 의제자본화되므로 (그래서 금융과 부동산의 가치가 거품의 주기적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듯) 이러한 공간적 조정또한 자본축적에 따른 위기에 대한 일시적 해결책에 불과하다.
하비는 자본주의가 위기를 극복하는 위의 세 차원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자본의 흐름을 다음의 그림(Harvey 1982, 408)과 같이 도해한다. 즉, 자본은 상품과 노동력의 교환을 통해 생산(잉여가치의 축적)과 소비(노동의 재생산) 사이의 끊임없는 순환을 형성하며, 이 과정에서 금융시장은 고정자본(생산수단, 건조환경)과 소비기금(주택과 같은 내구재와 건조환경)을 형성하고 국가는 거두어들인 세금을 모아 공적지출(복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제도화된 담론 등)과 과학기술에 투자함으로써 자본의 순환에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요컨대, 하비는 이와 같이 자본주의가 자신의 주기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식이 감가와 아울러 공간적 조정을 통해 발생하며, 이와 동시에 자본주의 하의 지리적 변동 또한 자본주의의 위기극복 방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고 이해한다. 하비가 주장한 위기의 세 층위는 독일입지이론을 포함하는 신고전지리학과 실증주의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공간이 자연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구성된다는 점, 그리고 공간과 장소는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생산하고 생산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2008.4.5 박경환)
참고문헌 Harvey, David, 1982, Limits to Capital, London: Verso. Sheppard, Eric, 2004, The Spatiality of the Limits to Capital, Antipode, 36(3), 470-479.
|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trackback/10/106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