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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11/04
 

매트릭스란? :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4학년 박창민

2008.12.21 19:10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6 주소복사

매트릭스(Matrix)가 의미하는 것은?

 

지리교육 박창민

 

‘매트릭스’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이는 미디어 철학자 귄터 안더스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이 유대인 비평가는 잠깐 한나 아렌트의 남편 노릇도 했는데, 훗날 그의 아내는 “그의 대책없는 페시미즘(염세주의)이 견딜 수 없어서” 그와 헤어졌노라고 술회했다. 아내를 질리게 한 안더스의 비관주의는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미래에 대해서도 매우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이 현대판 묵시론에는 인간이 만든 도구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통제능력 사이에 점점 벌어지는 ‘격차’(Diskrepanz)를 걱정하는 하이데거의 우려가 깔려 있다. 이 철학적 우려는 오래전부터 SF영화를 위한 풍부한 상상력의 원천이었다.

안더스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새로운 존재층을 만들어낸다. 가령 안방의 텔레비전 속에서 쌍둥이빌딩이 실시간으로 불탈 때, 그 영상은 ‘가짜’ 하기도 뭐하고, ‘진짜’라 부를 수도 없다. 이렇게 가상도, 현실도 아닌 이 제3의 존재층을 안더스는 ‘팬텀’(환영)이라 부른다. 실제로 대중매체가 등장한 이래로 우리의 세계는 점점 더 관념적인 팬텀으로 변해가고 있다. 가령 미국에 가보지 못한 나의 머리 속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100% 사진이나 영화, 혹은 텔레비전 영상, 즉 내가 아닌 남이 본 영상들로 짜여져 있다.

‘팬텀’을 재료로 세계를 짜는 원리가 바로 ‘매트릭스’다. 철학자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이 주관의 선험적 형식인 것처럼, 대중매체는 세계를 세계로 제시할 때 ‘매트릭스’라는 선험적인 틀을 사용한다. 가령 <조선일보>를 생각해보라. 노무현 대통령이 말을 아끼면, “대통령, 꿀 먹은 벙어리인가”, 대통령이 말을 흐리면, “대통령 입장을 확실히 하라”, 대통령이 입장을 확실히 밝히면, “대통령, 입이 헤프다”. 이렇게 세계는 미리 짜여진 선험적인 틀에 따라 우리에게 제시된다.

사건은 원본의 형태로는 더이상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보도라는 형태로 복제가 될 때 비로소 사건은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이렇게 모든 것이 원본이 아니라 외려 복제의 형태로서 사회적으로 더 중요해질 때, 현실은 팬텀과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에 자리를 내주고 점차 사라져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누가 짠 것인가? 이 세계는 과연 누구의 표상인가? 오래전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나의 꿈이 너희의 표상이다.” 누굴까? 이 말을 한 매트릭스의 창조주는 히틀러다.

그렇다면 우리 세계의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교사가 되기 위한 집단이다. 미래의 교육을 위해 배우고 있고 교사가 되는 절차인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단계를 거친다.

‘참교육’ 이란 무엇인가? 흔히 사범대재학중인 학생들은 참교육이라는 구호를 외쳐댄다. 새내기들은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참교육이라는 담론에 세뇌된다. 참교육이라는 말은 존재하는 것인가? 새내기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학교에서 담임교사, 그 외 학과교사를 욕하면서 스트레스해소, 농담거리로 삼았던 이들(전부 그렇지는 않겠지만.^^)이 참교육을 외친다. 정작 학생들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현장에서 수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을 욕하며 지적하며 때린다. 술 자리에서 왜 교사가 되겠는가? 라는 말이 오가면 방학이 있어서, 편해서 정년이 보장되니깐, 라는 말이 오가면서 정작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진정한 교육을 실현 시키겠노라’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포장하는 현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 없는 그런 상태로 살고 있는 우리는 매트릭스에 갇혀 살고 있다고 하겠다.

 

영화속에 나오는 수많은 인간을 양성하는 인큐베이터같은 역할을 한다. 사회화에 필요한 지식 기능 등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은 영화의 내용으로 보면 없어져야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강의를 듣는 모든 학생들은 “그런일은 일어나서는 안돼!!”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현실에서 살기 위해서 교사라는 직업은 꼭 필요하니깐.,,,

 

존 말코비치되기: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2학년 윤희주

2008.12.21 19:02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5 주소복사

존 말코비치 되기를 보고

71988 윤희주

 

처음에 영화를 보고 한순간 멍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의식과 도대체 어떠한 관련이 있을까? 평소에 영화를 자주 보는 편이었지만 이런 류의 영화는 잘 접해보지 못했기에 오랜시간의 정리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의식은 무엇이고 무의식은 무엇일까? 의식은 내가 자각하는 것이고, 무의식은 내가 자각하지 않지만 내가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것, 쉽게 말하면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소소한 습관들을 예로 들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원래의 존말코비치는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지만 크랙이 문을 발견함으로써 크랙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존말코비치의 무의식을 살펴보고 심지어는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말코비치의 무의식이 타인에게 지배받고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시점은 나의 습관을 자각하는 순간처럼 무의식을 자각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크랙이 말코비치의 몸을 빌려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은 무의식이 말코비치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종반부에 맥신과 라티의 추격장면에서 나오는 말코비치의 여러 면들, 이것들도 말코비치가 지금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코비치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화처럼 타인이 나의 무의식을 보거나, 혹은 지배하진 않을 것이다. TV에서 가끔 나왔던 최면같은 경우 무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검증되지 않은 비과학적인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상황은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은 언제나 내 어딘가에 있다. 종반부에 나왔던 상황들, 말코비치가 어렸을 때 놀림을 받고, 충격을 받고 또 자학을 하는 모든 상황들은 무의식속에 남겨져 관음증과 같은 의식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은 항상 의식을 사정권 내에 두고 있다. 아무리 의식적으로 이걸 해야해. 하지말아야 해 해도 어렸을 때부터 생겼던 포비아나 트라우마 같은 무의식적 행위를 멈출 순 없다. 이런 점에서는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한다고도 볼 수 있다. 허나, 의식이라는 것도 참 신기해서 무의식이 이끄는대로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는 것 같다. 무의식적 행위를 극복하려는 의식의 노력은 오히려 무의식이 이끄는 것 보다 더욱 강력하게 신체를 지배하기도 한다. 이렇게 의식과 무의식이 신체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또 신체도 나름의 능력제한을 두어 이러한 의식과 무의식을 제한한다. 결국, 우리 몸을 이루는 모든 정신과 육체적인 면에서 완전한 것은 없다. 모두 자신의 힘겨루기를 하다가 어떤때는 의식이, 어떤때는 무의식이, 어떤때는 신체가 주도권을 잡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에 대해서 다뤘다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또 이 영화에서 말코비치가 자신의 무의식에 사람이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무의식으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가면 거기에서 수많은 말코비치들이 나와 말코비치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말코비치의 무의식에 말코비치가 들어갔다는 것도 어찌보면 웃긴이야기다. 하지만 거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짧은 생각으로 말하자면 내 안에는 수많은 무의식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자기 나름대로 떠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타인이 말코비치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말코비치의 의식을 보았는데, 말코비치가 들어온 이상 더 이상의 의식은 없고 무의식만 존재한다. 그 무의식들의 혼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의식과 무의식의 측면에서만 몇가지 이야기해보았다. 이 영화에서 의식과 무의식 이외에도 더 많은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내용보다도 나는 말코비치를 통해서만 사랑과 자아실현을 할 수 밖에 없었던 크랙, 그리고 말코비치를 통해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은 라티, 그리고 말코비치의 외부적인 모습을 보고, 그 정체성이 누구인지 상관치 않고 사랑하는 맥신[물론 크랙을 사랑했다기보다는 이용했다는 측면이 강한 것 같지만]. 이러한 주인공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좀 더 흥미로웠던 것 같다. 사실 영화보고 이렇게 머리아프게 상상해본적이 거의 없었는데, 처음에는 정말 뭐 이런게 다있나라는 생각밖에 안들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무심코 흘렸던 것들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스타일의 영화는 아니었지만 영화를 볼때보다 다시 생각할 때 더 재밌는 영화였다.

존 말코비치 되기: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명지

2008.12.21 19:01 | 명예의 전당2: 영화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4 주소복사

-‘존 말코비치’를 보고-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김명지

 

이 영화는 제목그대로 '존 말코비치'라는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해 사람들이 존말코비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정체성, 무의식, 잠재의식 ,욕망 등에 대해 담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명확하게 이 영화의 의도하는 바를 집어낼 수는 없었다. 너무나 철학적인 질문들이 많아서 답도 잘 모르겠고, 참 난해한 영화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15분간 존말코비치 속으로 들어가 그의 감각을 느낄수도 있다. 이영화에서 무의식이라는 단어와 연관되는 장면은 크게 세 부분정도였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크레이그의 부인 로테가 말코비치의 뇌속에 15분간 들어간후 무의식속에 잠재되어있던 자신의 남성성의 정체성을 찾는 부분, 두 번째는 크레이그가 존말코비치의 의식을 차지해 존말코비치 진짜 자신은 무의식속에 갖혀버리고 나중에 크레이그가 그에게서 빠져나왔을때 조금의 시간동안 의식적으로 행동하는 부분에서 잠깐 언급되었다. 무의식속에서 말코비치는 크레이그의 인형극의 인형들처럼 조종당했다. 또 마지막으로 로테, 멕신이 말코비치안으로 들어갔을때 그 안에서 말코비치의 유년기 청년기 시절이 보였는데 그당시 따돌림, 오줌싸개 등으로 불리던 소심한 아이였던 모습이 그의 무의식이었다. 지금은 잘나가는 영화배우로서 당당한 척하지만, 그의 무의식 속에서는 아픔이 묻어나 있고, 애써 그럼 점을 묻고 살기 위해 점점 더 그것을 무의식속에 가둬 놓고 의식속의 현실에서는 명예, 부라는 욕망을 추구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의식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았을때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무의식이란 의식이 없는 상태,즉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각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런 상태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가치가 있다면 어떤 점에서? 또 나에게 있어 무의식의 상태일때는 언제일까? 언제 나는 무의식임을 느낄까? 영화에서처럼 나 또한 무의식 중에 타인에 의해 순간순간 지배받는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을까?

 

나에게 있어 무의식은 꿈속에서 많이 나타났던 것 같다. 의식속에서는 애써 지우고 싶어했던 것들이 꿈속에서 많이 나와서 괴로웠던 적도 있다. 그래서 나도 점점 무의식을 최대한 의식에 개입되지 않게 꾹꾹 억누르려 했던 것 같다. 단적으로, 의식적으로는 나는 부족함이 없고 항상 완벽한 알파걸로서 행동하려하지만 내 무의식속에서는 부족함, 열등감 등이 많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무의식으로 곤란을 겪었던 적,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무의식이 표출되는 바람에 곤란을 겪었던 적도 있었다. 나는 평상시에 되도록 속내를 내 비추지 않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편인데 내 주량 이상의 과한 알콜을 섭취하다보니 술로 인한 무의식이 입밖으로 표출되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동안 하고팠던 말들을 다 내뱉어 버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내 머릿속의 필름은 끊겨 있었는데 말이다. 대체로 나의 무의식의 경우에는 되도록 감추고 싶은 나의 모습이 있는데, 가끔은 무의식이 의식에 개입되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질까봐 두렵기도 하다.

 

영화얘기로 넘어가서 영화에서의 인형과 크레이크가 들어가서 조종하는 존말코비치는 공통점이 있다. 꼭두각시인것이다. 존말코비치는 인형과 같이 무의식인 상태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에 의해 놀아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의 존말코비치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게 된다.

육체는 존말코비치이지만, 정신은 크레이크라면 이건 말코비치인가? 크레이크인가? 영화에서는 그때의 말코비치의 진짜 주체는 크레이크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는 정신적인 세계를 육체적인 면보다도 중시한다. 의식만이 진짜 나를 만들 수 있는 것일까? 이건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 인듯 하다.

 

무의식의 세계는 알수없는 미지의 세계라는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래서 더욱 두렵다. ‘김명지되기’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한번 들어가서 내가 진짜 누군지, 내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쯤 알고 싶다. 무의식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무의식도 나도 내 일부분이기에 너무 억누르려고 하지 않고, 무의식의 신호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또한 내가 그동안 무의식에 대해서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부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렇지 무의식에서도 긍정적인 나의 무궁한 잠재적 능력을 끌어낸다면 내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흔히 의식과 무의식은 빙산에 비유된다. 밖으로 보이는 빙산, 즉 의식은 전체 빙산의 1%정도인데, 나머지 99%의 빙산은 무의식이라 한다. 99%잠재되어 있는 나의 무의식을 통해 그동안 몰랐던 나의 참모습, 매력을 끌어내어 진짜 내 자신을 발견해보고 싶다. 

장소와 장소상실: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현선

2008.12.21 18:33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3 주소복사

책이름 :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책지은이 : 에드워드 렐프 Edward Relph

작성자 : 김현선

 

 

어렸을 적 티비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에 대한 연속극 따위를 본 것 같다. 병원 침대에서 막 깨어난 환자는 가장 먼저 ‘여긴 어디지요?’라고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물음은 그 다음이다. 또한 만화 등에 나오는 우스갯소리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형이상학에 의하면 존재하다 혹은 있다는 모든 사물의 본질이자 공통점이다. 있음과 관계되는 말은 많겠지만, 가시적인 공간을 차지함도 있음이라고 말할 때 연상되기도 한다.

‘장소와 장소상실’이 핵심 개념으로 장소를 택하고, 장소에 대해 철학의 분과인 현상학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위의 상황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본 지리학 서적과 다르게, 지리적 개념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시작한다. 현상학적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산만할 정도로 다양한 관점으로, 장소를 한 가지 술어로 정의하려는 의도를 배제하며 논의는 진행된다.

사적으로 쓰이지만 본질적으로 실존과 맞닿았으며, 저자가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지리적 개념인 장소는 학적 지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환기시킨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장소들은 의미로 충만하며 지리학은 장소의 의미, 장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일상이 지리적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나의 경험을 지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저자가 공간에 대한 의식을 분류할 때 언급한 개념 중 지각 공간은 아마 내가 걷는 전남대학교의 캠퍼스, 몇 달에 한 번 가는 고향과 그 길에 거치는 터미널, 내가 사는 고시원 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년기에 자아 발견의 기초가 되며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안정감과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공간’에 대한 추억은 여수에 살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빗댈 수 있으리라. 7살도 되기 전에 여수의 달동네에서 산 적이 있는데, 경사진 마을 앞은 항구였다. 비릿하고 짠 바다바람과 생선 냄새로 찌든 회색 콘크리트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향수와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뿌리 뽑힘과 장소에 대한 관심’이라는 제목이 붙은 내용을 읽을 때는 운 좋게 사주팔자가 맞아떨어졌을 때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나의 문제를 설명할 말이 떠올랐다. 그 동안 나는 계속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소속감을 느껴도 좌절되었다. 그리고 고향을 이상화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가 식물 같다고 생각했다. 강진에서 뽑혀 광주에 심긴 식물. 10년 간 자라던 곳에서 뿌리 째 뽑혀 낯선 토양에 적응해야 하는 식물. 나는 뿌리 째 뽑혔다는 말을 곱씹으며 조선 시대가 모든 점에서 현대보다 혹독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주장은 아니지만 이 책에 인용된 내용에 따르면, 그 때 떠올린 뿌리 뽑힘은, 장소와 장소가 중요한 이유 그 자체라고도 하는 인간과의 유대에서 뿌리 뽑혔기 때문이라고 지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한다. “오늘날의 집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현상이다. 집이 주택과 동일해졌다. 다시 말해서 집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집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금전적 가치로 쉽게 측정되고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집을 ‘거주할 수 있는 기계’로 여기는 상황이나 무장소성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대의 집이 처한 상황을 전적으로 대표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를 상정하기보다 논의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저자의 태도로 미루어 그런 의도로 집어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자 어머니가 떠올랐다. 10년 동안 같은 곳에서 살기를 고집한 어머니는 아마 집을 ‘거주할 수 있는 기계’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몇 십 년 간 감옥에 살던 죄수는 어느 날 가석방을 당한다. 그는 친밀한 장소에서 낯선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졌다고 느낀다. 사회는 너무 변했고 자신은 감옥에서보다 무능한 사람 취급을 당한다. 범죄를 저질러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마저 하지만 결국 자살한다. 이 죄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마 책에서 설명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17세기, 18세기 의사들은 노스탤지어가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책의 주인공인 하이디도 자기가 살던 시골에서 도시로 떠난 뒤 몽유병에 걸리고 시름시름 앓는다. 장소는 나의 어머니에게는 애착의 대상이었지만, 더 나아가 죄수나 하이디에게는 떠나면 죽을 수도 있는 물고기의 바다와도 같았나 보다.

 

이렇게 감정을 이입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추상적이고 광범위하며 비정형적인 방식으로 쓰여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저자가 경직된 논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장소의 진정성과 비진정성에 대한 부분에서 저자의 어조는 확고해진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는 대중적인 장소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는 상징이나 의미, 합의된 가치가 아니라 멋대로 합성해서 만들어진 조잡하고 경박한 상투성에 기초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작된 이미지를 지닌 채 해당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른바 진정성이 부족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에 부여하는 가치가 입장에 따라 상이함은 저자도 말한 부분이다. 같은 달동네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고 지저분하고 비좁으며 비슷비슷한 집들이 몰개성하게 들어선 장소라고 느껴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집들과 거리의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자아를 구성하는 의미 깊은 장소일 수 있는 것이다. 장소의 진정성도 장소 자체가 가지기 보다는 장소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성질이 아닐까? 물론 대중적 이미지는 장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나 이해가 없이, 단지 조작된 이미지일 뿐이며 심하게는 선입견이라고 말해질 수 있지만 말이다. 대중적인 장소이미지가 허구성 때문에 저자로부터 비판받는다면, 허구적이지 않은 대중적 이미지는 그럼 비판받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대해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자연적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장소와 관련한 정체성을 장소의 정체성과 장소에 대한 정체성이라고 구분하는 부분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어떤 것에 대한 정체성이 아닌 어떤 것의 정체성은, 다른 것으로부터 그것을 구분해낼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인 동일성과 통일성을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주체로서 정체성을 느끼는 것처럼 장소도 스스로 정체성을 느끼는 것일까? 장소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느낌 안에서만 정체성을 가진다. 게다가 인간이 고유하고 절대적인 정체성을 가진다고 말해도 반발이 있는데, 장소가 가진 정체성이라니. 내가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일까.

 

아무튼 지금까지 읽은 지리학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인문학적인 책이었다. 경제철학, 역사철학, 사회철학 같이 지리철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면, 아마 이 책이 그 분야에 잘 들어맞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지리학적 발견이나 지리학의 역사를 통해서만 지리학이 무엇인지 알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지리학에 접근한 책은 처음이라 좋은 경험이 되었다.

 

장소와 장소상실: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아리

2008.12.21 18:23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2 주소복사

장소와 장소상실(Place and Placelessness)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논형)

 

 지리교육과 김아리

 

우리는 평소에 장소 그대로의 본질을 간과한 채 장소의 외연적인 모습만을 ‘인증’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혹은 장소의 본질을 잊고 가이드가 이끄는 대로, 책에서의 중요도의 순으로 우리는 장소를 평가하고 관망한다. 장소는 그의 실존적 내부성을 무시당한 채, 그 가치를 평가절하 당하기 일쑤이다. 장소의 피상적인 의미 만에 중점을 두는 세태가 일반적인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장소 안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 장소감은 어쩌다 얻은 멋있는 기술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어떤 것이라고 말한 이안 나이른처럼 장소감이 우리와 지대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 모습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장소와 장소상실」의 초점은 우리가 살고 있고 날마다 생활에서 직접적으로 알게 되고 경험하는 일상의 환경과 상황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즉 장소의 현상에 대한 탐구이며 장소경험의 다양성과 강도를 밝혀보려는 시도이다. 저자는 장소와 장소상실의 모습을 확인하며 무장소에 대한 태도와 이러한 태도가 경관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탐구한다.

장소는 지리학의 현상학적 기초를 이루는데 필수적인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래서 투안은 지리학 최초의 로맨스는 장소와의 어떤 생생한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지리학은 장소를 알게 하고 장소를 만들도록 하는 모든 분야의 경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공간은 다양하다. 공간은 형태가 없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고 또 직접 묘사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공간을 느끼고, 알고 또 설명하더라도 거기에는 항상 장소감이나 장소 개념이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공간이 장소에 맥락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그 의미를 특정한 장소들로부터 얻는다. 공간과의 관련에서 볼 때, 장소 역시 상호 연관된 의미 복합체이다. 장소는 단순히 어떤 상황에서나 한결 같은 무차별적인 경험현상이 아니다. 장소는 인간의 경험이나 의도 폭만큼이나 광범위한 미묘함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장소로 구별해내는 공간의 특성은 우리의 의도를 유혹하고 집중시키기 때문에 다양하게 분화된다. 모든 장소는 서로 겹치고 서로 섞이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건물이든 자연물이든 확실히 외관이 가장 뚜렷한 장소의 속성 중의 하나이다. 외관은 실체적이며, 묘사할 수도 있다. 장소가 경관으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이유가 시각적 특징이 인간 활동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의미에서이든 아니면, 인간의 가치와 의도를 반영한다는 다소 미묘한 의미에서이든 간에, 외관은 모든 장소들의 중요한 특성이다.

공동체와 장소 사이의 관계는 사실 매우 밀접해서 공동체가 장소의 정체성을, 장소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며, 이 관계 속에서 경관은 공통된 믿음과 가치의 표출이자, 개인 상호간의 관계맺음의 표현이다. 모든 장소와 경관은 개인적으로도 경험된다. 우리의 태도, 경험, 의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우리만의 고유한 환경으로부터 장소와 경관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경관이란 개별적인 동시에 공동의 맥락을 통해 경험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장소들은 우리들에게 구체적이고 특별한 의미로 정의되고,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기 보다는 기억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소들이 불러 일으키는 것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그 당시 나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에 나는 장소의 정확한 특징보다 그 장소들의 분위기를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이를 잘 나타내준다.

한 장소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세상을 내다보는 안전지대를 가지는 것이며, 사물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고하게 파악하는 것이며, 그리고 특정한 어딘가에 의미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학적인 애착을 가지는 것이다. 장소는 자체의 특성과 그것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의미 때문에 장소에 대한 진정한 책임과 존경이 존재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또는 특히 감동적인 경험을 가졌던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장소를 의식하고 있다. 개인은 장소와 동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도시나 경관의 물리적 외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경험, 눈, 마음, 의도 속에도 존재한다. 모든 개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 장소에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정체성은 상호 주관적으로 결합되어 공통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장소의 정체성만이 아니라, 한 개인이나 집단에 가지는 그 장소에 대한 정체성이다. 특히 장소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내부인으로서 경험하는가, 외부인으로서 경험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장소를 그 세부적 내용으로만 생각한다면 엄청나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양성 속에서 공통 요소들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의 장소 경험은 직접적이고, 완전하며 대게 무의식적이다. 장소 경험이 여러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하더라도, 장소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요소들의 결합 속에서 경험된다.

장소정체성의 주요 요소는 장소에만 적용되지 않고, 지리, 경관, 도시, 집 등 모든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발견된다. 그러나 장소의 본질을 이런 것들보다는 외부와 구별되는 내부의 경험 속에 있다. 어떤 장소의 안에 있다는 것은 거기에 소속된다는 것이고 그 곳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더욱 깊이 내부에 있게 될수록 장소와의 동일시, 즉 장소에 대한 정체성은 더욱 강해진다. 내부에서 어떤 곳을 경험한다는 것은 당신이 장소에 둘러싸여 그 일부가 되는 것이다. 정체성 없는 장소는 없다.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 일생동안 계속되는 인간의 장소에 대한 정체성과 장소 자체의 정체성은 점진적이고 섬세한 형태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얼마나 성취할 것인가는 자신의 문화적, 개인적 가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과 관찰의 감수성에 달려 있다. 대중적 정체성만을 알고 있는 사람의 경우는 선입견이나 기성의 태도가 항상 직접 경험보다 더 중시된다. 따라서 이들은 대중 매체가 제공해온 기성의 정체성이나 선험적인 정신적 도식의 틀에 사로잡혀 장소를 관찰하며 이것과 실제 장소가 불일치할 경우는 아예 무시하거나 아무렇게나 설명해 버린다. 장소 정체성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나, 그것은 항상 다른 장소에 대립하여 바로 이 장소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기분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장소감이란 무엇보다도 내부에 있다는 느낌이며, 개인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나의 장소에 속해있다는 느낌이다. 이 소속감은 고향, 혹은 지역이나 국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현대의 도시 거주자들은 자기 장소에의 소속감을 갖기도 힘들며, 쉽게 자기 집을 더 좋은 조건의 집과 바꾸기도 한다.

진정성은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을 완전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양한 강도의 진정성으로 장소를 경험할 수 있듯이, 장소는 다양한 정도의 진정성을 가지고 창조될 수 있다. 한쪽 끝에는 무의식적인 설계 전통을 통해 한 문화를 전체적으로 표출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쪽 끝에는 의식적인 시도가 있다. 진정한 장소 만들기의 가능성은 감소했지만, 장소에 있어서 그런 순수한 자기표현의 가능성과 필요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산업 시대 이전의 무의식적이고 수공업적인 문화의 특징이었던 지방색이나 다양한 장소와 경관이 사라지고 있으며 이미 소멸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이제 보편적이고 익숙한 것이 되었다. 밋밋한 경관은 의도적인 깊이가 결여되고 평범하고 평균적인 경험의 가능성만을 제공한다. 다양한 경관과 의미 있는 장소가 결핍된 일종의 무장소의 지리가 나타날 가능성을 나타낸다. 또한 우리가 현재 무장소성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으며 장소감을 상실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현재의 획일화현상이 이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점은 광범위한 스케일로 획일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어느 곳에서나 장소 경험이 빈약해지게 된다.

다양성이 인류에게서 사라지고 있다.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이제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모방하지 않아도 비슷해지고 있다. 약간의 무장소성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존재해왔다. 그리고 장소에 대한 관심의 결여가 맥락을 파악하고 비교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한, 이러한 무장소성은 장소감에 필수적이다. 무장소성은 일종의 태도이며, 이러한 태도가 점점 지배적인 현상이 됨에 따라 깊이 있는 장소감을 가지거나 장소를 진정하게 창출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집의 의미는 이동성의 증가와 이동성과 연계된 기능의 분리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감상에 젖거나 상품화에 의해서도 약화되어왔다. 부동산업자들도 더 이상 주택이 아닌 집, 즉 비싼 집 ․ 상류층 취향의 집, 아파트를 팔기 시작했다.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는 관광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관광을 할 때 장소에 대한 개인적이고 진정한 판단은 거의 항상 전문가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의견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관광이라는 행위나 수단이 방문하는 장소보다 더 중요해 지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안내책자에 표시된 별표가 몇 개인지만 확인하고는 서둘러 다음 장소로 향한다. 그들은 그 장소를 경험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비진정성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여행의 목적은 독특하고 다양한 장소를 경험하기 보다는 그 장소를 수집하기 위한 것 같다.

장소에 대한 진정하지 못한 태도는 여러 가지 프로세스를 통해 전파되는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매체가 무장소성을 직간접적으로 조장한다. 이 매체들은 장소들이 서로 비슷해 보이게 할 뿐 아니라, 비슷한 느낌을 주며 똑같이 무감동한 경험을 하도록 장소의 정체성을 약화시켜버린다. 이 프로세스들이 그 자체로 반드시 무장소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점은 이런 것들이 경관을 변하시키는 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미 있고 다양한 장소를 창조하고 유지하는 데는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길은 본질적으로 20세기의 창조물이며, 인간의 교통수단이 연장된 것이다. 이 길은 장소들을 연결시키지 않고 주변 경관과도 관련이 없다. 일반적으로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것 같지만, 우선적인 요구 조건은 장소를 연결시키거나 장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출발지로부터 막연하게 어딘가로 가는 것이다. 길, 철도, 공항은 경관과 함께 발전하기보다는 오히려 경관을 위압하고 가로질러서 경관을 토막 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무장소성의 표현이다. 이들 교통수단은 다양한 생활방식과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대규모 이동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범위를 넘어서 무장소성의 확산을 조장한다.

획일적인 상품과 장소는 획일적인 욕구와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창조된 것이며, 역으로 사람들이 획일적인 욕구와 취향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획일적인 상품과 장소에 의한 것이다. 타자지향장소의 극치는 아마도 환상적인 디즈니랜드, 가공적인 역사 공원, 미래 지향적인 박람회 같은 엄청나게 거대한 오락공원일 것이다. 디즈니화로 인해 실제 지리 환경과 거의 관련이 없는 부조리하고 인공적인 장소가 역사, 신화, 현실과 환상의 초현실적 조합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디즈니 월드와 그와 유사한 것들은 세계 곳곳에서 모아온 역사와 모험을 가장 상상력이 풍부하고 조형적으로 만들어 내보이며, 이것들을 암시적이든 명시적이든 기술공학적인 유토피아전망과 결합시킨다. 이러한 환상적인 가짜 장소들은 단순히 가족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며, 고립적으로 존재하는 몇 안되는 것으로 간략히 처리해 버리기 쉽다.

이런 환타지 랜드는 단조롭고 타락하고 무능력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기분 좋게 미소 짓는 영감의 장소이다. 이에 더하여 그런 곳들은 미리 보장된 흥분, 오락, 흥미를 제공하는 유토피아를 어느 정도까지는 진짜처럼 보여준다. 반면에 이런 곳은 우리가 직접 여행을 해보거나 상상해 볼 기회나 노력을 소용없게 만들어 버린다. 사실 디즈니화는 현대 서구 문화의 주류에서 볼 때 우연히 발생한 피상적이고 제한적인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자연과 역사를 객관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대중적이고 키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디즈니화는 그런 지배를 가능하게 만든 기술적 성취에 숨겨진 어떤 태도를 독특한 모습으로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미래화는 주목할 만한 무장소의 형식이다. 새로운 스타일과 테크닉을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계속해서 장소를 파괴하며, 마침내 시간과 전통이 장소에 부여한 진정성까지 부인해버리기 때문이다.

광고나 포장이든 아니면 상품 자체이던, 대량 생산과 관련된 기업들은 결코 기회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러한 활동은 획일적인 취향과 유행을 강요함으로써 그러한 대중문화를 유지 창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사실 국가는 공공 주택이나 자원 관리 같은 부문에서 대기업과 같은 많은 기능을 한다. 이런 국가적 표준화가 법률상에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법률 역시 직간접적으로 토지 이용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개발과 입법을 통제하고 있다. 국가나 지방 정부는 경제 발전과 공간 계획에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장소 만들기나 장소파괴에 엄청난 영향을 행사한다. 국가는 근대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기술과 산업, 경제 체제에 보조적 존재로서 기술과 산업경제체제 역시 무장소성에 대한 적잖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진정한 경험과 관련된 장소의 의미와 다양성의 깊이가 대부분의 현대 문화에서는 크게 약화되었다. 점차 의미 있는 장소들이 사라지고, 무장소의 지리를 향하고 있으며, 밋밋한 경관, 의미 없는 건물 패턴들이 늘어가고 있다. 무장소의 지리에서는 개개의 장소들이 피상적이고 판에 박힌 이미지로 경험되며, 사회 및 경제 활동이 이루어지는 불명료하고 불안정한 배경으로만 경험된다. 장소와 무장소간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관계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지리적 경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무장소의 전반적인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장소성을 현재적 경관이라는 동시대적 맥락위에 올려놓고 경관 경험의 주요 측면들을 밝혀야 한다. 무장소성은 이러한 현대경관의 맥락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경관의 본질적 부분이며, 그 산물이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현대 경관은 일반적인 편리성과 고도의 효율성의 지리를 갖추고 있다. 비록 그 깊이와 다양성이 부족하고, 과거의 지리를 모두 말살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경관이 최근의 현상이기 때문에, 그 특징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든가 편리성과 효율성이 반드시 부조리와 무장소를 야기한다거나, 혹은 현대 경관에서는 매우 의미 깊은 장소들이 생겨날 전망이 없다고 믿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제 일상생활은 더 이상 일정한 범위를 가지는 장소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전통적 의미의 장소에 대해 어떤 애착이나 정체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소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장소는 우리의 생활양식에 큰 영향력과 파급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장소든 무장소든 일상생활에서 삶에 시나브로 스며들어, 우리는 장소가 바뀌는 행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저자의 무장소의 지리가 그냥 필연적이고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경관의 한 특징에 불과하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전통적 장소성이 뿌리 뽑히고 그 뿌리 뽑힌 장소를 우리는 흡사 진짜라는 신념을 가지고 현시대를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봐야한다. 저자가 말한 장소의 진정성도 우리는 어쩜 잃어버린 채 살지는 않는가 말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장소의 창출을 시도하고 있다. 흔히 자본과 권력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를 가지는 이러한 새로운 장소들의 창출과 홍보는 때로 은밀하게 이루이지지만, 때로 매우 노골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이른바 장소마케팅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들은 가시적인 정체성을 자극한다고 할지라도 장소의 뿌리내림, 즉 존재론적 안전감을 제공하지 못한다. 다른 한 사항은 복원되어야 할 미래의 장소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미래 장소에 대한 유토피아적 상상력도 필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기초한 미래의 장소를 실현하기 위하여 실천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진정한 장소성은 장소의 외형적 환경의 본원과 이에 대한 의도적 의미부여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위한 실천과정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재형성되는 것이다.

장소의 의미는 그 물리적 형태와 마찬가지로 덧없는 것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관 경험의 근본적 토대는 점점 더 무장소적인 것으로 바뀌고 있다. 무한한 수요의 결과가 될 끊임없는 장소 박탈에 대항할 가장 좋은 무기는 사람들의 장소에 대한 감성을 재생시키는 것과 무장소성을 초월하는 데에서 찾아야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의 장소를 만들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고, 그런 장소들을 개조하고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장소에 진정성과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장소가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뿌리와 배려를 허용하게 될 조건을 제공하는 것은 아마도 가능 할 것이다. 장소가 우리에게 중요하다면, 뿌리 뽑히고 점점 높아지는 지리적 이동성과 무장소로 인한 정신적인 결과와 도덕적 문제를 우리 모두가 정말 걱정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진정으로 장소 만들기를 위한 접근 방법을 탐구해야 한다. 장소는 생활세계가 직접 경험되는 현상이고 개인과 공동체 정체성의 중요한 원천이며, 때로는 사람들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깊은 유대를 느끼는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끄집어냄으로써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장소의 변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믿어왔던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수단의 개입으로 어떤 연유로 말미암아 변화가 초래되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물론 해결책은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그의 주장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 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그 전에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던 일들이 공간을 통해, 우리가 믿는 장소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장소에는 완전히 무심했던 우리에게 반성적 성찰을 제공해주는 하나의 지침이 아닌가 싶다. ‘장소 그 자체가 나’라는 말처럼 장소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추억을 상기시켜주는 훌륭한 매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편협한 지적․사회적 관행이나 유행에 따르지 않고 장소를 음미하려는 노력을 동반해야할 것이다.

 

 

※참고자료

- 【장소와 장소상실】(에드워드 렐프 지음, 논형, 2008, 서울)

-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장소성의 상실과 복원】, 최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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