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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y Chow, 2002, “Chapter 1: The protestant ethn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in The Protestant Ethnic &the Spirit of Capitalism, Columbia University Press, 19-49. 발제: 박경환 (2009. 6. 7) <글로벌 시대의 민족성(ethnicity) 거래> 중국은 1997년 장쯔민 주석이 미국을 방문한 직후 유명한 정치범인 Wei Jingsheng을, 그리고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기 직전 또 다른 유명한 정치범인 Wan Dan을 석방했다. 이 두 명은 지금 모두 미국에 살고 있다. 사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서양은 계속 중국의 “인권‘을 문제시 해 왔다. ”인권“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서양의 매스미디어와 정부는 민주주의, 의사표현의 자유, 정치범에 대한 기본권 보장, 그리고 인간 장기의 암거래 등과 관련하여 중국은 인권에 있어 무엇인가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냈다. 이에 대하여 중국 당국은 중국에 있어서 인권에 대한 정의가 서양의 것과 같을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즉, 서양은 계몽주의 이후 (인권과 관련된) 자신들의 도덕적 주장을 ”보편“이라는 차원에서 주장해오고 있지만, 중국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자기에게 주어진 위치, 즉 문화적 전통, 가치, 역사적 차이의 기반 위에서만 말할 수 있다. (서양이든 중국이든) 오늘날 글로벌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인권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국제 관계에서 생체정치적 거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중국은 정치범이라는 상품을 교환함으로써 서구 국가들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보다 완곡하게 표현하게 하며, 이는 중국이 (인권문제로 수출을 금지하고 있는) 서구의 더 많은 국가들로 다른 상품을 수출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중국은 계속해서 정치범이라는 상품을 팔기 위해 새로운 정치범을 찾아 창고에 저장해 두어야 한다) 중국만이 이러한 정치범 석방에서 이익을 보는 것은 아니다. 중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지만 중국의 전체주의 체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서구의 기업들은 이러한 중국 정부의 계산적인 움직음으로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는다. 요컨대, 중국과 서구 사이에 이루어지는 많은 상품들의 거래는 ”인간“이라는 상품의 거래에 의해 (죽었을 때는 장기 매매의 형태로, 살아있을 때에는 정치범 석방이라는 형태로) 더욱 촉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중국만이 인권을 오용하는 유일한 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중국의 사례는 오늘날 글로벌 상품화의 과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중국”이라는 하나의 민족성(ethnicity) 자체가주류적이고 규준적인 것으로부터 구분되는 일종의 타자성 혹은 외래성으로서 거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족성은 민족집단에 의해 점유되어 그냥 거기에 있는 정적인 공간(static space)이 아니라, 민족적(ethnic)이라고 간주되는 사람들과 이들을 인식하는 서구화된 청중 간의 문화정치적 관계이다. (곧 중국의 민족성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해 보고 듣는 청중들에 의해 함께 형성된다) 따라서 중국의 인권 문제는 중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미국화된(서구화된) 중국의 문제’로서 중국의 정치인 및 정치활동가와 아울러 미국 의회, 기업, 미디어, 헐리우드, 인권단체활동가, 유권자 등이 함께 관여되어 있다. 민족집단은 보편이라고 간주되는 서구에 대한 특수성으로 “그들”의 형태로 존재하며, 오직 “그들”만이 야만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장기를 밀매하는, 인간을 교섭물품으로 사용하는 문화를 가진다고 간주된다. 상품으로서의 민족(ethnic)은 단순히 과거의 휴머니즘이나 실존주의 내에서 이해되기보다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자본주의 논리는 Max Weber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의 문제, 즉 환언하면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의 전통에서 시작된다. 민족성, 자본주의적 상품화,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의 정신문화 사이의 복잡한 계보학적 관계를 지도화하기 전에, 매우 정의하기가 어렵고 기만적인 "민족성(ethnicity)"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며, 이에 앞서 인종(race)와 민족(ethnicity)에 간략히 살펴본다. 인종과 민족은 동일한 용어가 아니지만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절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생산적인 논의를 가져오기 힘들다.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itities》에서 Immanuel Wallerstein은, 인종(race)과 인종주의(racism)는 글로벌 자본과 노동의 부산물이며, 민족성은 로컬 문화적 혹은 공동체적 사회화의 과정의 형태로서 인종에 대해 하위적이다고 본다. 한편, 이와는 달리 Balibar는 민족성은 모든 이데올로기와 마찬가지로 “허구적”이지만, 민족성의 사회적 기능은 (개방적, 포함적 과정인) 언어 습득과 (폐쇄적, 배타적 과정인) 인종적 그룹화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본인은 Balibar의 정의에 가까운 접근 방법을 택하지만, 노동-자본의 자본주의 계급구조는 인종화된 혹은 민족화된 분리로 나타난다는 고전적인 주장은 나의 (지적) 탐험에 깊게 영향을 미친다. <민족성(ethnicity): 보편적인 범주인가 아니면 로컬한 범주인가?> 민족성(ethnicity)의 사전적 정의는 그리스어로 민족(nation) 혹은 사람(people)이라는 의미의 어원인 “ethnos”에 기인하는데, 이는 원래 유대인과 크리스트교도들이 “이방인” 혹은 “이단자”를 차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민족성은 독특한 특징을 소유하는 문화적, 언어적, 인종적 공동체를 표현하는 보다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은 민족적이다(every person is an ethnic)’는 보편적인 함의를 갖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회과학에 있어서 민족성이라는 개념은 엄밀한 분석 개념으로 사용되기에는 너무 모호한 상태에 있다. Max Weber는 민족성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 번째는 특정 민족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의 믿음에 준하는 “주관적인” 범주이며, 두 번째는 어떤 정치적 국가가 구성원의 지지를 얻는 방식으로 민족성에 호소를 한다는 측면에서 “정치적인” 범주라는 것이다. 따라서 Max Weber에게 있어서 민족성은 신화적인 잠재력을 가진 것으로서 정치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민족성은 원래 유대인/이교도, 기독교도/이단자 등과 같은 배제와 경계 구분의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이들을 아우르고 경계를 없애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개념적 변화가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 차이, 정체성, 폭력을 다루는 과정에서 자유주의 이론가들이 민족성을 초역사적, 초문화적, 초인종적인 것으로 간주해 온 결과라고 주장한다. 근대 이전의 시기에 전형적이었던 타 민족집단에 대한 경계 짓기와 적대감은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cism)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민족적이다’라는 인식하에 민족집단 간의 ‘차이’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에 (그리고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용의 강조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오늘날 민족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백인 문화집단은 유색인만큼이나 민족적이며, 이는 우리와 그들, 집단 내부와 집단 외부 사이의 경계를 상대화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의 종식 이후 동유럽에서는 보스니아 코소보의 대량학살과 같은 민족집단 간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백인 민족국가 내부에서도 유색인에 대한 배제와 침해가 계속되고 있고, 그 외에 팔레스타인, 중동지역, 퀘벡, 동남아시아, 티벳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즉, 민족성은 차이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에 대한 인간주의적 관용의 토대로 나타나기보다는 타자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타자를 제거하려는 폭력의 토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미국의 경우 민족성은 주로 유색인 집단을 지칭하는 데에 관행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곧 민족성에 대한 WASP식의 정의이며, 이는 ‘앵글로 색슨에게 민족성이란 없으며‘, ’민족성은 비유럽게 혈통을 지닌 사람들에게 강하게 나타난다‘는 주장을 함의한다. 곧, 미국 대학에서 “ethnic studies”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는 지식은 영국계, 프랑스계, 게르만계, 스칸디나비아계가 아니라 유색인들과 그들의 역사에 관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Ethnic Studies에서의 민족성의 “인종화된” 용법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경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 도시 내부의 소수민족 집단: 히스패닉과 같은 비유럽계, 유색인 이민자들 - 원주민 - ethnonationalism movement로 대별되는 민족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민족집단: 쿠르드족, 팔레스타인, 시크교도, 스리랑카 타밀 등. - 인도네시아, 케냐, 자메이카와 같은 다원사회(plural society) 내부의 이질적인 민족집단들 이처럼 민족성은 개념 자체가 대단히 모순적이며, 사실 민족성이라는 개념이 유효한 이유도 바로 그 본질이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점에 있다. 즉, 민족성은 하나의 보편적, 중립적, 기술적인 용어라고 주장되지만, 동시에 민족성은 ‘시간’에 의존하는 경계 짓기의 서사에 이용되는 불안정한 개념이기 때문에 많은 정치인들의 정치적 수사를 정당화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실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경계는 항상 경계를 중심으로 어느 한쪽은 우월하고 다른 쪽은 열등한 계층적 의미를 전달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서구와 북미의 경우 민족성은 문화적 경계를 시간적/역사적 차별화의 형태로 쉽게 치환될 수 있으며, 이는 어떤 민족집단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만 (우리와 동일한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상대적으로 열등하거나 종속적인 집단을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다. 백인집단에 의해 민족적이라고 분류된다는 것은 곧 (직접적인 차별과 무시가 아닌) 보다 포괄적이고 자유주의적 문화 논리에 근거하여 백인 집단으로부터 “인정(recognition)”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날 “다문화주의” 혹은 “다양성”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으로 찬양되고 있는 자유주의적 문화 논리인데, 이는 차별과 배제의 경계를 수사적으로 민주화하지만 실질적으로 정부, 기업, 대학 등과 같은 제도에 의해 게토나 엔클레이브(enclave)의 형성이 촉진되는 과정을 동반한다. 오늘날 미국이야말로 보편주의적 열망과 특수주의적 실천 사이의 긴장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Werner Sollors가 민족의 어원인 'ethnos'가 사람과 타자를 동시에 의미한다는 측면에서 민족성이라는 개념의 태생적 모호성을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규준이면서도 동시에 편차이며, 소수민족의 특징이면서도 국가 전체의 특징을 의미한다. 나는 후반부에서 밝히겠지만 여기에는 어원적인 이유 이상의 모순이 있음을 주장한다. 많은 이론가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 내부에서는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사이에 해결되지 못한 긴장이 잔존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민족 정체성이 공유된 역사적, 문화적 과거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 기회, 자유, 민주주의와 같은 추상적, 포괄적, 이상적인 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현실적으로 한 번도 이러한 이상과 일치한 적이 없다. 이는 Stratton & Ang이 지적하는 것처럼 미래에 수정되어야 할 역사적 오점의 문제가 아니라 ‘헤게모니적 규준성’이 가지는 바로 그 효과로 파악되어야 한다. 곧, 이러한 헤게모니적 보편성으로 인해 미국에 있어서 민족성은 필연적으로 양가성(ambivalence)을 띠게 되는데, 소위 하이픈화(hyphenated) 미국으로 일컬어지는 것처럼 미국은 African American, Asian American, Italian American과 같이 전자는 특수성을 후자는 보편성을 동시에 의미하는 정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설명이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이란과 같이 소위 ‘후진적’이라고 간주되는 국가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민족성 연구의 동향> 오늘날 민족성은 모더니티 내부에서 (배타적인) 경계 짓기의 한 방식으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포용적인) 경계 없음의 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모순을 안고 있고, 바로 이 점으로 인해 민족성은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이득이 위험에 처하는 순간에는 항상 (외부에 대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날 민족성에 관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의 방법론적 패러다임 사이에 속해 있다. 첫째는 민족성을 인류 역사의 도처에서 발견된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보편적인 조건(universial condition)’으로 설정하는 연구로서, 이들은 민족성을 하나의 ‘문화’로 이해한다. 따라서 민족성은 개별적인 수준에서 조사될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수행’의 문제로 파악된다. 두 번째는 특정 민족집단에 대한 불평등과 같은 ‘민족성의 정치(politics of ethnicity)’에 관한 연구인데, 이들은 앞에서처럼 민족성을 하나의 문화적 유산이자 개인의 수행으로 파악하는 보편주의에 반대하는 대신, 민족성을 (초국적 기업의 이동, 글로벌 체제의 전략적 요충지,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같은) 주요한 경제적, 지정학적 네트워크 내에 위치시켜 파악한다. 이들은 민족성을 억압의 원천 혹은 억압에 의한 이용에 취약하다고 파악하면서 현대 서구 사회에서 백인과 유색인 사이에서의 비대칭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관계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와 같은 서사를 통해 분석, 비판된다. 그러나 이 두 방법론적 패러다임은 공통적으로 이론적 편견을 생산하고 있는데, 이는 곧 인간 주체(human subject)를 ‘범할 수 없는(inviolable)’ 것으로 (inviolable은 완결된, 닫힌, 투과될 수 없는 정도로 파악) 간주한다는 점이다. 전자는 인간이 고유한 민족적 속성과 관습을 담지하므로 인간성(humanity)란 항상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후자는 외부의 억압에 대한 투쟁과 저항을 통해 (본래의) 인간성이 회복되어 되찿아져야 할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 이 두 패러다임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민족성은 이미 생체정치화된 경제적 관계의 일부로서 민족적이라고 간주되는 인간성 그 자체가 상품화의 과정 그리고 권력의 비대칭적 분포 ‘내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이다. 민족성을 (거래되어야 할 상품으로 간주하는) 상품화의 관점에서 파악하면 ‘한 민족집단의 구성원이 어떻게 자기의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이상 충분치 않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어떤 민족집단의 한 구성원이라고 믿게 하는 힘, 즉 (민족집단 내에서) 자기 자신이 목소리를 가진 하나의 주체라고 믿도록 하는 이데올로기적 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대답되어져야 한다. 오늘날 민족성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인간주체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점과 점차 강렬해지고 있는 집단적 상품화라는 과정 사이에 위치하면서, 민족성과 관련된 (1)인간주체에 대한 보다 정교한 분석과 (2)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의 합리화와 체계화 과정에 대한 (인간주의적) 반대라는 이 두 가지 패러다임이 여전히 지속되지만 또 동시에 이를 초월되고 있다. 따라서, 민족 주체화에 대한 어떠한 분석도 (1)민족적인 것들이 어떻게 비인간화를 야기하는 객체화에 종속되고 저항하는가의 문제뿐만 아니라 (2) “(신의) 호명”이라는 (혹은 Max Weber가 ’노동윤리‘라고 부리는) 심리적인 메커니즘의 이해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소외된 노동으로서의 민족성: 루카치의 유산> 민족성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이를 노동의 문제와 관련짓지 않고 있지만, 오늘날 현실에서 사회적 열등함을 의미하는 외래성(foreignness)은 노동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 민족적이라고 간주되는 많은 집단들은 사회의 윗부분에서 요구하는 필수적인 서비스를 공급하는 노동을 수행한다. 민족성은 이주의 경험과 매우 밀접하게 얽혀있지만, 본 저술에서 나의 목적은 이주 자체보다는 특정 사회 내부에서 이들이 ‘민족적’이라고 간주되면서 열등한 위치를 차지하여 노동에 참여하는 과정을 분석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성들이 저임금 혹은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방식을 고려할 때 여성들은 하나의 민족집단이기도 하다.) 이주에 관한 연구는 소위 ‘노동의 민족집단화’에 관심을 두고 상품화된 노동과 민족집단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 나는 이주성, 디아스포라, 이민, 추방 등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들이 민족성이 어떤 사회의 외부에서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지속되는 현행의 상황을 간과한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민족집단에 속한다는 주장은 민족성을 하나의 선험적인(a priori), 본질적인 외래성으로 파악하므로, 나는 이러한 실증주의적 관점을 넘어서고자 한다. 따라서 민족성과 노동 사이의 관계는 이주노동자의 존재론적 뿌리 뽑힘의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모더니티에서 민족성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집단에 의해 생산된 외래성의 위치이며 이는 그 사회 내의 계층화된 노동 구조에 의해 정의되는 동시에 노동 구조를 구성한다는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처럼 노동의 상품화라는 관점에서 민족성을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민족성을 ‘특수한 문화’로 이해하는 기존의 관점을 넘어설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민족성은 일종의 변동적인 사회관계로서, 노동에 의해 경계가 그어지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종주의는 언제나 계층화되어 있지만, 그러한 계층 구조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연하며 가변적이다. 가령, 만약 흑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흑인이 없거나 그 수가 모자란다면, 그 사회에서는 ‘백인 검둥이’가 발견될 (혹은 고안될) 것이다. 민족 노동은 저임금이나 착취와 관련되어 있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국 학계의 경우 African American Studies이나 Asian American Studies와 같은 분야에서 가르쳐지는 민족 역사 내용은 주류사회에 의해 결코 인정받지 못한 민족 집단 내 선조들의 작품들을 공부함으로써 과거의 서사를 재반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관점은 ‘노동의 소외’에 대한 고전 맑스주의적 분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에 게오르그 루카치가 제시한 계급 의식 모델이 이러한 (민족적) 문화연구에 있어서 가장 설득력있는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 루카치는 민족성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착취당하는 주체’를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는 주체-외부세계의 문제를 자연/인간, 주체/객체 등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 내에서 다루는 것을 초월한다. 그는 의식을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인 인식 상태’로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비판의 역량을 통하여 총체성으로서의 역사를 표현하는 집합적인 인식 상태라고 이해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착취와 종속 하에서 프로레타리아트만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을 위하여) 역사를 변혁하고 초월할 수 있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루카치는 의식의 문제를 상품화의 차원에서 분석한다. 객체화와 물신화라는 경제적 과정은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필연적인 현실을 정의하는데, 이러한 현실은 지주계급이든 프로레타리아트이든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지주계급은 이러한 현실에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프로레타리아트는 이를 파괴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느낀다. 왜냐하면 동일한 경제적 과정 내에 있지만 이 두 계급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position)”가 다르기 때문이며, 후자의 위치가 비판적인 “입장(standpoint)”과 변혁에의 열망을 일으킨다. 루카치는 분명 프로레타리아트가 저항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그러한 모습의 구성은 (프로레타리아트는 상품화의 외부에 있으면서도 상품화의 내부에 있다는 측면에서) “양가성”을 갖는다고 본다. 첫 번째의 프로레타리아트의 의식은 “상품의 자기-의식”인데, 이는 ‘자기 스스로가 상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에 (자기 자신이 노동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상품 그 자체이므로) 비로소 사회 내에서 자신의 존재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이는 물신화된, 상품화된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의식의 측면을 가리킨다. 그러나, 루카치는 이와 동시에 프로레타리아트는 다른 사람(혹은 계급)으로부터 자신을 구분짓는 또 다른 의식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즉, 노동자가 물신화되고 상품화되는 과정은 노동자를 비인간화하고 영혼을 위축시키지만, 정확하게도 바로 이러한 과정은 노동자의 인간성(humanity)과 영혼(soul)은 결코 상품으로 전환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노동자는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루카치가 말하는 상품화로부터 순수하게 남아있는 “인간성” 내지 “영혼”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들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루카치는 정확히도 “노동”이 이에 대한 해답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직 인간만이 노동을 할 수 있고,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재생산되며, 모든 사회적 실천과 자유의 모델이라고 본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성”을 갖게 되며, 이는 노동에 의한 필연적인 존재론적 결과이다. 그러나 루카치는 노동을 하나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하면서도 이를 동시에 (인간의) 선험적인 존재론적 조건으로 간주하는 이유로 인해 근본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속박의 서사로서 계급의식과 민족성의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기> 우리는 위와 같은 모순으로 인해 노동을 이상화하고 본질주의화하는 루카치의 문제설정 방식을 그대로 따르기는 힘들며, 다음의 3가지 측면에서 그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시간성(temporality)의 문제인데, 루카치는 억압과 해방, 상품과 비상품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설명함으로써 프로레타리아트 의식이 변증법적인 “현재”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A이면서도 동시에 A가 아닐 수 있기 위해서는 곧 A의 외부가 있어야 하며, 루카치는 이것이 “인간성” 혹은 “영혼”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루카치는 인간성과 영혼이 의식의 (사회적 혹은 시간적) 질서의 외부에 존재다고 인식한다. 둘째, 루카치의 주장을 하나의 서사로 읽게 되면 일종의 목적론적인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즉 프로레타리아트에 관한 이야기가 (물신화와 상품화와 같은) 억압에서 (계급의식의 출현과 같은) 자각으로 그리고 (계급없는 사회의 달성과 같은) 궁극적인 해방으로 이어지는 일종의 선형적인 발전 과정으로 그려지고 있다. 프로레타리아트는 마치 모든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상처입은 자의 모습 그리고 종국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함으로써 그들을 억압에서 자유롭게 하는 그리스도의 기독교적 숭배를 연상시킨다. 셋째, 루카치의 모형은 단순한 서사에 그치지 않고, 계몽주의 이후 (폭력과 반(counter)폭력과 같은) 근대적 관념에 기초한 “속박(captivity)”의 서사로 읽혀질 수 있다. 즉, 계몽주의 이후 모더니티는 폭력, 야만, 원시적 무자비함(intolerance)과 같은 전근대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면서 보다 평화로운, 문명화된, 관용적인 사회를 그리고 있다(Leonard Tennenhouse). 이러한 측면에서 모더니티는 항상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서 폭력, 야만, 원시적 무자비함 같은 요소들을 찾아내어 이를 시간적 타자, 곧 과거의 속박으로 간주하고, 모더니티는 이러한 비근대적 속박에 갖혀 있는 인간성을 해방시키는 진보적 작업으로 이해된다. 곧, 속박은 근대적 문명의 해방적 의미에 대하여 필수불가결한 이면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속박이 하나의 역사적, 담론적 구성물로 간주된다면, 자연적이고 논리적이라고 간주되어 왔던 저항이라는 관념 또한 일종의 근대적 산물로서 새롭게 개념화(역사화)되어야 한다. 속박에 대한 Tennenhouse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루카치가 주장하는 계급과 의식의 문제를 일종의 속박 서사로 읽어낼 수 있는데, 프로레타리아트는 (인간의) 자본주의적 상품화 과정 속에서 원시적인 국가 내에 갇힌 인간성의 원형이며, 저항을 통하여 보다 문명화된 존재 조건을 달생하기 위해 투쟁해야만 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프로레타리아트는 무엇을 통해 자신의 속박에 저항할 수 있는가? 루카치는 속박의 원천은 바로 상품화이며, 이 상품화라는 사슬을 깨고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결코 상품화될 수 없는 자신의 ‘인간성’ 혹은 ‘영혼’을 통한 것임을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성 혹은 영혼은 모더니티를 하나의 해방으로 간주하는 역사적 서사에 의해 구성된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에게 있어서 인간성 혹은 영혼은 역사적 조건 외부에 있는 본질적으로 흔들릴 수 없는 조건으로 간주된다. 나는 이러한 자기모순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의 저술은 의식에 관한 (혹은 작취당하는 주체성에 관한) 가장 영향력있는 모델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페미니즘에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에 이르는 정체성에 관한 많은 소수 담론들은 (집단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자기가 외부에 의해 소유되어 있다는 인식 그리고 자기에 대한 존재론적 긍정을 바탕으로 하는) 루카치의 서사방식을 답습하면서, 인간성과 주체성이 손상, 위협받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본질적으로 자유롭다고 간주하고 있다. 특히, 민족성에 관한 이론화의 전체 과정은 루카치의 모더니티 서사에 담긴 모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민족성이 (우리는 누구나 다 민족적이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보편이면서도 (항상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람들에 적용되어 왔다는 측면에서) ‘동시에’ 특수로서 개념화되고 있다는 모순 때문이다. 따라서 민족성의 내적 모순이 화해된 상태로 남기 위해서는 담론적 보상이 필요하며, 이는 (문화적, 민족적 차이를 관용적으로 대할 수 없는) 무관용(intolerance)의 느낌이 민족적 타자성(ethnic otherness) 혹은 민족의 과거(ethnic past) 라는 외부의 형태에 투사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개발도상국을 방문할 경우 혹은 농촌을 방문할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됨). 이는 곧 국지적인, 외래적인, 제한된 형태의 민족성을 원시적이고 미개한 영역으로 밀어붙이고 우리 스스로를 그러한 영역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과정이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민족성의 내적 모순이 담론적인 화해 상태로 남게 된다. 그러나, 외면상 진보와 해방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거리화, 거부, 그리고 반박의 행위는 타자를 민족화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즉, (누구나 다 민족적이므로 우리는 민족적인 차이에 관용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우리는 (진보와 해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미명 하에) 그러한 관용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자민족중심적(ethnocentric)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우리”와 “그들”이라는 구분선을 긋는다. <항의의 문화와 자본주의 정신> 민족적 존재는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저항 중에 있는 속박’의 이미지로 상상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가령 부정의에 대한 불평 혹은 희생자에 대한 인정과 보상 등을 요구하는 항의와 같은) 일종의 항의(protest)와 관련되어 왔다.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보편주의적 주장은 인간 해방을 꿈꾸기 위해서 폭력, 착취, 상품화를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속박으로 문제설정해야 한다는 모순을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은 보편주의를 뒷받침하는 항의의 문화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인간성을 사회적 과정의 외부에 있다고 간주하는 루카치의 본질주의적 관점으로는 대답되기 힘들며, 오히려 이러한 항의를 자본주의 “내부”의 문제로 인식함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나는 근대적 도덕을 둘러싼 이러한 모순이 Max Weber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베버는 자본주의의 노동윤리의 기원이 종교, 특히 중세 말의 종교개혁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추적했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물질적 추구는 단순히 어느 시대에서나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탐욕의 결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서양의 종교적 세속화 과정에서 독특하게 나타나는 내적 규율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규율은 종교개혁 이후 나타난 (주님에 의한) “소명(부르심. calling)”에 대한 믿음, 즉 모든 개인에게는 주님이 부여하신 각자만의 사명이 있으며 개인은 그 주어진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이다. 이 “소명”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활동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훌륭한 도구이며, 세속적 일에 대해 (열심히) 규율화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인생을 마감할 때 종국적으로 많은 은덕을 쌓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면, 성실, 끈기는 신의 은총이 가시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며, 반대로 일하기를 거부하거나 일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것은 (더 많은 은덕을 쌓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신의 은총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베버는 종교의 세속화 과정에서 이러한 종교적 원리는 점차 약화되었지만, 이러한 원리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소위 ‘세속적 금욕주의’를 통해 더욱 명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베버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종교의 윤리적 ”원리“가 아니라 (신의 은총이 드러나는) 윤리적 행위 형태들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청교도(Puritanism) 각 개인의 ”윤리(ethos)“를 형성하며, 개인은 (이러한 윤리적 행위를 통해 쌓은 자신의) 은총으로서 (심판의 날에) 신 앞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의 ”정신“, 특히 근대 ”부르주아지 중산계급“의 윤리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 오늘날의 ‘신없는’ 세계에서 구원의 종교의식은 탈가치화 되었지만, 신의 은총을 쌓는 행위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합리적, 체계적, 결과-지향적 노동 윤리로 나타난다. 자본주의는 청교도윤리를 계승함으로써 ‘근면(열심히 사는 것)’에 대한 심리적으로 뒷받침한다. 즉, 세속적 성공은 신의 은총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구원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루카치의 모델을 베버의 분석과 나란히 놓고 이해하면, 자본주의는 (고전 맑스주의가 주장하는) 노동의 소외가 낳는 물질적 이윤을 전유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노동을 함으로써 갖게 되는) 은총과 구원과 같이 (원래 노동자에게 속하는) 비물질적인 보상까지도 전유함을 알게 된다. 루카치는 프로레타리아트의 저항의 원천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성 혹은 영혼과 같은 본질주의적 용어에 의존하고 있지만, 베버는 물질적 생산 조건과 그와 관련된 사회관계의 토대 하에서 주체성의 형성을 이론화한다. 베버는 종교가 단순히 허구적인 상부구조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물질적 지원의 형태로서 실제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이는 제머슨(Fredric Jameson)의 표현을 빌리자면 “진짜 맑스주의 사고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것으로, 오늘날 주체성의 형성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들과는 달리 심리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의 상호 적응을 보여줌으로써, 자본주의의 객관적인, 금융적인 작동 과정에 주관적인 것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를 잘 드러낸다. 루카치의 문제의식이 “어떻게 인간 내면의 힘이 자본주의의 악에 저항하고 항의하는가?”였다면, 베버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인간 내면의 힘이 자본주의 내부에서 발생하였고 어떻게 자본주의의 진보에 기여하는가?”였다. 루카치에게 노동은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원초적인 인간 본질이라면, 베버에게 노동은 하나의 문화적 산물로 다루어진다. 베버의 모델은 인간(성)이 노동에 앞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규율과 처벌의 세속적 실행을 통해 이루어지는 노동이 인간을 생산한다고 이해한다는 측면에서, 푸코의 주장은 베버의 근본적 주장의 연장선 상에 있다. 루카치와 베버의 관점에서 살펴본 근대 이후의 민족성에 관한 논의는 다음의 4가지 함의를 갖는다. 1) 민족성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루카치의 계급의식 모형은 강력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카치의 모델은 일정한 모순을 갖고 있는데, 이는 비판의식에 도달한 집단이나 계급이 완전하게 상품화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러한 상품화를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3) 이러한 모순적인 서사 구조는 희생자를 속박의 위치에 두고,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구원이 저항과 항의에 있다고 설명한다. 4) 루카치에게 있어서 저항과 항의는 목적론적인 서사이지만, 베버에게 저항과 항의의 서사는 ‘보편적인 정의에 (도덕적으로) 몰두된 근대적 서사이자 자본주의의 정신의 효과이다’. 결국, 저항과 항의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 구조의 일부분이다. (부연한다면) 저항과 항의는 자본주의가 번영하는 원인이다. <나는 항의한다, 고로 존재한다: 글로벌 자본 시대의 민족성> 중국과 서양 사이의 거래 관계와 관련하여, 인권의 상실/속박은 명백히 민족성의 차원, 즉 중국의 차이 혹은 중국적임의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초문화적 거래(구조)에 있어서 중국 사람은 논리적으로 ‘희생자’로 간주되어야 하고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항의하고 투쟁해야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오늘날 민족성은 그 것이 지니는 불확실한 지위 때문에 인식론적으로 매력적인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명백히도 민족성은 민주주의, 표현의 자유, 인권과 같은 도덕적 보편주의에 기반하고 있는 유토피아적 항의와 투쟁의 패러다임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패러다임은 객체와와 물신화와 구체화와 같은 체계적인 자본주의적 윤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인간을 일종의 상품이란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오늘날 민족성은 여전히 ‘소외된 노동’ 그리고 ‘속박된 상태에서의 저항’이라는 근대적 서사 하에 놓여있지만, 나는 오늘날 민족성은 (계급의식과 마찬가지로) 소명, 기회, 보상의 메커니즘으로 충만한 자본주의의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작동 과정에 각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족적이고자 하는 것은 항의하고자 하는 것이며(to be ethnic is to protest), 이러한 항의는 실질적인 해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세계적으로 유통되고 가시화되기 위한 것이다. 즉, 오늘날 민족적인 것은 항의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민족적인 것이 상품화될 수 없는 인간성 혹은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항의하는 것 자체가 경제적인 논리와 사회적인 소명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민족적인 투쟁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해당 민족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경우를 보면) 중국인 독재자나 반체제인사를 재현하는 종종 서양인, 특히 미국인들이기도 하다. “나는 항의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오늘날 한 개인이 더 많이 항의할수록 그 개인은 더 많은 일과 비즈니스와 이윤을 창출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민족성은 도덕적인 자기-생산, 자기-확장, 자기-증식되면서 급박하게 변화하는 (phantasmagoric) 글로벌 자본주의의 흐름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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