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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11/04
 

The Dialectics of Cultural Hybridity - Pnina Werbner (앞부분)

2009.06.07 17:25 | 대학원 세미나룸 | caneland@Y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628 주소복사

<사회공간이론교육세미나> 2009.5.19(화) 발제자: 박주희

Pnina Werbner, 1997, "The dialectics of cultural hybridity", in Pnina Werbner and Tariq Modood, Eds., Debating Cultural Hybridity: Multi-Cultural Identities and The Politics of Anti-Racism, Zed, London, 1-11.

 

 

The Dialectics of Cultural Hybridity - Pnina Werbner

 

 

The Power of Cultural Hybridity

 

* 문화적 혼종성 비판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최근의 열광은 거짓된 역설을 감춤. 혼종성은 강력하게 해석적으로 찬양되면서 아직은 평범하고 보충적으로 이론화됨. 모더니스트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까지 이론 속에 전형적인 전환에서 나온 역설은 반 본질주의자, 반통합주의자에 의해 에너지를 얻음.

역설의 한 측면인 문화적 혼종성의 힘은 모더니즘적 이론들에 들어맞음. 모더니즘적 이론들은 질서화된 사회성 및 체계적인 범주들에 기반하고 있음. 즉 사회가 민족적, 규범적 행동 및 금기 그리고 자명한 문화적 진실들 및 공식 담론들에 의해 경계 지어지고 ‘구조화’된 것으로 간주하는 이론들. 그러한 이론들에서, 범주적 적대를 파괴하고 더 나아가 문화적 반성성(reflexivity) 및 변화를 위한 조건을 창조하는 상징적 혼종들의 위반적인 권력을 말하는 것이 의미가 있음. 혼종들은 독특한 권력을 부여받고, 선 혹은 악을 타고난 것으로 인식되며, 그리고 그 혼종적 국면들, 공간들 혹은 대상들은 구체적인 의례들에 속박되고, 신중하게 보호되며, 평범한 현실로부터 분리됨. 여기서 혼종성은 사회적 질서에 대한 이론적 메타구축물임.

 

그러나 만약 문화적 혼합 및 교차가 전지구화적 경향의 맥락 속에서 일상화 된다면 어떨까? 그것은 혼종의 위반적인 권력을 제거하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적 이론이 일상적 혼종성과 위반적 힘 양쪽 측면에서 동시에 의미가 있는가? 정체성이 strangerhood의 관념을 무의미하게 하는 포스트모던한 불확실성들에 직면해서 구축될 때 문화적 혼종성에 의해 우리가 의미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화 그 자체, 모든 문화적 범주들은 언제 불확실하게 반영적으로 불안정하고 인지적 신념이나 확신을 결여하는가? (포스트)모던한 국민 국가의 주체들은 어떻게 그러한 애매함과 문화적 생산물, 민족성들 및 정체성들의 개화기에 반응하는가? 이것은 포스트모던 이론에서 중심적인 질문들이고, 이번 호의 저자들이 직접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질문이다.

 

그 역설은 헤게모니적 사회 구성체에 의해 분리될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분리된, 문화적 혼종성의 한계들에 관해 질문하도록 한다. 프리드만이 질문하듯이 문화적 경계지어짐, 민족성, 인종주의 혹은 외국인혐오를 강조하는 담론을 본질화하는 반혼종(Anti-hybrid)을 생성하는 세력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세력들에 들어있는 모호성과 복잡성들을 이론화하는가? 이방인들은 왜 이질성의 그 의미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타자애호증’의 시대로써 규정한 것 속에서 정의하기 어렵고 무의미하게 보임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위협을 취하는가?

모더니즘적 혼종성 이론은 매우 상이한 개척지들에서 그것의 발견적 성과를 거두었음. 무한하고 사회적인 질서에 관한 가정에서 출발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모순의 애매하고 모호한 매개자로써 사기꾼을 분석했음. 빅터 터너, 매리 더글라스...

사회 내부에서 원근적 입장에서 출발하면서, 모더니즘적 인류학의 이러한 눈에 띄는 기여는 국지적 문화 질서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에 도전하고, 그럼으로써 비판적인 문화적 자기반성성을 은폐하는 잡종적 상징적 기형들의 능력을 강조했음. 그들은 왜 위험한 혼합들이 문화적으로 두드러지고 금기들을 속박하는지를 설명함.

푸코의 헤테로토픽한 공간에 대한 분석과 같이, 모더니즘적 혼종성 이론은 저항 및 배제의 현장(site)을 살펴봄. 비슷하게, 바르뜨, 부르디외 및 바흐친은 인기있는 대중 문화와 공식적 담론에 대해 전복적이고 재활성화하는 반전으로써 축제를 분석했음. 햅디지가 분석한 청소년 문화의 전복적 브리콜라주와 같이, 그러한 대중적 혼합 및 전도는 그들이 대상, 언어를 병렬하고 전도하며 상이하고 규범적으로 분리된 영역으로부터 실천을 의미화하며, 자연적 세속성이나 장소 밖 문제를 찬미하는 것에 의해, 공식적 청교도적 공식 질서를 도전한다는 의미에서 잡종적임.

포스트모던적 관점으로부터, 이데올로기적 운동을 본질화하는 것이 횡단 문화적이고 다민족적 동맹을 구축하는 것에 의해 간주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자명할지도 모름.

정체성은 혼합에 열려있고 그 주체가 되기보다는, 혼종화에 저항하는 것처럼 보임.

우리는 공존을 침식하지만, 불확실하고 파편적이며 본질주의를 극화하는 것을 촉진시키는 schismogenetic한 세력들을 신문해야 함.

현재 탈구축적인 국면에서, ‘경계지어진’ 문화의 어떤 단일한 개념은 자연주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것으로 경멸적으로 명명됨. 그러나 대안은 동일하게 납득시킬 수 없음. 만약 ‘문화’가 순전히 잘못된 지적 구성물이라면, 문화적 정체성 및 혼종성의 파괴적이거나 재활성하는 권력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우리는 특정정체성, 공동체 및 질서화된 문화적 범주로부터 출발하는 낡은 담론을 넘어 공인되지 않은 이론적 흐름으로 이동해 왔음. 낡은 모더니스트의 시야에서 경계성(liminality), 장소 그리고 Betwixt-and between의 시간 등으로 이동해 왔음.

출현중인 혼종성에 대한 이론의 윤곽을 보기 전에, 바흐친의 중요한 구분을 서술하고자 함. 이 구분은 포스트모던한 혼종성 논의에 불필요한 혼란을 피하는데 도움을 줌.

 

의도적인 혼종성들

 

바흐친은 대화적 상상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언어적 혼종화에 대한 두 가지 형식 사이에 핵심적인 구분을 했음. 즉 무의식적, ‘유기체적’ 혼종성과 의식적, 의도적인 혼종성.

- 유기체적, 무의식적 혼종성은 모든 언어들의 역사적 진화의 특성임. 그것을 문화 및 사회에 더 일반적으로 적용하면서, 우리는 경계성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비반영적 차용, 모방적 전유들, 교환들과 발명들을 통해 역사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름. 자체 내부와 자체에 의한 문화는 없음. 동시에, 유기체적 혼종화는 질서 및 지속성의 의미를 붕괴시키지 않음. 새로운 이미지들, 단어들, 대상들은 언어 혹은 문화에 무의식적으로 통합됨. 반면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바흐친이 말하길, ‘유기체적인 혼종들은 침묵하고 불투명한 채로 남아있다. 그러한 무의식적 혼종들은 새로운 세계의 관점들을 위한 잠재력을 낳는다.’

- 더 나아가 유기적 혼종성은 미적인 혼종들이 같지 않은 사회적 언어들 및 이미지들의 상당히 의도된 융합을 통해 충격, 변화, 도전, 재활성화 혹은 파괴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토대를 창출함. 그러한 미적 조정은 유기체적 혼종들과 달리, 내부적으로 대화적이고, 융해될 수 없는 것을 융해함.

- 바흐친의 구분은 민족적으로 혹은 이민자 집단들 그리고 민족 국가 안에서 문화적 변화 및 저항 양자의 동시 공존을 이론화하는데 유용함. 따라서 그러한 미적 개입은 국가적이고 민족적 혹은 이민 집단들에 의한 일상적인 문화적 차용 및 전유들과 비판적으로 상이함.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미래의 사회적 변화를 위한 지반을 창조함.

 

* 혼종성의 긍정성

 

단일한 독백적, 권위적, 단일한 언어가 있는 어떤 폐쇄된 사회적 세계에 대한 미적 포즈의 위험성은 경계들을 넘어 작용하는 이질언어성(heteroglossia)의 위험임. 로트만(Lotman)의 ‘기호계’는 중심-주변 개념들(Papastergiadis)에서 이러한 이질언어성을 이론화하려는 시도임. 의도적인 이질언어성은 단일한 이데올로기, 문화 및 언어를 상대화함. 유기체적 혼종화는 문화적 전체론의 단순한 학문적 모델의 생존력을 의심하게 함.

그러나, 문화적 전체주의의 인류학적 이론들을 인종주의와 같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개정주의에 엄청난 아이러니가 있음. 즉 뒤르켐의 사회와 보아스(Boas)의 문화는 결국 진화적, 인종주의적 이론들을 반증하는데 사용된 강력한 분석적 도구들이었다는 것. 구조주의자와 상대주의자 사이의 인류학적 불일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통적인 목적은 만약 토착민들이 맥락 속에서 보인다면, ‘토착민’들의 명백히 기괴하고, 원시적이거나 야만적인 신념들 및 관습들이 합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의미있다는 것. 두 번째로, 그들은 문화가 그들 자신의 개념에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목적이 있었음.

문화적 혹은 사회적 전체론에 대한 인류학의 포스트모던한 비평의 아이러니는 현재 포스트구조주의적 국면에서, 심지어 보편적인 합리성, 진실 및 도덕성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인 거부에 의해 결국 표시되는 그것의 언명에 의해 혼합됨.

문화와 사회에 대한 전체론적 모델을 실행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전후 인구이동, 초국적 자본주의, 전지구적 텔레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소비의 폭발의 현실임. 현재 긴급한 것은 문화적 번역 및 반성성, 내부민족적 소통 및 간문화적 동원, 혼종성 및 크레올화의 문제를 이론화하는 것임. 바흐친의 은유를 빌리면, 전지구화 세계에서, 단일한 국가적 언어들은 ‘이질언어성의 바다’에 둘러싸이는 것의 의미를 피할 수 없음. 바흐친이 주장하듯이, 이것은 신화적이고 마술적인 사고의 물화된 관습 및 전통의 권위를 침식함.

그러나, 우리는 인류학자들이 힘들게 없애려고 해온 ‘전통’의 고정관념화된 관점을 수호할 필요가 있음. 즉 신화와 의례가 규범적인 것에 대해 전복적일 수 없다는 잘못된 가정. 실제로, 전산업 사회에서도 그들의 미적, ‘마술적’, 중단적 국면들을 가지고 있음. 그 국면은 내부 갈등 및 관점의 적대가 의례적 유머, 기괴한 대상들 및 경계적(liminal) 행위들을 통해 표출됨. 그러한 liminal 국면들은 일치 및 단일성의 상태에 도전함. 더 나아가, 순전히 권위, 신화, 마술 및 의례의 순전히 순환적인 재각인이 있기 보다는 근대 소설처럼 미적 혼종적 형식들을 사용함. 그러한 형식은 암묵적인 사회적 갈등을 상연하고, 권위에 도전하며 일상의 도덕성을 전복하기 위해 같지 않은 이미지들을 병렬시킴.

우리는 심지어 다음과 같이 주장할지도 모름. 근대 소설의 초월적이고 반영적인 특성은 그러한 의례들, ‘계몽된’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 스며든 적대의 제도화된 형식과 동등함. 그러한 것으로써, 소설은 필연적으로 자유주의적 사회 질서에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서 대화적 혼종성과 반성성을 창조함.

 

* 혼종성 비판

전지구화가 클레올화된 문화를 통해 굴절된다는 환영은 포스트모던한 삶의 기술에 대한 인식 그리고 멜루치가 주장하듯이 인간 행위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현실을 생산하는 매체의 능력에 의해 도전받음. John Hutnyk; 월드 뮤직 페스티벌. 아이러니하게도 제3세계 음악 작품을 작동하게 하는 상업적 형식 속에서 독특함과 확실성이 포장되고 물신화됨. 그러나 혼종은 독특하게 초월적이기 보다는 그들의 차이 속에서 동등함. Hutnyk이 고려한 문제는 모든 현실의 저항 정치가 그러한 기술을 통해 싸울 수 있는지 없는지에 있음.

이것은 심각한 질문임. 디아스포라적 흑인 및 제3세계 지식인들에 의한 미적 작업들이 민족성, 인종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그 질문의 역설은 우리가 정당하지 않은 경향으로 보는 것에서 이러한 미적 ‘텍스트들’을 사회와 문화에 관해 전지구적으로 이론화하기 위한 기록 도약판으로써 사용하는 것까지 걸쳐있음.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며, 우리는 이러한 ‘의례적’ 대상들을 향한 그것들의 다양한 구성체들을 위치 지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 더 중요하게, 우리는 어떻게 평범한 문화적 의미들, 혼합들 및 본질주의를 배제하는 것이 실천에서 활동적으로 변증법적으로 협상되고, 정치적 행위의 접합(joint)을 통해 전략적으로 공식화되는지 질문해야 함. 그리고 어떤 종류의 한계들이 문화적 혼종성의 실천 및 담론에서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set 되는지 질문해야 함.

Wicker; 문화적 배열 및 실천으로써 아비투스에 대한 부르디외의 이론을 서술. 부르디외의 이론은 우리가 왜 크레올화가 발생하는지 물어야 할 필요성 뿐만 아니라, 의미의 협상된 영역에서 행위자들이 지속적으로 이러한 혼종화의 과정을 거부하고 무시하는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고 주장함. 위커가 정의하는 이동은 문화적 복잡성부터 복잡한 전체까지. 그러나 현실에서, 포스트모던한 협상된 질서는 도피적이고 거의 정치적으로 성취되지 못할지도 모름. 여기서 지속적인 경향들은 새로운 형식의 자기 인식적 혼종 정치를 요구하는 파편화에 대한 것.

 

사이보그 정치

 

사이보그 정치는 복잡한 정체성 입장들의 특정성들을 교차하기 위해 나온 비헤게모니적 저항 운동을 구축하려는 정치를 정의하기 위한 헤러웨이의 텍스트로부터 서술한 개념. 헤러웨이의 사이보그는 유기체 혹은 자연적 입장에 대한 모든 주장을 침식하는 .... 합병을 통한 단일성이나 지배를 통한 단일성에 반대하는 투쟁에 의해 구성됨(1991: 157). 모든 소수자 집단들이 동등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억압받는 것은 아님. 사이보그의 인공적인 ‘탄생’은 ‘지배의 실천’으로부터 순수함을 주장하는 어떤 특권화된 주체의 부재에 대한 증가하는 반사적인 현실화의 결과.

사이보그 정치는 이데올로기, 문화, 정체성 및 사회적 입장의 차이들을 횡단해 대화를 열고 유지시키는 것에 관한 것임. 수용되는 것은 불완전한 소통의 엄청난 잠재력임. 따라서 횡단적 정치는 헤테로글로시아를 거부하거나 제거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조직하고 모양지음.

횡단적 정치는 본질주의, 문화, 국가 및 그들의 경계에 대한 고정된 구축, 문화를 민족성으로 환원하는 것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함. 그러나 동일하게 거부되는 것은 ‘차이’에 대한 본질주의적 가정들. 반면에 혼종화된 여성 정체성들의 포스트모던한 구축은 대부분 문제설정적. 여성 사이의 권력의 불평등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구축적 아포리아의 탈출구로써 전략적 본질화에 의지한 이래로.

진짜 횡단적 정치는 그들 자신의 ‘뿌리’와 개인적 헌신의 강력한 의미를 지지하는 참여자들에 의지함. 멜루치가 생태운동에 대한 자신의 분석에서 주장했듯이, 탈물질적 세계에서, 개인의 뿌리는 그 자체로 불확실함. 그들은 자아의 복잡한 의미와 함께 사는 것을 배워야만 함. 전지구적 사회적 삶을 조직하는 작동적 언어와 응집적인 코드에 대항하여 동원하려면, 주체들은 개인적 혹은 집단적 자율성을 주장해야 함. 그러나 명백히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개인 및 행위자들이 정체성을 구축해야.

그러한 파편화된 자아에 대한 개념화는 자아를 소멸시키는 위험과 본질적인 핵과 형이상학적인 연속체 속으로 정체성을 넣는 위험을 피해야 함. Bauman이 제기했듯이, 이것의 핵심은 책임성의 개념임. 즉. 타인과 세계에 대한 책임성. Melucci가 지적했듯이 자신을 자신과 타자의 관계에 위치시킴으로써. 나의 장소를 세계에 놓음으로써.

그러나 이러한 책임성에 대한 협상은 파편적이고, 불확실하며, 좌표적 개인주의로 해체시키려는 위협을 받음. 유일한 해결책은 사회적 교환과 소통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동료행위자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목표와 선택에 관한 메타 커뮤니케이팅에 의해, 그 부서지기쉬움의 인식을 통해 연대를 창조하는 것.

생활세계와 선택의 증가는 Michel Wieviorka가 기술한 인종주의의 ‘폭발과 확산’에 대한 고발에서 역으로 생산됨. 인종주의가 의미하는 것의 그 이해에서 이러한 확장은 불가피하게 반인종주의적 연대의 파편화를 불가피하게 이끔. Wieviorka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인종주의라는 오래된 단어는 모든 것에서 수용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음. 유사하게, 백인성은 새로운 인종주의의 논리에 의해 그것에 부과된 본질주의를 피할 수 없음.

만약 모든사람들이 인종주의자이거나, 아무도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면, 반인종주의 운동은 어떤 반인종주의적 운동을 가정할 수 있는가? Wieviorka가 주장하듯이, 먼저 규정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음. 인종주의는 보편적인 인간적 차이를 단정함으로써 지배하거나, ‘자연적’ 위협으로써 두 문화를 뒤섞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차별화함. 보통 인종주의는 둘 다를 함.

 

Wieviorka가 주장하듯이, 반인종주의 운동은 이러한 혼종적 비일관성을 반사하기에 충분하지 않음. 보편주의와 차별주의의 진퇴양란의 불가능한 경로를 탐색하는데 사이보그 정치가 유용함.

영국과 미국의 반인종주의 기획; 반인종주의자들은 여전히 백인을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고, 단일하고, 생득적으로 인종주의자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반본질주의 기획을 전복함. 백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 명명들이 역사적으로 위치지어진(sited) 것을 인정하기 보다, 우리는 역사 및 지리 밖에서, 모든 사회적 맥락이 제거된 백인성을 지속적으로 붙잡고 있음. 문제는 죄라는 백인에 대한 공적 표현이 단지 아이러니하게 백인성을 반인종주의 담론의 이타적인 도덕적 중심으로써 위치짓는다는 것.

Bonnett가 제기했듯이 전략적 본질주의보다, 필요한 것은 전략적 해체. 즉 모든 인종에 대한 사람들의 개인적 경험을 탐색하는 자기 감시적 반성성의 지속적인 과정이며, 동시에 백인성, 흑인성 및 인종 자체를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 범주의 구성성을 폭로하는 것.

Yuval-Davis가 제시했듯이, 우리의 예는 ‘대화의 경계가 메신저보다는 메시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제안함. 그러나 그것은 불분명함. 이러한 것들이 유토피안을 대체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들의 상징적 분리를 강조하기보다 활동가들 사이의 환유적인 연결을 확대하는 수행적 제스처, 이음의 물리적 행위의 더 현실적인(earthy) 인간 실재와 함께 사이보그의 불완전하고 파편적인 소통적 ‘소음’을 대체할 것인가?

사이보그 정치와 달리, 민족적 동원에서, ‘메시지’는 종종 순전히 사회성 및 문화적 창조성에 대한 변명임. 따라서 우리는 민족성들과 세계주의(cosmopolitan) 사이에 실제real 및 정치화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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