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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공간이론교육세미나> 2009.5.19 발제:chan-
Chapter1. Introduction: The dialectics of cultural hybridity Pnina Werbner, 1997, “The dialectics of cultural hybridity”, in Pnina Werbner and Tariq Modood, Eds., Debating Cultural Hybridity: Multi-Cultural Identities and The Politics of Anti-Racism, Zed, London, 11-26
■The Power of Cultural Hybridity ■Intentional Hybridities ■Cyborg Political
■The Political of Hybridity : Cosmopolitans and Transnationals 혼종성의 정치학: 코스모폴리탄과 트랜스내셔널
*코스모폴리탄과 트랜스내셔널의 차이 -전지구적인 문화 복잡성(complexity)에 관한 한네츠(ULF Hannerz)의 작업에서 코스모폴리탄과 트랜스내셔널에 대한 구분을 차용/확장하여 코스모폴리탄은 전지구적 문화, 자극적인[맛좋은] 문화적 차이들 사이를 여행하는 다중언어를 하는 미식가들임. 전지구적 문화라는 온실에서의 그런 화려한 나비들은 외국의 땅에서 새로운 벌통과 둥지를 만드는 트랜스내셔널한 벌들, 개미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적 종임. 트랜스내셔널들은 이들이 도달하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그들 주변에 집합적인 “homes"을 만들기 위해서 큰 벌떼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임. 코스모폴리탄처럼, 그들은 전지구적으로 사고하지만 그들의 로열티는 전지구적 세계 교회주의라기 보다는 트랜스로컬적 사회네트워크와 문화적 디아스포라 내에 정박하고 있음. 대부분의 트랜스로컬들은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엄청난 고난에 고군분투하고, 생존을 위해서 상호조력과 사회성이라는 문화적으로 구성된 자원을 끌어들임. 그들은 인종차별적 거부들에서 그들을 방어해줄 수 있는 ‘커뮤니티’를 적극적으로 구축하기도 하지만 경배를 위해서 경쟁하기도 하고, 떠나온(잃어버린) 고향을 향한 향수에 대한 의식, 이주에 대한 집합적 의례를 행하고, 숭배하고, 즐기기 위해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함(Werbner). 그들은 위험한 습격과 고의적이고 외적이며 위반적인 혼종성까지 감지하는 경계선(boundary)을 그림(Mood, van der Veer, Baumann).
*‘혼종성’에 대한 논쟁의 지형과 그 한계 -혼종성, 즉 동시대의 융합주의(syncretism)처럼,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 통합성에 대한 이해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행위자들에 의하여 인식되는 집합적 조건이고, 그러므로 논의하고 성찰해야 하는 주제임. 즉 고도로 정치화된 형태임.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화적 혼종성은 순수 문화주의자들과 혁신적 문화주의자들 사이의 반성적이며 도덕적인 전장을 대신하게 됨. 즉 본질적으로 문화적 “상태(thing)"는 논쟁의 분야임. -조나단 프리드만(Jonathan Friedman)은 제 3세계의 디아스포라적 지식인들을 코스모폴리탄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계급으로 위치짓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들 지식인들이 모더니즘 외부에 혼종성이라는 개념을 두고 고려한다고 봄. 조나단이 상기시키는 구지식인 엘리트들은 사회 정의와 평등, 문화적 차이를 초월하는 개인의 권리들이라는 보편적인 관념을 고무함으로써 문화적 다양성을 반대함. -but 다문화주의는 모더니즘의 쇠퇴를 나타냄. 주변으로부터의 목소리라는 새로운 지식인들의 공허한 주장은 그러나 종족화(ethnicisation)를 향한 전지구적 경향에 의해 알려짐. 주변으로부터의 실제 목소리는 혼종성이라는 트럭을 원하지 않음. 현실은 약화된 국민-국가/상태와 마주한 에스닉한 원초주의의 하나이고, 파편화와 게토화의 하나임.
*‘혼종성’ 연구 3인방의 작업과 한계 -프리드만은 호미바바와 폴 길로이의 기여에 질문하면서 현재 수많은 책에 활기를 불어넣은 혼종성에 대한 선구자인 스튜어트 홀, 폴 길로이, 호미 바바를 검토함. 이들은 여기서 설명하는 바로 그 문제들[혼종성]에 대해 교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문화 정치학의 연구 속에서 과학적 혁명을 촉진함. | 1) 스튜어트 홀 | 2) 폴 길로이 | 3) 호미 바바: | 혼종성 연구 | -차이를 가로지르는 동맹을 통해서 반드시 구성되어야만 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혹은 대항헤게모니에 대한 사고를 기반으로 혼종성에 관한 논의에 기여함. -차연에 관한 데리다의 작업, 젠더와 젠더의 양가성에 관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개념들을 끌어들임. -홀은 보수적인 ‘대처’세력들에 의해 부과된 모든 매개적 기획에 대한 한계 수용에 대항하는 동맹을 만들어 내는 긴급한 요구들을 받아들임. | 길로이는 흑인중심주의의 형식 속에서 본질주의와 흑인성을 보증하지 않은 전인적인 구성으로 보는 반본질주의에 도전함. 그가 제시하는 흑인주체의 연속성은 모더니티의 어두운 측면에 연루되고 지속적으로 속해있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음. 길로이에게 The Black Atantic은 그저 단순한 구축물도 전근대의 불변하는 전체도 아닌,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혼종화하는 대항-문화이며, 노예와 인종주의에 반응적인 진짜 감정(sentiment)의 커뮤니티임. 그는 이러한 흑인 디아스포라의 우연적인 단일체(unity)를 흑인 지식인과 음악가들의 미적 작업을 상세히 분석함으로써 설명하고, 흑인 디아스포라적 커뮤니티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넘어서고, 가로지르고 그것 내부를 여행하고 여행해왔던 작업 방식을 설명함. | 바바에게 국민국가주의는 결코 동종적이며 단일한 것이 아님. 그것은 경계적(liminial) 공간임. 경계적 공간은 국가적 위엄을 지닌 서사들, 영원하고 ‘페다고지적’인 서사들의 영속적인 수행적 위반에 의해 창조되었고, 수많은 국민국가의 목소리를 나날의 ‘일상적 국민투표(daily plesbicite)’라는 ‘헝겊조각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주변으로부터의 문화담론에 의해 만들어짐. 데리다를 끌어들여서 바바는 행위자(agency)를 방해적 언술(enunciation) 행위(act)속에 놓음. 길로이 처럼 또한, 이것은 ‘이중적 무의식화’, 분열적인(split) 주체, 파편화된 현실을 만듦. 인류학자들에게 이는 유사한 비유임. 즉 경계적 위장들(mask), 소유물인 “사자들”, 의례적 광대 혹은 변칙적 창조물과 같은 경계를 넘어선 모든 것은 그러한 이중적 무의식화를 만듦. | 한계 | 홀에게 정체성은 미래를 위한 하나의 비전이자, 유동하는 요청임. 그의 작업은 그람시의 동맹과 헤게모니라는 개념들에 이론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 사이보그 정치학을 드러냄. | 프리드만이 발견한 그의 작업의 문제점은 인종화 과정 그 자체를 뭔가 진실한 코스모폴리탄을 향한 욕망 속에서 표현하면서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입장임. 혼성화는 현실의 전지구와와 완전히 거리가 먼 반-에큐메니컬(ecumenical:공회의, 교회 일치의) 과정들임. 즉 반-에큐메니컬 과정은 모더니스트 기획으로 국민국가/상태의 약화를 촉진시켜온 과정임. 따라서 길로이는 여전히 이아인 챔버스(Iain Chambers: 문화비평가)처럼 자기-의식적인 에스닉 정체성들이 ‘나쁜 것(bad)'이며, 국민국가주의(nationalism)는 모든 악의 원천으로 남는 것 처럼 보임. | -그러한 담론적 환경은 국민, 주변자, 잡종인, 변칙자이며, 이도저도 아닌(betwixt and between)것 사이에 있는 존재를 제외시키고, 아주 강력한 창조물로 포스트식민적 이주자들, 혹은 보다 특별하게, 그들의 고급 문화의 창조적 작업물을 만듦. -이는 프리드만이 비판하는 일상 현실과 물질적 이해를 지적(知的)화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순수’문화가 있다고 가정함. 문화적 “혼합화”를 말하기 위해서는 사회세계 내부에서부터 이해해야 함. -바바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유사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지님. 피터 밴 데어 비어와 유발-데이비스임. 바바는 그의 문학에서 도덕적 반대물들을 형태화하고 양극화함. 즉 새로운 유럽 다문화주의의 선봉대 속에 있는 종교적 이민자들이지만, 그들은 엘리트, 부르주아, ‘계몽된’ 지식인들에 따른 순수주의자로 비난받거나 해체됨. 페미니스트적 관점에서, 유발-데이비스 또한 주변부에서의 모든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진보적이지 않다고 지적함. 실제로 주변부의 토착적인, ‘백인’, 인종차별적이며 제노포비아적(외국인혐오적)인 피지배자의 담론을 덧붙는 것은 역사적으로 국가적 엘리트들의 담론과 마찬가지로 유해한 것임. |
4) 프리드만의 혼종성
-프리드만은 레비스트로스를 인용하여, 자인종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와 인종주의는 동일하지 않으며, 융합할 수 없다고 주장함(Werbner, Wieviorka, van der Veer, Yuval-Davis와 유사). 자인종문화중심에 대처하는 방법은 물론 포스트모던 아포리아의 핵심에 있음. 만약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편적인 가치나 합리성이 없다면, 그것은 도덕성을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언어를 문화적 커뮤니티들의 외부의 진실로 말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음. 그러나 만일 ‘문화’ 자체가 보편적으로 악의 세력으로 보여졌다면, 어디에 진실이 놓여져 있는가? 니힐리즘은 이러한 일련의 등식에서 분명히 하버마스, 매킨타이어, 노리스에 의해서 다양하게 공격받음. 노리스가 보여주는 푸코에서, 그가 주체의 능력을, 즉 지배담론에 비판적으로 연루되고, 지배담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주체의 능력을 강조한다는 점을 보여줌(Norris 1993:91). 우리는 스피박의 헤게모니적인 ‘식민’담론내부로부터 ‘의도와 반대로 말하기(Speaking against the grain)’라는 기획 속에서 동일한 것을 발견함. -혼종성은 동종화하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단순한 양식이 아님을 의미함. 즉 국민국가주의 혹은 에스니시티가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그것은 그들 자신의 문화담론으로부터 반성적인 자기-비판적 거리화를 약속하는, 그러므로 또한 타자의 언어라는 담론/커뮤니티들의 잠재적 정당함을 인식하는 에스니틱 혹은 국민국가적 집합체들의 성원들의 능력(그리고 권리)에 의존함. 담론 내외부로부터 그러한 비판적 자기-원격화(self-distanciation)는 호미바바가 주변으로부터 방해적 혼종성(interruptive hybridity)이라고 강조했던 것과 다름. 프리드만으로 돌아와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 즉 기어츠가 보여주었듯이 [혼종성]은 전지구적 편협성을 해결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인류학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님. - 혼종성은 ‘문화’기술로는 의미없음. 왜냐하면 이는 문화를 하나의 ‘상태(thing)'로 ’박물화‘하기 때문임. 디아스포라적인 신지식인들에 의해 칭송받은 혼종성 담론은 프리드만이 느끼듯이 도덕적 자기-경축의 형태일 뿐임(Hutnyk도). 분석적 개념으로서 문화는 항상 혼성적(프리드만, Wicker), 왜냐하면 그것은 시종일관 상징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에서 역사적으로 협상적인 창조물로서 적절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임.
■The Power to Name: Hybridity Versus Essentialism
명명하려는 힘: 혼종성 대 본질주의 *‘양가성’ 논의의 중요성 및 함의
-1) 혼종성과 양가성의 혼합: 양가성은 (탈)식민/디아스포라 담론에서 있어서 혼종성 대신에 사용하는 중요한 용어임. 양가성은 바바의 경계적인 ‘하나의 상황과 그것의 반대 사이의 동요’(Young 1995)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파농과 아시스 낸디(Ashis Nandy)가 강조하는 왜곡된 식민적 인종주의의 거울상(specularity)(Werbner, Papastergiadis)임. 앙가성은 ‘식민 생산의 거울’이고, 마이클 타우시그(Michael Taussig)에 따르면 이는 인종주의가 인종화된(racialised) 타자의 신체성(physicality)속에 배태되어 있는, 즉 그 자체가 억압된 ‘감각성sensuority'과 관련된 애증관계’를 모방적으로 리허설함. 따라서 정신분석학적 시선은 생물학적이고 성적일 뿐만 아니라 은유적인 혐오와 욕망을 조명함. 영에 따르면, ‘영국의 식민 소설들은 그들 스스로 문화적 타자를 향한 욕망을 작동시키고 있었음. 그것은 이미 인종주의 그 자체가 만드는 자성(磁性) 강한 타자성, 섹슈얼리티, 문화를 뒤섞는 것으로, 라뜨시(Rattansi)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양가적인 (혹은 ‘혼종적인’)임. 논리적 논의 그 이상은 인종주의와 에스니시티 사이의 차이들, 본질화하는 타자성의 담론과 다문화적인 정체성들 사이의 차이들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논하는 것임. 모든 것은 혼종적임. -2)이러한 에스니시티와 인종주의의 융합에 반대하여, 우리는 여기서 변환되고 혼종화하는 문화 다양성의 정치학(Werbner, Baumann, Hutnyk)과 궁극적으로 양가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본질주의의 위반적이며 배제적인 과정들로서의 인종주의(Werbner, Bonnett) 간의 차이를 살펴봄. 우리의 공유된 가정은 문화가 항상 위치지어지며 교섭되기에, 우리는 또한 새롭고, 긍정적이며, 에스니틱한 반-인종차별적 정체성의 퓨전(fusion)의 가능성, 초월적인 파편화와 사이보그 정치학을 너머의 가능성을 논의함(Baumann, Hutnyk, Werbner, Bonnett) *인종차별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정체성과 타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인종차별주의자들은 Modood가 보여주듯이 자신들의 좋고 싫음 속에서 특별히 일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인종화된 욕망/혐오의 대상들 사이를 구별하려는 일관된 경향이 있음. 즉 그들은 ‘단지(just)’ 인종차별주의라기 보다는 오히려 ‘문화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임. 포스트모던 시대의 불확실성속에서 바우만(Bauman)이 제안하는 차이는 좌파와 우파 둘 다에게 구체화됨. -비비오르카(Wieviorka), 멜루치와 프리드만의 포스트모던 조건에 대한 분석과 공명하여, 바우만은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정체성들은 항상 변화하는(constant flux)하는 속에서, 지우고 다시씌여지고(palimpsest), 불안정(rootless)하다고 제안함. 그러나 포스트모더니티의 불확실성, 소외감,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개인의 자기충족감과 해방감을 향한 현실의 기회를 열어주었음. 낡은 근대론, 즉 이방인과 살 수 없는 강박적으로 조직화된 국가/상태에 대항하여, 문화와 하위문화의 차이에 대한 현재의 개화상태(efflorescence)는 포스트모던한 존재를 바로 조직화하는 원리를 구별함. 이방인을 이해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음. 현대는 이종친화적(heterophilic) 시대임.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화적 차이는 또한 차이를 과장하기 위한 근거가 되었고, 그것과 동시에 문화의 통약불가능성이 되었음. 인종차별적인 차별론과 해방적이거나 사회적인 공동체주의-- 좌파와 우파의 이데올로기들--는 폐쇄된 문화, 뿌리와 전통을 바꾸기 위해서 삶의 기획으로서 개인과 책임성이라는 보편적인 개념들을 버림. 불확실성에 반대하여, 그들의 욕망은 모더니티가 탈배태된것을 ‘다시-배태’시키기 위한 것임. 이러한 ‘커뮤니티’와 ‘권리’라는 혼종적 담론에서, 다문화주의자들은 부족 혹은 국가에 상관없이, 선택을 위해서 개인들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에 대한 가정들 위에 세워진 보편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자기-해방적 도전을 거부함. 따라서 그들은 새롭고 포스트모던한 자유가 승인하는 권리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 실패한 반면, 동시에 그들은 이방인들이 존재함을 규정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권리를 부정하고 있음. -but, 커뮤니티와 국민국가에 호소하는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인종차별적이라고 가정할 수는 없음. 뉴라이트의 혼종적 담론--사회적 배제를 더한 문화적 배제--은 분명한 양가성을 발생시키지만, 문화적 인종주의는 바우만의 용어 속에서, 즉 ‘본질주의는 아직 표시되지 않은’ 것임.
*인종적 혼종성과 양가성
정확히 이러한 인종주의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에스니시티, 애국주의, 다문화주의 혹은 자인종문화중심주의로부터 분리되고 상이한 것으로 인식되는가? -그것의 다양한 모든 가닥들 속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담론이 수행적이라는 사실, 즉 추상화속에서 분석되어지는 텍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음. 우리가 주장하는 인종주의와 에스니시티는 공적인 의사소통, 발화행위, 유발(elicitation), 행동과 반응이라는 구별적인 사회적 과정들임. 이는 바바가 수행적이고 방해적인 것의 특권화와 일치하고, 그것은 인종주의의 양가성과 다문화적 정체성들의 다양성 사이의 분할을 밝히는데 핵심임. -아마도 사람들은 인류학자들이 준 풍부한 사유에서의 주체와 에스니시티의 성격을 고려함으로써 시작가능함. 그레드 바우만(gerd baumann)은 담론적 프락시스의 두 형식들, 즉 ‘지배적’ 형식과 ‘민중적(demotic)' 형식들을 말함. 그는 종교적 제휴와 민족성(nationality)에 토대를 둔 South Asian British 정착자들 사이의 분할을 최근에 수용하여 분리함으로써, 지배담론은 본질로서의 문화와 커뮤니티를 구체화하고, 민중적 담론은 위치지어진 상호작용 속에서 이러한 분할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 예) 특히, 젊은 South Asian들은 이러한 분할을 횡단하여, 즉 대중문화의 미적 형식들을 통해서 South Asian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들을 용해하는 공유된 대중문화를 만듦. 그들은 자신들의 부모들에 의해 결정된 ‘커뮤니티’의 규준적인 경계들을 의도적으로 전복시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적 담론을 사용하는 동일한 사람들은 공적인 일에 관해 지배담론으로 귀속된 반면, 이러한 담론을 구체화하는 모든 공적 도전(지역 여성 집단들에 의해 시도된 것으로서)은 커뮤티니의 연장자들의 엄청난 분노를 사고 범죄자취급 받음. -바우만이 주장하는 이 지점은 지배담론과 민중담론 모두 다 ‘틀렸다’는 점임. 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혹은 로컬 상태와 마주하여 ‘문화’와 ‘커뮤니티’라는 용어에 대한 논쟁과 협상을 표현하는 이중 담론의 능력을 구성함. 에스틱 활동가들에게 구체화된 문화적 상징은 분석적 논쟁의 용어가 아니라 유동하는 가치들임. 그들은 문화, 커뮤니티, 에스노, 그리고 자기충족적 상동으로서 ‘인종’을 객관화하는 상식적인 사고들을 그리고 있는 반면, 동시에 다른 맥락들에서 재형성되고, 재개조되며, 재편되는 이러한 용어들을 앎. -이러한 환경 속에서, 협상적인 동맹은 사이보그 정치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보다 독백적 담론과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서 재미와 음악을 통해서 문화 그자체를 재형성함으로써 존재함. 경계적인 담론적 공간은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의미에서 양가적임. -Werbner가 주장하는 긴급한 필요는 ‘(미리)나타나’고 ‘기초를 갖는’ 동학적 과정들을 통해 문화정체성들을 상황적으로 최전면에 내세우는 에스니시티의 표준적 대상화로부터 인종주의라는 치명적인 본질화, 그것 자체의 우연적인 양가성을 허용하지 않는 범주의 구체화를 구별하는 것임. 여기서 Werbner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안정화하면서도‘상연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서 자리매김뿐만 아니라 등급(계급, scale)에 관한 인류학적 통찰을 끌어들임. 길로이처럼, 그녀는 ‘주변부’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감정 속에 근거해있으며 도덕적 가치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함. 그것들이 담아내는 해방의 모티브들은 단지 담론적인 것이 아님. 즉 인종적 위반이라는 경험에 대해 주체들이 물질적으로 그것들(정체성)을 체현하지만, 또한 공적 시선에서 떨어져있는 비가시적인 디아스포라적 공간들 속에서 수행적으로 규정된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타자에 대해 ‘뻗는’ 몸짓을 통해서도 체현됨. 우연적으로 남겨진 합리적인 에스닉 정체성들은 맥락에 대한 책임성과 관계가 있으며 그러므로 고정성의 결여와도 관계가 있음.
*본질주의의 양가성
-에스니시티와 달리, 치명적인 본질주의는 분열발생적 과정을 촉진함. 인종주의 혹은 제노포비아에 대한 병리학적인 양가성은 일련의 부자연스러운 도덕적 패닉을 통해 추진하는 극단적인 과정을 움직이는 바로 그 모토, 즉 위반적 배제, 동화들 그리고 부정들을 향해 나아가는 극단적인 과정들을 추동함. 유럽사회의 이슬람포비아들의 출현은 이러한 과정을 명확히 보여줌. 이러한 인종적 폭력에 대한 관점에서 모든 인종차별적인 본질주의는 의도적으로 표본적이고 연극적인 것이며,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자아와 주체성을 위반함. 파괴적인 감정 속에서 인종주의라는 퇴적구조는 파농에 의해 조명된 특징으로서 병리적이고 반(non)우연적인 그것의 양가성을 구축하는 것임. 이것은 다문화주의 혹은 에스니시티의 다양성과 혼종성에 관련한 식민적/인종적 ‘욕망’을 왜곡된 거울상에 혼합시키는 경향이 있는 바바 혹은 Rattansi의 이론과 같은 탈식민/모던 이론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Werbner를 끌어들임. 모든 본질주의의 본질화와 마찬가지로 범죄적인 에스니시티와 면제적인 인종주의를 종식시키는 혼란을 경계해야 함. 대신 우리는 인종차별적 조우자들의 왜곡되고 극단적인 특징들을 인식하는데 있어 파농과 낸디를 따를 필요가 있음. -파편화된 사이보그 정치학에 대항하여, 인종적 고통에 대한 물질성은 ‘여행하는’ 알레고리들의 발명과 사회 문화적인 분업들을 가로지르는 고통에 대한 도덕적 미적 커뮤니티들의 ‘상상’을 잠재적으로 도출할 수 있음. 우리가 보았듯이, 그러한 감정의 커뮤니티들을 분열시키려고 하는 강력한 원심력이 있지만, 억압에 대한 공유된 경험의 체현된 성격은 적어도 그러한 혼합을 향한 토대를 만들려는 것으로 보임. 반인종차별적 연합들의 출현은 Hutnyk의 기여에 대한 중심적 메시지에 있음.
■Mimesis, Crossover and Creativity
미메시스, 크로스오버 그리고 창조성 *반성적인 전지구 이종친화적 시대에서의 말하기
-Hutnyk는 아도르노가 차이의 상품화에 대한 통찰의 함축적 의미를 점검함. 즉 자본주의적 생산 속에서 미메시스, 크로스오버, 독특한 신뢰성(authenticity)이 획일성 아래에서 병합됨. 월드뮤직 페스티발, 즉 평화와 이해의 세계를 촉진하는‘진보적인’ 이벤트는 전지구적인 해방의 투쟁에 대한 아이러닉한 개소리의 텍스트이며, ‘신뢰성이 이해할 수 없음을 통해 작동하는’ 하나의 장면임. Hutnyk가 생각하는 ‘전통’, 장르, 현대의 크로스오버의 다양성은 문화에 대한 본질주의적 규정을 초래하는 악몽을 거래하게 만들어야만 하며, 그들 자신의 모순성에 대해 몽매하게 해야만 함. 호선의 과정에서 모든 독특한 목소리의 외관(semblance) 혹은 가치는 사라진 듯이 보임. 아이러닉컬하게, 혼종성-말하기는 매매할 수 있는 또 다른 상품 처럼 될 위험 속에 놓여 있음. -여기서 Hutnyk는 분열적인 문학력 작업들의 힘에 관한 반 데어 비어의 회의론과 공명함. 동시에 새로운 기술의 접속가능성은 한편으로는 전지구적 동종화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율적 창조성을 초래함. 시장에 대항하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음악을 통한 정치적 저항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도르노와 호르크 하이머, Hutnyk가 주장하는 사실들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음. 두 학자들은 대중문화의 파시스트적 잠재성을 인식하면서, 그들은 또한 그것을 회복시키는 힘을 고급문화로 보았음. 그들이 실제 반대했던 것은 부르주아의 입맛에 의거하여 대중문화를 희석하는 것이었음. - 자본주의 아래에서 그것의 배태성에도 불구하고, 우마드(Womad)는 상품의 페티시즘과 창조성과 ‘혼합’을 과감하게 확산시키는 무분별함을 탈피하는 진짜 해방의 공간을 여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음. 이는 일부 아시아 밴드의 정치적 작업, 즉 아시안, 무슬림,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종적 억압이라는 명백한 비평 속에 녹아져 있음. 이러한 젊은 아시아아인들이 노래하는 것은 스튜어트 홀의 ‘순수한(innocent) 흑인 주체’가 여전히 아주 중요하게 제출된다는 점임. 즉 그것은 에스닉한 차이와 마주하면서 삭제되지 않았음. 스피박이 말한 것처럼 너무 많은 혼종성은 해결되지 못한 계급착취와 인종 억압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안고 있음. 혼종성이 흑인의 정치적 활동성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정치적 궁지에서 돌아나오는 것만으로는 급진적 기획을 완수하기 어려움. -그렇다면 급진적 혼종성은 어떻게 보이는가? 예를 들면, 그는 우리에게 다양한 억압의 경험에 의해 알려진 인종차별주의, 식민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벵골의 밴드의 서정시를 가져옴. 그것은 동종화하는 시장의 영향에 저항할 수 있는 집합적 주체성의 미적 융합
■Conclusion: The Process of Hybridity
결론: 혼종성의 과정 *포스트모던 사회에서의 혼종성의 변형과 그 이면
-포스트모던한 상상 속에서 혼종성은 굳건한 계급들과 범주들을 전복하고 융합하는 사회학적 담론의 전 영역들을 공격함. 따라서 행위자-네트워크이론(Actor Network Theory)은 혼종성을 사람(people)-대상의 혼합된 네트워크를 생산하는 것으로 규정함(Latour,1993). 대상들은 인간(person)의 보철술의 확장이고, 인간들은 물질적으로 대상들에 의해 구성됨. 하이-테크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분업’을 융합시키기 위해 공격함(Strathern, 1996). 이종성이라는 용어, 즉 ‘혼합된 서사’에 대한 개념적 개화는 그것을 체현하는 네트워크처럼 무한하고 형태없는 것임.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이론의 성과는 원본의 순수성과 고정성에 대한 관념들에서 주체를 해방시켰다는 점은 사실임. 그 과정에서 인종적 오염이라는 위험스러운 담론을 어깨에 맨 혼종성은 문화적 창조성 가운데 하나로 변형되었음.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장했듯이, 탈식민 지식인들이 찬양하는 혼종성에는 다양한 문제들이 존재하며, 이중 의식화의 모범적인 체현으로서 ‘이주민’이라는 개념 역시 문제적임(Ahmad, 1995). 아마드는 혼종성이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것을 넘어서서 움직이는데 실패했다고 주장함. 따라서 혼종성은 오랜 기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지속성과 변형물들을 가림. 현실세계에서 정치적 행위자는 유연과 탈구(displacement)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장소, 소속감에 대한 이해, 젠더, 국민국가, 계급에 대한 이해를 가지는 주어진 역사적 위치들 속에서 구성되는 것임. 이 책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마드 역시 윤리적 책임성의 조건들, 도덕적 행위와 위임된 자리매김이 현실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반대의) 정치학의 주체적 토대임을 발견함.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필요로한 것은 혼종성에 대한 과정적인(processual) 이론이며, 그것은 독백적 담론들이 이질언어성에 대한 지속적인 긴장 속에 있다는 인식을 넘어서는 것임. 이러한 이론들을 1)우선, 단일성을 향한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욕구 속에서 차이의 정당화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학과, 단일 결정적 진실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토대를 둔 강압적인 연합에 의존하는 정치학 사이에서 구별되어야만함. 2)어떻게 그리고 왜 문화적 혼성들이 포스트모던한 세계 속에서, 즉 소비시장을 통한 차이를 찬양하며, 소비시장이 ‘독특한’ 정체성들, 하위문화들, 스타일들에 대한 끝없는 선택을 제공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혼란스러울 수 있고 ‘충격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하며, 반성성과 ‘이중적 의식화’를 강화시킬 수 있는지도 설명해야만 함. -이러한 질문들은 이론적으로 묶여있음. 즉 이러한 과정에서 범주들은 참여자들의 조건을 재구성하도록 과장되었으며 풍자되었음. 의례적 혼종들은 의식화를 단순히 제기하지 않음. 그러나 의례적 혼종들은 수행적으로 강력하며, 모독적이며, 풍요로우며 또는 정화적임. 우리가 다문화주의와 반-인종차별주의라는 담론의 방식에서 우리의 논의를 생각하는 이유는 매개(bridge)를 만들기 위한 상호작용하고 혹은 분극화하는 과정을 촉진하기 위함임. 바로 이러한 정신 속에 유발-데이비스와 여타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있음. 즉 다문화주의라는 하나의 경향은 문화적 ‘차이’를 과장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마이너리티들 사이의 ‘근본주의적인’ 문화라는 자기-규정들을 가치화함. 이에 반해서, Hutnyk와 바우만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종적 혼종성은 폭력과 고통에 부응하여 동종화하는 문화 산업에서 부상할 수 있음. 그러므로 또한 사이보그 정치학은 반성적이고, ‘숭고한(high)' 모더니티의 맥락에서만 실행가능한 형식일 수 있음. *과정으로서의 혼종화
-이에 대한 도전은 우연적인 혼종성에 대한 최근의 강조를 대체하는 혼종성이라는 과정적 모델들을 발전시키기 위한 것임. -과정으로서의 혼종화에 대한 관심은 주변부에서의 핵분열을 드러냄. 즉 호선, 저항의 전략들 혹은 진짜 혼합(fusion)은 중심과 주변 사이를, 그리고 모방적인(periodic) 도덕적 패닉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연대를 만들려는 주변부를 분할함. 이러한 과정의 복잡성은 다문화주의, 즉 중요한 수사학이자 하나의 불가능한 실천을 표현함. 수사학으로서 다문화주의는 국민국가주의[민족주의]를 혼종화하는 문화 주체의 의식화로 변화시키는, 즉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하나의 보루로 행동할 수 있는 하나의 문화적 전체로서의 국민국가라는 모든 개념에 도전함. 이러한 수사학이 숙고하는 대상들--디아스포라적 예술가, 작가들, 영화제작자 혹은 감독의 미적 창조물들-은 이러한 의미에서 중요하고 주의를 기울일만한 것임. 그렇기에 또한 때때로 귀에 거슬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목소리이기도 함. 일련의 가정들로서 다문화주의는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주변적 문화(들)이 관심을 기울여야만함. 즉 우리는 특히 역사적 순간과 특수한 규모(등급,계급), 우리의 위험을 재규정하는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정서적이고 도덕적인 뿌리를 가치절하해옴. -그러나 다문화주의라는 수사학에 대항하여, 확립된 정책 실천으로서의 다문화주의의 가능성은 우리들 대부분이 여기서 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서, 내재적으로 위치지어지고 교섭되는 혼종들에서, 그리고 아직 도덕적으로 위임된 ‘문화’와 에스니시티의 성격에서 발생함. 현실 속 현대의 국민국가/상태에 고정된 문화는 없고, 순수 혹은 불순한 문화적 지평선의 정치적 상상만이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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