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즐겨찾기 | 블로그홈 | 바로가기 바로가기 | 로그인
블로그  |  사진갤러리  |  동영상갤러리 방명록  |   즐겨찾기 추가
 인기도 :
 이 블로그 점수주기
전체 글보기(609)
학부 강의자료방
학부 과제제출방
대학원 세미나룸
명예의 전당1: 서평
명예의 전당2: 영화평
토막강의
스크랩북
지리사진방
기타 지리관련 자료
약력
최근 댓글 전체보기
1941년-45아프리카..
1619년최초의흑인노예..
아시안 1550만흑인 ..
한국48.3 북한 23..
중국 1345.8 인..
2009 11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오늘 전체
방문자 30 112777
구독자 0 40
댓글 0 226
참조글 0 98
다녀간 블로거 더보기
- sytelgate
- 발가락
- 김승종
- 영이의일상
- anthdb81
HanRSS 로 구독하기Fish 로 구독하기
개설일 : 2007/11/04
 

<사회공간이론교육세미나> 2009. 발제자: 박주희

J.B. Harley, 1992, "Chapter 13: Deconstructing the map", in Trevor Barnes and James Duncan, Eds., Writing Worlds: Discourse, Text and Metaphor in the Representation of landscape, Routledge, London, 231-247.

 

 

 

13. Deconstructing the Map

 

 

이 장의 요점 ① 인간의 실천 및 역사 지리학을 위한 지도의 가치 속에 있는 신념. ② 사회 세계에 대한 준거 없이 자신만의 기술에 의해 창조된 터널 속에서 작업하는 오늘날 학계에 다수의 지도제작자들의 좌절 ③ 개입의 욕망.

가속화된 기술적 변화의 한 가지 효과는 그 실증주의적 가정들을 강화하고 현실(reality)에 접근하는 방식으로써 지도제작자의 가정된 가치에 관한 지리학에서 새로운 거만을 키워왔음. 만약 '사실적 재현의 새로운 소설들이 우리에게 떠맡겨진 일상적 존재라면, 그다음 사회적 차원을 근대 지도제작 속으로 삽입하는 것에 대한 사례는 특히 강력함. 지도는 지도제작자들에게만 남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이러한 발전의 한 가지 결과는 현재 구성되는 것으로써 지도제작의 실천과 이 논문에서 강조되는 해석적 전략들 사이에 대화를 수행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 여타의 비판이론의 측면들과 함께, 저자는 푸코와 여타의 사람들이 규정한 담론 개념이 대부분의 지도제작자들에게 낯설고 기괴할 것이라고 예상함. 개념적 진공이 지도제작과 인문지리학 사이에 놓여있음.

 

여기서 저자가 하려는 것은 어떻게 지도제작 역시 생산되는 사회적 세계의 영역에 머무르는지를 보여주는 것. 지도들은 불가피하게 문화적 체계임. 지도제작은 절대 자율적 지식의 기밀한 양식이었던 적이 없고, 지식의 정치 위에 있지도 않았음. 인문지리학의 관점으로부터, 지도는 아주 구체적이지 않거나 특이한 이미지가 아니라 넓은 재현 이론의 악센트로써 이해되는 것이 아마도 더 나음. 나의 해체에 대한 믿음은 과거와 현재 지도에서 보여진 세계에 대한 명백한 자연성 및 순수성을 전복하는 것임.

 

물론 해체개념은 포스트모던한 도전의 비밀번호임. 나는 해체주의적 전략을 현실과 재현 사이에 가정된 연관을 파괴하기 위해 특정하게 사용함. 현실과 재현 사이의 가정된 연관은 지도제작적 사고를 지배해왔고, 지도제작을 계몽주의 이래로 ‘정상 과학’의 경로 속으로 이끌었으며, 지리학적이거나 역사적인 기록으로써 지도에 대한 문화 연구를 위해 이미 만들어져있고 당연하게 간주되는 인식론 또한 제공해 왔음. 저자의 목적은 과학적 실증주의보다 사회 이론에 뿌리박고 있는 대안적 인식론을 제안하는 것. 우리의 임무는 지도제작을 구조화해온 사회적 힘들에 대해 조사하고 권력의 존재를 모든 지도 지식에 위치 짓는(locate) 것임.

 

다음의 아이디어들은 푸코와 데리다의 글들에 빚지고 있음. 저자의 접근은 둘의 절충. 푸코의 글들에서 핵심적인 폭로는 지도와 지도책에 기호화(encode)되어 있는 특정 지식을 포함해서, 그 권력이 보이지 않거나 함축적일지라도, 모든 지식 속에 권력이 편재되어 있다는 것. 반면에 나는 아무것도 텍스트 외부에 놓여있지 않다는 데리다의 관점을 수용하지 않음. 모든 텍스트들의 수사성에 대한 그의 개념은 도발적인 도전을 제공함. 그것은 현재 학자들이 측정 및 지형학만을 발견했던 지도 속에서 은유와 수사에 대한 조사를 요구함.

해체는 지도의 선들(lines) 사이―지도의 주변부들―를 읽는 것이고, 이미지의 명백한 정직성에 도전하는 침묵들과 모순들을 발견하는 그것의 수사(trope)를 통해 읽는 것. 우리는 세계에 대한 초월적인 개시와는 거리가 먼, 예술 같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특정한 인간의 방식인 지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서 출발함.

 

지도제작의 규칙들

 

푸코의 일차적 분석단위 중 하나는 담론. 담론은 ‘지식에 대한 가능성의 체계’로 정의됨(Pillips 1985: 69) 그 다음 우리에게 핵심적인 질문은 ‘어떤 규칙 유형이 지도제작의 발전을 지배하는가?’ 내가 정의하는 지도제작은 지도 제작자가 시각적 재현의 분명한 방식으로써 지도들을 구축하기 위해 고용되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체. 물론 문제는 문화적이면서 역사적으로 특수함. 즉 지도제작의 규칙이 상이한 사회 속에서 다양하다는 것. 여기서는 처음에는 유럽에서 이후 해외 식민지적 영토들에서, 17세기 이래로, 서구 지도제작의 역사의 아래에 있으면서 그 역사를 지배해온 일련의 분명한 두 가지 규칙을 가리킴.

하나의 세트는 지도의 기술적 생산을 지배하는 것으로 정의될지도 모르며, 지도제작적 논문들 및 글쓰기에서 외연적으로 만들어졌음. 다른 규칙의 세트는 지도의 문화적 생산과 관련됨. 이러한 규칙들은 과학적 절차나 기술보다는 폭넓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 더군다나 그 규칙들은 지도제작자들에게 보통 무시되어왔던 규칙들이고, 따라서 그 규칙들은 그 담론의 숨겨진 측면을 형성함.

 

따라서 지도만들기(maping)를 위한 첫 번째 규칙의 세트는 실증주의적 인식론의 측면에서 정의될 수 있음. 적어도 17세기 이후 지도제작 및 건축과 같은 활동들에서 인식론적 파열이 있었고, 유럽 지도 제작자들은 점차 우리가 오늘날 지식 및 인식에 대한 표준적인 과학적 모델이라고 기술하는 것에 고무됨. 지도제작의 목적은 ‘정확한’ 합리적 영토 모델을 생산하는 것. 그 가정은 지도화되어야 하는 세계에서 대상들이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며, 그것들은 지도제작자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향유한다는 것. 지도제작은 또한 더 정확한 도구화 및 방법의 역사를 기록함. 더군다나 비록 지도제작자들이 지속적으로 지도만들기의 ‘예술과 과학’에게 입 발린 말을 해왔더라도, 예술은 점차 지도에서 주변으로 밀리게 됨. 예술은 지도제작적 소통에서 중심적 역할보다는 치장으로 종종 간주되어 옴.

 

‘자연의 거울’로써(리차드 로티의 말을 빌려) 지도에 대한 수용은 그것들이 명백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곳조차도 지도제작 담론의 다른 수많은 특성들을 초래했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선형적 절차 속에서 믿음. 즉 과학의 적용에 의해 더 정확한 현실의 재현이 생산될 수 있다는 것. 유사하게 과학적 규칙들에 대한 일차적인 효과는 지도제작자들이 ‘진짜’ 지도에 대한 그들의 성 주위에 벽을 쌓을 수 있도록 했던 ‘표준’을 창조하는 것이었음.

과학적 규칙들이 지도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담론을 정상화하려고 시도하는 그들의 작동을 추적할 수 있음. 적을 혼란시키기 위해 그들의 지형학적 지도를 위조했던 러시아인들의 입장을 따르는 최근 서구 유럽 및 북미 지도 제작자들의 신앙심 등의 예는 이러한 규칙들에 따라 움직이는 게임이 얼마나 되는지 보여줌.

이러한 시간적 예들은 저자의 두 번째 주장을 도입하는데 도움을 줌. 즉 어떤 경우에 지도만들기의 과학적 규칙들이 지도의 문화적 생산을 지배하는 아주 상이한 일련의 규칙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 이러한 규칙을 밝히기 위해, 우리는 기술적 절차들의 선들 및 지도의 지형학적 내용의 선들 사이를 읽어야 함. 그것들은 민족성, 정치, 종교 혹은 사회적 계급과 같은 가치들과 관련되어 있고, 그것들은 또한 대체로 지도생산 사회 속에 그리고 그것의 여타 재현 형식들 속에 배태되어 있음. 지도 제작 담론은 이러한 지도 지식의 가능성의 측면에 대해 이중 침묵을 작동시킴. 지도에서 그 자체 사회적 구조들은 종종 추상, 도구적 공간, 혹은 컴퓨터 지도그리기의 좌표 속에 갇힘. 그리고 지도제작의 기술적 문헌 속에서 사회적 가치들 또한 무시됨. 지도에서 그것은 그것의 특징에 대한 ‘질서’와 그것의 실천의 위계를 생산함(Foucault 1973). 푸코의 의미에서, 규칙들은 에피스테메를 규정할 수 있도록 해주고, 시간을 통해 지식의 고고학을 추적하도록 해줌.

 

그러한 규칙이 얼마나 지도 속에서 명백한가에 대한 두 번째 예는 지도제작적 재현을 구조화하는데 있어서 그것들의 힘을 서술함. 첫째는 세계 지도의 구축에서 ‘민족중심성의 규칙’에 대한 잘 알려진 집착. 이것은 많은 역사적이고 근대적인 사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영토를 그들의 세계 중심에 위치시키게 했음. 그러나 지도제작에 대한 지식에 대한 푸코의 비판은 그 유럽중심적 규칙의 역사가 과학적 지도제작의 역사와 보조를 맞추지는 않았다는 것. 새로운 기하학적 지도제작은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중심성의 새로운 신화를 강화하는데 봉사했음. 지도제작의 역사를 통틀어, ‘신성한 땅’은 빈번히 지도에서 중심에 놓임.

두 번째 예는 어떻게 ‘사회 질서의 규칙들’이 그 자체로 지도제작적 사본의 더 작은 코드들 및 공간들 속으로 기입되게 되었는가임. 17세기 이래 유럽 지도제작의 역사에 많은 예들이 있음.

지도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매우 확신을 주는 이유는 사회의 규칙들 및 측정의 규칙들이 비슷한 이미지 속에서 상호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든 예들은 역사적이지만 많은 근대 지도들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음.

 

다시 한번, 이러한 공간의 위계화는 지도제작적 재현의 의식적 행위는 아님. 그보다 그것은 왕의 장소가 소남작의 장소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는 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됨. 지도는 차별함. 즉 지도제작적 기호들에 의해 계급 및 권력의 구별들이 공작되고(engineered), 물화되고 정당화됨. 우리는 어떻게 예술처럼 지도가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고, 사회적 규칙들을 유지시키고, 사회적 가치들을 강화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되는지 알 수 있음(Geertz, 1983).

 

두 가지 예에서 저자가 만들고 있는 요점은 규칙들이 분류화 및 측정의 질서있는 구조 내부 및 그 너머 모두에서 작동한다는 것. 그것들은 지도제작의 진술된 목적을 넘어 작동함.

 

해체와 지도제작적 텍스트

 

지도제작적 규칙들의 문제로부터 내부로 이동하기위해 우리는 지도제자적 텍스트 그 자체로 이동해야 함. ‘텍스트’라는 단어는 그것이 지도를 읽기 위한 기술들의 단순한 세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사려깊게 선택되었음. 몇몇 지도제작자들은 언어로써 지도의 은유에 저항해왔지만, 텍스트 모델은 글자그대로 텍스트 하나보다 더 넓은 적용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현재 일반적으로 수용됨. 지도는 문화적 텍스트임. 하나의 코드가 아니라 코드들의 집합. 코드들 중 몇몇은 지도제작에 특유함.

지도의 텍스트성을 수용함으로써 우리는 수많은 상이한 해석적 가능성을 포함할 수 있음. 명료성의 투명성 대신에 우리는 불투명성의 풍부함을 발견할 수 있음. 소통의 형식적 과학과 함께, 혹은 사회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인지 심리학 혹은 심지어 기술적 과정과 느슨하게 관련된 시퀀스와 함께 일하기보다, 우리의 관심은 역사와 이미지의 고고학을 재연결시키는 것.

그러므로, 해체는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가? 해체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음.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의미들의 몇몇 측면들이 정해지지 않을지라도, 가능한 한 많은 의미에 목표를 두고 있음. 그것은 대안적인 의미들에 대한 탐색으로써 간주될 수 있음. ‘해체하는 것’은

 

폭넓은 운동들 및 구조들 내부에 의미들, 사건들 및 대상들을 재각인하고 재위치 짓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잘기울어진 이미지들을 구성하는 스레드를 ? (해석불가 - - p.239)

 

출판된 지도는 또한 ‘잘 기울어진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독해는 기하학적 정확성의 평가를 넘고, 위치의 고정을 넘으며, 지형학적 패턴 및 지리학의 인정을 넘어야 함. 그러한 해석은 지도 텍스트가 ‘인지불가능한 모순들이나 식언의 긴장들’을 담지한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함(Hoy 1985: 40). 그 전제는 표준적인 객관성의 표면층을 침식함. 지도텍스트를 수수께끼, 설명되어야 할 문제들, 세계로부터 떨어져 이해를 차단하는 감옥으로 간주해야. 예를 들어 서구에서 근대적 지도제작의 역사들 통해 지도가 위조되고, 검열되고, 비밀에 부쳐진 수많은 예들이 있어왔음.

그러한 실천들의 취함으로써, 지도 해체는 많은 해석자들이 얼버무려온 지도의 측면들에 초점을 맞춤. 크리스토퍼 노리스에 따르면,

 

해체는 텍스트들이 비자발적으로 레토릭과 논리 사이의 긴장, 텍스트가 선언적으로 말하는 의미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하도록 강요된 것 사이에 긴장을 비자발적으로 폭로하는 이러한 ‘아포리아(난문)’, 숨겨진 지점들 혹은 자기 모순의 국면들을 끊임없이 찾는 것. 그러므로 글쓰기의 일부를 ‘해체’하는 것은 일종의 전략적 반전을 작동시키는 것,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교조적인 주장의 해석자들에 의해 지나쳐온 이러한 간주되지 않은 세부사항들을 잡는 것이다.

 

우리가 초기 지도를 해체하는 방법의 좋은 예는 17~18세기 유럽의 지도들에서 장식적 예술의 지위를 재해석하는 최근의 연구들이 제공함. 카르투시에서 엠블렘들과 각 장에서 장식적 표지들은 그러한 지도들이 그들의 문화적 의미를 나르는 방식에 기본으로 간주될 수 있음. 그리고 그것들은 지도제작이 공정한 그래픽 과학을 생산한다는 주장을 파괴하는데 도움을 줌.

그러한 전략은 역사적으로 ‘장식적인’ 지도들에 한정될 필요는 없음. 노스 캐롤리나의 공식주고속도로 지도에 관한 우드와 펠즈(Wood and Fels, 1986)의 최근 논문은 최근 지도의 ‘주변들’에서 시작함으로써 해체적 전략에 대한 더 넓은 적용가능성을 지시함. (이쪽면에는 주를 상징하는 꽃이 그려져있고.... 다른쪽 면에는 주깃발이 휘날리고...)

이러한 엠블렘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해체론자들이 보기에 노스캐롤리나 주고속도로지도는 그것의 순수함과 투명성의 가면 뒤에 여타 대화적 주장들을 만들고 있음. 여기서 저자는 이 지도가 여행자들이 A지점에서 B지점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지도 안에 이차적 텍스트가 있다고 주장함. 텍스트는 지속적으로 여타 텍스트들, 상호텍스트성이 공간에 열려있음.

지도는 주 정책의 도구와 주권의 도구가 됨. 동시에 그것은 그 영토에 대한 노스 캐롤리나의 지배력에 대한 확인보다 많음. 그것은 또한 신화적 지리, ‘흥미 지점’으로 가득한 풍경을 구축함. 마을들과 시각적으로 마을을 연결하는 지배적인 고속도로의 위계는 세계에 대한 자연적 질서를 정당화함. 지도는 자동차를 가지고 우리의 러브 어페어를 우상화함. 신화는 믿을만함.

 

해체론적 주장에 대한 지도제작자들의 상투적인 반응은 상대를 잘 비난하는 것. ‘그건 실용적인 지도라는 것. 운전자들의 흥미를 위한’ 해체론자들은 그 실행적인 의미에서 제외된 해석적인 목적들에 대한 대립과 같은 것을 해소하려고 할 것임. 또다른 반응은 그것이 ‘과학적 지도’가 아니라는 주장. -> 지도제작자들의 기술에 배어들어있는 사회 관계들을 거부하려고 할 때 그들의 최후의 방어선.

데리다의 전략은 모든 지도들이 과학적이나 비과학적이냐, 기본적이나 파생적이냐라는 그러한 해석을 확장하도록 해줌. 데리다는 ‘문학적 수준이 얼마나 집중적으로 은유적인지’를 보여줄 수 있었음. 우리 역시 지도제작적 ‘사실’이 또한 상징적임을 보여줄 수 있음. ‘풍부한’ 과학적 지도들에서, 과학 자체는 은유가 됨. 그러한 지도들은 ‘상징적 실재론’의 차원을 포함함. 상징적 실재론의 차원은 초기 장식적 지도의 핵심에 위치한 여왕의 초상이나 광을 낸 것 못지 않게 정치적 권위 및 통제의 진술임. 정확성과 디자인의 엄격함은 권위의 새로운 부적임.

우리는 이 과정을 유럽에서 계몽주의시기 지도제작의 역사에서 매우 분명하게 추적할 수 있음. 지도에서 보여지는 지형학—점점 섬세해지고 면적상 정확함—은 공리주의적 철학에 대한 은유 및 그것의 권력 의지에 대한 은유가 됨. 토지를 소유한 재산권에 기반을 둔 사회 구조에 대한 은유...

 

해체주의적 이론에서 수사학의 작동은 은유의 작동과 밀접하게 연결됨. 이 절에서 저자는 문화를 자연으로 변환하려는, 그리고 사회적 실재를 ‘자연화 하려는’ ‘과학적’ 지도제작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본래 수사적 담론으로 남아있다는 것을 주장함.

 

논란이 되는 쟁점은 몇몇 지도들이 수사적인가 아닌가 혹은 여타 지도들이 부분적으로 수사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수사학이 모든 지도제작적 텍스트들의 보편적인 측면인 범위임.

그래서 몇몇 지도제작자들에게 ‘수사’라는 개념은 경멸적인 개념으로 남아있음. ‘수사’는 프로파간다 지도만들기 혹은 지도제작을 광고하기 혹은 과학적인 핵심에 대립되는 것으로써 지도에서 ‘예술적인’ 혹은 미적인 측면을 확인하는 시도를 가리키는데 사용됨. 저자의 입장은 수사가 모든 텍스트들이 작동하는 방식의 일부이고 모든 지도들이 수사적 텍스트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우리는 ‘프로파간다’와 ‘진실’ 사이의,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방식 사이의 애매한 이원론을 해체하려고 해야 함. 모든 지도는 청중의 맥락에서 그들의 메시지를 프레임하려고 노력함. 모든 지도는 세계에 관한 주장을 말하고, 그것들은 본래 제안적. 지도들은 색, 장식, 지형학, 헌신 혹은 그 방법의 쓰여진 정당화를 통해 그것의 잠재적 독자수에 호소함. 수사학은 숨겨질지 모르지만 항상 현존함. 지도를 만드는 단계—선택, 제외, 단순화, 분류, 위계제의 창조, 상징화는 모두 본래 수사학적. 수사적 혹ㅇ느 비수사적 지도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대신에, 모든 지도제작적 텍스트의 유형에서 재현의 이러한 근본적인 측면에 적응한 지도제작적 수사의 이론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됨. 따라서 저자는 과학을 넘어선 수사의 우월성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의 내용뿐만 아니라 사회적 목적을 읽는 두 가지 사이의 허황된 구별을 해소하는 것에 관심이 있음.

 

지도들 그리고 권력의 실행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푸코로 돌아감.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데리다에 대한 푸코의 비판을 염두에 둠. 즉 데리다는 정치적 현실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순수하게 언어적이고 텍스트적인 수준으로 해석을 제한하려고 했다는 것. 저자의 최종적 관심은 지도의 사회정치적 차원들, 그리고 지도가 어떻게 사회에서 권력지식의 형식으로써 작동하는가임.

지도―특히 국가에 의해 생산되고 조작된 지도들―가 근대적 질서의 권력/지식의 메트릭스에서 적소인 것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음. 특히 지도가 정부에 의해 주문되는 곳에서 그것은 그것들이 법적 지위, 영토적 제국주의 및 정치 권력의 실행으로부터 나온 가치들을 확장하고 강화는지를 알 수 있음. 그러나 어떻게 권력이 지도제작적 담론 및 더 정밀한 사회에서 그 권력의 효과를 통해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함.

 

단순한 지배와 종속의 모델은 부적절하고, 저자는 지도제작에서 외부 및 내부 권력 사이의 구별을 서술하려고 함. 이것은 권력-지식에 관한 푸코의 아이디어로부터 차용한 것이지만, 이 특정한 구성체는 조세프 로즈(Joseph Rouse)의 책 지식과 권력(과학의 내부권력 이론)에 빚지고 있음.

지도제작에서 가장 친숙한 권력의 의미는 지도 및 지도그리기의 외부에 권력의 의미임. 이것은 지도를 정치권력의 중심과 연결시키는데 봉사함. 권력은 지도학 위에(on) 영향을 미침. 권력은 또한 지도제작과 함께(with) 실행됨. 근대 서구 국가에서 지도는 국가 권력의 유지에 중대하게 되어갔음. 이러한 모든 사례들에서 지도는 푸코가 ‘사법 권력’의 실행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결됨. 지도는 ‘사법적 영토’가 됨. 지도는 우리의 삶을 셀 수 없는 방식들로 통제하는데 여전히 사용됨. 이 모든 것은 지도의 도움과 함께 있는 권력임.

 

사회에서 또한 지도의 효과에 중심적인 것은 지도제작의 내부에 권력으로 규정되는 것. 질문은 권력의 사법적 체계에서 지도학의 위치로부터 지도제작자들이 지도를 만들 때 정치적 효과로 이동함. 지도제작자들은 권력을 제조함. 그들은 공간적 판옵티콘을 창조함. 그것은 지식에 배태되어 있고, 상호교차하는 권력임.

권력은 지도로부터 오고, 그것은 지도가 만든 방식을 가로지름. 지도는 권력의 기술이고, 이 내부 권력의 핵심은 지도제작적 과정임. 저자는 지도들이 편집되고 정보 분류가 선택되는 방식을 의미함. 세계를 분류하는 것은 그것을 전유하는 것. 따라서 모든 이러한 기술적 과정들은 지도제작의 전문적 사용을 넘어 확장하는 세계의 이미지를 통제하려는 행위를 재현함. 세계는 규율화됨. 세계는 정상화됨. 정상화가 발생!

 

지도제작자의 권력은 개인을 넘어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만들어진 세계에 대한 지식 넘서 일반적으로 실행됨.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인 것은 아니고, 그것은 ‘의도적인’ ‘비의도적인’의 단순한 번주를 초월함.

만약 맥루한의 문장(프린트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인간의 의식 위의 이러한 지도의 논리의 어떤 효과가 있는가? 맥루한처럼 저자는 지도에 대해 정신적 구조를 지도화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세계의 장소 감각을 주는데 있어서 추상, 균등성, 반복성 및 시각성의 효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함(?). 그것은 사회에서 지도제작의 효과에 관ㅎ해 질문을 제기했던, 이러한 장소 감각과 세계가 무엇인지에 관한 많은 대안적 비전들 사이에 탈구임. 따라서 Roszak(1972: 410)이 서술하길

 

지도제작자들은 풍경이 아니라 그들의 지도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빈번히 말하는 것이 일상 언어로 번역될 때 매우 역설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도와 풍경 사이의 차이를 칮을 때―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그 차이를 잊도록 명령하고 설득할 때, 모든 성향들(liabilities)의 분류는 일어난다.

 

이러한 ‘성향들’ 중 하나는 지도들이 대중 생산되고 스테레오타입화된 이미지들 속에서 세계를 절합함으로써, 구체적인 사회적 비전을 표현한다는 것. 한편, 총체적인 단순성의 지리지질(patina)만 있음. 다른 한편, 지도는 모든 고정관렴들의 모호성을 드러냄. 그것의 침묵들은 또한 페이지에 각인됨.

 

그러한 빈 이미지들이 우리가 세계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 속에서 자신의 결과를 가지는가?

데리다에 따르면, 의미가 결정되지 않는다면, 상징적 행위의 담론으로써 지도의 힘도 그렇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모든 지식을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는 더 넓은 투쟁에 완전히 잡힌 것으로써 보는 푸코에 동의함. 지도는 이러한 권력관계를 변경하는 투쟁에서 외부적이지 않음.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없다면, 지도는 현상을 강화하고 정당화할 수 있음.

 

결론

 

지도를 해체하는 해석적 행위는 우리가 지리학적 문화에서 지도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세 가지 기능을 제공함. 1) 그것은 항상 현실의 더 나은 묘사를 생산하는 객관적 과학의 누적적인 과정에 대한 인식론적 신화에 도전하도록 해줌. 2) 해체론적 주장은 지도의 사회적 중요성을 재규정하도록 해줌. 3) 지도의 해체론적 턴은 지리학적 지도제작이 텍스트와 지식의 상호 규율적 연구 속에서 완전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해줌.

댓글쓰기

댓글쓰기 입력폼

포스트 목록 닫기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