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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생” 찾기 - 싱가폴 드리밍(Singapore dreaming)을 보고 -
“달빛 아래 나 홀로 서 있네. 봄바람은 얼굴을 간질이고, 꽃다운 나이지만 혼자이구나. 이제 젊은 그대를 보네, 진정 매력적인 그대를... 저 이가 내 반쪽일까? 맘 속은 사랑으로 가득한데, 언제쯤 내 맘 속 꽃이 필까? 봄 바람은 불어오는가? 누군가의 인기척에 혹시나 하며 문을 열어 보지만 달빛만이 날 보며 웃고 있네” 귀를 간질이는 듯한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노래로 ‘콜린 고’와 ‘엔엔 우’ 감독의 ‘싱가폴 드리밍’은 시작된다. 작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싱가폴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삶을 다루고 있다. ‘싱가폴 드리밍’ 의 원제는 ‘아름다운 인생’ 이다.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영화는 중산층의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 아름다운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꿈꾸는 아름다운 인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제시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 전반에 드러나는 이들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은 아닌 듯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지루한 일상에, 경쟁을 강요받고, 교육이 그들 사회의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그들의 모습은 결코 우리네 삶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놀라울 정도로 같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듯싶다. 섬세한 터치로 싱가폴 중산층의 삶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 ‘싱가폴 드리밍’. 때로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유쾌하지 못한, 약간은 불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던 영화였지만 그것이 향해 달려간 결말은 우리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한 싱가폴 가정의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보통 싱가폴 중산층의 삶의 - 결국 우리의 모습일 -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들의 삶의 모습에서 싱가폴 사회의 특징도 찾아보고자 한다.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되는 곳은 집안이다. 가족들의 생활이 모두 일치되는 공간이 집안이기 때문일 터인데 이들이 살고 있는 집은 정부에서 공급해 준, 결코 넓지 않은 공공 주택이다. 싱가폴은 국토는 작고 인구는 많은 도시국가의 전형으로서 당연히 도시화에 따른 문제 중에서도 주택문제가 큰 과제일 법도 하지만 싱가폴은 영화에서 드러나 듯 오히려 주택문제를 가장 잘 풀어가고 있다. 영화를 보고나서 싱가폴의 주택 문제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곳의 주택은 크게 HDB라 불리는 공공주택과 민간주택으로 나뉘는데 싱가폴 국민의 86%가 공공주택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부동산 문제로 1년에도 몇 차례씩 법이 개정되는 우리나라 입장으로는 매우 부러운 일이다. 주택 문제가 국가에 의해 해결이 되기 때문에 싱가폴은 여타 사회 문제들이 저절로 해결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싱가폴은 국민소득 수준(1인당 GDP 3만달러 정도)에 비해 인건비가 낮은 편인데도 그것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되지 않고, 정부의 강력한 억제 정책으로 승용차의 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2배에 가까운데도 거리에 고급 승용차로 넘쳐난다. 이러한 현상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또한 바로 위에서 언급한 싱가폴의 주택 제도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사람들이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내 집을 갖는 것이, 이후에는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양 허덕이며 살아가는 반면, 집을 갖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 싱가폴인들에게는 인건비가 조금 낮아도 감내할 만하고 또 집 대신 자동차나 그 밖의 다른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서 우리도 당장 싱가폴의 방식을 따라 우리의 고질병인 주택 문제, 혹은 부동산 문제를 해결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성향의 정책을 꽤 오랫동안 취해온 가운데서 시행된 그들의 제도를 우리에게 적용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고 싱가폴은 1965년에 독립한 역사가 매우 일천한 도시국가로 당연히 국민들의 일체감과 귀속감이 약하고 대신에 자기 출신국에 자신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이에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키우고 국민국가로서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싱가폴에 자신의 재산을 갖도록 주택 소유 정책을 실시했다. 이처럼 그들은 우리와 같은 아시아 국가임에도 거쳐 온 역사의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오늘날도 다른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듯 했다. 싱가폴의 중산층 가정에는 일반적으로 메이드(maid)가 있다. 영화에서도 메이드가 등장하는데 메이드는 그 집안의 사소한 일을 전부다 처리하고 주인이 외출할 때 따라가기도 하는 등 싱가폴 가정 생활을 돕는 중요한 구성원이다. 이는 싱가폴의 정부 방침과 관계가 많은데 정부에서는 모든 싱가포리언은 당연히 일을 해야 하며 모두 나가서 일을 하려면 가사 보조원인 메이드를 국가 차원에서 공급해 주는 정책을 오래 전부터 써왔다고 한다. 3백만명이 채 되지 않는 싱가폴인들이 그 같이 높은 국민 소득을 올리기까지는 국민들의 부단한 경제 활동이 있었을 것이다. 메이드들은 주로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에서 온다. 필리핀 메이드들은 학력이 비교적 높고 영어가 어느 정도 되는 반면 일을 성실히 하지 않는다고도 하고, 인도네시아 메이드들은 순박하긴 하나 교육 수준이 높지 않다고 한다. 메이드를 고용하는 비용은 메이드에게 주는 비용이 한달에 300불 정도, 싱가폴 정부에 내는 세금이 300불 정도, 그리고 메이드에게 휴지며 샴푸며 식비 등 잡다하게 들어가는 비용까지 포함하면 대략 800~900불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메이드의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안전사고를 방지하는 일이다. 유모는 아니지만 아이를 돌보는 일 역시 메이드가 하는 것이다. 또 개를 산책시키며 가족과 함께 외출하기도 하는 등 싱가폴에서 메이드는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집안의 아들은 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2년 만에 돌아온다. 그러나 유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업들은 그를 채용하지 않았다. 유학만 갔다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던 그들의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아들은 변변한 직장에 취직하지도 못한 채로 방황하며 시간을 보낸다. 특히 아들을 끔찍이도 아끼는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좌절에 함께 그 자신도 좌절하며 인생의 낙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실로 우리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 수 없다. 싱가폴 역시 유교 사상의 영향이 강한 국가로 남아선호사상과 부모들의 교육열이 상당히 대단하다. 그들은 중산층에서 신분이 상승되는 수단으로 교육을 삼아, 그들 자식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고(이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남은 재산을 거의 전부를 아들의 유학비로 썼다) 그들을 통해 대리만족을 누리려는 모습은 2007년의 대한민국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아시아의 교육열은 그 정도에 있어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교문화 영향을 받은 국가들에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한데, 이는 유교의 '효 사상'과 '교육을 존중'한다는 두 측면의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하다. '효'의 측면에서는 유교의 자아실현은 자기가 아닌 가족, 가문을 위한 자아의 실현이라는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서 자식의 교육문제는 자식의 개인적 문제가 아니다. 모든 가족이 관여하고 참여하고 걱정하는 가족 모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돈을 투자하고, 교육으로 인해 더 나은 삶을 지향한다. 이는 유교의 이런 사상(가족주의) 우리의 현실이 맞물려 과도한 교육열을 낳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좁은 영토와 한정된 자원으로 우리가 믿을 건 인적자원 뿐이었고,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노동력에 의지해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맞게 되었다. 60 ․ 70년대의 우리나라의 현실이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허리띠를 졸라매고 조금만 노력해야 한다는, 잘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해서 전 국민이 일터로 나가게 되었고, 80 ․ 90년대 들어서며 이제 배고픔의 개념과는 다른 삶의 질을 높이려고 보니 어른들이 자신들이 못 먹고 못 배운 한을 풀고자 자식들의 교육에 열정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교육이 모든 미래를 해결하고, 아름다운 청사진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지만, 교육은 자식이 '더 나은 삶'을 누리기 원하는 희망이었고, 그것은 한 번으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까지 이어지는 자원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오늘날의 교육열이 형성되었다 해도 유교의 교육론은 지금 우리의 교육론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지덕체 중 '지'만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 지금 현재의 교육이 아니던가. 그리고 문이 무보다 숭상되었다고 해도, 이것은 결코 '무' 라든지 '노동'을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교는 농업사회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노동을 중요시했다.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유교의 사상이 아닌가. 하지만 유교에서는 '신분제' 아래에 놓여있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지어져 있었다. 이후 신분제 붕괴로 천민이나 양민들도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새로운 신분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문'이 된 것이다. 문이 지배층의 특권이었던 것만큼, 교육은 신분 상승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유교 자체의 교육론은 꽤나 이상적이여 보인다. 하지만 당시 현실에 적용이 잘 되었을지는 사실 의문이다. 어느새 신분상승의 측면으로만 이용되어지는 교육을 지덕체의 균형 잡힌 모습으로 자아실현에 좀 더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교육의 이 같은 기능조차도 최근에는 위협받는 듯 하다. 과거에 교육은 희망이었고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가난해도 판·검사, 의사, 대학 교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부잣집 자녀와 가난한 집 자녀는 인생의 출발점과 종착점 모두 다르다. 교육이 희망이기는커녕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더욱 궁핍하게 하는 고통일 뿐이다. 사회통합과 계층 이동의 통로라는 순기능이 아니라 계층을 고착화하고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 교육 당국은 대학 입시 제도를 바꿀 때마다 ‘공교육 강화 및 사교육비 축소’를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제도가 바뀌면 바뀔수록 사교육 혜택을 누리는 부유층 자녀들이 더욱 유리해진다. 학생부 성적 반영 비율을 높인 2008학년도 입시개혁안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 기대와는 달리 대학들이 변별력 확보를 이유로 일선 학교에서 가르치기 어려운 논술 시험을 도입하면서 사교육 업체들의 배만 불려주고 있다. 교사를 꿈꾸는 입장에서 이 영화를 보며 중산층의 교육 문제는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았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교육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답은 아직도 숙제로 남아 있다. 취직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사소한 다툼이 계속되는 식구들 사이의 갈등에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준 것은 의외의 복권 한 장이었다. 아들이 찍어준 숫자로 20만불의 복권에 당첨된 아버지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꿈을 하나 둘씩 실현해보려 한다. 값비싼 식당에서 음식도 먹어보고, 상류층만이 가질 수 있던 콘도도 사고자 한다. 맵시 나는 옷을 식구들에게 선물하고, 돈 문제에 결혼을 주저하던 아들에게도 자신 있게 호화로운 결혼식을 약속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해 준 것은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요행이 깃든 복권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복권은 어쩌면 중산층의 속성과 닮아있는 듯도 했다. 복권은 중독성이 강한 희망이다. 매우 낮은 확률이지만 당첨만 된다면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 그리고 기대는 그 동안 복권을 사면서 잃어왔던 돈에 대한 아쉬움을 훨씬 뛰어넘는다. 당첨이 되어 엄청난 금액을 손에 쥐게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달콤한 상상들이 지금까지의 쓰라린 실패의 역사들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린다. 마치 그들이 현재의 고통을 자식들의 성공으로 보상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그렇게 쉽사리 채워지지 않고,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키웠던 그들의 자녀는 그들 부모의 모습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대개 끝나고 만다. 이처럼 복권에는 보다 나은 삶을 열망하는 중산층의 바람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고 이것이 곧 복권이 드러내는 중산층의 속성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복권 당첨으로 술술 풀릴 것만 같던 이들의 삶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는 얼마 안 되는 돈을 두고 서로 더 갖기 위한 또 다른 갈등이 있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누나와 동생 간에 벌어지는 돈을 향한 다툼은 이들의 문제가 결코 돈을 통해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많은 돈, 그리고 그로 인한 풍족한 삶이 그들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 진정한 전환이 된 것은 불행히도 가장의 죽음이었다. 아버지가 갑작스레 죽게 되며 가족은 커다란 충격에 빠진다. 그들이 그동안 집착하고 있던 것이 헛된 것임을 깨닫고 삶에 대한 허무를 느낀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아버지의 죽음 속에서 그들이 찾은 행복은 바로 가족의 소중함이었다. 가족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해 뒤돌아보며 그들이 현재 있는 자리가 가장 행복한 자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이 바라는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어떠한 일이 있든지 그들 옆에 있어주는 서로의 존재가 가장 큰 행복이었고 그것이 그들의 ‘아름다운 인생’이었던 것이다. ‘중산층이 무너졌다’ 이것이 최근 우리 사회의 상황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막상 ‘중산층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면 그 개념조차 확실하지 않다. 즉, 중산층이란 개념도 정의도 합의된 바도 없는 아주 애모 모호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시대에 따라서 변화되는 사회계층을 어느 한 단계에서 규정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중산층을 거론하면서 척도하려는 의도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반목을 조장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애초에 경제적 측면에서 ‘중산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제, 사회적으로 주도적인 위치와 피동적인 위치만이 존재하며, 그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인정받은 중산층은 사회적인 흐름과 관계성에 영향을 받지, 그 자체가 전체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며, 중산층이라고 할 만큼 다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경제 위기를 겪은 후의 우리 사회는 더욱 그렇다. 결국 시대에 따라서 중산층의 품위는 다르며, 이들은 IMF 이후처럼 언제든지 하층민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반대로 상류층으로 오르는 경우는 아주 요원한 일이다. 또한 전통적인 상류층이 중산층이나 하류층으로 몰락하는 예는 드물다. 때문에 중산층의 부모들은 이 영화에서와 같이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그리고 신분 유지의 수단으로 자녀의 교육에 그들의 모든 것을 다 거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현 실정은 늘 5 %의 특권층과 50 %의 저소득층 사이에서 움직이는 중산층의 피해의식이 문제로 대두된다. 부동산 관련 투기도 저소득층에 대한 혜택에서도 애매모호한 계층으로 중산층이 속해 있다. 경제적 이익을 싹쓸이 해가는 상류계층은 문제가 있으면 각종 힘으로 치고 빠져 나가는데 불구하고 중산층은 늘 방패막이로 희생이 되고 있다. 처음부터 상류층의 대부분은 해외에 집을 갖고 고급제품을 해외서 구매한다. 중산층은 소비세가 듬뿍 붙은 가격으로 물건을 구매하여 처음부터 피해자 일 수 있다. 사회의 중심축이지만 불안한 속성을 지니고 있고 상류층과 하층민 사이에 끼어있는 계층, 그들이 바로 중산층이다. 또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대개 일반 국민들의 성격은 그간 내성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가정에서, 교육에서, 사회에서 자기 표현할 기회를 인위적으로 제한해 왔기 때문에 정당한 주장도 제대로 펴지 못한다. 물론 국민을 위한 교육에서도 ‘왜’ 라는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교육을 받아 왔다. 대개의 학교에서의 질문은 묵살이었다. ‘왜’ 라는 질문에 가장 친절한 답변이 ‘아직 몰라도 돼’ 라는 답변이었다. 이게 아니면 아니야 또 다른 것은 몰라도 돼 그래도 알고 싶으면 몇 차례 벽을 넘어가고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내성적으로 길러진다. 그런 교육 과정을 통해 길러진 학생들은 학부과정에서조차 무슨 고시를 치기 위하여 헌법을 외우고 무슨 자격시험을 치기 위하여 답변을 외운다. 그러다 보니 원리는 모르고 마는 교육, 협력보다는 경쟁을 뚫고 성공하는 것을 강요하는 교육을 하게 되었다. 배운 대로 하고 배운 대로 같은 길을 가는 사회가 되었다. 당연한 주장도 경쟁에 이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회가 된 지금 무엇을 먼저 고칠까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이것이 과거 우리의 교육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사회 곳곳에 잔재해 있는 과거의 유산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의 중산층 계층이 형성되었고 이것은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싱가폴 사회 역시 마찬가지 인 듯 하다. 왜냐하면 우리와 싱가폴이 각기 다른 역사적 경험을 겪긴 했지만, 유교 사회라는 공통성과 국가 권력을 중심으로 한 경제 성장을 이룬 역사의 경험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강한 국가의 리더십이 최선의 가치로 여겨지던 시대가 오늘날 중산층의 모습을 형성시켰다. 영화의 전반에 계속적으로 드러났듯 그들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계층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또한 우리 사회 행복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가질 수 없는 허황된 꿈을 좇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중한 이들과 함께 삶을 누려 나가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흘러나왔던 간드러지는 목소리의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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