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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 08년 2학기 지리교육과 3학년 김현선

2008.12.21 18:33 | 명예의 전당1: 서평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73 주소복사

책이름 : 장소와 장소상실 Place and Placelessness

책지은이 : 에드워드 렐프 Edward Relph

작성자 : 김현선

 

 

어렸을 적 티비에서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에 대한 연속극 따위를 본 것 같다. 병원 침대에서 막 깨어난 환자는 가장 먼저 ‘여긴 어디지요?’라고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요?’라는 물음은 그 다음이다. 또한 만화 등에 나오는 우스갯소리로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형이상학에 의하면 존재하다 혹은 있다는 모든 사물의 본질이자 공통점이다. 있음과 관계되는 말은 많겠지만, 가시적인 공간을 차지함도 있음이라고 말할 때 연상되기도 한다.

‘장소와 장소상실’이 핵심 개념으로 장소를 택하고, 장소에 대해 철학의 분과인 현상학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위의 상황들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본 지리학 서적과 다르게, 지리적 개념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시작한다. 현상학적 방법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산만할 정도로 다양한 관점으로, 장소를 한 가지 술어로 정의하려는 의도를 배제하며 논의는 진행된다.

사적으로 쓰이지만 본질적으로 실존과 맞닿았으며, 저자가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지리적 개념인 장소는 학적 지리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환기시킨다.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장소들은 의미로 충만하며 지리학은 장소의 의미, 장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의 일상이 지리적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나의 경험을 지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저자가 공간에 대한 의식을 분류할 때 언급한 개념 중 지각 공간은 아마 내가 걷는 전남대학교의 캠퍼스, 몇 달에 한 번 가는 고향과 그 길에 거치는 터미널, 내가 사는 고시원 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년기에 자아 발견의 기초가 되며 나이가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안정감과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공간’에 대한 추억은 여수에 살던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빗댈 수 있으리라. 7살도 되기 전에 여수의 달동네에서 산 적이 있는데, 경사진 마을 앞은 항구였다. 비릿하고 짠 바다바람과 생선 냄새로 찌든 회색 콘크리트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향수와 안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뿌리 뽑힘과 장소에 대한 관심’이라는 제목이 붙은 내용을 읽을 때는 운 좋게 사주팔자가 맞아떨어졌을 때처럼 눈이 번쩍 뜨였다.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어느 날, 나의 문제를 설명할 말이 떠올랐다. 그 동안 나는 계속 거처를 옮기고, 새로운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소속감을 느껴도 좌절되었다. 그리고 고향을 이상화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가 식물 같다고 생각했다. 강진에서 뽑혀 광주에 심긴 식물. 10년 간 자라던 곳에서 뿌리 째 뽑혀 낯선 토양에 적응해야 하는 식물. 나는 뿌리 째 뽑혔다는 말을 곱씹으며 조선 시대가 모든 점에서 현대보다 혹독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주장은 아니지만 이 책에 인용된 내용에 따르면, 그 때 떠올린 뿌리 뽑힘은, 장소와 장소가 중요한 이유 그 자체라고도 하는 인간과의 유대에서 뿌리 뽑혔기 때문이라고 지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한다. “오늘날의 집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현상이다. 집이 주택과 동일해졌다. 다시 말해서 집은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 집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금전적 가치로 쉽게 측정되고 표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집을 ‘거주할 수 있는 기계’로 여기는 상황이나 무장소성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현대의 집이 처한 상황을 전적으로 대표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류를 상정하기보다 논의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저자의 태도로 미루어 그런 의도로 집어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읽자 어머니가 떠올랐다. 10년 동안 같은 곳에서 살기를 고집한 어머니는 아마 집을 ‘거주할 수 있는 기계’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몇 십 년 간 감옥에 살던 죄수는 어느 날 가석방을 당한다. 그는 친밀한 장소에서 낯선 세상으로 내동댕이쳐졌다고 느낀다. 사회는 너무 변했고 자신은 감옥에서보다 무능한 사람 취급을 당한다. 범죄를 저질러 다시 감옥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마저 하지만 결국 자살한다. 이 죄수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마 책에서 설명한 노스탤지어가 아닐까? 17세기, 18세기 의사들은 노스탤지어가 집에 돌아갈 수 없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라는 책의 주인공인 하이디도 자기가 살던 시골에서 도시로 떠난 뒤 몽유병에 걸리고 시름시름 앓는다. 장소는 나의 어머니에게는 애착의 대상이었지만, 더 나아가 죄수나 하이디에게는 떠나면 죽을 수도 있는 물고기의 바다와도 같았나 보다.

 

이렇게 감정을 이입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추상적이고 광범위하며 비정형적인 방식으로 쓰여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저자가 경직된 논의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장소의 진정성과 비진정성에 대한 부분에서 저자의 어조는 확고해진다.

 

예를 들어 대중매체는 대중적인 장소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는 상징이나 의미, 합의된 가치가 아니라 멋대로 합성해서 만들어진 조잡하고 경박한 상투성에 기초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작된 이미지를 지닌 채 해당 장소를 찾아가는 일은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한다. 이른바 진정성이 부족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에 부여하는 가치가 입장에 따라 상이함은 저자도 말한 부분이다. 같은 달동네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불쾌하고 지저분하고 비좁으며 비슷비슷한 집들이 몰개성하게 들어선 장소라고 느껴지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집들과 거리의 개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며 자아를 구성하는 의미 깊은 장소일 수 있는 것이다. 장소의 진정성도 장소 자체가 가지기 보다는 장소를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성질이 아닐까? 물론 대중적 이미지는 장소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나 이해가 없이, 단지 조작된 이미지일 뿐이며 심하게는 선입견이라고 말해질 수 있지만 말이다. 대중적인 장소이미지가 허구성 때문에 저자로부터 비판받는다면, 허구적이지 않은 대중적 이미지는 그럼 비판받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대해 거의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자연적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장소와 관련한 정체성을 장소의 정체성과 장소에 대한 정체성이라고 구분하는 부분도 잘 이해가 안 간다. 어떤 것에 대한 정체성이 아닌 어떤 것의 정체성은, 다른 것으로부터 그것을 구분해낼 수 있도록 하는 지속적인 동일성과 통일성을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이 주체로서 정체성을 느끼는 것처럼 장소도 스스로 정체성을 느끼는 것일까? 장소는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느낌 안에서만 정체성을 가진다. 게다가 인간이 고유하고 절대적인 정체성을 가진다고 말해도 반발이 있는데, 장소가 가진 정체성이라니. 내가 저자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일까.

 

아무튼 지금까지 읽은 지리학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인문학적인 책이었다. 경제철학, 역사철학, 사회철학 같이 지리철학이라는 분야가 있다면, 아마 이 책이 그 분야에 잘 들어맞지 않을까 싶다. 위대한 지리학적 발견이나 지리학의 역사를 통해서만 지리학이 무엇인지 알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지리학에 접근한 책은 처음이라 좋은 경험이 되었다.

 

hhg 2009.09.03  21:00  [115.136.142.38]

ihu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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