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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말코비치 되기] 감상평 김현선 나는 나다. 깨어 있는 동안, 나는 나를 의식한다. 정확히는 나를 의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나를 온전히 의식하는 것일까? 윗배에 난 점, 발바닥에 붙은 굳은 살, 남이 불러주는 이름 등 나에 대한 지식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도 아니면서, 전체적으로 나를 의식할 수 있을까? 나에 대한 사실들을 강박증처럼 기억해내는 일이 의식이 아니라면, 의식함은 감각을 경계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나누어 느끼는 것일까? “존 말코비치 되기”는 여기에 또 다른 의문도 퍼다 준다. 나라는 사실을 의식하는 나는 무엇일까? 영화 속의 존 말코비치는 분명 존 말코비치였다. 하지만 그와 연결된 통로를 타고 사람들이 건너오기 시작한다. 이 통로는 말코비치의 무의식과 연결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타인의 의지가 말코비치의 행동이나 말, 생각과 그에 따른 결정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무의식 속에 있는 타인까지 생각하면 나는 여럿이지만, 말코비치는 내가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중앙집권적인 하나의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닌 가정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인이 무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은 충격적인 상상이지만, 그 점은 잠시 잊고, 무의식이 말코비치의 일부인지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식할 수 없으니, 무의식에 숨어있는 본능이나 생각, 무의식적인 행동 등은 말코비치의 일부가 아니지 않을까? 말코비치가 개미를 밟아죽였음을 의식하지 못해도 그는 개미를 밟아 죽인 것일까? 그렇다면 말코비치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시절을 말코비치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하지만 심리학적으로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을 동시에 가지며, 나의 논의는 의식과 의도를 혼용해서 생긴 것 같으니 본점으로 돌아가겠다.
아무튼 무의식에 들어왔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인형술사인 슈와츠가 의식까지 침범하자 그때 비로소 말코비치는 자신 안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다고 의식하고, 슈와츠가 나가자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말코비치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의식하고 있을 때는 억압을 느끼고 자유를 원할 수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통제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벗어날 생각조차 못한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래서 누군가는 끊임없이 낯설게 바라보고, 부조리를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하나 보다. 부조리를 평생 의식하며 사는 것은 외줄타기와 같은 긴장과 외로움, 고됨을 필요로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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