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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지리학 (Geographies of Postmodernism)

2008.09.17 00:15 | 토막강의 | philgeog

http://kr.blog.yahoo.com/kyonghwanpark/133 주소복사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본대면 “모더니즘-이후” 정도가 되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생각하는 “이후”의 정도가 저마다 틀리겠지요. “포스트”라는 용어 자체가 앞의 것과는 다르다는 “단절”을 의미하면서도 앞의 것의 다음이라는 “연결”을 동시에 의미하는 까닭에, 사람들이 저마다 이 단절과 연결의 사이의 직선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점을 찍을 때 저마다 틀릴 수 있겠죠.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 자체에 대한 거부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이 어떤 카테고리안에 억압되어 있는 다양성, 혹은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이던 시절 서태지와 아이들이 TV에 처음 데뷔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한 방송국의 TV 연예 프로그램이었는데, 프로그램의 제일 마지막에 신인가수를 초대하여 노래를 들은 후 4명의 심사위원이 점수를 매기면서 평을 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난 알아요”라는 곡을 부르면서 7.8이라는 최악의 점수와 더불어 탐탁치 못한 심사자들의 평을 들었었죠. “저는 노래를 들을 때 우선 가사가 문법적으로 맞는지를 봅니다”라고 하던 어떤 심사자, “안무는 남성적인데 멜로디는 여성적이다”며 노래를 폄하했던 어떤 작곡가도 생각이 납니다. 그러나 그 방송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90년대 중반까지 가요계를 평정하며, 단순한 아이돌 스타가 아니라 “저항”, “권력에의 도전”, “문화혁명”과 같은 코드로써 기호화되어 전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지금은 삐딱함, 일탈, 파격, 부조화, 도전, 파괴, 반항 등의 코드는 너무나 일상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서태지와 아이들의 뭔가 “부조화스런” 음악은 일렬로 “점수”을 매겨가면서 멜로디와 안무가 “조화”드러운지, 가사가 “문법”적으로 맞는지를 보는 권위 및 권위적인 시선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모던한 의미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10점 만점짜리 음악이라는 어떤 규준에 대해 심사위원의 권위에 의해 그 아래 어디 쯤에 위치되어야만 하는 것이었죠. 그러나, 사실 현실은 그 음악을 “다름”, “파격” 혹은 “새로움”으로 받아들이면서 서태지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던 것이죠.


독재군사정권이 뚜렷했던 90년대 초 이전에는 사회의 민주화가 워낙 시급했던 터라  “적”과 “우리” 라는 이분법이 뚜렸했고 따라서 “운동”으로 일컬어지던 대학생의 정치참여는 그래야만하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학교에 입학하였던 시기는 제도적으로 민주화가 정착되기 시작하였던 시기였던터라 신입생들은 운동을 하느냐 혹은 마느냐의 고민을 깊이 하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1992년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되고 독일도 통일을 이루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사회주의 운동이 새롭게 재조명되고, 의심받고, 혹은 거부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에 정말 사회주의 운동이 필요한지, 어떤 사회운동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고 운동을 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어떻게 보면 운동권이 되기 싫은 변명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 한 선배의 말이 기억이 납니다. “운동이 뭔지를 알려면 운동을 해보아야 안다”는 것이었죠. 그 말은 지금 생각해보면 사회적 위치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꾸어 물어볼께요.남성의 몸으로 여성이 사회적으로 겪는 다양한 차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백인의 몸으로 흑인이 겪는 인종차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혹은, 보다 근본적으로 내가 진정 타인을 100%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해 혹은 지식을 이야기하는 순간 어떤 “객관적”, “절대적”, “과학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위치를 선험적으로 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객관성 혹은 절대성은 누가 판단하고 누가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있을까요? 이해 혹은 지식이라는 지극히 객관적인 용어 자체도, 구체적으로보면 이해하는, 판단하는 주체가 누구냐라는 차이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은 이와 같은 객관성, 절대성, 규준성, 과학성 등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죠. 모더니즘에 철학적 기반이되는 근대철학은, 중세 말기에 등장한 프랑스의 철학자인 데카르트(1596-1650)에서 출발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세는 신이 지배하는, 아니 보다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신의 말씀을 평민들에게 전달하여 주는 성직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In the beginning the Word already existed.  He was with God, and he was God)”. 말씀(The Word)이 대문자로 시작하는 것처럼, 말씀은 절대적인 진리요 인간이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위로부터의 권력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남성성으로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중세 뿐만 아니라 근대 철학을 관통하는 서구의 “말씀 중심주의”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과학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절, 데카르트는 신을 통하지 않고서도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이라는 선물을 통하여 신의 말씀인 절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세계는 당시 지리상의 발견 등을 통하여 기존의 성경적 지식에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경험적 지식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살던 당시는 갈리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았던 시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데카르트는 신학적 굴레를 벗어나고 절대적 이성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생산하기 위하여 신을 끌어들였다고도 할 수 있겠죠. 중세는 모든 진리가 신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까닭에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성직 즉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전략적인) 철학적 질문은 “신의 말씀에 의존(refer)하지 않고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진리를 내가 알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라고 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어찌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것 같으나 이와 같은 혁명적인 사고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신에게 묻지 않더라도 내가 생각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통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기 자명한 진리에서 출발하여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인 사유를 통해 수학, 기하학, 자연과학적인 “객관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합니다. 모더니즘은 이와 같은 근대철학에서 출발합니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개발을 통하여 즉, 과학적인 사고와 지식의 축적을 통하여 인간이 신의 진리에 종교를 통하지 않고서도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더니즘은 하버마스(W. Harbermas)가 “모더니티 프로젝트”라고도 명명하였던 18세기 동안에 몽테스키외, 볼테르, 그리고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루소 등과 같은 계몽사상가들의 힘을 업고 전면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계몽”이라는 말 자체는 종교적 권력의 어두움에 묻혀있는 세계를 과학적 이성적 세계로 열어젖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 권력으로부터 탈피하여 절대왕정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던 왕권은 이와 같은 계몽사상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어떻게 보면 유럽의 식민주의는 이와 같은 내적 종교적 권력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전략적인 것으로 생겨났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은 자연에 대한 이성적 사고와 과학적 “지배”를 통하여, 인간을 미신의 세계에서 해방하여 굶주림,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변화는 공간과 시간을 보는 관점이 혁명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상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공간적인 인식은 기본적으로 본인의 육체가 땅에 발붙여 살아온 사회속에서 생겨나는 문화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이 발달하게 되면서 원근법, 투시도법 등과 같이 어떤 공간을 객관적, 과학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지구를 칼로 사과조각을 자르 듯 위선과 경선으로 나누고 영국 그리니치를 본초 자오선의 중심으로 삼아 수학적인 기호를 부여하는 것이 대표적이겠죠. 공간계획도 격자형, 대칭형으로 조성함으로써 공간적 질서감을 주는 것도 이에 해당되겠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시간적 경험은 자신의 육체가 속한 자연 및 사회의 변동 흐름에 따라 달리 느끼는 것이고, 시간이 가지는 의미도 사회의 템포에 따라 다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년을 12개월, 한달을 30일, 시간을 24시간으로 쪼갤 뿐만 아니라 분, 초의 단위 까지도 쪼개면서,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을 갖게 될 정도로 선형적 시간 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공간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간적, 시간적 미학을 생각해보면서 우리의 사회의 다양한 모더니즘을 읽어 봅시다. 우리는 “바빠서 힘들다”고 하면서도 왠지 바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죠? 게으른 사람을 보면 뭔가 “부족한” 혹은 “개선되어야 할” 사람으로 비쳐지지는 않던가요? 그러나, 버트란드 레셀이 근대 형성시기에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책에서 비판하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이 바쁨에 대한 미학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인간의 소외 및 경제적 불균등을 양산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겁니다.


모더니티라는 것은 결국 유럽의 근대 권력층, 특히 왕정, 근대철학자, 과학자집단 및 부르조아지 계급이 서로의 이해관계속에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프로젝트”라는 것이죠. 오늘날은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그것이 얼마나 특수한 상황에서 형성된 특수한 사회문화적 작품이었던가를 모르지만, 그 시작은 굉장히 시간, 공간 특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창조적 파괴”라고도 일컬어지는 근대화의 흐름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회생활집단 및 그 공간을 “유토피아”를 향한 절대적 믿음하에 통일적이고 질서정연한 사회 및 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이었지요. 이 속에서 모더니즘은 유럽의 낭만주의 사조를 생산하기도 합니다. 루소는 데카르트의 언명을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고 치환함으로써 모더니즘으로의 전화를 과학화의 과정 뿐만 아니라 미학적, 예술적 차원으로 변화시킵니다. “개인”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상상된 개념”이지 개인 속에는 수많은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더니즘은 기존적으로 미학적인 주체로서의 예술가 자신을 하나의 일반적인 개인으로 놓고 자신의 주체적 의식, 감각, 감성, 의미 및 사회와의 관계 등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모더니즘은 기계화, 산업화, 도시화, 시간과 공간의 객관화, 기술적 변화, 대중문화화, 등질화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 변화속에서, 사라져가는 전통사회, 공동체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하거나 지식인 집단의 전위(아방가르드)로서 예술가들이 가지는 영원불변한 것에 대한 지향을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모더니즘 작품은 이러한 까닭에 대부분 대중성과 깊이 유리되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관념적이면서도, 어떤 유토피아적 영원성, 불변성을 개인의 심미주의적 태도를 통해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모더니즘은 1차, 2차 세계 대전 이후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성 및 그에 근거하는 과학적 진보가 유토피아를 형성하기는 커녕 수 백만명의 살상과 사회의 파괴를 야기했기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자들이 생각했던 유토피아는 흑인 및 황인종의 세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축적된 부에 기반한 것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백인”들만의 상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들이 이성 및 과학에 대한 믿음에 기반하여 사회의 진보와 유토피아를 이야기했던 18, 19세기에, 이미 수백, 천만의 비백인들이 무참히 살상되었고 그들의 사회와 문화가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죠. 결국, 모더니즘은 개인주의, 이성에 대한 믿음, 사회진보에 대한 의지에서 출발하였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철저히 집단적인 권력, 비성적인 정치,군사적 권력, 그리고 다른 사회에 대한 침략에 기반한 괴물같은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발전”을 이야기하지만, 그렇기 위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다른 개발도상국가의 “파괴”는 쉽게 생각할 여유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죠. 어쨌든, 세계대전 이후 이성에 대한 직접적인 회의와 비판을 드러내는 실존주의, 현상학적 흐름들이 생겨나기도 합니다만, 모더니즘은 “영웅성”으로 대표되는 전간기 (세계대전 이전) 모더니즘과 달리 전쟁이후에는 특히 건축 등의 분야에서 합리주의적, 기술중심주의적, 표준적은 성격을 띠며 “보편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후간기 모더니즘은 결국 1968년을 전후한 신좌파, 반모더니스트 운동들에 의하여 비판받게 되고, 이후 포스트모던적 예술양식으로 얼굴을 바꾸게 되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티 프로젝트가 상상해온 개념들 즉, “인간의 합리적 이성”, “보편적 인간”, “인간의 진보와 그 역사성”, “절대적인 지식”, “객관성” 등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둡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여러 차원에 접근할 수 있겠는데, “차이”를 드러내는 현상 혹은 철학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서구의 “말씀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근본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서구 근대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구성을 통하여 신으로부터 인간을 독립시키려는 데카르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철학”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어렵고,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많은 개념들은 사실 이와 같은 “언어”라고 하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하여 인간이 이성을 통하여 무엇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의 부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것으로써 인간 사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시공간적 맥락하에 형성된 사회와 문화의 부산물입니다. 우리가 사전에서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본다고 가정합시다. 사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차이는 “같음의 반대. 똑같지 않음” (영어사전의 경우) 등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동의어와 반의어는 사전상에서 어떤 개념을 가장 쉽고도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동일성”이라는 용어를 찾으면 어떨까요? “차이가 없음”으로 정의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이 어떤 개념은 서로가 서로를 정의하고 있는 까닭에 항상 그 의미가 다른 개념에 대한 참조(reference)를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이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죠. 여성은 남성을 참조하지 않고서는 그 의미가 획득되지 않습니다. 낮이라는 것은 밤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정의가 되는 것이죠. 서양이라는 것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동양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것이 언술이 의심할 수 없는 명제라고 하였는데, 누가 “나”라는 것은 뭐지? 문장속의 “나”는 글을 쓰는 “나”와 똑같은가?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항상 똑같은가?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무슨 생각을 한다는 거지? 등으로 물을 수 있을 터입니다. 결국,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이라는 것, 즉 언어라는 것은 고정되어 있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의미를 획득하며 그 의미라는 것도 항상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천재적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란 언어게임 그 자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언어게임? 즉, 우리말로 하면 말장난이죠. 정체성(identity)이 오늘날 주요 사회이론의 핵심적인 화두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러한 언어적 배경에 있습니다. “Identity”는 그 사전적 의미에서 두 개의 대립적인 의미를 동시에 의미합니다. 하나는 “독자성, 개성”이라는 뜻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일함, 동일시 여김”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정체성이란 다른 실체와의 절대적 “동일성”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체의 독특성, 유일무이성, 차이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따라서, 어떤 사물, 개인, 집단, 국가, 사회, 문화의 정체성은 다른 것들과의 비교를 통해 인식되는 동일함과 차이의 논리에 따라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령 “개”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개라는 것이 고양이와 “다른” 어떤 속성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개라고 인식하지만, 반대로 “개”라는 카테고리에는 진돗개, 삽살개, 푸들 등 다양한 하위 개념들의 차이를 무시한 채 일반화하여 “개”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언어를 사용할 때에는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어떤 카테고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혹은 억압되어 있는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언어에 배여있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은 한국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떤 미국인을 의미하고 어떤 한국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혹자는 일반적인 미국인, 일반적인 한국인이라고 대답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미국인, 일반적인 한국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여성? 남성? 어린 아이들? 흑인? 백인? 등등 우리는 실제로 “일반적인 미국인”을 가리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거대서사(grand narratives)는 그 속에 드러나지 않는 차이를 항상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과학적인 진술과 일상적인 언어 행위 모두를 아우르는 언술에 내재되어 있는 권력은 사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말장난”은 너무나 보편화되고 일상화되어 있어서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인 차이에 바탕을 둔 당연하고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남성과 여성의 구분 및 그를 둘러싼 많은 인식은 “생물학적”인 차이에에 바탕을 두는 대신 “사회적” 차이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서로 다름에 의하여 서로 참조되고 또 정의되지만, 실제 언어생활에서 우리가 “남자는 다 늑대야”, “여자애들은 소심하고 잘 삐져” 등 이야기할 때에는 전혀 이와 같은 생물학적 참조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결국,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죠, 사회적인 까닭에 사회권력관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어서, 모든 언어관계는 권력관계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되는 것입니다. “담론”을 처음 이야기했던 푸코는 이것을 거꾸로 이야기하지요, “모든 권력관계는 언어관계”라고 말이죠.


자,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지리학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상(혹은 현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태도(주의)”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중대한 문제를 함축하고 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을 개괄하는데에 유용하기때문에 일단 여기서는 대상과 태도로서 구분하여 먼저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상으로 파악하는 포스트모던지리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태도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그 토대에 관심을 둡니다. 보통, 유연적 축적, 포스트포디즘 등으로 대변되는 축적 체제 변화에의 관심이 그 하나가 되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부류의 연구들은 이와 같은 경제체제의 변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포스트모던한 사회, 공간구조, 경관, 도시 등을 형성하게 되는지에 또한 관심을 둡니다. 하비는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이라는 저술에서 공간이 생산되는 세 가치 차원의 틀, 즉 “공간적 실천”, “공간적 재현”, 그리고 “재현된 공간”을 통하여 이러한 공간변화과정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많은 IT 기업들은 기술혁신을 일으키는 정보, 지식의 네트워크 형성이 중요한 까닭에 본사나 연구개발기능 등은 도시 내부에서 입지하여 다른 기업들과 산업지역을 형성하지만, 실제 IT 제품을 제조하는 것은 노동비와 지대 등 고정비용이 저렴한 도시 외부에 입지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간적 실천). 공학, 건축, 설계, 지리(경제지리) 등 공간적 재현을 다루는 학문에서는 도시 내에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인 벤처기업단지 혹은 첨단산업지구를 형성할 수 있을까를 “과학적 지식”을 가장한 공간 담론을 생산하지요. 가령, 네트워크가 잘 발달되려면 정보, 통신 하부구조 뿐만 아니라 적절한 휴식공간도 필요하고, 정부기관이 주변에 입지해서 기업들을 지원해야 하고, 고급 인력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에 대학교나 연구소가 있어야 한며 심지어 빌딩의 내부구조나 외관도 그에 걸맞게 효율적이면서도 첨단성을 상징하는 독특한 건축이어야 한다는 등의 담론을 생산합니다 (공간의 재현). 마지막으로는, 이와 같은 재현이 공간화되어 나타나는 양식이 될 터인데, 도시 내에서 기존의 다운타운 근처에 기업본사가 입지한 것과는 달리 도시의 여러 곳에 새로운 산업중심지구가 형성되고, 건물의 양식도 기존의 길쭉한 사각형의 모습이 아닌 전면 유리로 되어있으면서 꼭대기가 길쭉하게 변형되거나 불규칙한 건축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건물들 사이의 한 가운데에 스타벅스같은 까페나 공원이 나타나기도 하겠죠(재현된 공간). 르페브르에 의해 제시된 이러한 공간의 변증법은, 빈부격차의 증대, 파트타임 노동의 증가, 기업의 수직적 분화, 기업의 수평적 협력확대, 다품종소량생산, 제품주기의 단축, 노동시장의 다변화, 지방의 분권화, 작은 정부, JIT 생산방식, 출퇴근의 유연화 등 다양한 사회경제적 유연화의 결과 및 특색이 가져온 공간적인 변화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유용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모더니즘은 선형적 시간의 흐름에 기반한 유토피아적 사고에 의하여 시간이 우선적이었고 따라서 전통적-모던이전의 공간을 모던화하려는 욕망이 있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양식에서는 오히려 공간성을 중요시하여 시(공)간적으로 서로 상이한 것을 특수한 목표하에 한 공간안에서 재현하는 “꼴라쥬”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더욱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이는 특정 공간의 장소감을 새롭게 재현함으로써 소비자와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전략의 일환인 경우가 많지요. 더군다나 제품의 수명주기뿐만 아니라 공간적 수명주기도 빨라져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공간감대신 인위적으로 빨리 재편되는 공간의 재현도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제머슨(Jameson)이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의도된 깊이 없음”이라 하겠죠? 하비(Harvey)는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도시경관의 분절화, 파편화, 그리고 탈맥락화등은 실물자본주의와 분리된 금융자본주의가 과잉축적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감행하는 “공간적 돌파”의 일환의 결과라고 보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의 차원은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 지리에 접근하는 것이겠는데, 이는 푸코(담론-권력과 지식의 관계), 데리다(해체-무의미의 의미), 부르디외(취향, 상징/문화자본), 리오타르(언어게임), 보드리야르(시뮬레이션/초현실성), 들뢰즈/가타리(욕망) 등 일련의 사회이론(social theory)에 대한 관심과 참조를 통하여 모더니즘을 비판하고 그에 억압되어 있는 차이가 공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데에 관심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부류의 지리학에서는 “주변성(marginality)”라는 용어가 중요하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한 언어게임의 기반이 되는 “이분법”은 수평적인 관계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불균등학 권력에 기반하고 있다고 봅니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에는 단지 차이들만이 있을 뿐이며, 어떠한 긍정성도 그 내에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데리다는 “차연(차이와 연기의 혼합)”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일상 언어를 포함한 철학적 용어들은 그 의미가 고착되어 있는 것이 이분법적 관계에 의하여 대립되는 것과의 비교를 통해 항상 의미가 연기가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남성-여성의 이분법은 그 자체가 수평적인 이분법이 아니라 남성 중심의 불균등한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죠. 남성은 자신이 정의되기 위해서 항상 그 거울로써 “여성”을 필요로 합니다. 이 때 여성의 의미는 남성의 의미와 동시에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과 “무엇이 어찌어찌 다르다(틀리다)-부정"이라고 자기 인식을 한 후에 비로소 그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이죠. 앞의 요한복은 1장을 잘 보세요. 말씀(Word)은 그녀(she)가 아니고 그(he)입니다. 차이에 관계에서 하나는 권력을 지닌 주체의 입장에 서고 하나는 타자의 입장에 서게 되며, 주체의 자기 인식은 항상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죠. 따라서 타자는 항상 주체가 지니는 속성들 중 무엇을 결핍(부족)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남성-비남성이 되는 것이죠. 마치, 백인-유색인의 이분법처럼 말이죠. 거꾸로, 여성-비여성 혹은 아시아인-비아시아인 하면 어떻습니까? 적절한 이분법이 아닌 것 같죠? 태도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와 같이 사회에 억압되어 있는 타자들 및 타자성(여성/여성성, 홈리스, 호모/레즈비언, 트랜스젠더, 소수민족, 장애인, 비만인, 자연/생태, 농촌, 슬럼, 유곽-집창촌, 이슬람, 더러움의 공간, 귀신의 공간/유령의 집, 무덤, 질병의 공간, 교도소, 정신병원 등)의 형성에 개입되는 권력의 본질과 그 사회공간적인 과정에 초점을 두어, 모더니티 프로젝트가 보편화된 이후 우리 사회를 생산해 온 주류 혹은 권력(이 때의 권력은 정치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권력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상적 권력관계를 의미)을 해체, 비판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이분법적 언어의 권력 구조 뿐만 아니라 그것이 형성한 사회공간적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상(객체적 입장)과 태도(주체적 입장)로서 구분하였는데 실제로 이 둘의 구분은 모호하기도 하고 상호 구성을 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글의 서두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무엇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제 그 무엇이 되어보아야 안다”는 말을 상기할 때에, 어떤 대상을 주체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주체가 객관적인 위치에 서있지 않은 까닭에 대상에 대한 왜곡 혹은 이해의 부족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떤 대상을 바라보는 나는 특정한 사회, 문화, 그리고 언어게임속에서 살아온 나와 분리될 수가 없다는 것이죠. 보다 직접적으로, 제가 이제까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렇다면 제가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이것을 이야기 한것인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는지 내가 혹은 그 누가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글속의 “나”와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여러분과 읽는 “나”가 모두 동일한 나일까요? 포스트모더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지금 포스트모던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누구나 주체이기도 하고 객체이기 때문이죠. 영화 메트릭스에서 항상 주인공 네오가 선택-운명 두 가지에서 고민하는 것처럼, 나는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이기도 하지만 항상 그 선택은 객체로서 나에게 이미 주어진(조건지어진) 것들 사이에서의 선택이기도 하지요.

2005. 10. 26. 박경환

임치홍 2008.12.16  20:14  [58.141.104.117]

교수님, 건강하시죠? 우연히 블로그에 오게된 이후에 종종 들러 좋은 글 많이 읽고 있습니다. 예전에 쓰시던 이메일 계속 쓰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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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08.12.16  22:42  [168.131.49.212]

그래 잘 지내고 있냐? 지난번에 다시 들르랬더니 그냥 갔구나. 내년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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