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민주의(colonialism)이란 무엇일까요? 식민주의라는 말은 농장(farm) 혹은 정주(settlement)를 뜻하는 로마어 ‘colonia’에서 비롯되었는데,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식민주의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A settlement in a new country ... a body of people who settle in a new locality, forming a community subject to or connected with their parent state; the community so formed, consisting of the original settlers and their descendants and successors, as long as the connection with the parent state is kept up.
위의 사전적인 정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민주의와 뉘앙스가 많이 틀린데, 이는 식민지본국 사람들이 정주하기 전부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배’와 ‘저항’의 관계도 들어가 있지 않죠. 또한 “새로운” locality라고 하였는데 이는 낡은 것 혹은 원래 있던 것에 대한 파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을 아닐까요? 또한,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한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 필연적인 정치적, 군사적 불평등 관계 등은 위의 사전적인 정의에 배제되어 있습니다. 사실, 상당한 수의 유럽 및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colonialism"이라는 용어는 우리의 시각만큼 부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지역으로 진출, 영역의 확장, 미개한 사회/지역의 개척, 황무지나 미개척지로의 도전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식민주의는 16세기 이후의 유럽 식민주의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2세기에는 중앙아시아와 대서양 연안까지 확장되었고, 칭기스 칸은 13세기 몽고대륙에서 뻗어나가 중국,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동과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또한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 문명 또한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멕시코를 포함한 많은 부족국가를 지배하기도 하였죠. 그렇다면 왜 유럽의 식민주의도 오랜 식민주의 역사가운데에 하나 아닐까요? 유럽의 식민주의와 다른 식민주의를 구별하는 뚜렷한 차이가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 가운데에 하나를 맑시즘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유럽의 식민주의는 서유럽의 자본주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났는데, 이는 다른 식민주의 역사와 달리 단순히 피지배사회의 부와 자원을 약탈하는 것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피지배 사회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버림으로써 식민지본국과 식민지간에 체계적인 불균등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흐름을 만들었다고 설명합니다 (식민지-노동과 raw material 공급 및 시장, 식민지본국-설탕 및 직물 제조업). 즉, 식민주의가 없었다면 유럽의 자본주의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제국주의(imperialism)는 무엇일까요? 제국주의는 원래 ‘명령’ 혹은 ‘절대적 권력’의 의미에 기원하는데, 사전적인 정의로는 ‘황제(emperor)의 전제주의적 지배’로 되어있습니다. 옛날의 로마제국부터 오스만-투르크 제국, 그리고 가깝게는 대한제국이 그러한 예가 되겠지요. 그러나 20세기 초 맑시즘을 발전시킨 레닌과 카우츠키에 의해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였습니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인 모순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성장’ 즉, 끊임없는 자본주의적 공간을 생산함으로써 존립할 수 있는 체제인데,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 자본의 축적이 극도에 도달하게 되면 제한된 공감으로 말미암아 선진자본주의 국가들 간에 피할 수 없는 충돌, 즉 ‘제국주의전쟁’이 발생하게 되어 자본주의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죠. 이와 같이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차이는 일차적으로 공간적인 관점에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는 식민지/제국 본국에 뿌리를 두어 공간적 지배와 통제를 파생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식민주의는 그 결과로써 식민지에서 나타나는 지배와 통제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제국주의는 오늘날의 세계화라는 제국주의(see Hardt and Negri's Empire) 혹은 미국의 제국주의에서 볼 수 있듯 공식적인 식민지 관계가 없이도 기능할 수 있지만, 식민주의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기식민주의(postcolonialism)이란 무엇인가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언제나 “post”라는 말이 함축하듯 후기식민주의는 형식적 식민주의를 “벗어났다”는 의미와 “이후”라는 의미 둘 다 있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백인 미국인들의 경우 식민주의라고 하면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기를 떠올리는데, 이러한 경우는 벗어났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죠. 뉴질랜드나 호주의 경우도 비슷하겠죠? 그러나 미국 원주민이었던 어메리칸 인디언들이나 뉴질랜드 혹은 호주의 원주민의 경우는 어떨까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식민주의에서 벗어난 것이 그들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까요? 오히려 이들에게는 유럽인의 사고방식과 가치를 지닌 백인들의 계속되는 지배라는 의미에서 별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즉, 식민주의에 의해 모든 식민지 거주민들이 동일한 억압, 착취를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 농민, 여성 계층 혹은 유색인종과 같은 주변적 집단들에 이러한 억압이 집중되는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민족/국가주의에 토대를 둔 많은 식민지 이후의 독립국가들 경우 지배자의 위치만 달라질 뿐 실질적인 지배를 받는 집단들에게는 ‘식민지이후’에 있어서 식민주의와의 연속성이 더욱 강할 수도 있겠죠. 즉, 후기식민주의라는 것은 식민지본국-식민지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관계(이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관계 내에 내재되어 있는 혹은 그 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외연적 맥락 둘 다와 관련된 다양한 후기식민주의적 현상에 초점을 두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후기식민주의적인 사회가 식민주의 이전 시기에 대해 가지는 단절성입니다. 즉, 한 번 식민주의가 사회문화적으로 식민지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면, 식민주의가 끝나더라도 그 사회를 식민주의 시기 이전으로 되돌려놓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죠. 즉, 한국의 경우 일본의 식민주의시기에 뼈대가 형성된 철도망과 항구도시에 의한 기본적 경제공간구조, 교육제도, 주소체계, 지식체계 등을 완전히 새롭게 재편할 수 있을까요? 보다 넓은 차원에서는 일본 식민주의에 담긴 서구중심주의적 자본주의 문화와 가치를 그 뿌리부터 뽑아내고 전혀 새로운 후기식민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체제 자체도 식민주의의 산물이 아닐까요? 유명한 페미니스트 후기식민주의 문화 비평가인 Gayatri Spivak 은 이와 같은 ‘pre-colonial’한 전통적인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것을 복구하려는 욕망이 오히려 제국주의에 갖힌 오늘날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데에 장애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pre-colonial’한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항상 후기/식민주의의 역사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거나 상상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죠. 요컨대, “postcolonial”이라는 용어는 어떤 사회에 대한 ‘평가(eval uate)’나 ‘판단’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어떤 사회를 ‘기술하는(describe)’ 태도 혹은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지난 500여 년 동안 지구상 대륙의 85% 이상이 유럽/서구 백인 사회에 의해 지배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배가 오늘날 비공식적인 양식으로 보편화, 일반화된 세계 현실을 볼 때, 후기식민주의는 특정 국가, 지역, 사회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과 같이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창(window)’이 되는 것이죠. 후기식민주의 연구는 크게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탈식민지화(decolonization)의 역사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써 어떻게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 혹은 극복이 식민주의적 인종, 문화, 언어, 계급 관계에 도전하거나 이를 변형시키는가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서구의 탈식민주의 연구를 중심으로 어떻게 주체와 문화가 탈/식민지화의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혹은 담론을 통해 생산되는가라는 보다 구조주의적인 차원의 문제의식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두 문제의식은 보통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차원에서 서로 밀접하게 얽혀있습니다. 먼저 이데올로기의 차원을 봅시다. 1854년 영국이 인도에서 발표했던 교육조치는 “영국식 교육이 인도 원주민들에게 노동과 자본에 의한 놀라운 결과를 가르칠 것이고 그들이 우리(영국)를 모방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원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에 눈을 뜨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도의 개혁가였던 Raja Roy는 이러한 교육이 인도를 “암흑”으로부터 구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는 지배자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들이 스스로가 열등하고 미개한 주체들이라는 자기인식을 하게끔 합니다. 또한, 이러한 식민이데올로기는 식민지본국에서 white working class들을 길들이는 방식이 되기도 하였죠. 이과 같은 새로운 주체의 탄생이자 인간을 노동-자본의 관계에 의해서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 근대화이자 발전이 되는 것이죠. 이러한 의미에서 세재르(Cesaire)라는 아프리카의 흑인 운동가는 사람은 “식민화=물화(thing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라는 리얼리티를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격자(인종이나 계급 등)에 위치시킬 수 있도록 객체화하는 것이죠. 그리고 유럽과 그 타자(other)의 관계는 자본주의(개인주의적)와 비자본주의(공동체적, 협력적)의 차이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Franz Fanon이라는 그의 유명한 저술 “Black skin, white masks"라는 저술에서 식민지인들은 단순히 유럽에 의한 노동착취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유한 문화의 사망과 매장에 의해 형성된 열등성으로 가득찬 영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심훈의 상록수나 이광수의 흙와 같은 “계몽”소설뿐만 아니라 기독교과 깊이 관련된 농촌계몽운동, 나운규의 문화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 민족계몽운동, 과 같은 식민주의적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이러한 운동이 말하는 “계몽”은 무엇으로부터의 무엇을 향한 계몽이었을까요? 담론의 차원에서는 전 시간에 설명했던 오리엔탈리즘, 즉 비유럽사회 특히 근동(Middle East)지방에 대한 상상의 지리가 유럽의 소설가, 탐험가, 정치인, 철학자, 학자집단, 예술가 등에 의하여 ‘지식'으로 생산되고 유통되는 문화적, 물질적 체계에서 잘 드러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 혹은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그 나라, 지역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이라 이분법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이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은 리얼리티로써 존재하는 그 나라 및 지역의 특성 자체가 아니라, 나 혹은 우리들의 주체적 입장에 비추어보았을 때에 가능한 판단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친숙한 것과 낯선 것은 주체의 위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근대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이분법에 기초한 오리엔탈리즘 즉, 서양-동양, 문명-자연, 발전-미개, 질서-혼돈, 청결-더러움, 도덕-비도덕, 자유-억압, 평등-불평등, 동적임-정적임, 이성-비이성 등을 파생한 상상의 지리학은 세계의 준거집단으로서 유럽의 집단적 주체성을 형성하는 거울이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비대칭적 이분법으로서의 동양에 대한 지식이 형성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동양에 대한 지식접근을 방해했던 지리적, 물리적 장애(산맥, 바다)와 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정신적 장애 둘 다에 의한 것이겠죠. 다양한 차이를 지닌 비유럽 사회를 하나의 등질적인 사회로서의 ‘동양’으로 생산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재료가 되었던 것은 그리스에서 비롯되는 동양에 대한 고전적 지식, 여행가들의 이야기, 신화, 종교적, 성경적 지식, 그리고 예술가들의 시각적, 텍스트적 재현 등이었습니다. 결국 리얼리티로서의 ‘동양’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서구 유럽인들의 정신에는 동양이 있었던 것이죠.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유럽이 만들어지기 위해서 동양이라는 외부의 타자뿐만 아니라 내부의 타자도 필요로 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즉 남부 이탈리아처럼) 한국에서 오랫동안 ‘전라도’라는 상상의 지리가 내적인 타자생산의 결과였던 것처럼 말이죠. 폴란드, 체코와 같은 동구 유럽 국가들도 오랫동안 유럽의 타자였고 특히 아직까지도 종종 비아냥과 경멸의 대상이 되는 ‘유태인’들은 지금까지도 타자로서 남아있죠 (참고, How the Jews became white?). 이탈리아(한국과의 비교)인과 아일랜드인들도 서구유럽에서는 아직까지도 열등한 타자로서의 존재로 남아있습니다. 담론에서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오리엔탈리즘과 완전히 결별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좁은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차이일 수도 있겠죠. 서양-동양의 이분법이 서양의 구분임을 알면서도 이것이 보편화된 지식-권력으로 자리 잡게되면서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 지식적 독창성의 뿌리 혹은 권력을 상실했기 때문이죠. 18세기 유럽은 내적으로 ‘인종’에 관한 담론이 과학적인 지식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는데, 당시에는 과연 인종적 차이가 기후와 같은 환경의 산물인지 아니면 생물학적, 자연적 결과인지가 큰 쟁점이었습니다. 계몽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환경결정론적 사고와 인체측정학으로서의 인류학이 발전하면서 유럽인들은 흑인들을 열대가 아닌 다른 지역에 옮겨 놓아도 그 후세들의 ‘흑인성’은 재생산된다는 점을 발견하고 인종은 ‘생물학적 진실’ 즉, 과학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동시에 검은 피부는 그들의 작은 두뇌와 야만성과 미개함을 상징하는 양식이 되는 것이죠. ‘인종’의 발견은 성(gender) 차이와도 결합됩니다. 예를 들어, 19세기 중반의 인류학적 연구들은 ‘새로운 과학적 인체측정학(anthropometry)’에 따르면 두뇌를 비롯한 해부학적 특성에 있어 백인(Caucasian) 여성들은 백인 남성들보다 오히려 아프리카 남성들과 유사하다고 보았습니다. 당연히 흑인 여성들은 가장 미개한 인종으로 간주되었죠. 유럽의 잔인한 식민주의 정책이 아프리카 부족사회와 그 문화를 뒤엎으면서 18~19세기에는 많은 흑인들, 특히 흑인 남성들이 정신분열증적 증세를 보였습니다 (왜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전과 같은 경우 농촌 마을 마다 ‘미친’-사회병리적 현상으로써- 사람이 있지 않던가요?). 이 때 식민주의의 사회병리학적 담론은 흑인 여성들이 자의식조차 형성할 수 없는 극도의 원시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에 흑인 남성들만큼 ‘미치는’ 사례가 드물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미치는 것은 정신구조의 일정한 복잡성(complexity)이 있어야 가능한데 흑인 여성들은 이러한 자아인식 능력조차 없다는 것이죠. 문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그 때까지만 해도 ‘과학’이었다는 겁니다. 또 이와는 정반대로 여성/여성성과 대지(land)가 동일시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등 비유럽세계는 서구 남성 탐험가들의 발견을 기다리고 그들의 침투를 맞이하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앞서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 그림에서 볼 수 있듯 말이죠. 지식-권력의 차원에서 반드시 서양이 인식의 권력 주체가 되고 동양이나 식민지 사회가 침묵하는 인식의 객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면서 많은 교량과 댐을 건설하고자 했는데 사실 이는 원주민의 지식과 조언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죠. 근대적 관개시설 및 댐건설의 아버지라는 영국의 Cotton은, 그가 인도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원주민들은 영국인들을 “문명화된 야만인”이라고 하면서 ‘전투’에 있어서는 전문가이지만 댐이나 가옥을 건축하고 수리하는 데에는 매우 열등하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특히 갠지스강과 브라마푸트라 강의 하류에 형성된 범람원이나 삼각주에는 두터운 모래층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층위에 가옥을 짓거나 교량 및 철도를 건설하는 것은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지식과 고문없이는 불가능했었다고 고백합니다. 아프리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인들이 기니만의 정글, 기후, 지형, 병/해충 등과 같은 고유한 지리적 장애를 극복하면서 내륙의 노예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토착 원주민들의 지식을 이용하는 것이 필수적이죠. 그래서 대부분 초기 유럽인들은 원주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물론 나중에는 일부 소수를 다수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그들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교활해지기도 하지요 (르완다, 브룬디-벨기에 Hutu와 Tutsi족의 관계). 한편, 이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프랫(M. Pratt)에 따르면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훔볼트와 같이 유럽과 신대륙을 문화-자연, 발전-미개 등으로 이분화했던 사고는 실제 식민지 정착민들과 원주민들 사이에 의해 지배-종속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이에 도전하는 문화적 차용, 교환 및 타협과 같은 다양한 상호작용을 낳았다고 봅니다. 프랫은 이를 접촉역(contact zone)에서 일어나는 ‘문화변형(transculturation)’이라고 개념화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종적, 문화적 격리와 비대칭적 권력의 이분법이 발생한 것은 이와 같은 문화적 교변을 억압하고 식민주의적 지배-종속의 관계를 자연화하기 위한 것이죠. 문화교변이라는 점에 착안한 관점은 혼성성(hybridity)이라는 새로운 후기식민주의의 정치를 파생하기도 합니다. 키버드(Kiberd)에 따르면 번역(translate)라는 말은 사실 “정복(conquer)”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번역을 해 보면 알겠지만 사실 한국어 한 문장에 담겨있는 의미뿐만 아니라 뉘앙스와 맥락까지를 그대로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존칭어와 조사에 의해 독특한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한국어의 고유한 독창성 때문이죠. 식미주의자와 식민지 원주민의 관계도 지식 및 문화의 ‘번역’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접촉역에서 발생하는 문화교변은 식민주의담론에 의해서 불균등한 권력관계로 나타나는데, 이 때 원주민의 문화와 지식을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사고체계로 이해할 수 없는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이를 분류하고, 기록하고, 재현(representation)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것으로 “번역”을 한 것이죠. 예를 들어,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이자 식민주의시기의 군인 James Cook 선장과 그의 부하들은 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 일대의 섬을 탐험하면서 원주민들의 식인문화(cannibalism)를 발견하고 이것을 일기나 탐험기 등의 일부로 기록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하와이를 포함한 태평양 연안 부족사회에서는 인류학적으로 식인문화가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Cook과 그들 일행은 어떻게 보면 식민문화를 발견하기 이전에 식인문화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이 먼저 있었겠죠,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태평양 연안 섬들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야만성과 미개함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베예스케르(Obeyesekere)에 따르면 하와이 원주민들의 경우 오히려 공격적이고 전투에 능한 Cook과 그 일행들로부터 위협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잡아먹을 식인종으로 간주하였다고 합니다. 즉, Cook과 그 일행들이 각종 무기들과 더불어 누더기 옷과 악취나는 몸 그리고 반쯤 굶주린 상태로 하와이에 하선한 후 원주민들에게 식인종에 대해 묻는 것을 보았던 하와이 원주민들은 그들이 실제로 하와이 원주민들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 보았던 것이죠. 실제로 하와이 원주민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비이성적인 유럽인의 행위는 하와이 원주민들에게 미개함과 잔임함으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하와이 원주민들중 마오리(Maoris) 족의 경우는 “의식적으로” 식인문화를 재현하여 유럽인들대한 잔인함을 보임으로써 그들이 침범에 도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접촉역에 있어서 정치가 단순히 식민지-피식민지인의 이분법적 도식에 의해 보편적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포스트식민주의의 지리학은 이와 같이 식민주의, 그리고 식민주의의 결과로 파생되어 오늘날 보편화된 서구중심사회를 형성한 식민주의적 담론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식민지본국-식민지의 관계가 보편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공간적 맥락하에서 다양한 문화초변적 현상들이 식민주의적 담론을 생산하고, 다시 식민주의적 담론이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교류를 생산하는 변증법적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의 대표적 사례로서 혼성성의 정치(the politics of hybridity)가 최근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의 가운데에 서 있다고 하겠습니다.
(2005. 11. 1 박경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