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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의 10번째 생일입니다.
1998. 6. 12.에 태어났으니 햇수로 꼭 10년이 됩니다.
참 힘든 하루였습니다.
당시 제가 제주도 근무할 때이고, 처는 제주대학교 병원을 다녔었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은 특이하게 신생아실을 따로 두고 있지 않고 출산 후 신생아를 입원실에서 산모가 데리고 있으면서 몸조리하고 퇴원하는 곳이랍니다.
그래서 산후조리를 해 줄 아주머니를 구했는데, 예정일을 좀 남겨놓고 서울에 급하게 다녀올 일이 있어서 가도 되느냐고 묻는 전화가 와 처가 허락을 했나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산기가 온 것이지요.
아주머니는 며칠 있어야 오는데 해산을 해 버리면 신생아를 돌보기가 어려워집니다.
한라의료원에는 신생아실이 있어 거기서 출산을 할 수밖에 없다고 알아봐달랍니다.
알고계시던 의사선생님이 한 분 계셔서 급하게 전화를 드렸고, 퇴근한 산부인과 여의사 선생님께 다시 부탁이 가 그 분이 나와서 출산을 맡아주기로 하였습니다.
한라의료원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저도 부랴부랴 달려갔는데, 처가 분만실로 옮겨지고, 의사선생님이 잠시 후 남편이 출산하는데 들어와 봐도 된다고 하여 그 잠깐 사이에 아들애 음료수를 하나 사주고 왔는데 그 사이에 처는 애를 낳았다네요.
그리고 2시간 정도 회복실에서 지내다가 입원실로 올라오니 밤 10시가 되었는데, 산모 밥을 못준답니다. 다들 퇴원해서 누가 밥을 마련해줄 형편이 아니라며 야식집 같은데 부탁해보라고 하고 돌아서네요.
야식집에 전화를 해보니 밥과 같이 되는 메뉴는 닭도리탕 뿐이라는데, 막 출산한 산모에게 매운 음식을 먹일 수는 없는 것이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전화기를 내려놓자 처가 "그냥 빵하고 우유나 하나 사다줘"라네요.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아내에게, 막 출산이라는 힘든 일을 마친 아내에게 그럴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아버지와 큰 애를 데리고 집으로 갔습니다.
집 입구 정육점에서 고기를 좀 사고, 미역을 담그고 쌀을 씯어 밥을 앉힌 후, 급히 회사로 가 남은 일을 마무리(그 날 제가 당직이었습니다)하고 돌아와 미역국을 끓여 이러저러한 반찬과 함께 퍼담아가지고 처의 병실로 날아갔습니다.
빵과 우유면 된다는 처도 갓지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에, 뽀얗게 국물이 잘 우러난 미역국을 주는대로 다 먹습니다.
그렇게 처를 먹이고 나, 저는 안도의 한 숨을 쉬며 캔맥주를 하나 따서 마시며 텔레비전을 트니, 멕시코인지와 월드컵 시합을 합니다.
그 때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할 때거든요.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낸 탓에 딴 맥주를 채 두모금도 못마시고 바로 골아떨어져 잠이 들었고, 그 해 가을 인사에 저는 이 곳 제천으로 오게 되었지요.
제가 살 관사가 비지 않아 약 한 달 남짓을 독신으로 지내다가 가족이 뒤따라 이사를 왔는데, 이 녀석은 채 백일도 안 돼 비행기라는 것을 타 본 셈이지요.
아주 작은 녀석이었는데, 어찌나 민감하고 까탈스러운지 한참을 다독이며 자나 하고 처다보면 방긋 웃으며 "내가 자는 줄 알았지" 요런 표정을 짓습니다.
제가 춥지 않게 가슴에 안고 오버코트로 둘러씌운 채 동네를 1시간 이상 걸어다녀야 잠이 든 적도 여러 번입니다.
어려서 물놀이를 데리고 가면 꼭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하여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하던 그런 녀석이기도 합니다.
캐나다에 간 첫 달동안 아빠를 그리워하며 혼자 방에서 울기도 하였다는, 그러나 좀 적응이 되자 아빠 전화도 받지 않고 노는데 열중하던 그런 녀석입니다.
욕심은 많아서 뭐 한다고만 하면 손들고 하겠다고 나가고, 나가면 용케 상 하나씩을 챙겨오는 그런 녀석입니다.
고런 녀석이 생일을 맞아 아빠가 케익을 하나 사다주고, 온가족이 둘러앉아 촛불켜고, 축하노래부르고, 케익을 나누어먹습니다.

저 촛불처럼 이 녀석도 사회에서 밝게 빛나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마음을 가져보는데, 그 녀석은 뭐라고 소원을 빌었을까요?

퉁퉁한 아들과 날씬한 딸을 보면서, 두 놈이 바뀌었으면 고민이 더 컸겠구나 하고 위안을 하기도 합니다.

손주를 보시는 할아버지 모습도 흐뭇하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