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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3
 

              

 

수필 , 그 자기 지시성에 대하여(감자가 탔다, 를 읽고)/글쓴이 미상, 여주문학에서 옮김

… 전화가 한 통 있었다. … 셋째 언니였다. … 단축 버튼을 눌렀다. … 건강이 안 좋아 졌다. … 열흘정도 되었다로 첫 단락을 시작하는 글이다.

한 단락 다섯, 아니면 열 개의 단문으로 구성된 글이다. 이글을 읽다보면 푸른 말 한 필 올라타고 내리달리는 기분이다.


요즘 말도 안 되는 형용사 부사 덕지덕지 끼워 넣어 한 참 늘어지는 수필들 앞에 망연자실 동댕이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말해 무엇 하랴. 그런 수필이 무슨무슨 상을 타고 탔다는데 속이 뒤집혀 미칠 지경인건 나만 그런지.


왜들 그럴까. 내가 잘 못 읽었나? 수필을 오래 쓰고 몇 권을 책을 냈다는 사람일수록 더욱 심하다.


생각해 보면 주변의 이런 저런 이야기나, 아내, 남편, 아들딸 가족사 주저리 주저리 털어놓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고, 할 말이 떨어지니 말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말에 말을 덧씌우거나 있는 말 배배 꼬아 놓는 것은 아닌지.


지난 호 이수태의 정처 없는 글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원래의 수필은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수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를테면 몽테뉴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탈 형식의 새로운 시도였다. 수필은 항상 그렇게 모든 기존의 형식을 떨치고 떠나는 새이며 시도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형식에 대한 관심에서 오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수필은 지식이나 도덕 윤리 사상 같은 것들을 이편에서 저편으로 이동해주는 전달자, 또는 매스컴 비슷한 역할에 불과한 것 아니냐.


수필에서 웬 형식운운을 내세워 예술이니 문학이니 호들갑을 떠느냐는 말씀인데, 기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이 말 앞에 수필가들은 숙연해 질 필요가 있다. 수필론, 수필학, 글의 구조가 어떻고, 문체 운운하며 하염없이 쳐 바른 화장 싹 지우고 다시 각자의 모습을 뒤돌아 볼 때가 됐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서 저 윗글에서 나는 단문이라 했는데 실은 단문이 아니다. 어찌 한 단락의 글을 단문들로만 쓸 수 있겠는가.


단문으로 착각하게 하는 화자의 말솜씨 때문이다. 중문이나 복합문에서 복잡다단한 형용사 부사, 미사여구 낙엽 털어버리듯 앙상한 뼈대만 남겨두고 보니 단문으로 보이고 글의 속도는 배가되고 말이 되어 달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이 수필의 자기 지시성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인간사 염려와 걱정 속에 사는 것. 그 걱정, 염려 중 이혼이란 가장 함구하고 싶은 것이며 입 밖에 떼어 놓기 조차 싫은 것. 글로 쓴다는 것은 더 더욱 힘든 일이다.


참았던 봇물 때문일까. 쏟아져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쏟아지고 떨어져 콸콸 흐르는 한 폭  가파를 계곡물이 되어 흐른다.


그 계곡물 속에 걱정스런 어머니의 얼굴이 울고 작은 오빠가 흔들리는 술잔으로 술을 연거푸 들이켜며, 지긋이 눈감은 큰 오빠의 눈자위가 붉게 타오르고, 올케는 술상머리 종종 걸음을 치며, 언니들이 와장창 몰려든다.


사이, 화자는 감자 껍질을 벗기며 엄마! 엄마를 불러본다. 어느 틈에 감자는 새카맣게 타 버렸다.


글을 읽다보면 다르르 달달 어느 틈에 끝자락에 와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불필요한 수사 떼어버리듯 줄거리 줄거리마다 군더더기 미련 없이 잘라버리고 나니 그 과감한 힘으로 글은 풍요롭고 금속처럼 강인하다.

 



 
물질과 정신의 대비

-
현진건의 <빈처>를 읽고-

 

현진건, 그에게는 많은 수식어가 따른다.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근대 단편소설의 개척자. 뿐만 아니라 월탄 박종화는 이 땅에 사실주의를 대성시킨 소설가로 그를 꼽았고 백철은 현실주의적 경향을 대표하는 작가가 현진건이라 하였다.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나 <개벽>지에 단편<희생화>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그는 계속해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무명탑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1936년 손기정 베르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기소되어 일년 간 복역 후 출옥한다.그 뒤 동아일보를 사직하고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과 핍박에 울분을 토하면서 1943년 빈곤에 겹친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이 같은 생애가 보여주듯 그의 작품 태반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 수난과 일제에 대한 끈질긴 저항의 태도와 강렬한 민족의식이 주로 표현됐다.  그런만치 소설 <빈처>는 빙허의 생애와 작품세계의 이해가 선행된 다음에 읽어야 한다.소설 <빈처>는 정신적 가치 지향의 무명작가와 양순하고 가난한 아내의 이야기를 극적인 사건의 전개없이 담담히 펼쳐 나간다. 물질적 부유와 정신적인 것의 상호결핍적 병렬화를 그려가며 결국 물질적 사회체제 밖에서 걷돌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인 작가의 현실 소외 문제를 리얼하게 다룬 자전적 고백작품으로 초기 신변소설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빙허 문학의 특성이 농후한 자기 표출이듯 서사적 자아인 의 고백적 형식을 통해 당대 현실의 사회적 모순과 내적 갈등을 표현한 소설 <빈처>.즉 나를 통하여 고통을 제시하고 나를 통하여 생의 단면을 관찰하므로 읽는 이가 쉽게 나에 동화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그처럼 소설은 초라하고 절망에 허덕이는 한 지식인의 강한 자의식의 내면을 보여준다. 매일 전당포에 드나드는 가난한 예술가의 아내와 주식 이익금으로 비단옷만 걸치고 사는 처형을 대비시켜 물질적 부유와 정신적 부유의 이원적 가치와 대립을 제기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비단을 내리 감은 처형과 당목 옷 허술한 아내와의 비교는 얼굴색만으로도 당장 차별화가 된다.처형은 이글이글 만발한 꽃 같고 아내는 시들 마른 낙엽 같다는 표현처럼 말이다.(바로 내 행색을 대변하는 이 부분을 곰새겨보려고 오래전의 이 책을 다시 펼친 것임)  부유하나 불화한 처형보다 가난해도 의좋게 사는 것에 만족하지만 실상은 부부 모두 처형의 생활이 부럽긴 하나 표면에 드러내지 않았을 뿐. 물질에 대한 본능적 욕구도 참아가며 정신적 행복에만 만족하려 애쓰나 그것만으론 사실 부족하다. 모자라지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별 도리없이 참을 따름이다. 그렇게 참아가면서 출세 또는 성공만을 기다리는 것이다.막연하나마 놓칠 수 없는 끈,희망을 잡고서.

모든 문학은 그 시대의 산물. 현대라면 빈처의 소설 구성은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오히려 있다해도 지탄받을 것이다. 낭만적이며 감상적인 예술지상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힌 채 이 세상을 비현실적으로 살아가는 무능한 가 과연 용납되기나할까.전당포에 옷가지를 맡기러 다니기 이전 자기가 할 수 있는 어떤 일거리라도 찾아내어 힘껏 일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아 가정을 꾸려나가는 가장이 아니라면 진작에 퇴출감으로 낙인 찍힐 터.더구나 요즘같이 부권이 흔들리는 세태에서라면 처럼 생활에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남편은 글쎄?…

 

2007.07.23 06:06 | 단풍나무 그늘에서 |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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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꿈이러니

 

김만중의 구운몽을 읽고

 

<천하 명산이 다섯시 잇스니 동의는 동악 태산이오 서의는 셔악 화산이오 남의는 남악 형산이오> 이렇게 구운몽은 시작된다. 그중 구의산 동정강 소상강이 삼면을 둘러 제일 풍광 수려한 형산을 무대로 소설 구운몽은 펼쳐진다.소설의 내용은 주인공 성진의 하룻동안 체험을 골격으로 하여 꿈속의 양소유와 팔 선녀가 엮어내는 삶을 주제로 하였다. 즉 성진의 꿈 속 사건이 이 소설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성진의 꿈 속 인물인 양소유의 출생 성장 출세라는 일대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양소유가 사해를 평정하는 무공을 세우고 팔 선녀인 여덟 여인과 더불어 부귀와 공명을 누리나 이런 영화에서 잠이 깬 성진은 비로소 인간세상의 福 緣 壽가 모두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된다. 그리하여 스승인 육관대사로부터 금강경 설법을 들으며 크게 깨달아 성진대사가 되어 팔 선녀를 비롯한 중생을 구제한 후 극락세계로 간다는 내용이 주 골격을 이룬 구운몽.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성진이 잠시 애욕과 영욕이 뒤엉키는 세속적 세계에서 살게 되지만 그 세속의 삶 가운데 참다운 영웅으로서의 바른 길을 걸으며 이상적 善 의지를 실현하고 구도적 자세를 잃지 않음으로 드디어 영혼의 구제가 약속된다는 것.이처럼 꿈꾸기 전의 성진은 순수한 자아를 나타내고 양소유로 사는 꿈꾸는 동안은 세속적이고 본능적인 자아를 나타내고 있다.그러나 세속적 자아를 극복하고 보다 높은 순수의 차원으로 승화된 자아를 완성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즉 양소유의 부귀공명은 현세적 욕망으로서의 의미를, 성진의 구도자적 자세는 초월성 추구로서의 의미를 지닌 삶의 양면이라는 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은 동양사상의 본질인 유불선을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현실과 꿈의 이원적 체계를 서사 구조화한 사대부 소설의 한 전형이라 할 수 있다.창작 장편소설이며 고소설 중 한글소설로 쓰여진 구운몽은 서포 김만중의 작품이다. 서포는 조선조 숙종 때의 문신이며 문학가였다. 그는 명문의 후예로서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성리학의 대가가 된 김장생의 증손이며 대학자 김집의 손자였다. 또한 정묘호란 시 청나라에 굴욕을 함에 자결로써 순절을 한 강직한 열사였던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 윤씨 부인은 학문이 깊고 높은 인격을 지닌 분으로 직접 소학 대학 시전까지 가르쳐 서포 나이 29세에 문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는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특히 숙종 왕비인 인현왕후 폐비설에 반대하다 남해로 귀양가서 서울에 홀로 계신 늙은 어머니를 위해 지은 소설이 구운몽이라고 한다.그외에도 사씨남정기 서포만필 등을 남긴 그는 적소에서 생을 마쳤다.

소설문학을 천히 여기던 당시에 우리의 문학은 마땅히 한문 아닌 국문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 아래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한 바 큰 김만중. 그의 소설 구운몽에 대한 문학작품으로서의 제고 이전에 서포의 충과 효 그리고 국문학을 애호하였던 그의 인간적 면모가 내게는 무엇보다 크게 돋보였다.왜냐하면 이 시대에 특히 요구되는 바가 바로 이런 문제들이기도 하므로.

토인비와의 만남 -대화를 읽고-

2009.06.27 23:00 | 작은 독서실 |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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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팡내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꽤 오래 묵혀두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아놀드 죠셉 토인비의 <대화>였다.  일찍이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반대하거나 논란을 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하지말라. 그렇다고 무조건 믿거나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독서를 하지 말라. 생각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만 독서를 하라. <대화>를 읽으며 불현듯 이 뜻이 상기되었고 비로소 그 의미를 곰곰 음미해볼 수 있었다.과연 이 책이야말로 나로하여금 인생의 많은 것을 보다 깊이 그리고 폭넓게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었다.우리의 마음 바닥에 상존하고 있는 생의 욕구 그리고 목적과 의의 나아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인간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까지 광범위하게 토의하고 있는 <대화>.
   대화는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있어왔다. 서로 마주보며 나누는 이야기인 대화. 그러나 점점 대화가 없는 가정, 대화가 없는 사회가 되어가며 여러 병리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있는 현실이다. 즉 소통의 창구가 폐쇄된다는 것은 상호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에 따스한 이해와 사랑의 유대감이 회복되길 바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소회는 아니리라. 우리는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 절대 知子였던 그는 시정을 두루 헤매면서 대화를 통한 독특한 문답법으로 상대로 하여금 자기의 무지를 자각시켜 그 자각에서 출발하여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보편적인 지식 도덕에 도달하게 하려 힘썼던 소크라테스였다.그렇다면 20세기 석학 토인비와의 대화는 무엇일까.
     이 책은 1971년 일본의 한 교수가 오늘을 사는 보람, 삶과 죽음, 사랑과 성, 학문과 교육, 현대의 과제, 미래의 전망, 젊은 세대에 대한 기대 등 주제별로 질문하고 토인비가 대답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그 가운데에서 나는 <현대의 과제> 부분에 중심을 두고자 한다. 현대인은 파우스트적 인간이라고 독일의 슈펭글러가 말한 것처럼 무한을 추구하고 만족을 모르는 탐욕과 정서적 불안정감으로 상징되는 현대인. 거기에 대기오염, 범죄증가, 주택난, 교통전쟁 등 인구의 과밀화가 초래한 심각한 현상들.이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고도의 기계문명, 팽배한 도시화 속에서 느끼는 정신적 기아감, 인간과 자연의 불균형에서 오는 세기말적 위기감 등이 <현대의 과제> 난에서 집중적으로 토의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겪는 당면한 문제 중 급변하는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수시로 경험하고 있는 모순과 대립 그로 인한 갈등 등 현대인의 고뇌의 본질을 분석 규명하여 적절하게 균형 시키고 융화시키기 위해 뛰어난 사상가의 전반적인 조언이 필요하다고 느낌은 나만이 아니리라고 본다.토인비(1889-1975)는 영국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역사가이며 문명비평가이다.역사상의 여러 문명을 비교 연구하고 그 발전과정과 생성붕괴의 원인 설명을 통하여 문명 형성의 일반법칙을 세운 토인비. 그의 문명사관은 도전에 의한 응전으로 집약되며 그는 <역사의 연구> <시련에 선 문명> 등 역사론 문명론의 문제작을 남겼다.
  오늘날 고도 산업사회로의 가속적인 발전과 풍족한 번영에서 우리는 수많은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그러나 인간성의 물질적 측면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에 이르는 한 수단에 지나지 않고 정신적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물질은 우리에게 봉사하는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것이 곧 인간인 것. 항용 진보에는 선과 악 각 두개의 측면이 따른다.정신적 진보는 순수한 은총일 수 있으나 물질적 진보와 어울린 정신적 진보를 달성치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재난이 될 수도 있다.따라서 현재의 우리가 지금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중의 첫째는 우선 참된 인간성의 회복이다. 그와함께 인생의 목적 내지 삶의 보람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의 혼돈도 심각한 수준. 이상과 현실의 괴리 혹은 단절에 직면했을 때 갖게 되는 불만과 갈등도 적지않다.

  인간이 최초로 의식에 눈 떴을 때 첫번째로 시도한 것이 자연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한 인공적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을 기술의 진보라 하여 이미 석기시대에도 돌을 깎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산업혁명 이후 비약적인 기술발전으로 인간의 생활은 눈부신 변혁을 가져오기에 이르렀다.곧 산업혁명의 특징이란 물리적 원동력으로서의 인간이나 동물의 힘 대신 에너지를 활용하여 산업의 가속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만든 것. 그리하여 힘든 자연육체노동이 단순도시노동 형태로 바뀌어짐과 동시에 시간이 남아돌게 되고 그 공백 혹은 여백 처리에 익숙치못하다보니 오히려 긴장이 가중되며 정서적 불안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자연환경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된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새로운 인공환경의 노예가 되어갔다. 마치 달리의 그림처럼 인간은 무기력감에 빠져들 뿐 아니라 점차 육체노동은 물론 두뇌노동까지를 포함한 인간의 일거리가 기계에 의해 침식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기계에게 넘겨 이제는 하릴없이 남아도는 우리의 시간과 정력과 노력을 쏟아 부을 곳은 어디인가. 이처럼 인간의 정신면이 무한한 활동의 여지를 갖게 되므로 여기에서 의학 연구와 우주 개발을 시도하게 되고 또한 한층 차원 높은 사상 예술 종교의 꽃이 피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찬란한 문예부흥기가 도래할 수 있었다.결국 인간의 정신적 요구는 한이 없으며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존재하고 있는 최고목적이며 인간구원의 길이 되기도 하니까.우리가 선택한 인류의 명칭은  호모 파베르(工作人)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현명한 사람)이듯 기술자로서 최고의 영역을 확보한 인간은 이제 정신적인 면에 빛나는 성공을 거두어야 할 차례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음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듣는다. 인간은 자연의 한 구성부분이며 물론 부분 이상의 존재이지만 역시 자연의 일부. 이에 대한 진지한 자각이 선행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자연에 대해 정복의 자세가 아닌 외경의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무계획 무제한으로 정복하여 공업화 도시화를 급속도로 진행시켜왔다. 인간에게 정서적 안정과 평화를 안겨주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은 점차 사라져가는 대신 우리는 환경오염을 비롯한 각종 공해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발등의 불이 된 지구온난화 문제, 스모그 현상 등의 대기오염, 폐수로 죽어가는 하천, 농약에 오염된 먹거리, 비료를 과다하게 사용하여 약화되는 지력 등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공업화 사회의 은혜 이상의 비싼 대가였으며 자연의 무서운 보복이었다. 인류의 역사는 환경과 생명의 어울림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공할 과학의 힘으로 자연의 질서를 파괴시켰고 자연은 이제 악의 찌꺼기를 본래의 순환작용에 의해 다시 인간에게 되돌려 보내고 있다.결코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 살수 없는 존재, 자연의 지배자이며 만물의 영장이라 뻐겨보지만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인 까닭이다.

  그밖에도 대화를 읽으며 현대지성을 대표하는 냉철한 토인비에게서 온화한 인간미를 곳곳에서 느꼈던 점이 나름의 큰 수확.손자와 증손자가 살아가야 할 2천년 대의 세계는 내 자신의 생활이 아니라도 그들과의 관계에 의해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연대감에서 풍기는 자애로움. 사랑은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유일의 신이며 사랑의 절대적 가치가 삶을 값지게 한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리하여 사랑에 의해서 자기 중심성으로부터 해방된 성 프란체스코,  증오심없이 저항할 수 있었던 간디, 깨달은 자로서의 석가를 존경한다는 토인비. 죽음과도 화해하며 가장 좋은 벗으로서 죽음을 맞길 바라는 그였듯이 평화로운 임종을 맞았다는 그. 지적 인간인 동시에 정신적으로 풍족하고 따뜻했으며 진실로 자연과 예술을 아낀 이 시대 위대한 학자 토인비. 그와의 만남이었던 대화를 읽으며 인류의 미래에의 청사진은 보다 밝고 긍정적이리라고 판단이 되었다.왜냐하면 인류의 역사는 우리에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진보해나가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도서출판 산책대표 김영란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피에타 상’은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슬픈 성모상을 조각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그 조각상에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며 끝나는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2009년 4주째 연속 베스트셀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풍금이 있는 자리’ ‘외딴 방’ 등의 장편으로 한국의 모든 문학상을 휩쓴 작가 신경숙의 엄마 이야기에 독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작가는 ‘나’라는 일인칭 대신 생소하게도 ‘너’라는 이인칭 소설의 독특한 화법을 시도했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주인공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느낌을 받게 하며, 소설 속 엄마의 실종사건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길을 잃어버린 엄마의 행방을 찾는 가족들의 모습 속에 나와 엄마의 존재를 재확인시키며, 우리가 필요하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줄 믿거나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우습게 여겨온 엄마와의 관계설정을 다시 하도록 만든다.

칠순을 앞둔 엄마는 자식들을 편하게 해주려는 마음에 남편 생일상을 시골에서 받지 않고 서울서 받겠다며 남편과 상경한다. 그러나 지하철을 타기 전 남편 손을 놓치는 바람에 뇌졸증 증세가 있던 엄마는 실종되고 아내의 가방을 든 아버지는 평생 천천히 좀 가라고 요청했던 엄마의 말을 무시했던 것을 후회한다.

형철엄마라고만 불려온 자신의 아내가 사라진 후에야 남편은 형철 엄마가 아닌 아내로서 마음에 생생하게 그녀를 떠올린다. 자식들 또한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들었던 엄마지만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엄마를 애타게 찾는다. 아무 것도 없이 글도 모르는 엄마를 너무 어이없이 잃어버려 곧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을 가지나 엄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텅 빈 고향집에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해진 아빠와 큰딸은 전화로 그동안 존재가 없던 엄마의 모습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고 왜 엄마가 그랬는지 그동안 엄마의 행적이 퍼즐처럼 맞춰진다. 잘 모르면서 무시했던 엄마의 삶이 얼마나 자신들의 성장에 큰 기둥이었는가를 깨달으며 큰 낙담 속에 새롭게 엄마를 회상한다. 매사에 긍정적이었고 상처와 슬픔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다는 엄마의 숨겨진 모습을 재발견한다.

자신의 처지에 대한 슬픔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자식을 키우면서 행복했던 기쁨만을 간직하고 싶어 하는 엄마, 지나왔던 엄마의 모든 삶의 고달픔을 이해하고 마무리하며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큰딸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단 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보면서 엄마를 부탁한다.

자신의 이름은 간 곳 없이 누구의 엄마, 누구의 할머니로 불리며 오로지 가정과 자녀에게 헌신하다 죽어가는 것이 엄마의 일생이다. 작가는 엄마란 자식들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주는 성모 마리아로 보며 신이 이 세상에 다 있을 수 없어 만들었다는 어머니를 재발견하게 한다. 자식을 위해 모든 열정과 시간 그리고 온 몸을 아무 대가나 조건 없이 바친 어머니의 희생과 끈끈한 사랑이야기를 하자들면 누구나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우리의 평생에 영향을 미치고 매사에 등불이 되어주는 어머니지만 누구나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잊고 살거나 잃어버린 존재로 여겼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마도 목소리가 있고 소리 지르고 싶은 때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선산에 묻히기 싫어하던 엄마가 남편의 걸음이 빨라서 못 따라 간 것이 아니라 죽음을 예감하며 가족들이 없는데서 죽고자 실종이라는 마지막 목소리를 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엄마도 엄마가 평생 필요했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며 자신도 욕망이 있는 사람인 것을 보이지 않던가?

어머니 없이 세상에 온 사람은 없다. 작가는 마치 공기나 물처럼 가장 가깝고 소중한 존재지만 무시되거나 잊고 살았던 어머니를 재발견하고 재조명하며, 엄마를 살려내고자 하는 뚜렷한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우리에게 엄마를 부탁하며 엄마의 존재를 그리움으로 확인시킨 작가, 그녀는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지켜왔지만 간과해 온 엄마를 실종사건을 통해 독자 개개인의 사건으로 받아드리게 하며 나아가 누구나 엄마를 찾아 나서게 흔들어 댄다. 자주 우리의 마음 밖에 세워 둔 엄마와 만나게 하며 한번쯤 목 놓아 말하고 싶었던 엄마를 대필하고 그 존재 앞에 가슴 찡하니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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