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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그 자기 지시성에 대하여(감자가 탔다, 를 읽고)/글쓴이 미상, 여주문학에서 옮김
… 전화가 한 통 있었다. … 셋째 언니였다. … 단축 버튼을 눌렀다. … 건강이 안 좋아 졌다. … 열흘정도 되었다로 첫 단락을 시작하는 글이다. 한 단락 다섯, 아니면 열 개의 단문으로 구성된 글이다. 이글을 읽다보면 푸른 말 한 필 올라타고 내리달리는 기분이다.
요즘 말도 안 되는 형용사 부사 덕지덕지 끼워 넣어 한 참 늘어지는 수필들 앞에 망연자실 동댕이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말해 무엇 하랴. 그런 수필이 무슨무슨 상을 타고 탔다는데 속이 뒤집혀 미칠 지경인건 나만 그런지.
왜들 그럴까. 내가 잘 못 읽었나? 수필을 오래 쓰고 몇 권을 책을 냈다는 사람일수록 더욱 심하다.
생각해 보면 주변의 이런 저런 이야기나, 아내, 남편, 아들딸 가족사 주저리 주저리 털어놓고 나니 할 말이 없어졌고, 할 말이 떨어지니 말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 말에 말을 덧씌우거나 있는 말 배배 꼬아 놓는 것은 아닌지.
지난 호 이수태의 정처 없는 글쓰기에 이런 말이 있다.
‘원래의 수필은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수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를테면 몽테뉴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언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탈 형식의 새로운 시도였다. 수필은 항상 그렇게 모든 기존의 형식을 떨치고 떠나는 새이며 시도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형식에 대한 관심에서 오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수필은 지식이나 도덕 윤리 사상 같은 것들을 이편에서 저편으로 이동해주는 전달자, 또는 매스컴 비슷한 역할에 불과한 것 아니냐.
수필에서 웬 형식운운을 내세워 예술이니 문학이니 호들갑을 떠느냐는 말씀인데, 기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이 말 앞에 수필가들은 숙연해 질 필요가 있다. 수필론, 수필학, 글의 구조가 어떻고, 문체 운운하며 하염없이 쳐 바른 화장 싹 지우고 다시 각자의 모습을 뒤돌아 볼 때가 됐다.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서 저 윗글에서 나는 단문이라 했는데 실은 단문이 아니다. 어찌 한 단락의 글을 단문들로만 쓸 수 있겠는가.
단문으로 착각하게 하는 화자의 말솜씨 때문이다. 중문이나 복합문에서 복잡다단한 형용사 부사, 미사여구 낙엽 털어버리듯 앙상한 뼈대만 남겨두고 보니 단문으로 보이고 글의 속도는 배가되고 말이 되어 달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이 수필의 자기 지시성에 합당하지 않겠는가.
인간사 염려와 걱정 속에 사는 것. 그 걱정, 염려 중 이혼이란 가장 함구하고 싶은 것이며 입 밖에 떼어 놓기 조차 싫은 것. 글로 쓴다는 것은 더 더욱 힘든 일이다.
참았던 봇물 때문일까. 쏟아져 떨어지는 폭포가 되어 쏟아지고 떨어져 콸콸 흐르는 한 폭 가파를 계곡물이 되어 흐른다.
그 계곡물 속에 걱정스런 어머니의 얼굴이 울고 작은 오빠가 흔들리는 술잔으로 술을 연거푸 들이켜며, 지긋이 눈감은 큰 오빠의 눈자위가 붉게 타오르고, 올케는 술상머리 종종 걸음을 치며, 언니들이 와장창 몰려든다.
사이, 화자는 감자 껍질을 벗기며 엄마! 엄마를 불러본다. 어느 틈에 감자는 새카맣게 타 버렸다.
글을 읽다보면 다르르 달달 어느 틈에 끝자락에 와 있다.
한 문장 한 문장 불필요한 수사 떼어버리듯 줄거리 줄거리마다 군더더기 미련 없이 잘라버리고 나니 그 과감한 힘으로 글은 풍요롭고 금속처럼 강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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