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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삶의 문학 - 처음 수필을 쓰는 사람들을 위해-
鄭 木 日
수필은 멀리 있지 않다. 나의 생활 곁에, 삶의 곁에 있다. 슬픔의 곁에, 눈물의 곁에, 기쁨의 곁에, 그리움의 곁에, 정갈한 고독의 한가운데에 있다. 삶과 가장 근접해 있는 문학이 수필이다. 원대하거나 화려하거나 압도하려 들지 않는다. 수필은 자신의 삶과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맑고 투명한 거울이다. 한숨이 나오거나, 그리움이 사무칠 때나, 외로움이 깊어 가만히 있을 수 없을 때 백지 위에 무언가 끄적거려 보고 싶어진다. 그냥 낙서일 수도 있고 문장으로 써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이 '끄적거림'은 별 의식 없이 나온 것이지만 마음의 독백, 마음의 토로로서 이 속에 자신의 인생과 느낌이 담겨진다는 뜻에서 중요하다. 이 끄적거림이 발전하면 삶의 기록, 인생의 기록이 되며, 문학으로 승화될 수 있다. 기록한다는 것은 자아(自我)의 발견이며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기록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의식과 영원성을 수용하게 된다.
기록은 삶을 성찰하여 새로운 삶을 꿈꾸며,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이다. 기록하는 일을 통해 삶은 더욱 진지해지고 충실해지며 가치로워진다. 기록은 사실 그대로를 쓴 것이다. 체험(사실)에다 상상과 느낌을 보태어 재구성과 해석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수필이다. 기록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만, 수필은 사실에 상상과 느낌을 불어넣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담아 낸다. 우리 삶의 얘기가 그냥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수필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상상과 의미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필은 누구나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일기, 고백, 기행, 감상, 편지- 어느 형식이든지 자유롭게 마음을 토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자신과의 대화이다. 수필을 쓰기 위해선 동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신과의 대화에 과장과 허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긴장을 풀고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장신구도 떼어내고 화장도 지워버리고 홀가분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실에 눕거나, 턱을 괴고 앉아 친구에게 마음을 토로하듯 쓰는 글이다. 애써 잘 쓰려는 의식이나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도 없이―. 권위의식, 체면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일체의 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동심으로 돌아가 순수무구의 마음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욕심에서 치장하고 수식하고 싶어 안달을 부리게 된다. 겨울 언덕에 선 벌거숭이 나무처럼 녹음· 꽃· 단풍도 다 떨쳐버린 맨 몸으로 보여주는 진실의 아름다움을 가져야 한다. 수필이 '마음의 산책' '독백의 문학'이라 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 인생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성찰을 통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 내는 문학임을 말한다.
수필의 입문(入門)은 어느 문학 장르보다 쉽지만 수필의 완성은 실로 어렵다. 성공한 인생은 많지만 아름다운 인생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시작은 쉬웠지만 점점 들어갈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글이 수필이다. 시, 소설, 희곡 등 픽션은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논픽션인 수필의 경우엔 작가와 작품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 인생의 경지에 따라 수필의 경지가 달라진다. 수필은 인생의 거울이므로 사상, 인품, 경륜, 인생관 등이 그대로 담겨진다. 심오한 사상, 고결한 인품, 맑고 따뜻한 마음, 해박한 지식, 다양한 체험이 수필을 꽃피우는 요소이고, 이런 인생 경지에 도달한다는 자체가 구도, 자각, 실천의 길이 아닐 수 없다.
수필은 완성의 문학이 아니라, 그 길에 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문학이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통한 의미와 가치를 최상으로 높이는 도구다. 수필을 쓰려면 무엇보다 겸허하고 진실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꽃피우는 문학이므로 스스로 교만과 허위의 옷을 벗어야 한다. 마음속에 항상 자신의 영혼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을 깨끗이 닦아 두어야 한다. 마음속에 양심의 종을 매달아 두어서 불의나 탐욕의 손길이 뻗힐 때 스스로 자각의 종소리를 내게 해야 한다. 마음속에 맑고 깊은 옹달샘을 파 두어서 거짓의 먼지를 깨끗이 씻어 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마음의 경지를 얻은 사람이라면, 진실과 겸허의 눈으로 말하고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마음속의 울림 그대로를 끄적거려 보는 데서 시작하면 된다. 낙서라고 해도 좋다. 단 몇 줄의 문장을 만들고 점차 자신의 마음을 토로해 나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수필과의 만남을 얻게 될 것이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습성을 가지는 일이 수필을 쓰는 첩경이 된다. 삶의 기록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① 체험의 서술 ② 체험 + 느낌 ③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④ 체험 + 느낌 + 인생의 발견, 의미부여 + 감동
①은 자신이 겪은 대로 쓴 것이어서 기록문에 불과하다. ② 수필이 되려면 체험과 느낌이 조화를 이뤄야 함을 말한다. 체험이 많고 느낌이 적을 땐 정서감이 부족하여 딱딱하게 느껴지고, 체험이 적고 느낌이 많은 경우엔 추상적이고 현실감의 결여를 느끼게 한다. ③의 수준이면 수필에 진입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창출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한 인생의 의미부여가 필요하다. ④의 경우엔 '감동'을 주문하고 있다. 수필이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한 글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나 인생의 의미를 일깨우고 읽는 보람을 안겨 주기 위해선 '감동'이 있어야 한다. '감동'은 문학성의 핵심 요소이다.
수필은 삶의 문학이다. 수필 쓰기는 자신의 삶을 가치롭게 꽃피우는 자각과 의미 부여의 행위이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의미의 꽃으로 피워낼 수 있을까, ― 이것이 수필을 쓰는 핵심이며 궁극적 목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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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수필 /고동주
1)읽기 쉬워야
문장을 읽어 가는 가운데 리듬이 있고, 깊은 뜻이 있고, 군더더기 없이 산뜻하게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가 부담없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瀏?것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우선 표현을 쉽게 하여야 하고 내용은 진지하고 구수하게 엮어야 할 것이다.
2)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짧아야
한 문장이 50자를 넘으면 지루하게 느껴진다. 문장이 너무 길면 호흡처리가 곤란하고 산만하여 글의 뜻을 파악하기 조차 힘들게 된다. 쓰는 사람이야 분위기에 도취되어 문장이 지나치게 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ꡐ어쩔 수 없이 길어졌군!ꡑ하고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어칠이 말하기를 ꡐ나는 짧은 말과 쉬운 문구를 즐긴다ꡑ라고 했다. 여기서 쉬운 문구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고 간결하게 정돈된 것을 말하지 않았을까. 간결하면서도 짧은 문장이야 말로 수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3)강한 인상을 주어야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거나 다른 사람이 이미 써 버린 글을 다시 쓰면 진부하여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소재나 단어를 발굴하여 생기가 넘치게 써야 한다. 그래야만 강한 인상을 주는 살아 있는 글이 될 수 있다.
4)즐거움을 주는 글
수필을 읽는 목적이 있다면 은은한 즐거움이나 감동적인 분위기에 젖어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런 재미가 없으면 이 바쁜 세상에 무엇 때문에 남의 수필을 읽어 주겠는가. 수필이 재미있게 될려면 시(詩)적인 정서가 감돌고, 소설처럼 이야기가 구수하게 잘 짜여져야 한다. 웃음 속에 날카롭게 번득이는 재치도 보여야 하고, 가슴을 울려주는 진리가 들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첫쩨 진실성이 요구된다. 그래야 감동과 연결될 수 있다. 억지로 꾸민 이야기는 감동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실용문이 아니고 예술문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해야 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 새롭게 탄생된 글이기를 바란다. 쌀과 누룩을 버물려서 익히면 술이 되듯이, 잘 여과된 사색과 감정은 즐거움을 주게된다.
5)품격이 넘치는 글
사람에게 인격이 있드시 글에는 문격(文格)이 있다. 유치한 감정이나 야비한 표현 등 저속한 내용은 품격을 상실하게 된다. 복잡한 세상사의 일을 글로 쓰되 그대로 쓰지 않고 맑은 마음의 눈으로 여과시켜 품위있게 써야 한다. 이것을 심안(心眼)이라 하는데, 심안을 거치면 격이 달라진다. 난(蘭)에 대해서 글을 쓰면 여기에 향(香)이 머물러야 하고 인생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면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 바다를 노래하면 물새들이 머물러야 하고 황야를 그리면 역사 속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야 한다. 연인끼리 애정을 그리되 일정한 간격이 있어야 하고, 지나간 추억 속에서는 절실한 그리움이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글의 품격, 즉 문격이라 할 수 있다.
6)진솔한 글
수필은 무조건 진솔해야 된다. 그것이 최대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솔직하면서도 구수하게, 담담하면서도 거짓없이, 유머스러우면서도 지성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주제에 관련된 상상까지는 허용할 수 있으나 허구까지를 허용한다면 진솔하다는 매력에 문제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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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 2009.03.24 11:13 [121.100.7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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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문장은 文格이 있어야 한다는 필자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소설은 비교적 자유분방하게 예외일 수 있겠지만, 시나 수필에 비속어, 은어, 심지어 푹설까지 동원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심정을 헤아리기 앞서 불쾌한 감정이 들었어요. 비속어를 동원하더라도 독자로 하여금 불쾌감이 들지 않으면 무방하겠지만 말입니다. 자극적인 문구에 박장대소하기 보다, 은은한 웃음이 입가에 번지는 글을 선호하는 것이 저의 성향이라 그런지 모르겠어요. 아름답고 미려한 글을 읽으면 정수리가 갑자기 맑아짐을 느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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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2009.03.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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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절대적으로 위 필자 말씀에 공감합니다
유머와 위트가 있는 재치있고 재미있는 글, 그리하여 한바탕 웃게만드는 글
순간적인 스트레스 해소제는 될지언정 길게 맴도는 여운이 없다면 좀..
박장대소하게 만들기 보다 은은한 웃음이 입가에 번지게 되는 그런 글...
그게 곧 수필 아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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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과 깨달음 /정목일
소재를 선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순간적으로 마음이 끌렸거나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대상은 어떤 인연법에 따라 만나게 된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낱말 하나, 풀 한 포기, 돌맹이 하나가 내 눈과 마음에 들어오기까지 나와 인연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긴 해도 생각 중에 눈맞춤해 두었기 때문에 낯설지가 않고 두고두고 마음에 담아놓고 대화하고 싶어진 게 아닐까.
내 마음을 끄는 소재는 수수하고 소박하며 눈에 잘 띄지 않는 것들이다. 누가 한 번 이름을 불러주지도 않을 듯 외로움을 간직한 대상들이다. 다가가 다정히 손을 잡아주고 말을 건네고 싶다. 소재의 선택은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자 만남이며,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하늘 아래 땅 위의 삼라만상이 수필의 소재가 되는 것이지만, 진정 소재가 되려면 은밀한 교감과 애정이 없으면 안 된다. 글을 쓸 대상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는 영혼교감을 이루지 못하며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한 소재의 발견이야말로 삶의 오묘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머리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어서 대상을 경이의 눈으로 들여다 보아야한다는 걸 알고 있다.
「본다」는 것은 예사로운 행위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살피는 것이지만, 일생의 총체성으로 한 사물과 만나는 일이다. 인생의 경지에 따라 보는 법이 달라진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체험한 것만큼 보이고 명상한 것만큼 보인다. 한 사물을 두고서, 한 번 보는 것으로 세상 이치를 터득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수십 번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소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작가의 개성, 취향, 관심, 전공, 기질에 따라서 다를 것이지만 마음의 눈이 밝아야 한다. 좋은 소재를 발견할 줄 아는 눈은 결국 좋은 인생을 볼 줄 아는 눈일 것이다. 마음 속에 맑고 깨끗한 거울을 달아두어서,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맑게 닦아두어 가만히 들여다보는 사람, 마음 속에 해맑은 옹달샘을 파두어서, 넘쳐흐르는 물로 마음에 묻은 얼룩과 때를 말끔히 씻어낼 줄 아는 사람, 마음 속에 깊고 은은한 소릴 내는 종을 달아두어서, 양심의 종을 스스로 울릴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글감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마음의 연마가 필요하며 깊은 체험과 명상이 있어야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수필쓰기는 결국 마음의 안목에 따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인격의 향기, 깨달음의 꽃은 고도의 인생 경지에서 얻어진다.
주제 설정에도 작가에 따라 소임 같은 것, 역할 같은 것을 느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수필을 쓰는 분명한 이유가 드러나야 한다. 나는 체험을 통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겠다는 소박한 뜻에서 한 걸음 나아가 평생동안 추구하고 탐구한 세계와 깨달음을 전하고 싶다. 민족의 고유한 미의식과 민족정서의 재발견을 수필문학을 통해 현대 감각에 접목해 놓고 싶다. 그 길을 가다가 쓰러진다면 행복하겠다.
구성은 없는 듯 있는 듯이 자연스레 이뤄진다. 의도성, 작위성이 아니라, 마음의 물결을 타고 자연스럽게 가락을 타고 이뤄진다. 비교적 짧은 글이기 때문에 치밀한 구성이 필요한 것인데도, 마음 속에서 써내려 가는 중에 무심결에 짜여지는 경우가 많다. 첫머리를 어떻게 꺼집어낼까, 이것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명상 세계로의 몰입이요, 미의식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수필 구성의 요점은 서두다. 장마철 끝에 먹구름 속에서 파아란 하늘이 나타나듯이 서두가 풀리면, 전개 부분은 쉽게 이어진다. 마무리 부분에선 공을 들여야 한다. 이 세 가지 요건만으로도 3단계 구성이 이뤄지는 것이다. 나는 종전에 이미지 중심의 서정수필을 많이 써왔으나, 줄거리가 있는 서사수필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수필에 있어서 문장은 생명이요,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문장이 곧 사람이요, 수필 문장은 작가의 인생 경지와 품격을 드러낸다. 맑은 글에선 맑은 인생의 향기가 풍기고, 좋은 문장에선 좋은 인간의 삶을 느낀다. 픽션인 시와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논픽션이기에 작품이 곧 작가가 아닐 수 없다. 픽션은 작가와 작품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논픽션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므로, 작가의 인생과 삶을 그대로 투영시킨다. 수필이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질적으로 높은 경지의 작품을 만나기 어려운 것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간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필은 경지의 문학이 아닐 수 없다. 문장은 정확하며 깔끔하고 군거더기가 없어야 한다. 마음으로 타고 흐르는 가락이 있어야 좋다.
수필 한 편을 쉽게 발표하고 곧 후회하곤 한다. 고쳤으면 하는 데가 드러나 마음이 편하지 않다. 좀더 공을 들여서 내보지 않았을까 후회하곤 한다. 술도 오래 묵힐수록 맛이 나는 법이 아닌가. 한 소재를 마음에 담아 두고 정을 들이고 다듬어야 하며, 이 쯤 떠나보내야 그리워질 법할 무렵에 얼굴을 내놓아야 한다.
나는 수필을 쓰면서 하늘에 빌고 싶다. 가끔 은혜처럼 좋은 생각이 떠올라 부족한 마음을 채워주길, 눈에 띄지 않는 말, 순결한 말을 들을 줄 아는 귀와 평범 속에 깃들은 오묘한 세계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게 해달라고... 마음의 연마, 인생 도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경지를 쉽게 가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동경한다.
수필은 아무나 쉽게 쓸 수 있는 글이다. 친숙하고 정다워 꺼리낌이 없다. 남녀노소가 삶의 체험과 느낌을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글이다.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대중적인 삶의 문학인 동시에 좋은 글을 만나기란 실로 어려운 문학이다.
수필은 완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도달이 없는 깨달음의 도정으로 뻗어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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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 2009.03.24 11:23 [121.100.7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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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정목일 선생님의 수필을 꽤 읽은 듯해요.
심안을 맑혀야 한다는 가르침, 그런 것 같았어요.
마음이 무언가에 꼬여있으면 글도 자꾸 베베 꼬이더라구요. 매사를 삐딱하게 부정적으로만 끌어가는 것 같았구요, 소재도 주제도 공격적이 되구요. 수필 소재에 관한 수필을 읽다가 자신을 알게 되네요. 선생님 서재에는 마음의 창이 아주 많습니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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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2009.03.2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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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수필...젊어 한동안 그 범주에 속해있었지요
헌데 나이들수록 그도 한계가 있더라구요
나이 의식치 않고 언제까지나 감성적인 글을 쓸 수가..
옛것에 대한 집착도 한때, 헌데 첨단의 정보화시대인 요즘
어떤 주제든 누구나 다 검색하면 쉽고도 정확하게 그 내용이
좌악 꿰지다보니 그 얘기가 그 얘기로 뻔하게 드러나버리고..
나이에 걸맞는 중수필은 철학의 빈곤을 절감하기에 주저되고
하여 무엇을 쓸까 주춤대다가 스스로 재충전 차원에서
다시금 읽어보려고 수필 노트란 창고에 수필론을 모아들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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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2009.03.24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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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론들 읽어가며 함께 정진해나갑시다
더불어 참고할 좋은 자료 만나면 열려진 공간인
<추천수필>에 언제라도 넣어주세요
그리고 댕큐! 그대에게 인사 남깁니다
안그래도 요새 하루 스무번 이상 '감사할 일 찾아 표현하기'
실천 중이거든요
안구건조증이 있어서 인터넷 되도록 삼가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눈뜨면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아름다운 빛과 만날 수 있어서요,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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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을 위한 수필의 방향/정주환
1. 序
수필작가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고도의 압축과 다기한 묘사력을 발휘하여 무게 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창작인이다. 그러므로 신변잡기의 차원을 뛰어넘어 현실 상황의 맥락 안에서 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발견하여 탄력있는 삶을 제공하는 전문인이라는 점을 뼛속 깊이 인식해야 한다. 특히 시와 소설과 수필을 비교하여 특징 지우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문학의 장르라는 쇠울타리를 쳐놓고 그에 따른 정의를 내리는 것 역시 충분한 근거가 못 된다. 그것은 문학의 본질을 외면한 데서 출발한 편협한 논의들이다. 수필에서 허구를 배제해야 한다는 논의도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에서 태양만 존재해야 하는가, 아니면 암흑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 같은 우문이다. 왜냐하면 밤은 낮을 위해 필요한 존재요, 낮은 밤 때문에 낮으로서 그 가치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학에 있어서 허구란 어디까지나 그 진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요, 그 진실은 허구 때문에 진실로써의 상징성을 지닌 미의식으로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에서처럼 선인을 드러내 놓기 위해서는 먼저 악인을 등장시켜야 하고 자신을 드러내 놓기 위해서는 타인을 등장시켜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음양의 논리는 사물의 법리를 설명하는데 자연스러운 이치가 아니겠는가. 또 수필의 이야기의 구성이나 표현이 견고하게 구축되어 독자에게 충격과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단편 소설과 마찬가지로 수필 역시 어떤 전기의 실마리, 자질구레한 극적 사실, 흥미있는 일화, 마음속의 기이한 감상 등을 통해 복잡한 인생을 송두리째 엿볼 수 있도록 미학적으로 압축되고 의미있게 형상화되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이런 문제점을 전제로 새로운 21세기의 수필의 방향과 그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수필문학의 방향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시점에서 수필작가들은 수필에 대한 유행으로서의 관심이 아니라 확고한 사유 세계의 형상성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정착시켜야 한다.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독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나름대로 수필 창작의 장치적 비밀을 가지는 것만이 수필이 문학으로서의 자리를 견고하게 확보하는 길이다. 타문학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사유를 통해 입안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상징’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어서 문학으로서의 충분한 가치성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반면 수필문학은 대개가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전개가 대부분이었다는 점을 솔직하게 시인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21세기는 이런 면을 깊이 통찰하고 이런 인습에서 과감히 탈출해야 한다. 말하자면 신변잡기적인 너스레에서 탈출하는 혁명적인 작가로 거듭나야 한다. 여기에서 신변잡기라는 말은 본격 문학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그렇고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을 전제해 둔다.
1) 일상성의 탈출
작품이란 문자에 의해서 탄생되지만 그러나 작가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문자의 의미 밖에 존재해야 한다. 문학이란 뜻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문자를 사용한다. 하지만 우량한 작가는 문자 밖의 어떤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상징 같은 문학적 장치를 동원한다. 그래서 그 작가의 고도의 장치 속에 들어가면 작가가 내세우고자 하는 그 본질적인 세계를 미학적으로 음미할 수가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윤오영의 〈달밤 〉, 주요섭의 〈할머니 〉와 같은 작품 등이 그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이들 작품 속에는 달이 주는 이미지와 동전이 주는 이미지는 모두 문자 밖에서 그 의미를 찾게 되어 있다. 그리고 윤오영의 〈왜 울었던고 〉는 제목의 상징성이 아주 뛰어나서 제목만으로도 수필의 전체의 내용을 흔들고 있다. 앞으로 수필은 이렇게 일상성을 쓰되 그 일상성을 탈출하는 데서 쓰여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것만이 새로운 시대의 진정한 문학에 가담하는 수필의 방향일 것이다. 사르트르의 〈嘔吐 〉는 그의 최초의 작품이면서도 예술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마무리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수십 번의 개작 끝에 이루어진 작가의 집념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존재의 우연성’을 주제로 그의 실존철학을 소설화한 이 작품은 시적인 이미지와 형이상학적인 이미지를 교묘히 혼합하여 주인공 로캉템의 의식이 구토로 향하는 계기를 구명한다. 여기에서 존재의 우연성과 여분의 자유에 대한 문제는 ‘自’와 ‘對自’를 구별하게 되고 인간 존재와 사물의 양태에 대한 무상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 역시 〈구토 〉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소설의 방법을 모색하며 쓰여진 것으로 그의 절대적인 신념의 소산이었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장차 도래할 과학과 이성의 26세기의 사회를 비평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사회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정신적인 생활은 통제되고 규격화할 것인데 과연 이 같은 미래세계의 모습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작자의 박식함과 기지가 종횡으로 직조되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수필에서도 이러한 심층적이고도 철학적인 수필을 구상해 볼 필요가 있다.
2) 문학과 법
문학과 법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들이다. 법은 인간을 교살하기도 하지만,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세우는 근거도 된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재단하는 무기이면서 그 책임을 묻는 심판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을 보호하는 중요한 장치도 되는 것이 또한 법이며 악법도 법으로서의 가치성이 존재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가이없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이 되려는 욕심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신이 될 수 없다는 현실성 때문에 인간의 욕망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 한계성이 법이요, 욕망에 대한 브레이크가 또한 법이다 그러므로 법은 하나의 갈등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수필문학에서 법과 욕망에 얽힌 내재적인 문제들이 의미 심장하면서도 교묘하게 형상화되지 못하고 단순 처리되고 있는 것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다. 문학과 사회는 함께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법은 어느 사회에서나 문학을 뒤따른다. 인간은 상상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내고 또 그것들을 시험해 왔다. 그리고 상상이나 이상은 언제나 그 사회적 실존을 앞지르며 그것들은 우리 사회에 고착화되게 마련이다. 그때 법은 그것을 보호막의 위치에서 뒷받침해 주고 보호해 준다. 이처럼 법이란 우리의 삶과 불가불의 관계가 있듯이 문학 역시 우리의 삶을 부단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뱀은 이브를 유혹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사과나무의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된다.”(창 3 ; 5)고 유혹한다. 신이 되고 싶은 이브는 그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열매를 따먹게 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이브는 그것을 취하지 않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의 갈등의 요소는 먼저 그 법률적인 제재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사회 속에서 우리는 법으로부터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도 사과를 따먹은 사람들이 저지른 많은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 법의 모순을 철학적으로 미화시킨 수필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의 하나라 생각된다. 소설 가운데는 법을 테마로 다룬 것들이 실로 많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우리 나라의 정을병의 〈육조지 〉는 수필적인 요소를 띤 아주 짧은 단편이다. 이 작품은 법이 안고 있는 우리의 현실의 모순을 아주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그리고 외국 작품으로는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 오.헨리의 〈20년 후 〉, 〈경관과 찬송가 〉, 호돈의 〈주홍글씨 〉, 위고의 〈레미제라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오 헨리의 〈경관과 찬송가 〉는 수필의 모습으로 쓰여진 소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소설에서 보는바 우리 사회의 문제적 모순을 수필로써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사신으로서의 수필
문학이란 사신, 즉 사적인 글이라는 맥락에서 관찰되어야 한다고 양선규는 그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필자 역시 이 말에 동조하면서 앞으로는 이 사신에 대한 노출이 좀더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란 어떤 내용을 리얼하게 형상화하여 보여주는 하나의 전문인이다. 그런데 지나간 세기의 수필작가는 깊은 골방에 앉아서 큰 기침소리나 내는 도덕군자로서 만족해야 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수필작가의 절대적인 몫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다가오는 세기는 그런 답답한 골방에서는 멀찍이 탈출하여 대지의 밝은 하늘을 노래해야 한다. 따라서 이제는 솔직하게 고백하는 수필이 창작되어 소설에 빼앗겼던 독자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성애 문제는 인간의 영원한 호기심이기 때문에 천박하게 다루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독자들을 확보할 수있다. 소설에서도 經史類를 제외한 모든 글들은 사신에 속한다. 사신은 한 개인의 내밀한 사건이기 때문에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라는 방패 때문에 그것이 자유롭게 구사되면서 수필은 한 개인의 이야기라는 한계성 때문에 그것들을 금기시해 오고 있다. 그러나 수필에도 이제는 이러한 제한에서 탈피하여 작가라는 프로성을 발휘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얼마 전 필자가 관여하는 잡지에 이 모씨의 〈첫사랑 그 영원한 향기 〉가 게재된 적이 있다. 그런데 독자 가운데는 이 문제를 가지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토록 문제삼을 만큼 비도덕적인 문제라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인간이 어차피 그 내면이 비도덕성을 지닌 다음에야 비밀을 숨긴다고 도덕으로 무장되겠는가. 성애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쓰였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적나라한 표현이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돌아오는 새로운 천년은 이러한 폐쇄성에서 탈출하여 소설처럼 사적인 문제가 본격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에 이 같은 문제를 제대로 다룰 용기가 없다면 최소한 소설에서처럼이라도 ‘실제작가’와 ‘내포작가’로 분리시켜 性愛 문제의 聖域을 극복해 가야 한다. 명나라 말기 笑笑生의 작품 《金甁梅》는 남녀의 욕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전개시키는 한편, 당시 사회의 풍습을 사실적 수법으로 그리고 있다. 미래에는 이런 성애류의 작품이 소설에 자리를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로렌스의 장편소설 《차털리 부인의 사랑 》에서는 性愛 문제를 실로 자유롭게 다루었다. 여주인공 코니가 이상적인 배우자 멜러즈로부터 성적인 만족을 얻기까지의 性愛, 즉 결혼 전 성교와 간통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다루고 있다. 더욱이 활자화의 금기를 깨고 성교 장면과 남녀의 국부를 가르키는 표현들을 통해 남녀가 육체의 교섭을 거의 종교적이라 할만큼 성실하고도 진지한 태도로 다루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을 태양과 같은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 감출 수도 더럽힐 수도 없는 신성한 것으로 그려 놓았다. 따라서 인간의 본능을 해방하여 인간의 균형과 조화를 찾고, 또 생명의 기쁨에 도달해야 함을 묵시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을 태양과 같이 신성시함으로써 건전한 인간이 태어나고, 또한 여기에서 바른 인간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을 이렇게 신성시하여 다룬 이 작품은 외설 문학의 범주를 뛰어넘어, 독특한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
4) 구원으로서의 생명백서
인간 구원으로서의 문학은 어쩌면 인간의 인식의 한계성을 넘어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구원의 과정은 우리가 살필 수는 있어도 그 결과는 확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구원의 의미를 신학적 미가시적인 데 국한하지 않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그 논의의 초점을 두려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의 환상 같은 것도 그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처럼 가혹하고 무력하고 냉정한 세계도 없다. 그러나 다행이도 환상이란 열차가 있기 때문에 가혹한 현실을 슬기롭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건전한 인간의 삶은 현실과 환상과의 적절한 조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勝과 敗로 견주어 볼 수도 있다. 환상과 현실이 둘이 아니듯이 따지고 보면 勝과 敗도 둘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둘은 서로 배반하면서 공생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의 양면성이고 자연성이다. 승이 곧 패요, 패가 곧 승이 되는 우리의 삶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산이 높아야 물이 흐르고 숲이 있어야 새가 깃들 수 있는 것처럼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야 舊自我를 해체하고 新自我를 정립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의 불가해한 숭고함을 던져 주고 그것을 시적 애매성을 한층 고조시킬 때 구원으로서의 진정한 생명 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수필문학은 외형을 교묘하게 감춘 채로 인간 존재를 억압하는 일체의 경향들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어야 하고, 한 사회의 진보 가능성과 좌절을 한때의 기억이나 풍경의 차원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잠복된 숨은 의미를 되새기는 구원의 문학으로 21세기를 주도해야 한다. 따라서 구원으로서의 수필문학은 궁극적으로 수필을 통한 미래의 전망을 그리고 감각과 감성주의의 칼라 시대를 창의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로 인하여 파괴되고 훼손된 생명 경시의 시대를 회복해 가는 결단으로 다가서야 한다. 그리고 숨막히는 현실 위안으로서의 좀더 편안하고 안식할 수 있는 미학으로서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 주어야 한다. 피천득의 〈오월이 오면 〉,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 〉이 그 속에 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자연주의학자였던 드라이저는 인생에 대해 극히 회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집필한 것이 그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이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에 보스턴에서 발간 금지를 받았으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그는 사회란 개인의 의지력을 초월한 거대한 메커니즘으로, 개개의 인간은 외부로부터의 힘, 즉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밀리면서 살아가는 微小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작품 속의 주인공 클라이드는 바로 그러한 인간 모형을 그린 것으로 돈과 명예를 능사로만 여기는 물질주의에 병들어 결국 자기 일신을 망치고 만다. 따라서 클라이드는 자신의 그것이 유죄라 한다면 사회 모두가 유죄라고 판단하고 자신을 파멸로 인도한 원인은 바로 자기가 아닌 사회 안에 있다며 사회에 그 책임을 묻는다. 따라서 이러한 비극은 사회 조직의 비극이며, 벌을 받아야 할 대상은 미국사회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드라이저는 인생의 상층부를 향해 발버둥치는 인간의 욕망을, 미국 사회의 선악과 美醜를 리얼하게 묘사해 냄으로써, 현실과 환상(이상), 勝과 敗의 갈등을 의미있게 조직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새로운 시대 수필 문학의 한 방향이 잡힐 수 있지 않을까 한다.
3. 수필작가들의 시대적 책임
태초에 수필은 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장르였었다. 후일 소설과 평론에 그리고 희곡에 한 부분씩 자리를 내어준 채 수필은 가지 잘린 나무처럼 그렇게 허허한 몸으로 외로움을 감내하는 장르가 되었다. 그간 수필에 평론이 부재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본격 문학으로서의 대접이 소홀했다는 것을 잘 설명하여 주고 있는 대목이다. 평론은 사실 문학을 키우는 지줏대와 같은 것이라 볼 때 수필은 올바로 자랄 수가 없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수필문학의 이론 부재나 왜곡 등 그 외면의 부끄러움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천년은 분명 수필의 시대로 전망된다. 풀어 말하면 다가오는 세기에는 에세이 풍이 문학의 주역을 이룰 것이다. 그 같은 조짐은 이미 새로운 천년의 문턱에서 에세이 풍의 소설 전집의 발간이 그것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 권성우는 1990년 〈날개 〉(이상), 〈무진기행 〉(김승옥), 〈이 황량한 역에서 〉(이문열) 등의 작품을 묶어서 에세이 소설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에세이 소설이 자리잡기는 훨씬 그 이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 지드의 〈좁은 문 〉 릴케의 〈말테의 수기)는 에세이적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서유기 〉나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 황순원의 〈소나기 〉도 에세이 풍의 소설인 것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천년은 音像文學이 새로운 자리를 확보하리라 전망된다. 읽는 것보다는 소리나 화면을 통해서 작품을 감상하려 들 것이다. 이러한 음상문학에 수필문학이 가장 적절한 문학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수필문학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창작의 신선감을 향한 새로운 모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작가만의 철저한 고민일 수도 있겠고, 인간의 행복을 겁탈하는 억압적 요소들을 작가가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있다. 수필문학의 영역을 자꾸만 한쪽으로 몰고 가는 협소성에서 탈피해야만이 문학으로서의 자리매김이 확고해진다는 점이다. 한 나무에서 가지를 자르고 이파리를 떼어내고 순마저 자른다면 그 나무에는 무엇이 남겠는가. 나무는 온전히 자연성으로 성장할 때 진정 나무의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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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창작의 이론과 실기/이철호
수필이란 말 대신 '에세이(essay)'라는 말은 서양에서 온 외래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수필을 가리켜 보통 에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영어인 essay의 원래의 뜻은 '시험'이나 '계획'. 또는 '시금(試金)'이다. 그리고 이 essay는 라틴어인 엑시게레(exigere)에세 다시 파생된 것이다.
라틴어인 이 'exigere'는 '계량(計量)하다. 조사하다, 맛보다' 뜻이다. 또한 고대 불어인 'essai'와 그 어원(語原)이 같은 셈이다.
서양에서 '에세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한 사람은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였던 몽테뉴(1533-1592)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몽테뉴는 원래 법률을 전공한 법률가였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보르도 법원에서 법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그는 법관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법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지신의 성(城)에 은거하여 사색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이때 그는 저 유명한 [수상록](隨想錄)을 완성하여 세상에 내놓았는데 바로 이 '수상'이 불어로 'Les Essais'인 것이다. 그리고 이 [Les Essais]가 이 세상에 처음 나온 때는 1580년이었다.
이 [Les Essais]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애초부터 나의 집안 일이나 사사로운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목적이 없다.... ...만일 내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좀더 좋은 평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내 스스로를 좀더 꾸미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나를 생긴 그대로 도 자연스러우면서도 평범하고 꾸밈이 없는 그리고 특별난 것도 없는 나를 보아 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내가 그려 놓은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나의 결점들까지도 있는 그대로 나온다. 또한 터놓고 보여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타고난 성품 그대로인 내 모습을 내놓는다. ...나는 나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그리고 통째로 그려 놓았음을 장담한다.
이 몽테뉴의 'Les Essais'의 서문에서도 수필의 본질과 특성이 드러나 보인다. 즉 가식이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내는 것이 바로 수필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몽테뉴는 그 후 이 'Les Essais'의 서문에서도 수필의 본질과 특성이 드러나 보인다. 즉 가식이나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내는 것이 바로 수필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몽테뉴는 그 후 이 'Les Essais'를 수정 보완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지 3년 만인 1595년에는 'Les ais'의 결정판이 발행되었다. 이보다 2년 가량 늦은 1597년에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철학자이며 세상일에 밝은 문필가이기도 했던 베이컨(1561~1626년)은 수필집 [The Essays]를 출간했다.
이것이 바로 영국에서 최초 'essay'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The Essays'에서 베이컨 수필의 개념, 또는 특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밀하기보다는 시사적으로 쓴, 짤막한 비망록의 일부를 나는 에세이라고 불렀다. 비록 이 말은 근래의 것이지만, 그 내용은 이미 옛날부터 존재해 왔다. 이를테면 세나카(B.C.4~A.D.65)의 [Lucilius에게 보내는 서간문]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이 [Lucilius에게 보내는 서간문]도 자세히 살펴보면 일종의 '명상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이 [The Essays]를 보면 이 세상에서의 처세술이나 성공 방법 등에 관한 글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이를테면 이 책 속에 실린 [학문에 관하여 (of studies)]라는 수필을 보면
...어떤 책들은 맛이나 보아야 하고 또 어떤 책들은 삼켜 버려야하며 그리고 일부 소수의 책들은 잘 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
는 등의 말로써 야망이 큰 젊은이들에게 책을 대하는 방법과 처세술을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시민과 도덕에 관한 수필 또는 충고](Essays or Counsels, Civil and Moral)라는 수필은 그 제목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어떤 충고를 하기 위해서 쓴 글이다. 즉 그 당시 정치가와 궁정인 등에게 각기 적합한 처세술과 성공 방법 등을 충고하고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썼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필들은 높은 문학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탁인석은 그의 [수필의 금자탑-프란시스 베이컨론(論)]이란 평론에서 베이컨의 작품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평했다.
...이러한 지적인 관심과는 달리 영국 문학사에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가 되는 Essays가 있다. 초판은 1597년에 나왔는데, 거의 20년 동안 자기의 뛰어난 능력을 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방법에 쏟아 왔다. 그의 결론은 짧고 요령있는 금언인 경구의 형식으로 정착되었다. 'of studies', 'of Discourse' 혹은 'Speech-making' 따위 소재에 대한 이념을 분류하지도 않았고, 또 따로따로의 사상을 현재의 사건이나 자신의 경험에서 해명 혹은 예시하지도 않았다. 문장은 직재적이요 박력이 있다. 완전한 수사가임을 보여준다. 신축성이나 현대미는 없을지라도 특수한 사상을 전달하는데 박력과 함축성에서 견줄 데가 없다. 라틴 낱말을 많이 썼지만 두 언어의 구조적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부피가 큰 영국 산문이 허술한 긴 문장으로 쓰일 때는 그는 생소하지만 짧고 명랑하게, 또 굳게 이어지는 문장의 유형을 동시에 구사하였다. 미문가의 기상(conceit)이나 지나치게 복잡한 심성을 거부하지만 잘 배치된 수사요 사상을 빛내고 상상의 빛을 더하고 매력을 줄 줄도 알았다…
…다른 어느 작가에서도 우리는 그렇듯 사고와 실용적인 지혜로 가득찬, 간결한 금언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많은 말이 격언으로 통하게 되었다. 그의 모든 저술 가운데서 인간적 관심이 가장 훌륭하게 나타난 것은 그의 수필집이다…
1597년에 초판 발행된 베이컨의 「The Essay」는 그 후 1612년과 1625년에 각각 수필 작품들을 추가로 수록하여 발행되었다. 그래서 원래는 10편이었던 수필 작품수가 1625년에는 다시 배 이상으로 늘어난 58편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추고(推敲)도 거듭하였다. 이렇게 추고를 거듭하고 수필 작품수를 늘려서 수록한 1625년의 제3판에 대해 탁인석은 다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제3판에서는 'of Gardens'(정원에 관하여)와 같은 essay에서 은퇴의 편함을 말해준다.그의 수필집에 수록된 수필들은 모두 문체가 지극히 간결하고 치밀하여 경구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과학자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을 만큼 그 배열이 정확하고 이론이 정연하다. 그 점에서는 프랑스의 몽테뉴(Montaigne)의 글이 유쾌하고 흉금을 터놓을 만큼 친밀감을 주는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초판 발행 후에야 그는 프랑스의 몽테뉴의 Essay를 알게 된 것 같다.
몽테뉴는 역사상에서 자기의 개인적인 추억과 의견과 환상이 남의 관심거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첫 사람이다. 그의 Essay(1580)(필자: 앞서 언급한 몽테뉴의 『Les Essais』뜻함)는 어느 나라에서고 르네상스의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요, 또 개인적인 수필이라는 새 유형의 문학장르의 기원이기도 하다…
몽테뉴와 베이컨, 이들은 서로 태어나서 자란 나라도 다르고 문학적 교류도 별로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필작품 세계도 사뭇 다르며, 사상이나 인생관도 다른 면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서양에서 '에세이'라는 새로운 문학장르를 개척한 수필문학의 개척자요, 수필문학의 금자탑을 쌓은 위대한 '에세이스트(essayis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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