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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5/11/23
 

               

    
    분리를 원하는 것은 샴쌍둥이만이 아니다. 분리되어 좋은 것이 또 있다. 한국이 미국보다 한발 앞선 쓰레기분리수거 제도가 그 하나. 이 제도야말로 환경보호와 물자 재활용 차원에서 볼때 각국이 서로 앞다퉈 진작 시행했어야 옳았다. 보통 쓰레기 처리는 소각과 매립 방식이 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비좁은 국토면적에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에서야 금방 한계상황에 부딪치게 마련. 가정마다 쓰레기 분리에 따른 불편함과 번거로움을 견뎌낸 끝에 이젠 정착단계에 이르렀다는 한국의 쓰레기분리수거제. 특히 음식쓰레기의 경우, 다른 생활쓰레기와 뒤범벅이 되면 모든 쓰레기를 재생불능의 지저분한 오물덩이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퇴비와 사료로 유용하게 전환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두번째로는 자나깨나 분리를 바라는 사람들 이야기다. 아무리 끌어안으려해도 하나가 되기 힘든 그 무엇, 민족이 다르고 종교와 문화가 다른 신장 위구르나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 끊임없이 피 흘리며 봉기 중이다. 강제로 속국을 만들어 중국에 편입시킨 뒤 야금야금 제 실속만 챙기며 종당엔 소수민족의 역사왜곡까지 서슴치 않는 서북공정이란 국가주도 프로젝트를 추진중인 중국에 강하게 반발하는 그들. 서역의 광범위한 땅과 풍부한 자원에 침 흘리는 중국의 음험한 속셈을 간파한 그들로써야 도저히 한족과의 통합이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독립국가로 분리될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그들, 그때가 언제이든 간에.

오늘 인터넷 뉴스에서 워싱턴 특파원이 보낸 기사 한토막을 접했다.7월 27일을 '한국전쟁 휴전일'로 지정하자는 내용의 법안이 미하원 본회의를 통과하여 잘하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내년에는 미 전역에서 조기를 다는 두번째 국가기념일이 탄생할 수도 있겠다고 내다봤다. 그와 동시에 내내 뇌리에서 맴돌던 유월 어느날의 한 인터뷰 내용이 다시금 떠올랐다. 6.25참전 유공자회 명예회장인 박정인 장군은 한국의 현 정국을 '굶주린 이리 앞에서 한눈 팔고 있는 살찐 양' 격이라고 일갈하며 국민들의 정신 재무장을 촉구했다. 핵을 앞세워 눈 부라리는 북한을 목전에 두고 좌우가 뒤얽힌 채 천방지축 정신 못차리는 남쪽의 한심한 작태가 못내 안타까운 노장군. 

한반도의 분열은 애당초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다 아는 사실이지만 한번 더 짚어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다. 전후 공과에 따른 몫 나누기가 응당 뒤를 잇는다. 냉엄한 국제사회의 법칙은 철저히 자국의 실리를 우선으로 한다. 우리를 식민통치했던 일본국을 패망시키자 미소 강대국은 한반도의 중허리를 동강낸다. 남은 미국측에 북은 소련측에 의한 군정에 들어가며 남북한이 사실상 나뉘어지게 된다. 그처럼 철저히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얽혀 금 그어진 38선이다. 그리고 육이오가 터졌다. 김일성의 야욕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전쟁의 참상을 딛고 경제성장을 거듭해온 동안에도 혼돈은 계속된다. 느닷없이 터지곤 하는 색깔론에 때로는 육이오가 남측에 의한 전쟁이라는 궤변이 들리고 민족해방전쟁을 방해한 미국을 규탄한다는 해괴한 논조까지 등장하기에 이른다. 구 소련이 붕괴되며 한국전쟁관련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설득력을 잃게는 됐지만. 

얼마전 망자가 된 한 대통령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으로 첨예히 나뉘어졌다. 급기야 남남갈등, 내부분열을 야기할 지경에 이르며 사회가 크게 요동질쳤다. 섬뜩했다. 생각이나 견해의 관점이 다르면 같은 문제를 두고도 좌와 우 혹은 흑과 백, 해석하는 방향은 이처럼 각기 다를 수 있다는 데 오싹 소름이 끼쳤다. 하기사 일치를 바라시고 평화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머리에 두고 사는 언필칭 신앙인조차 그와 별로 다를 바 없을진대. 집단이나 단체 또는 사상 따위가 갈라져 나뉘는 것을 분열이라고 사전은 풀이한다. 마치 사기그릇이 금가 갈라지듯 두쪽으로 쪼개지며 도저히 봉합 불가 상황에 이르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시시비비를 논하며 오늘의 분열상을 누가 만들었는가 원인을 굳이 밝히려 들고 싶지도 않다. 왈가왈부하다보면 시끄럽기만 할테고 따라서 루비콘강을 건넌 이제와 새삼 가로늦게 대화니 일치니 융합이니 수선 피우는 건 부질없는 짓. 나아가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시비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고유의 직분,우리는 그분 뜻을 조용히 기다리기만 할 일이다. 
   

             

 
    고생대 적 일이다. 키대로 자란 울창한 양치식물이 지각변동으로 쓰러지며 매몰된 그 퇴적물 위로 지층은 두터이 쌓여갔다. 지열과 압력에 의해 유기물이 탄화되는 동안의 덧겹쳐진 日月. 그렇게 길고도 깊은 잠은 계속됐다. 땅 속 저 아래 아득한 곳에서 수천만년에 걸쳐 숙성돼 마침내 뜨거운 열을 품은 에너지원으로 바뀐 양치식물의 화석. 석탄이다.
중앙선 주변마을이 흥청흥청 붐비던 시절이 있었다. 국내 유일의 부존 에너지 자원으로 보호 육성되던 석탄산업인지라 국가가 앞장서 증산정책을 펴며 장려 지원한 덕이었다. 검은 내(川)가 흐른다는 탄광촌일망정 번성했던 한창때는 사북 도계 태백이 산골 오지가 아니라 경제의 요지였다. 지하 깊숙히 뚫어내린 갱도 막장에 갇히는 매몰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진폐증에 시달리기도 하며 새카만 얼굴의 광부들은 경제발전을 이끄는 견인차로서의 자부심을 안고 부지런히 곡괭이질을 했다.
긴 침묵의 어둠을 건너 다시금 환생을 한 그날. 환한 지상으로 끌어올려진 석탄은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났다. 하여 검정이라도 암울한 검은색이 아닌, 자르르 윤기 흐르는 먹빛 석탄은 햇빛에 드러나면 오색 광채까지 발한다. 모든 색을 수용할 수 있는 마지막 색이자 가장 분명한 색이 바로 석탄의 그 까만빛. 사실 검정만큼 개성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색도 없다. 고급스러움과 모던함이 포함된 세련된 품위를 느끼게 하는 신비스런 색이 바로 검정이니까. 
탄광에서 실려나온 석탄은 줄줄이 이어진 무개탄차를 타고 도시로 갔다. 공장에 부려져 둥근 덩어리로 빚어지는 가공과정을 거치면 그때부터 명패가 바뀌어 연탄으로 불리게 된다. 7~8십년 대 허술한 주택구조 탓에 유달리 매섭게 춥던 겨울. 그래도 따끈한 아랫목 훈기속에 몸을 녹힐 수 있었음은 연탄의 소신공양, 하얗게 사그라들때까지 제몸을 아낌없이 사룬 보시 덕일 터였다. 활짝 폈다 미련없이 이우는 찔레꽃처럼 역할 다하고는 주저하지않고 흙으로 되돌아가는 아름다운 미덕을 지닌 연탄.
현재 오륙십 줄에 들어선 이의 대부분은 연탄세대에 속한다. 한밤중의 연탄갈기와 연탄재 처리하기가 늘 만만찮은 일거리였던 풋내기 주부 시절을 지나 화력의 완급을 조절하는 요령이 붙어가며  우리의 아줌마 이력은 늘어갔다. 당시는 집집마다 취사난방 겸용 연료로 연탄을 사용하고 있었다. 연탄불 하나만으로 방을 덥히고 밥을 짓고 찻물을 끓이고 목욕물을 뎁혔다. 다용도 기능 외에도 다 타고난 재는 미끄러운 빙판길에 깔거나 패인 골목길을 메우는데 요긴하게 썼다. 그러나 한편으론 死神의 마각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니 갈라진 구들 틈이나 문 사이로 스며든 연탄가스에 의한 중독사고였다. 가벼운 경우는 동치미 국물을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되기도 하였지만 한방에서 잠자던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는 일도 적잖았던 그때. 판잣집이 즐비한 달동네 살림이 궁색한 집 아이들은 새끼줄에 꿴 연탄을 낱장으로 사날랐다. 반면 형편이 좋은 집은 연탄광에 수백장씩 그들먹하게 쌓아두고 살았으니 연탄은 빈부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였다.
경제가 활황기에 접어든 90년대에 들어서자 편리하고 열효율이 높은 석유를 선호함에 따라 연탄은 제 영역을 잃고 사양화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몰락하다시피 밀려난 연탄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졌는가 했는데 그래도 어디선가 명맥을 이어왔던 모양이다. 잊혀져 가던 그 연탄이 요즘 난데없이 재등장했다. 그것도 불명예스러운 등판이요 복귀인 셈이다. 하필이면 연탄이 잠자듯 고요하게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게 죽어갈 수 있는 자살 도구로 떠오른 것이다. 일본을 비롯 한국 연예인이 연탄을 피워놓고 자살을 하더니 급기야는 인터넷에 연탄자살 동반자를 찾는다는 사이트까지 등장하는 판이다.
베르테르 효과라던가, 바이러스 퍼지듯 연탄자살자가 늘어나고 있단다. 해서 연탄화덕을 구입하려는 사람이나 뒷길에 차를 세워두고 잠든 사람이 눈에 띄면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생활이 어려운 저소득층 가정에 연탄을 무료로 제공해주는 연탄은행이란 곳에서 호소문을 띄우기에 이르렀을까. '연탄은 따뜻함의 상징이고 몸바쳐 헌신하는 사랑의 아이콘' 이라며 제발 연탄을 자살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달라고 사정한다. 총검류도 아니면서 어쩌다 생명을 상하게 하는 악역을 맡게된 연탄은 자기 이름을 더 이상 욕되게하지 말라는 탄원서라도 쓰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연탄가스인 일산화탄소는 밀폐된 공간에서 다량 흡수하면 적혈구의 산소공급 능력을 저하시켜 뇌에 산소공급이 줄어들며 실신상태가 되어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고 한다. 만일 미수에 그쳐 깨어난다해도 뇌에 회복 불가능의 흠을 남긴다는 무서운 독성의 연탄가스다. 심리학에서 자살은 정신적 질병의 결과로 해석한다. 무엇을 도구로 쓰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가장 불행한 죽음이다. 나아가 주변 인연들에게는 그 이상 가혹할 수 없는 잔인한 짓이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무책임한 자살은 동정 대상이 아니라 명백히 죄를 짓는 행위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배반한다. 유다는 은전 몇닢에 스승을 팔아넘긴다.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한 베드로에 반해 유다는 죄책감에 못견뎌 자살하고 만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자살한 영혼은 구원받을 기회를 영영 놓쳐버린다는 점이다.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귀한 생명이다. 살다보면 세파에 지쳐 너무 힘들다못해 기진맥진될 때가 왜 없겠으며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때인들 어디 한두번이랴. 산다는 것은 견뎌내는 일이라 하였다. 말 그대로 사바세계란 참고 견디는 세상이란 뜻. 이성복 시인의 시처럼 '자신을 속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진실은 우리가 지금 아프다는 사실'임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감에 빠질 때 저마다 극단의 선택을 한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이 세상에 살아남을까. 정도의 차이 뿐 누구에게나 삶에는 환난이 따른다. 그러나 하늘은 시련과 함께 고난을 극복할 힘도 주셨다. 
그 옛적 양치식물이 너울대듯 창밖 숲은 지금 푸르름 일색이다. 보라, 잎잎이 눈부신 신록이 우리의 어깨를 부추켜 세울듯 한껏 생기롭지 않은가. 의기소침을 벗어던지고 기운차게 일어나 다시 뛰어보자고 저 숲이 손짓하지 않는가.  




옷차림에 관하여

사무직의 직장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일터에서 거의 정장을 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다. 정장은 자세를 어느 정도 긴장시킨다. 따라서 차림이 반듯하고 단정하면 헐겁거나 풀어진 틈새가 보이지 않게 된다. 군경의 제복이 단적으로 입증하는 바와 같다. 이처럼 자신을 위한 면도 있지만 깔끔한 옷차림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며 이미지 관리를 고려해서이기도 하다. 행여라도 콧대 높은 백인들에게 몰캉하니 얕잡힐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오기 혹은 자존심일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자그마한 동양인이니 왜소하기도 하려니와 나이까지 들어 추레하게 보일 필요는 없으므로 그 다짐의 실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실용주의자들인 미국인들. 형식에 과히 신경쓰지 않는 그들인지라 청바지 티셔츠에 맨얼굴이 예사롭다. 격식이나 체면치레에 별로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 시각에 일터에서의 정장은 의아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도 아닌데 이브닝 파티가 있느냐고 묻는다. 특별한 날이냐고도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니 그냥 평상복인거야. 내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그 정도로 이사람들 정장 차림은 결혼식이거나 장례식 때의 예복차림. 그외에는 변호사나 은행원이 직업의 특수성상 정장을 한다. 일반적으로 대개는 면바지에 티 셔츠를 입고 자켓을 걸친다. 그나마 동부에는 화잇칼라가 많은 편이라 이곳 한인들이 종사하는 주업종이 세탁업. 뉴저지에만도 공장 드랍샵 합해서 7천여 군데라고 하며 나도 거기 한몫 거든다.
어느 식당에서 음악을 가지고 한가지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매상과의 상관관계에서 단연 효과적인 음악은 클래식. 실내에 클래식이 흐르면 손님은 스스로를 품위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 자신이 문화적이고 교양있는 것 같이 여겨져 더 비싼 음식에 고급 외인을 주문하게 되더라는 것. 감성 마켓팅 시대인 현대다. 그래서 한스 우베퀼러라는 독일의 경영 컨설턴트는 고객을 대할 때 왕이 아닌 연인 대하듯 하라고 이른다. 왕좌라는 권위로 군림하는 대상은 꺼려지는 반면 연인은 무작정 마음 다한 성심을 쏟게 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느 누군들 연인과의 만남에 편하다는 이유로 허술한 옷차림을 할 수 있을까.
옷차림은 때와 장소에 적합해야 한다. 일을 하면서 작업복이나 간편복이 아닌 정장 차림은 기실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만큼 불편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은 아닌데 통상 인식, 즉 굳어버린 고정관념상 정장은 일옷이 아니라고 여긴다. 물론 도포자락 늘어뜨린 어부나 비단 마고자 입은 나뭇꾼이란 한갓 희화거리. 그럼에도 줄창 정장을 고수하다보니 이제 사람들 눈에 익숙해졌다. 평상복일 수도 있는 정장, 이미 그건 사치스런 옷치레나 허황된 겉멋이 아니다. 재치있는 멋쟁이가 못되다보니 오히려 쉽게 걸칠 수 있는 옷이 정장인 셈이다.
우리 속담에 입성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난한 집안의 서생일지라도 과거보러 갈 적에는 두루막에 갓쓰고 선비의 기본을 갖춘다. 귀양살이 하다가도 왕명을 받들려면 의관 정제부터 한다. 빈 방아공이질을 해야할만큼 구차한 살림을 산 백결선생은 누더기진 옷을 겹겹이 꿰매 입어 얻은 이름.주색에 찌든 파락호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평상시 의관만은 반듯하게 갖추고자 한다.그래서인가, 사람살이의 기본요소인 의식주에서 가장 중요할 법한 먹거리보다도 먼저 등장하는 것이 옷이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내실없이 겉치레나 그럴싸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품격은 스스로가 만든다. 물론 번지르르한 옷차림만으로 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억지춘향으로 꾸미라는 게 아니라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있는 옷 잘 맞춰 단정하게 입으면 정장, 그건 옷 사치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때로는 입는 옷이 그의 인품을 반영한다
또 한가지, 사당이나 현충원을 참배하며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다면 무례를 넘어 몰상식으로 간주된다. 베르사이유 궁전이든 자금성이든 출입에 옷차림이 구애받지 않는 반면 바티칸 방문시 비신자인 일반 관광객에게도 요구되는 예절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며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상을 직접 만나고자 한다면 민소매 차림이나 짧은 반바지로는 곤란하다.의관 정제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기 전에는 입장 불가라고 못을 박아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일날 주님을 모시고자 성당에 나오는 우리의 자세는?
대상을 떠올리면 언뜻 연상되는 이미지, 곧 저마다 ‘상징’하는 것이 있다. 통상 성당을 상징하는 것은 장중하고 엄숙한 전례의식이다. 하느님께 예배 드리는 祭儀이자 공적으로 모여 기도하는 자리인 미사에 참례할 때는 내적인 준비를 하고 경건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신자된 의무이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시간인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기 전 자신을 가다듬게 된다.매무새부터 깨끗하고 점잖은 차림으로 다듬는 것이다. 물론 외형만 단정하게 차리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생활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얼마전 신문에서 스쳐본 기사가 생각난다. 백악관에 초대되어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여대생 몇 명의 사진이 실렸는데 얼굴이 아니라 정확히는 발만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끈이 달린 샌들을 신은 그들의 맨발이 가십 대상이었던 것이다.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의 차림새로는 기본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꼬집은 그 기사는 한마디로 부적절한 복장예절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민주국가라할지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성전에서랴. 각자 자신의 옷차림을 한번씩 돌아볼 일이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2007.04.03 22:20 | 心苑 만평 |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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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눈이라도 내릴 듯한 우중충한 오후. 낯선 흑인이 들어왔다. 구부정한 어깨가 잔뜩 위축돼 보이는 청년이다. 그는 일거리가 없느냐고 묻는다. 더러 멕시칸들이 일할 사람 필요하지 않느냐고 들르긴 하지만 흑인은 처음이다. 온가족이 뉴올리언즈에서 일자리를 찾아 여기까지 흘러왔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시무룩하다. 그는 허리케인으로 졸지에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린 수많은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    

 미증유의 재난이었던 쓰나미의 강타에 이어 지난 한해 규모 큰 자연재해가 유독 잦았던 지구촌이다.  여름의 막바지에 카트리나, 리타, 윌마, 알파로 줄을 잇는 초대형 허리케인이 멕시코 만을 할퀴고 지나갔다. 허리케인에 놀란 가슴이 채 진정도 되기전 연이어 파키스탄에서 강진이 발생했다. 아비규환의 카슈미르 현장 상황이 속속 보도됐다. 희생자만 9만 여명에 이재민이 330만이라 했다. 설상가상으로 폭우와 추위까지 겹쳐 구조작업은 지지부진, 손쓸 새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비극적 상황이니 불행은 처참하게 건물더미에 뭍혀 죽은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도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멍한 시선으로 허공에 손을 벌렸다. 카슈미르 주지사는 절규했다. 처음에는 사람을 찾고자 땅을 팠고 다음엔 그들을 묻고자 땅을 팠다고.
 
지구가 거칠게 요동질 칠때마다 생기는 무수한 사상자들. 가공스런 위력은 곳곳에 아물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특히 미남동부를 결딴낸 카트리나의 횡포는 무작스러웠다.열대성 태풍은 해마다 여름이면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그러나 지난해의 허리케인은 광폭의 정도가 한층 심해서 그 피해 규모와 범위가 엄청났다
.
 
시속 255킬로미터로 곧장 뉴올리언즈 시내로 돌진한 허리케인은 시가지 80%를 속수무책 물에 잠기게 만들었다. 300억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재산피해와 수천명에 이르는 사망자, 이재민이 부지기수인 최악의 물난리였다.그 통에 미국사회의 아킬레스건인 인종갈등 빈부격차라는 계층간의 양극화 현상, 불평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평등권을 보장한다는 나라, 세계 최강국이자 부국으로 오만하게 군림해 온 미국의 치부를 카트리나가 들춘 것이다. 뿐더러 멕시코만 산유시설의 파손으로 전략 비축유를 방출해야 하는 등 미국조차 에너지 파동을 겪어야 했다. 가스값이 오르자 경제가 휘청댔다. 그만큼 현대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지대한 석유라는 화석연료. 그 영향으로 아직까지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
 
연달아 내습한 초강력 허리케인은 지구 온난화가 주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석탄 석유같은 화석연료를 태울 때 생기는 유해물질인 이산화탄소 등이 온실가스를 내뿜어 지구가 지나치게 더워진 탓이라는 것이다. 태양열이 지구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온실가스가 하는 때문이다. 그에따라 만년설을 자랑하던 킬라만자로의 눈과 극지의 빙하가 녹으며 바다 높이가 일년에 1.5센티미터 올라 간다는 보고다. 그리하여 인도양 몰디브나 남태평양의 많은 섬나라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고 한다
.
   
지구 온난화로 유럽에서는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에 시달리는가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적도해역의 수온이 올라가며 발생하는 엘리뇨 현상으로 진달래가 한달 일찍 피고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여름밤이 늘고 있다. 이처럼 바닷물이 데워지면서 생긴 수증기가 구름층에 흡수되면 많은 비를 뿌리게 돼 태풍의 위력이 커질 수 밖에 없다. 해수표면 온도가 상승하면 할수록 허리케인 위력은 걷잡을 수 없이 거칠어지고 파괴력은 높아진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로 해수온도 1도 상승이 몰고온 대재앙이 카트리나였다고 과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
 
유엔에서는 진작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이대로 간다면 향후 10 년래에 지구 온도 상승폭이 2 C에 이르게 되어 생태계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자연재해 뿐 아니라 녹지의 사막화 현상 가속으로 식량생산 위축이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지난 92년 선진 38개국이 브라질 리우 환경회의에서지구 온난화 현상과 기상이변을 줄이기 위해 채택한 국제협약이 기후변화협약(UNFCCC)이다. 온난화 피해는 국경없이 전 지구촌에 고루 해당되기 때문이다.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데는 합의했으나 구체적 세부사항이 없어 흐지부지되려는 것을 보정 발전시켜 감축비율을 정한 것이 97년 교토 의정서. 세계 180여 개국이 참여한 온난화 방지를 위한 협약을 그러나 미국은 외면했다
.
 
온실가스 배출량이 세계 1위 국으로 전량의 4분의 1을 배출하는 미국은 그에 따른 경제활동의 위축을 우려한 나머지 비준을 거부한 것이다.  원자력이나 액화천연가스로 에너지를 대체한 유럽연합과는 달리 여전히 석유에 전반 산업활동을 의존하는 미국이다보니 온실가스를 줄인다는게 쉽지않을 뿐더러 부담 또한 클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목전의 이해득실만을 따른 결과 미국이 자연으로부터 보복을 당한 것이라고 환경단체들은 꼬집는다
.
 
얼마전 11차 유엔기후변화회의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었다. 인류 공동의 재산인 지구다. 이 지구를 보존하기 위한 몬트리올 액션 플랜이 만들어져 이산화탄소 배출권에 대한 구체적 안을 발의했다고 한다. 각국이 힘을 모아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대기 중의 기체를 위험하지 않은 수준으로 안정화 시키자는 것이다. 기실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경제 규모를 축소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며 개도국은 개도국대로 개발의 걸림돌이기도 하지만 기후변화협약, 이는 각국의 자유의사에 따른 선택사항이 아니라 모두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으로 필요한 것이다.

  허리케인은 마야인들이 일컫던 대로 하늘의 신(우라칸)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허리케인은 하늘의 신이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결과물로 변용되었다. 무분별한 온실가스 배출에 따라 자꾸만 지구가 따뜻해질수록 더 무서운, 더 잦은 허리케인을 불러오게 됐으니 말이다. 결국 자연이 준 경고에 제대로 응답하는 길은 더 이상 자연을 성나지 않게 다독이는 일이다.
 
그리스의 델포이 신탁장 입구에 써있다는 경구의 하나가 '오만하지 마라'. 이것은 인간에 대한 신, 또는 자연이 주는 영원한 경고일 것이다. 천지 창조 여섯째 날 제일 마지막에 인간을 만든 이유는 자연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이 새삼 설득력있게 들리는 저녁이다.




엄마는 부재 중

 

 해마다 실시하는 전국 규모의 어느 백일장 심사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그중 경남 • 부산 일원의 초중등 학생부 산문 분야 심사를 맡았다. 워낙 많은 분량이라 여럿이서 며칠간 작업에 임했다. 국민 학생들에게는 <우산>이란 제목이 주어졌다. 아직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발견하리란 기대로 한편 한편 읽어 나갔다. 시간을 잊게 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졌다. 때론 슬며시 미소 짓게 하는 글, 고개 끄덕이게 하는 글, 가끔씩은 가슴 뭉클한 내용도 있었다. 특이한 일은 부산 시내 어린이의 글보다 울주나 함안 등 지방 학생들의 글이 돋보이는 수작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만큼 체험의 진솔한 표현을 한 측과 진작부터 기교를 몸에 익힌 측의 차이 때문이리라.

 백일장에 참여한 학생들은 글쓰기의 대강 기본은 갖춰 있는 셈이었다. 더러 깜짝 놀랄 만한 작품도 나왔다. 국민 학생의 필력으로는 과할 정도의 뛰어난 솜씨도 보였다. 착상 역시 참신하고 재치 있는가 하면 전혀 뜻밖의 예리한 시각도 있었다. 그들의 글 속에서 어릴 적 내 모습이 읽혀지기도 했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이었다. 우산과 연결된 생각의 범주가 어찌 그리 비슷한지 거지반 한결같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리는 날, 하교 길에 우산 갖고 오는 엄마에 대한 반가움과 고마움. 그에 반해 비 맞고 집에 와도 엄마가 부재중이라 쓸쓸했다거나 울고 싶었다거나 원망스러웠다는 등등. 심지어 집을 자주 비우는 엄마에게 적의를 품은 아이 조차 있었다. 요즘 주부들은 정말이지 너무 바쁜 사람들이다. 가사외의 뚜렷한 일은 분명 없는 데도 집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나부터도 그러하다. 집에 들앉아 있으면 별 볼일 없는 사람 같고 무능하니 퇴보되는 듯해 공연히 들떠 나돈다. 한가롭게 지낸다는 자체에 공포심 내지는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주위로부터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것도 같고 탈락되는 듯해 조바심이 난다. 자칫하다간 무기력하게 쳐지고 원인 모를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밖에서는 연신 주부들을 불러 대며 사회 속에 뛰어 들라고 부추긴다. 취미 생활이다, 사회 봉사다, 평생 교육이다, 이런저런 명분으로 요즘 주부들은 꽤나 분주한 것이다. 계모임도 보통 서너 종류는 된다. 고급 식당에 몰리는 대낮 주부들을 보고 어느 교포 교수는 모두들 차분하지 못하고 들떠 사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물론 살다보면 꼭 해야 할 긴요한 볼 일도 있고 사람 만날 일도 생긴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엄마는 부재중이라면 곤란한 문제가 아닌가.

 아름다운 것들을 꼽을 때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의 모습, 자기 일에 열중한 여자의 모습, 그리고 또 하나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라고 한다. 폐미니즘이 아무리 기세 돋궈 나가도 여성은 어머니의 위치와 직분에 충실할 때 당당하고 고귀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역시 시대에 뒤떨어지는 나만의 촌스런 사고일까.

<동래 살롱 •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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