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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과 객
대서양이 나서서 경계지르기 전까지는 무한정 내달리던 펜실바니아 푸른 평원이다. 그 한 모서리에도 칠월이 깊어지면서 울울히 짙푸른 수해가 펼쳐지고 있다. 사방에 넘쳐나는 푸른 아우라, 저마다 힘찬 나무의 정기가 압박하듯 조여드는 느낌마저 든다. 메이플 셰이드란 지명 그대로 단풍나무 그늘 짙은 이곳. 도로변을 따라 걷노라면 바짝 옆으로 밀림지대나 되는 것처럼 울창한 잡목숲이 따른다. 훤칠하니 우람스런 단풍나무 참나무들이 대부분인데 밑둥 언저리에는 온갖 야생초들이 제철을 맞아 한창 탐스럽다. 그악스럽기야 들풀도 마찬가지이지만 얼키고설킨 덩굴식물들은 더부살이 주제에 욕심들이 지나치다. 막 자라오르는 조그만 나무를 온통 뒤덮다시피 점령해버린 인동초와 들찔레며 그중에도 특히 고약스런 무뢰한은 단연 포이즌 아이비다. 미동북부에만 서식한다는 포이즌 아이비는 아예 본 나무를 제치고 주인행세하기 일쑤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내치는 격이니 주객전도도 유분수다. 우둠지는 분명 단풍나무 이파리인데 허리춤부터는 세잎 큼찍한 포이즌 아이비가 기세등등히 세력을 넓혀간다. 가생이에 보풀이 너덜거리는 낡은 로프, 오래되어 썩어가는 동아줄같은 것이 나무둥치에 밀착된 채로 기어올라 한몸이듯 엉켜붙었다. 불량스런 몰염치범인 포이즌 아이비 덩굴이다. 절로 눈이 흘겨진다. 숲이 끝나는 가장자리에 주로 자리를 잡다보니 우리와 마찰도 잦다. 얼핏 스치기만해도 피부가 지독히 가려우면서 벌겋게 성이 나 화농이 되는 옻나무 류와 유사한 독초이기 때문이다. 길가는 물론이고 집뒷뜰까지 스스럼없이 침범해 들어오는 이 독초와 닿았다하면 단번에 물집이 잡히고 진물이 흐른다. 가렵기로 말하면 잠을 못 이룰 정도라 그여이 병원을 찾게되고. 산지사방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포이즌 아이비 덩굴에 숫제 어느 단풍나무는 고사 직전이다. 그도 그럴것이 꼼짝없이 양분을 다 빼앗기고 마는 약탈자와 한집에 살다보니 시난고난 맥을 못출 밖에. 숲 여기저기 듬직한 나무마다 포이즌 아이비가 음험스럽게 휘감아오르고 있다. 아마존에 산다는 뱀의 몸통처럼 시커멓게 나무를 타고 오르는 굵직한 덩굴의 포이즌 아이비를 보면 <주홍글씨>의 칠링워드가 떠오르기도 하고 크메르의 타프롬이 생각나곤 한다. 타프롬은 고색창연한 유적지보다 담장과 지붕을 감싼 거대한 열대수목의 뿌리로 더 기억되는 곳이다. 마악 쏟아져내리며 덮씌우는 용암 줄기와도 같고 범선을 통째로 휘감았다는 거대한 문어발처럼 지금도 살아 꿈틀거리며 당장이라도 나를 덮칠 것만 같은 거목 뿌리들. 식물이되 동물적인 감각으로 섬뜩하게 압도하는 그 힘 앞에 섰을 때 입이 절로 벌어지며 느꼈던 외경감이라니. 수백년에 걸친 긴잠을 깨운 앙리 무어가 처음 그들과 조우했을 당시의 놀랍고도 특별한 기분이 그랬을까. 신들의 정원이라는 앙코르의 이 사원은 폐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치 지진이라도 겪은듯이, 집중포화라도 당한듯이, 대사원은 원형을 찾을 길 없이 마구 허물어진 채 돌무더기만 남겨졌다. 그래도 나무뿌리 틈새로 돌벽에 새겨진 압살라의 풍만한 몸매가 엿보이고 정교하게 귀맞춘 탑 모서리가 드러난다. 사백년이란 긴 세월, 사람들로부터 시나브로 잊혀져 있는 동안 다시 정글로 되돌아가 나무에 그 몸을 의탁한 것인가. 사원은 열대수목을 불러들여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깊은 포옹으로 그나마 웅장한 석조문명의 잔해를 지탱해가고 있으니 아이러니이면서도 한편 기특하다. 천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타프롬. 폐허처럼 무너져내린 사원이건만 복구 엄두를 못내는 까닭은 열대수목이 이미 석조건물과 완벽한 일체가 되어 분리시킬 경우 오히려 더 심한 붕괴우려가 생긴다고. 이젠 그저 자연의 순리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긴 대자연의 입장에서야 우리 모두 너나없이 원시밀림에의 무단침입자이자 질서를 흐뜨리는 무법자들. 따지고보면 누가 더하고 덜하다 따질 계재도 아니며 나아가 누가 주인이고 객이라 우겨댈 것인가. 후세의 호사가들이 이끼낀 사암이며 흘러내린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역사를 논하지만, 어쩌면 일찍이 크메르인들이 꿈꾼 신들의 정원은 저런 모습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옛적엔 천지일월은 물론이고 거목과 거석마다 신격을 부여하고 우러러 숭앙했으니까. 웅장한 탑의 숲, 조각의 숲에서 지금은 괴기스런 나무의 숲으로 바뀐 채 묵언에 든 타프롬. 거기서 우리는 인간이 이룬 문명의 오만이 자연의 힘 앞에 얼마나 덧없는 가를 보게 된다. 세월의 힘, 뿌리의 힘에 강한 충격을 받기도 한다.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결국 흙으로 데려간다는 사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님을 거듭 환기시켜 주기도 한다. 우리 모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이긴 마찬가지. 단풍나무 숲의 밉상인 포이즌 아이비이지만 조물주의 作意가 그러하거늘 구태여 흑백과 주객을 구별해 무엇하리. 모든 생명은 그분 섭리안에서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홀연 자연의 속엣말이 들린다. 매사 내 기준으로 판단하려 내닫지 말고 섭리에 귀 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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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
이른 봄, 길섶에 민들레가 금화 뿌린듯 샛노랗게 깔린다. 봄부터 초여름까지 풀밭 어디서나 흔히 만나는, 그래서 아예 지천인 들꽃이 민들레다. 감광성 식물인 민들레는 해가 돋으면 꽃이 피고 저녁엔 오므라드는 예삿 풀꽃이다. 그러나 꽃이 지고 씨를 품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화경(花莖)을 쑥 밀어올려 씨앗을 널리 퍼뜨릴 준비를 하는 경이로운 식물이다.
민들레꽃을 볼적마다 생명의 신비앞에 내심 놀라곤 한다. 우거진 풀덤불 사이에 돋은 민들레는 옆자리 풀보다 한층 더 키를 돋구어 꽃대가 움쑥 크다. 깎일 염려가 없으니 얼마든지 키가 커도 상관없는 장소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듯이.그러나 잔디밭에 돋은 민들레는 땅에 납작 깔려 거의 부복자세다. 잔디깎는 기계도 피할 정도의 낮은 키로 지표면에 바짝 붙어 자라는 것이다. 용케도 잔디기계에 밀리지 않은 채 꽃을 피운 것도 신기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전날 핀 꽃대다. 단 하루의 역사만으로 무수한 씨앗을 준비하고는 키다리처럼 한뼘쯤 솟아 오른 꽃대궁. 씨앗을 하얗게 매단 둥근 비눗방울이 바람을 기다린다. 분신들을 멀리멀리 떠나보내주기 위해서다. 새로운 땅 더 너른 영토에서 힘차게 번식하라고 하이얀 깃털 가벼이 나래를 달아준 신의 배려가 뭉클하다.
아홉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는 민들레. 그중의 첫째가 예덕(禮德), 한 꽃대가 피었다가 지기를 기다린 다음 자기 차례를 지켜 피어난다. 다음은 강덕(堈德), 아무리 짓밟히거나 뿌리를 다쳐도 다시 살아날 정도로 역경을 이겨낸다는 민들레다. 본자리에 집착두지 않고 훌훌히 고향을 떠나는 때문인가, 민들레는 흔히 이민살이 삶과 비유되기도 한다. 그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야생초가 민들레다. 바람를 타고 정처없이 날아가던 씨앗은 어디든 머무는 그곳에서 새삶을 가꾸어간다.그 자리가 어떠한 장소이든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민들레. 땅속 1미터 가까이까지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라 웬만큼 척박한 박토에서도 능히 살아남아 제 영역을 넓힌다. 하다못해 도심 보도블럭 틈새에서도 샛노랑 꽃을 피우는 민들레가 아닌가.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식물 중 하나가 민들레라고 한다. 정원의 잔디를 망가뜨리는 주범으로 웬만한 잡초제거제로는 좀체 죽지 않는 지독한 풀이라 전용 제거제가 따로 필요하단다. 오죽하면 골치 아픈 사고뭉치를 이르는 '민들레같은 작자'라는 속어가 다 생겼으랴. 그럼에도 잔설 속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기에 나는 민들레가 반갑다. 아침해와 눈맞춤하며 환히 꽃을 피우는 부지런함도 맘에 든다. 어디서든 터 가리지 않고 영토를 넓혀가는 강인하고 왕성한 생명력이 짠하니 아릿땁고 대지에 바짝 몸낮춘 겸손함이 미쁘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자식들 눈물로 키운 내 어머니 같은 꽃' 민들레가 그래서 나는 좋다. 시리운 이민생활자의 향수를 다독여주는 그 꽃은 그렇다, 그 꽃은 고향이기도 하다.
며칠전 길가에서 낯익은 그 노란 꽃 무리를 만났다. 게으름뱅이 민들레네, 철 지난 지가 언젠데...지청구를 했더니 함께 길을 걷던 이가 요즘 피는 건 씀바귀꽃이라고 일러준다. 멈칫해졌다. 찬찬히 꽃자리를 둘러보니 노란 꽃이 얼핏 비슷한듯하나 민들레처럼 숱많은 겹꽃이 아닌데다 풀잎은 민들레와 영 다르다. 그저 샛노란 앉은뱅이꽃에다 꽃진 자리에 솟는 비누방울같은 씨앗만으로 다 민들레이거니 몰아버렸더랬는데 서로는 완연히 다른 종류였다. 둘 다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긴 하나 민들레는 3~5월에, 씀바귀는 5~7월에 꽃을 피운다니 생태부터가 판이한 풀이건만 구별없이 그게 그거다 가벼이 치부했던 셈이다.
미국에 살면서 차이니스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제는 그렇지도 않지만 처음엔 대부분 그렇게 물었다. 서양에 잘 알려진 나라이자 화교를 많이 내보낸 중국이라서인지 널펀펀한 동양인은 뭉뚱그려 그저 다 중국사람으로 여긴다. 민들레꽃과 씀바귀꽃이 엄연히 다르듯 중국과 한국은 전혀 다른 나라임에도 대충 그 나라가 그 나라거니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때마다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단호히 코리언임을 밝힌다. 그제사 미안하다며 현다이 차의 인기도를 얘기하고 엘지 휴대폰 성능이 아주 뛰어나다는 둥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들에게 나는 그냥 민들레였다. 민들레꽃이 아닌 씀바귀꽃이라는 걸 알려주면 딴에는 관심을 표한답시고 너희나라 말이 따로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이지, 이때 다시 한번 내 목소리가 커진다. 일터 앞자리에 떠억 걸려있는 훈민정음 목판목 탁본을 가르키며 우리 고유의 언어라고 자긍심어린 표정으로 설명도 한다. 물경 오백년도 더 전,그러니까 1446년에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인 한글이다. 이를 세종임금이 만든 목적은 백성의 편리한 글자살이를 위한거라고, 전세계 언어학자가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공인하였노라고 자랑스레 부연설명하고 싶지만 어쩌랴, 그러기엔 턱없이 부족한 내 영어실력이니. 'Who are you?' 답변은 'I'm American'인가. 요즘 한인 자녀들의 정체성 혼란에 대한 거론들이 잦다. 이민자의 후예로 미국땅에 튼실히 뿌리내린 2세 3세들. 미국속의 확실한 미국인으로 굳건하게 자리잡아 나갈지라도 변할 수 없는 그들의 본바탕은 역시 한국인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들이 '나는 코리언 아메리컨' 이라고 자신있게 자기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었으면 한다. 존재인식을 바로할때만이 어중이떠중이 민들레가 아닌 분명한 씀바귀로 당당히 제몫을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닐지. 나의 근본 나의 본질은 민들레가 아닌 씀바귀다. 자신이 과연 누구인지 깨우치는 것, 그렇게 깨달아진 자신의 존재확인 나아가 자아확신이 바로 정체성 확립이다. 팝의 황제로 군림해온 마이클의 피부색이 아무리 하얘졌어도 그를 백인으로 보진 않듯 민들레는 영원히 민들레고 씀바귀는 영원한 씀바귀인 것이다.
 <씀바귀>
사족:써둔 글을 미주 중앙일보 뉴욕으로 보내는데 가끔씩은 LA 중앙일보 미주판에도 나눠실린다. 글을 보낸 다음엔 일단 관심을 끄고 편집자에게 모든 걸 맡긴다. 보통 신문에 실리는 양은 한정이 되어있고 글의 제목도 다섯자 안팎이길 원한다. 심심풀이 재미로 쓰면서 굳이 무언가에 얽매이고 싶진 않다,따라서 맘 내키는대로. 동시에 신문사에서 제목을 바꾸거나 편집을 어찌하든 상관을 거의 않는 편이다. 이 글 역시 뉴욕과 LA에 동시에 실렸던데 뉴욕판은 <민들레와 씀바귀>인데 반해 한쪽에선 <나는 씀바귀>라 제목을 붙였다. 옳거니~ 맞아, 이 제목이 적합해..얼른 이곳으로 달려와 제목을 수정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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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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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봄 한국에는 민들레 나물이 한바탕 바람을 일으켰답니다. 청주근방에서 재배단지를 만들고 대규모 경작을 하였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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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2009.07.08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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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말리는 몸보신주의
뭐든 좋다하면 종자를 말리려드는 냄비근성에 녹아나는 자연
민들레 나물이 몸에 좋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모양이지요
들판 민들레 작살내다내다 이젠 대규모 경작까지 하며 팔아제끼는 걸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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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인생
내가 그짝이다. 간다 간다 하면서 애 셋 낳는다는 속담대로 말이다. 곧 철수할 것처럼 매양 엉거주춤한 채로 이민생활을 한 지 어언 석삼년 세월. 야전부대 임시막사같은 아파트살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뜨내기 살림이라 가구 역시 변변찮다. 그 형색에 어울리지 않게 꽤 그럴듯한 호두나무 책장 하나가 내게 있다. 친구가 콜로라도로 이사를 떠나며 주고 간 것으로 중간 뚜껑을 열면 책상이 되는 다용도 기능장이다.
귀퉁이가 약간 이지러지고 더러는 긁혔지만 흐르는 물결무늬 선연한 목리가 우선 아름답다. 암갈색 중후한 분위기에서는 앤틱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묵직한 색깔도 맘에 들지만 단순하면서도 점잖은 외관이 기호와도 맞아떨어진다. 별로 크지 않은 규모라 있는듯 없는듯 무덤덤하니 튀지 않아서 또한 좋다. 호두나무 목재는 내구성이 뛰어난 단단한 재질에다 광택 나는 색조가 훌륭해 예전부터 고급가구, 장식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책장과 인연이 닿은 지도 그럭저럭 제법 됐다. 낯익어 스스럼이 없어지자 더러 책장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호두나무가 있는 내 유년의 추억들이 화제의 주대상이었다. 매방리 할아버지 댁에 있던 두 그루의 우람스런 호두나무, 집앞 우물가와 바깥마당 잿간 옆에서 짙푸른 잎새 너르게 드리운 채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그 나무. 가을이 깊어지면 알이 실한 호두를 섬으로 거두기도 하였으니 가용에 적잖이 보탬이 되주었으리라. 창천에 그려진 추상화, 돌배같이 야문 점점의 열매를 장대로 따내린 뒤 수북히 쌓아두고 썩힌 다음 육질의 겉살을 제거하고 나면 그제서야 호두가 제 모습을 드러냈다. 호두알을 섬돌에 올려놓고 돌멩이로 깨뜨려 먹던 보얀 속살의 고소한 맛까지 이끌어내주던 호두나무 책장.
요새는 마음이 울적하니 침체된 날이라도 책장을 마주하다보면 입귀가 살푼 위로 향해지곤 한다. 지난 겨울의 유쾌한 시간들로 인해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휴가차 잠시 들른 엄마를 위해 딸은 발레 티켓을 예매해 놓았었다. 겨울이면 으레 등장하는 시즌 문화상품이자 성탄 단골 레파토리의 하나인 <호두까기 인형>을 그렇게 보게 되었다. 장소는 클라멘토에 있는 아담한 칼리지 내의 공연장이었다. LA 시내에서 한시간 반 정도 걸린다기에 초행길이기도 하여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인디언 캐년이란 안내팻말을 지날 무렵 이미 날이 어두어지기 시작했다.
높다란 산과 산 사이 분지로 이루어진 마을은 아늑한 게 숲이 깊고 의외로 가로수가 푸르렀다. 대학가는 고풍스럽기도 하지만 차분하니 학구적인 환경이라 절로 공부에 전념하게 될 것 같은 동네였다. 다들 면학에 힘쓰느라 나돌아다니지도 않는지 타운 전체가 한적하기도 하거니와 어둑침침한데다 길가엔 그 흔한 햄버거집 하나 없었다. 깜깜 밤중 어둠속 미로같은 길을 한참 헤매다 공연장 앞에 서니 근 일곱시, 겨울철이라 밤이 금세 덮쳤다. 서둘러 지정석을 찾아 자리잡은 다음 안경을 찾아 끼고는 카다록을 펼쳐들었다.
헌데 이 무슨 변고인고? 응당 날아갈듯 우아하니 눈부신 발레리나를 염두에 두었더랬는데. 세련되지 못한 안목이라 민망스런 타이즈 차림의 발레리노에 촌티 내지않을 훈련도 나름 하고왔는데. 어렵쇼? 안내장 표지에 목각 병정이나 생쥐 인형은커녕 엉뚱스레 웬 새빨간 가죽옷의 요상한 가이 하나가 춤을 추고 있질 않은가. 호두까기 인형이란 글씨 위엔 nutty란 낯선 단어가 건들건들 춤을 추고도 있질 않은가. 요게 뭔 말이고? 번역을 청하니 미국식 속어로 좋게는 '멋진' 그러나 대체로는 '미친' 내지 '희한한' 뜻으로 이해하란다. 그렇게 만난 불량스럽고도 사랑스런 호두까기 인형에 홀딱 빠져 공연 내내 얼마나 박장대소를 해댔는지. 그처럼 작품에 완전몰입되기도 흔치 않은 일인데 무대와 혼연일체되어 얼마나 신나고 흥겹게 즐겼던지. 시쳇말로 뿅~간 채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즐거운 거라고 줄창 손뼉을 쳐댔으니까. 요즘은 오페라도 뮤지컬도 발레도 퓨전 버젼이 대세다. 기본 내용을 주축으로하여 연극적 요소도 가미하고 거기에 재즈 살사 탭 힙합댄스 뿐인가. 비보이의 브레이크댄스에다 아크로바틱 쿵후까지 격정적이고도 열정적인 춤과 기예로 꽉 찬 무대는 또 어찌나 배경이 자주 바뀌는지. 동양 소녀들이 추는 차 요정의 춤, 생쥐들의 춤도 재롱스러웠고 표정으로 말하는 왕자님은 근사한 미남이었다. 재미있기로는 여장남자 발레리노인 클라라, 큰 덩치임에도 잠옷바람의 그는 퍽 귀여웠다. 호두까기 인형의 풀버젼인 고전 발레도 멋지겠지만 이처럼 계층에 따라 부담없이 즐길수있게 어린이 뮤지컬 혹은 코믹 발레로의 변화 시도, 연출가의 상상력에 따라 다양한 영역으로의 확대가 가능할 터이다.
가장 소중한 '금'은 지금이라고 했다. 그래, 지금 이 순간 미소지을 수 있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행복한 기억의 힘을 철썩같이 믿는 나. 내게 허락된 행복한 순간들이 모여 나의 오늘은 지탱되는 것. 고마워, 날나리 호두까기 인형아! 덕분에 실컨 웃을 수 있었고 그 생각만으로도 지금 기분이 좋단다. 왕자님도 꼬마 생쥐도 요정도 다들 고마웠어. 무대를 준비한 모든 분, 볼거리 즐길거리를 충분히 제공하여 관객을 만족시키는 최선의 봉사를 아끼지 않았더랬지. 역시 감사한 일이고 그 자리를 마련해준 딸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아직도 유효한 행복감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호두나무 책장에게도 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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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4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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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호두라는 말보다 추자라는 말이 더 친근감이 갑니다.
어릴 때, 추자 열매를 깔라치면, 손에 진한 갈색물이 묻어 지지도 않았던 기억이 나네요.
늘 호두라는 말은 낯설고 표준어처럼 들렸지요.
이제는 뺀또보다는 도시락이 자연스럽듯이 호두라는 말도 낯설지 않네요.
글의 표현에도 낯설게 하기라는 것이 있죠.
문득 생각나서 몇 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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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2009.07.05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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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 그런거 애시당초 알지도 못하는 사람
글쓰기에 관한한 참 무식하지요, 그래서 용감한건지도
헌데 호두가 간지러운 서울말 표준어같다고라
(집 아제가 늘 그럽디다, 갱상도 놈이 서울말 쓰는 것만큼 간지러운 거 없다고..
또박또박 표준어를 쓰면 아예 오질없는 놈이라고까지 매도)
충청도에서 우린 줄창 호두 아니면 호도라 불렀지
추자란 말은 갱상도 가서 살며 첨 들었는디..
한나라에서도 지방에따라 이처럼 다른 이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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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2009.07.05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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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코너에 문제 발생
잠시 장산도사님께 도움 청합니다
우짜다보니 글이 이처럼 좌악 늘어나 정신 수란습네다
다른 곳처럼 올린 글이 조붓하게 모이도록 만들려면???????
컴 공부 머리 아파 왕초보 탈출 시도는 애시당초 포기한 사람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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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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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두나무, 할아버지, 책장,
그리고 호두까기 인형.
그것도 퓨전식으로.
엥???
했겠지만 막장대소함시롱 즐거웠다니
그것으로 족한 거 아임까?
춘향이가 쇼킹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풀나풀 그네를 탄들
거북스럽지 않고 한바탕 웃을 수 있다믄
고것도 명약 아임까?
매방리 할아버지 댁에 얽힌 이야기가
참으로 정겨워서
억수러 부럽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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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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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이 방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고개만 쓰~~~윽 디밀고 갔습죠.
와야지 함시롱도....
이레 한걸음 디뎠으니
자주 오겄슴다.
말리지 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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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5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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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님. 사랑초님.
모처럼 한자리에 만났네요. 인사하세요.
사랑초님 이분은요. 초등학교 교사고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서울에서 시상식도 하고 왔지요.
부산문협에는 아직 가입 안한 걸로 알고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사이버에서만 교류가 있으니까요.
사랑초님.
종소리님은요 수필가이시고 저의 훨씬 선배죠.
5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갔어요.
거기에 따님이 계시죠.
두 분 다 공통점이 있네요.
여자라는 거. ㅎ ㅎ.
저도 글을 읽으면서 길어서 불편했는데 와이리 길어졌을꼬.
지는 잘 모르겠는데 사랑초님이 설명해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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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2009.07.08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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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춘향이가 비키니 입고 광한루에 나타난다는 설정도 즐겁지요
거북스럽지 않은 비틀기 보태기 변형 주기...재밌더라고요
건 그렇고...이제사 물꼬를 트게 된 강가의 사랑초님, 반갑슴다
응축과 은유의 시인께서 긴글 읽느라 무진 수고하셨음다
앞으론 짜른 글로 자주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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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yoon24 2009.10.15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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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피리의 춤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거죠?
카페에 올려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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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령 매미소리
17층 호텔 방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규모 큰 초현대식 고층건물의 숲 뿐. 의외였다. 여기가 진정 중국인가 싶을 정도로 도시는 근대화되어 있었다. 광활한 평원인 베이징을 벗어나 북쪽으로 두어 시간 달리니 비로소 시야에 산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울울창창한 삼림은 아니나 잡목 숲 푸르른 산. 성급한 마음은 벌써 성벽을 더듬어 찾지만 한참 뒤에야 산마루에 이어진 만리장성의 일부가 보였다. 휘어도는 조붓한 고갯길. 팔달령 인근은 차량과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다. 장성 입구 상가에 둘러싸인 광장에서는 원색 차림에 나팔 꽹과리 소리 야단스런 전통 혼례식 재현 풍경이 눈을 끌었다. 그에 질세라 성하의 숲에선 폭포 줄기같이 세차게 쏟아지는 매미소리로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여과없이 그대로 내리꽂히는 따가운 불볕 세례를 받으며 장성에 올랐다. 말이 좋아 '만리장성을 실제 밟아 보았다'이지 현재 우리가 돌아볼 수 있는 구간은 북경 인근 팔달령에 위치한 만리장성의 극히 일부분이다. 성은 본래 목적이 군사방어 시설로 요새에 해당한다. 따라서 어느 곳이든 그 지역의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주요 길목에 자리잡는다. 외침을 막고자 국방상 요지에 쌓기 마련인 성이다 보니 성터의 시대 구분만큼 애매한 것도 없을 듯 하다. 이를테면 신라때 쌓은 성벽이 전쟁으로 무너지고 나면 다시 그 터에 고려 혹은 조선조에서 성을 되쌓기 때문에 성터의 경우 여러 시대가 혼재된 양상을 보이기 일쑤다. 만리장성 역시 기원전 7세기경 중국이 북방의 외세를 막기 위해 축조한 성벽이다. 다시 전국시대에는 흉노족 때문에, 남북조 시대에는 거란을 막으려고 쌓은 성을 진시황이 연결해 완성을 보았다고 역사에 쓰여 있다. 지금 내가 딛고 선 이 성벽은 명나라가 몽고의 침략에 대비코자 쌓은 성이라 한다. 거의 모든 장성이 흙벽으로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전(塼)으로 완벽하게 만든데다 빈틈없이 견고한 성벽 위로는 마차가 지날 만한 너비를 유지하고 있다. 장성의 왼쪽 성벽은 경사가 급해 완만한 오른쪽보다 오르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장성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좀 힘들더라도 왼편 길을 택하는 것이 낫다. 높다라니 솟은 성루에 올라보면 능선따라 서쪽으로 끝없이 굽이쳐 돌며 이어지는 장성의 면모가 한 눈에 잡히기 때문이다.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이윽고 내려다보는 만리장성. 탄탄하게 다져진 너른 성벽길이 드디어 굵은 로프줄이다가 종당엔 가느다란 비단실로 가물가물 사라져 버린다. 아니 푸르른 능선 짙푸른 파도 위로 백룡이 굼실거리며 기어오르고 있다. 아스라이 먼 꼬리, 차차 굵어지는 몸피, 나는 그 허리쯤에 서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만리장성의 위용을 조망하며 장관에 감탄하고 유명세를 확인한다. 하지만 워낙 명성이 높은 만치 기대치가 컸던 까닭인가, 탄복까지는 아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성루에는 골바람 쐬며 땀을 식히는 사람들로 복잡하다. 무심히 양산 꼭지로 바닥을 쪼고 있는 젊은 중국 여인. 그녀의 몇 대 할아버지인가는 노역에 끌려와 바위를 날랐거나 전쟁 중 화살받이는 아니었을까 상상하니 왠지 모를 추연한 감회가 인다. 더 이상 나아가선 안된다는 출입금지 표석 앞까지 갔다가 발길을 돌려 허위허위 장성을 내려온다. 잊고 있던 매미 소리가 별안간 아우성치듯 쏟아진다. 무수한 목숨 바쳐 이룩한 역사(役事)의 현장인 만리장성. 제대로 눈 못감은 원통한 주검들이 구천을 떠돌며 다생겁을 지내다가 한번은 꼭 한번은 옛터를 돌아보고자 매미로 화했던가. 잠깐 허락된 이승에서의 아쉬운 몇 날들. 옛 회포의 서러움에 매미는 온몸으로 맹렬하게 운다. 처절하고 기막힌 흉금 몽땅 풀어헤친 채 속이 후련하도록 실컷 운다. 마냥 운다. 쨍쨍 울리는 매미소리. 쓰르라미 왕매미… 어느덧 지나버린 입추, 여름이 가고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만리장성은 달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지구의 유일한 인공 건조물로 유명하다. 발해만의 산해관에서 고비사막의 가용관에 이르는 동서로 길게 뻗은 성벽. 처음부터 끝까지 일일이 사람의 땀과 눈물로 쌓은 거대한 성, 그 일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무릇 얼마였으랴. 그 과정의 숱한 사연과 비극은 미루어 짐작이 가거늘 어찌 만리장성을 보고 실없이 웃으며 즐길 수만 있겠는가. 숙연한 심사를 더 가라앉게 한 것은 이화원에 가는 도중 운전기사의 배려로 들린 뜻밖의 장소로 인해서였다. 이름하여 진시황 예술궁. 동아시아 사상 최초의 대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의 일대기를 실제대로 재연시켜 놓은 곳이다. 등신상으로 꾸며진 출병식 광경. 장수와 말이 나뒹구는 전장터. 장엄한 어전. 호화스런 아방궁. 만리장성 축조시 독려차 나선 시황제 행렬. 광기어린 분서갱유(焚書坑儒) 현장이며 강제 사역으로 생전에 완성시킨 여산릉의 내부도 보인다. 특히 삼십 만의 군병과 수백만의 농민을 동원해서 만든 만리장성 축성 과정에서는 목불인견의 참상과 함께 선혈이 낭자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두른 전제 군주 시황제. 그 아래 힘없는 백성들의 삶은 참담할 수밖에. 노역에 끌려가는 아들 뒤에서 울다 쓰러진 노모와 꽃다운 젊은 아내. 그 남정네는 마지막 노동력을 잃을 때까지 착취당하다 병이 들면 산채로 구덩이에 묻혔다. 탈출을 시도하거나 반역을 꾀한 사람들은 생목숨을 끔찍한 방법으로 끊기 예사였다.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인민의 백골, 백골더미들. 만리장성은 그 위에 이루어진, 인간의 위대한 역사가 아니라 광기어린 역사에 다름 아니다. 만리장성이라는 웅장한 역사의 포장물 이면엔 끊임없이 죽이고 죽임 당하는 인간의 추한 면모가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있는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던 날 한국인인 것이 부끄럽던 것처럼, 그때 나는 한동안 찜찜한 기분인 채 사람됨이 부끄러웠다. - 96년 7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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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혼자

바람 몹시 불던 봄의 끝머리. 국도를 따라 밀양 가는 길목 어디쯤에선가 그 나무를 만났다. 야트막한 잔솔밭 등성이에 우뚝 선 큰 소나무 한 그루. 서로 어깨 부비듯 소근대는 잔소나무 숲에 저리도 멀쑥 혼자 커버렸을까. 어찌하여 그 많은 일월과 풍상 단지 홀로 맞고 보내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의아하기 조차하다. 명징한 쪽빛 하늘 배경삼아 잘생긴 몸체 윗동을 바람결에 맡기고 있던 노송. 오기 같은, 통한 같은 처연함이다. 청청한 기백 단아한 자태 깊숙이 가라앉은 절대절명의 외로움 같은 것. 또는 네가 되지 않고서는 이해될 수 없는 너만의 아픔같은게 전해진다. 아니면 고향 언덕 바위 위에 서서 어여 가라고 손 사래질하는 어머니 모습이 그러할까. 교향악단의 바이얼린이나 비올라처럼 고만고만한 음색으로 다정다감한 무리 중에 어쩌다 한번 폭발적인 힘으로 솟구쳐 오르는 심벌즈 소리 같은 노송. 그랬다. 산등성이 큰 소나무에서는 챙-하고 심벌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우러짐 밖으로 튕겨 나오는 단 혼자의 고독한 울림. 그러나 한주먹에 K·O 시키는 권투선수의 위력적인 펀치인양 힘차다. 쩌르르 전율마저 일게 하는 한편 가슴이 다 후련해지는 심벌즈 소리. 그 소리에 번번이 나는 맥을 못춘다. 음악회 티켓이 주어져 몇 번 교향악단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한낮의 평상복을 벗어두고 저녁나절 한때나마 우아한 기분에 젖어보는 것도 꽤 멋스런 일이다. 도회의 소음이 고즈넉이 잦아드는 초저녁. 문화회관 돌층계를 오를 즈음엔 마음까지 같이 고조되곤 한다. 유리문을 밀고 로비에 들어서면 길게 늘어진 샹들리에 휘황한 불빛에 좀더 가슴이 들뜬다. 엷은 흥분기를 누르고 객석에 앉는다. 천장과 벽의 조명이 차례대로 꺼져가고 무대에만 집중되는 빛. 이윽고 지휘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섬세하게 때로는 장중하게, 그와 동시에 유려하면서도 격정적으로 여울지는 음. 음악은 세계공통어라 했던가. 그 중에도 음색과 음역이 각기 다른 악기를 한데 묶어 편성한 관현악단의 연주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은빛 나래를 달고 조수처럼 스며드는 아름다운 음악에 잠겨드노라면 나는 잠시 천상의 시인이 된다. 번다한 세간사 잊을 수 있는 이 순간이 바로 복락 그 자체 아니랴. 음악 속으로의 유영만큼 황홀한 몰입, 완벽한 도취도 흔치 않을 것 같다. 스메타나의「몰다우 강」이며 시벨리우스의「핀란디아」가 벅찬 감동으로 안겨든다. 가락에 노랫말을 싣지 않아도 흐르는 강물소리가 들리고 비 내리는 저녁의 우수가 잡히는 음악의 세계. 경쾌한 새의 지저귐이며 화사한 꽃의 속삭임이 느껴지는 음악. 좋은 음악은 직관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되고 흡수되는 것이 아니던가. 교향악단의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지휘자보다 내가 더 주목하는 이가 있다. 심벌즈를 치는 사람이다. 오케스트라의 제일 뒤쪽 트라이앵글과 팀파니 사이에 배치된 심벌즈는 시종 묵묵하기만 하다. 따분할 정도로 손놓고 그냥 밀랍인형처럼 고정돼 있던 그 사람이 어깨 높이로 심벌즈를 치켜드는 순간, 나의 긴장은 최고조에 이른다. 아니 호흡조차 이미 멎어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숨죽이고 지켜보노라면 돌연 직격탄을 쏟아 붓듯 힘차게 부서지는 소리, 챙―. 극적 효과를 위한 듯 결정적인 순간 적재적소에서 확실한 구두점을 찍듯이 단호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 기(氣)란 기 죄다 모아 한꺼번에 터트리는 강한 에너지의 발산이다. 전심전력 집약시킨 힘을 단 한번에 내쏟는 열정의 극. 빨려 들어가는 듯한 흡인력을 느끼게 하는 심벌즈 소리. 아예 도발적이기조차 한 그 소리. 타악기 소리는 어딘가 모르게 초자연적인 힘, 나아가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특별한 힘이 배어있다. 아프리카의 혼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강렬함이 매혹적인 타악기는 기교 모르는 솔직담백한 점에 마음이 이끌린다. 직설적이라 아주 통쾌무쌍하다. 마치 막혔던 물꼬가 탁 트이듯 속 시원한 소리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감. 맘껏 자유로이 솟구쳐 오르는 그 소리는 매번 나의 숨을 가쁘게 한다. 타악기 거의가 그러하듯 심벌즈 역시 강한 성정을 타고났다. 태생 자체가 거칠고 야성적이다. 혁명가처럼 사람을 흥분시키는가 하면 단순명쾌하여 더욱 돋보이는 위용이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세계를 단숨에 평정시킨 격전장의 징기스칸, 그 서슬 퍼런 기개 닮은 소리. 뭇 짐승을 제압하려 포효하는 숫사자이거나 강풍따라 격렬하게 타오르는 산불의 기세 같은 심벌즈 소리는 결코 배경으로 잔잔히 받쳐주는 악기가 될 수 없다. 계속 연주에 동참하는 현악기와도 또 다르다. 부분부분에서 잠언이듯 간결하고 또렷하게 치솟아 오르는 소리. 혹은 섬세한 음의 조화에 좀 나른해질 듯 한 어느 대목. 문득 심벌즈는 긴장을 시킨다. 높이 치켜드는 한쌍의 둥근 금속판. 번쩍하고 놋쇠판이 빛을 반사한다. 위세당당한 장군의 견장 마냥 번뜩이는 광채. 그리고 작렬한다. 강하게 아주 강하게. 레스피기의「아피아 가도의 소나무」와「카르멘」의 전주곡에서 심벌즈는 특히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심장 쿵쿵 울려 혈관을 최대한 팽창시키는가 하면 심청이 아버지라도 퍼뜩 눈떠지게 하는 확연한 소리. 더욱이 한 단원을 마무리 짓는 심벌즈 소리는 딱 맞아떨어지는 구구단 숫자처럼 얼마나 명료하고 깔끔하던가. 힘찬 극적 박진감으로 충동적이기만 한 심벌즈. 그러나 동양의 바라는 똑같은 모양의 요철이 나있는 금속 원판의 마주침일지라도 오히려 분위기를 수굿하게 가라앉히는 마력이 있다. 불전에서 재를 올릴 때, 천수다라니를 외면서 바라를 치는 춤사위는 정적(靜的)이고도 신비스럽다. 불교 의식무용의 하나인 바라춤. 여기서 바라소리는 강한 치솟음이 아닌 고요한 다스림이다. 잡신의 근접을 막고 부정을 씻기 위해 청수 치듯 소금 뿌리듯 신성하기조차 한 바라 소리. 이렇듯 기질마저 동서양은 판이하게 다르다. 간혹 일상사로부터 떨어져 혼자 지내고 싶을 적이 있다. 더 나아가 세상 밖으로 이탈하고 싶어질 적이 있다. 가벼이는 녹작지근한 권태, 허무,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릴 경우이다. 더러는 세사에 지치고 존재의 무게에 치일 적일 것이다. 그때 심벌즈 소리를 들어야 한다. 자유로운 솟구침이자 강한 신념의 표출인 그 소리는 나약과 침체로부터의 구원의 소리, 해방의 소리다. 그리하여 나는 새로운 의욕과 활력을 전이 받곤 하는 것이다. 단지 혼자이지만 독야청청 올연히 푸른 빛, 뿌리깊은 소나무의 강건함이다. 심벌즈 소리는. - 95년 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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