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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8/12/01
 

'친북인명사전' 편찬 기자회견

2009.11.26 18:09 | 기본폴더 | kmj5103

http://kr.blog.yahoo.com/kmj5103/5471 주소복사

친북인명사전’ 편찬 기자회견

written by. 최경선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국회의원.판사.교수.변호사 포함 12월 100명, 내년 12월 200명, 2015년까지 5,000명 선정 발표 예정

 민간단체인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영주)는 2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약칭:친북인명사전) 발간 계획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 이날 기자회견장에는 많은 취재기자들이 참가하여 취재열기가 뜨거웠다.ⓒkonas.net

 고영주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총 대상자 5,000여 명중 현재 활동중인 자,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강한 자, 친북반국가활동 증거가 명백한 자 100명을 1차로 선정했으며, 12월중 100명의 명단을 발표하겠다.”고 말하고, 내년 1월중 이의신청 접수와 검증작업을 거쳐 내년 3~5월「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1)」’을 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고영주 위원장이 '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 편찬계획에 대한 언론 발표를 하고 있다. ⓒkonas.net

 위원회가 1차 대상자로 선정한 100명에는 정치권 10명(전․현직 국회위원 포함), 관계 7명(전․현직 관료, 현직 판사 1명 포함), 재야권 30명(노동계, 재야운동권 포함), 학계 20명(전․현직 교수), 종교계 10명, 문화예술계 7명, 언론계 7명, 기타 법조계 3명(변호사), 의료계 2명, 해외 4명 등이다.

 고 위원장은 또 “내년 5월부터 2단계 200명 선정 작업을 거쳐 내년 12월 중「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2)」를 발간할 계획”이며, “2015년까지 지속적으로 편찬작업을 추진해 총 5,000명에 대한 편찬 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고 위원장은 친북인명사전의 편찬 취지를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과 자유민주주위 체제를 부정하고 훼손하는 반(反)헌법적․반(反)국가적 활동을 행한 인사들의 활동내역과 사상성향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인명사전을 편찬함으로써, 친북반국가행위자들의 폐해와 실체를 정확히 국민들에게 알리고, 이들을 역사적으로 단죄하여 대한민국의 헌정질서와 국가정체성을 수호하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발전과 선진화에 기여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고 위원장의 언론발표에 이어 한 기자가 “이 사전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대응차원에서 편찬하는 것이냐”고 질문하자 고 위원장은 “‘친북인명사전’ 편찬이 ‘친일인명사전’ 발간의 맞불작전이라는 것은 오해”라고 말했다. 아울러 “우리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반대하지 않으며, 그 동기의 순수성과 선정 기준의 공정성에 의문을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 위원장은 또한 “현재 친일보다 친북이 더 중요한 사안임에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민간차원에서의 작업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위원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라 자원봉사 차원에서 틈틈이 작업하다 보니 발간시기가 늦어졌다”고 밝혔다.

 또 “1차 100명 명단에 전직 대통령이 포함돼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고 위원장은 “우리는 현재 생존하여 활동중인 자로 제한했기 때문에 1차 명단에는 없지만 5,000명의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다”고 답했다. 
 
 ▲ 1차 명단에 전직대통령은 포함되지 않았다는 고연주 위원장의 설명에 일부 참석자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다.ⓒkonas.net

 이에 흥분한 일부 참석자들이 “친일인명사전에는 사망자를 모두 포함시켰는데, 친북인명사전에 사망자를 포함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 “알맹이가 빠진 명단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고성을 질러 한때 기자회견장이 혼란스러워졌다.
 
 ▲ 양동안 위원은 친북반국가행위자의 기준과 인명사전 편찬절차 및 향후 일정에 대해 설명했다.ⓒkonas.net

 한편 양동안 위원(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친북․반국가행위자’의 기준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인 자유시장 경제원리와 자유민주주의 이념 및 국가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당국의 노선이나 맑스레닌주의 노선을 정당화하며 이에 입각한 행위(헌법정신 부정행위, 국보법 위반행위, 반국가활동 등)를 선동하거나 실행하는 인사”라고 말했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는 좌파정부 하에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국가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2005년 5월25일 발족되었던 ‘친북반국가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애국활동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08년 6월3일 결정되어, 그동안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결성 참여, 국가안보수사기관 정상화관련 광고, 북한인권 관련 NGO집단간담회, ‘촛불로 위장한 안보위해세력’ 국민교양책자 발간, 민보상위의 반국가활동 진상규명발표회, 친북좌익인사 북한보내기 운동 추진 등 안보, 교육, 과거사, 사회분야를 망라하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konas)

코나스 최경선 객원기자

 



**연방제적화인 대남 혁명 1단계에서는 초보적 사회화가 진행됩니다.삼성 현대 같은 재벌기업들만을 非理재산 사회헌납 또는 재벌 해체라는 명분으로 국유화하게 될 것입니다.쉬운 말로 압구정동 고급아파트를 빼앗아 좌익운동권이나 도시빈민에게 나눠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2단계에선 전혀 다릅니다. 2단계 혁명에서 말하는 높은 단계의 연방제는 북한 정권이 주도하는 적화통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사적私的 소유가 철폐되고,국유화가 단행됩니다. 60평 아파트를 가진 사람이나 17평 아파트를 가진 사람모두 인민정권에 재산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항하지 않겠느냐는 말은 2단계에선 별 의미가 없읍니다. 이미 1단계에서 모든 공안기관과 보수 세력이 잠식된 상황일테니까요.이런 분위기에선 10만명 처형해도 온사회가 조용해질 것입니다.

 
아니러니하게도 친북종김 운동권은 가장 앞서 처형될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불만세력에 해당할 뿐 아니라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혁명의 수뇌부에 충성을 바쳐온 고정간첩은 예외가 될 테지만요...

대한민국 적화보고서 중
 
이렇게 공산적화를 획책 중인 빨/갱/이 김정일 편을 들어 북침설 확산에 앞장서고 국보법 폐지 미군철수 연방제 주장에 동조한 좌익선동 방송 MBC는 이나라에 있어서는 안될 반역방송이다. 호남인이 주축인 빨/갱/이 방송 MBC는 나라에 백해무익한 쓰레기 집단들이다 이들을 영구퇴출시켜 사회공기를 정화해야 한다** 
 

"피고 김정일을 무기 종신형에 처한다"

2009.11.26 14:07 | 기본폴더 | kmj5103

http://kr.blog.yahoo.com/kmj5103/5470 주소복사

"피고 김정일을 무기 종신형에 처한다"

[대학생 모의재판] 관람객들 "사형에 처해라" 목소리 높여
김태홍 기자 | 2009-11-26 09:01   인쇄하기메일보내기스크랩하기확대축소



▲모의 재판에서 재판장이 김정일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데일리NK

피고 김정일에게 종신형이 선고 됐다. 김정일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기 위해 활동 중인 반인도 범죄조사위원회와 한민족인권수호대책위원회가 공동주최한 대학생 모의재판을 통해서다.

반인도 범죄조사위원회는 "북한주민 인권보호를 위한 공감대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됐다"며 "대학생들이 활동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김정일 처벌을 위한 모의재판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25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소강당에서 열린 모의재판은 김정일의 본적에 대해 "인권도 모르는군(郡) 나뿐이 없더군"이라고 말했다.

모의재판에서 검사가 먹을 것이 없어 국경을 넘은 주민에 대해 폭행을 가한 행위와 탈북 임산부를 폭행했다는 증언 자료에 대해 김정일의 변호사는 "자유롭게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냐. 아이와 남편이 어디에 있느냐. 지어낸 말들이 아니냐"고 변호했다. 이에 대해 김정일은 아는 바가 없다며 발뺌했다.

이러한 검사 그의 변호사 간의 몇 차례 열띤 공방이 있은 뒤 재판장이 "피고인 김정일이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행위는 매우 심각하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도 않고 있다. 국제 사회가 정한 국제법에 따라 종신형을 선고한다"고 판결으로 마무리됐다.

재판장의 판결로 모의재판은 끝을 맺었지만 관람객 몇몇은 "김정일을 사형에 처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모의재판에는 군인으로 납북됐다가 귀환한 고명섭 귀환납북자가족 협의회 회장, 이재근 부회장 등 단체회원 200여명이 참석했다.



▲증언자로 나선 '매마자' 씨가 탈북 사실이 발각돼 경비원에게 폭행당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데일리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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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데일리NK(www.dailynk.com) 무단전재 배포금지

 

**MBC등 친북매체는 전범집단 수괴 김정일 개호로잡놈을 "국방 졸개놈"이라 깍듯이 예우하면서 연방제와 6.25는 통일전쟁이라는 북괴의 주장에 동조 미군철수와 국가보안법 폐지여론을 확산시키는데 앞장서 왔으며 심지어는 6.25 북침설을 은연중 퍼트리는가하면 아웅산 묘소 폭파도 KAL 858기 폭파사건도 안기부 조작이라는 의혹을 유포시키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이런 반역방송을 살려두는 것은 나의 목숨을 뺐는 것과 같다.나라보다 적을 위해 충성하는 이적행위자들이 큰소리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빨/갱/이 벙송 NBC를 보지도 듣지도 않음으로써 자멸하도록 만들어 해국행위를 저지른 죄의 댓가를 지급해야한다**

한국현대사와 북한 실상 2( 5.10 선거반대 제주 폭동)

2009.11.26 09:47 | 기본폴더 | kmj5103

http://kr.blog.yahoo.com/kmj5103/5468 주소복사

380847백절불굴2009/11/24317/121
한국현대사와 북한 실상 2 (5.10 선거 반대 제주 폭동)

 

한국현대사와 북한실상

 

8,5.10 선거 반대 제주 폭동

 

1) 남로당 제주도당( 공산당) 간부와 김달삼 외 400여 명의 폭도들이 5.10선거를 반대하기 위하여 무장을 하고 48년 4월 3일 새벽 2시 군사작전을 하듯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하여 고일수 순경의 목을 처 죽이고,김장하 부부를 대창으로 찔러 죽이고,선우중태 순경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폭동을 일으켰다.

 

2)4.3 폭도들은 같은 날 우익 문역백의 딸 10살과 14세와 선거관리위원과 우익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3) 5.10 선거 때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를 폭도들이 폭력으로 저지 무효화 시켰다.

 

4) 폭도들은 북한의 8.25 선거에는 제주 유권자 85%인 52,000여 명이 참여하게 하여 북한을 지지하였고,남로당 제주도당 대표 김달삼 외 5명이 북한 해주 8월 25일 인민대회에 참석하여 북한 건국에 앞장을 서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5) 48년 6월 18일 제주 9연대 안의 좌파 문상길 중대장 외 다수가 박진경 9연대장을 암살하였다.

 

6) 48년 5월 20일 9연대 안의 좌파 군인 41명이 5,600말의 실탄을 가지고 탈영,대정지서 경찰을 공격하여 5명의 경찰을 죽이고 다수를 부산시켰다. 탈영병 20여 명이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기소되었다.

 

* 제주도에서 1948년 4월 3일부터 7월 20일까지 경찰 56명, 우익 253명이 폭도들에 의해 살해될 때 폭도는 15명이 죽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폭도들이 제주도를 장악하였으나 국군을 공격하지 않아 국군 전사자가 없었고,제주 양민이 희생되지 않았다. 제주 4.3 폭동이 여기에서 끝났으면 제주도의 많은 사람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제주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73쪽 참조)

 

7) 김달삼이 북한 해주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오지 않아 조용하던 제주도는 이덕구가 제2대 제주 폭도사령관이 되면서 제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려고 48년 9월 15일 다시 공격을 시작하였다.

 

(1) 48년 9월 15일 중문면 도순리 대동청년단원 문두천 외 다수의 우익 학살

(2) 48년 10월 1일 도순리 경찰 공격, 정찬수.박흔주 등 5명이 학살 2명 납치,다수 부상

(3)48년 10월 24일 대한민국에 선전포고

(4)49년 10월 28일 9연대 안의 강의현 소위 등 80여 명의 좌파 국군이 반란을 일으켜 폭도들과 합류하려다 실패

(5)48년 10월 31일 75명의 경찰과 공무원 등이 폭도들과 합세 제주도 적화음모 실패

(6)48년 11월 2일 폭도들이 국군 9연대 6중대를 공격하여 국군 21명 전사

(7)48년 11월 7일 폭도들은 서귀포시 가옥 72채에 불을 지름. 폭도 6명 사망, 경찰 3명 순직,일반인 3명이 사망하였다.

(8)이상과 같이 폭동이 악화되자 정부에서는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폭동을 진압하고 있었다.

(9)49년 6월 7일 폭도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됨으로 제주4.23 폭동은 우선 진압되었다.

이상의 사건 때문에 제주도에서 13,500여명의 사람들이 서로 죽게 되었다.

 

*(1) 5.10 선거를 반대하자 미군의 지령에 국군과 경찰이 제주도 양민을 3~8만 명을 학살하였다는 좌파들의 주장은 허위이다. 이덕구의 9.15 사건이 없었다면 절대 그렇게 많은 제주 사람들과 경찰과 국군이 죽지 않았다.

(2)2003년 10.15 정부에서 발행한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에는 48년 9.15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하지 않은 채 아무 잘못이 없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 양민을 총살하였디고 하면서,책임은 이승만-송요찬-함병선 등 국군에게 있다고 하며,김달삼과 이덕구에 대해서는 말 한 마디 언급 없이 허위 및 좌편향 적으로 보고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3) 그리고 2007년 3월 14일 제주 4.3 사건 희생자 심사가 완료되었는데,4.3 사건 희생자 총 13,564명 중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1,450명,폭도에 의해 1,673명,누구에게 희생당한지 알지 못하거나 피신 중 아사 또는 동사한 희생자 441명, 경찰 희생 140명,국군희생자 180명이라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희생자로 결정하였다.그런데 경찰 140명, 국군 180명, 우익 1,673명을 죽인 폭도에 대해서는 한 명이라도 있다는 기록이나 심사를 한 적이 없다.이처럼 엉터리로 보고서를 작성하고 심사를 하여 제주 4.3 사건 3대 폭도사령관과 탈영병과 경찰을 살해한 폭도까지 4.3 희생자가 되어 대한민국 유공자가 되려 하고 있어 현재 헌법 소원과 행정소송이 진횅 중에 있다.

(4) 2008년 4월 3일 제주시 봉개동 12만평에 582억원을 들여 평화공원을 조성하여 허위 및 좌편향의 4.3 사건 진상보고서를 사료관을 전시하고 있다. 학생들과 사료관을 관람하는 여행객들에게 대한민국을 규탄하고 반미 친북 사상을 갖게 하고 있다.

(5)노무현 전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을 항쟁이라고 하면서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제주도민에게 2 번이나 사과하였다.그렇다면 폭동을 진압한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만일 폭동을 진압하지 않았으면 제주도는 공산화 되었다.폭도들이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국군을 공격한 것은 내란이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는 좌파정권 10년 동안의 산물로서 이는 대한민국이 좌경화 되었다는 유력한 증거다.

 

제주4.3 사건 위원회 및 기획단 명단

 

1)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구분          성명                     주요직책                 비고

위원장    이한동-김석수-고건            국무총리                

당연직    김정길-안동수-최경원

          송정호-심상명-강금실         법무부장관          보고서 검토 소위 위원

          조성태-김동신-이준

          조영길                       국방부장관            상      동

          최인기-이근식-김두관

          허성관                       행정자치부장관        상      동

          최선정-김원길-이태복

          김성호-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        상       동

          전윤청-장승우                기획예산처장          상       동

          박주환-정수부-성광원         법제처장              상       동

          우근민                      제주도지사             상       동

위촉직    강만길                      상지대학교 총장        상       동

          김삼웅                      전 대한매일주필        상       동

          김정기                      전 원대학교 총장       상       동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       

          박창욱                      전 제주4.3희생자유족회당

          서중석                      성균과대학교교수        상       동

          신용하                   서울대학교명예교수      상동(주관위원)

          유재갑                      경기대학교교수          상       동

          이돈명                      변호사.전조선대학총장   

          이황우                      동국대학교행정대학원장

          임문철                      제주중앙성당 주임신부  

          한광덕                      성우회안보분과위원장

간  사    김한욱-강택상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장

                                                               2003,10.15 현재

           *한광덕 이황우 위원 등위원은 10월 15일 탈퇴함

 

2)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 작성기획단

구분         성명                          주요직책 

단장      박원순                      변호사.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당연직    이수만-성백명               법무부 서울고검 사무국장

          하재평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 

          김지순-장인태-권욱권

          선택                         행정자치부 자치행정국장

          유장근-최정일                법제처 행정법제국장

          김호성-서유창-김영택         제주도 부지사

위촉직    김종호                       재경제주4.3희생자유족대표

          강창일(간사)                 배재대학교,제주4.3연구소장.국회의원

          고창후                       변호사

          김순태                       방송대학교 충남대전지역학장

          도진순                       창원대학교 교수

          오문균                       경찰대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유재갑                       경기대학교 교수

          이경우                       변호사

          이상근                       전 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실장

서 기     박찬식-김종민                전문위원

                 

진상조사팀

*수석전문위원      양조훈(제주사람)

*전문위원          나종삼.장준갑.김종민.박찬식

*조사위원          김애자.장윤식.김은희.조경희.배성식.박수환.현석이.민은숙

                   부미선.김정희.정태희 등 15명

*나종삼 위원은 2003년 10월 16일 탈퇴함

 

~~~~~~~~~~~~~~~계                속~~~~~~~~~~~

글쓴이;이선교

실린곳;한국 현대사와 북한실상

펴낸곳;도서출판 현대사포럼

 

 


** 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없이 총공격을 개시해야만 한다. 전국적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의 도처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전화.발전소.방송국 등 중요한 공공시설을 점거함과 동시에 전력의 공급중단과 함께 통신.교통망을 마비시키고,임시혁명정부 臨時革命政府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한다.
무력통일에 관한 김성주 (김일성으로 사기치는 놈)의 비밀교시 1974년 12월
 
적의 북침설 미군철수 국보법 폐지 연방제 등의 악의적이고 허무맹랑한 주장을 확산시키거나 동조해 온 반역방송 MBC는 주적 빨/갱/이 김정일 인간개백정 잡놈이 남침하면  적의 아가리가 되어 국가와 국민을 배신할 쓰레기 들이다.국가에 도전하며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는 빨/갱/이 방송 MBC를 영구 퇴출시켜야 한다.호남인이 주축인 반역방송 MBC는 국가와 국민에 백해무익한 빨/갱/이 집단이다**

 

 

제주 4.3 사건의 진상 18( 제주 4.28 평화협상)

2009.11.26 09:44 | 기본폴더 | kmj5103

http://kr.blog.yahoo.com/kmj5103/5467 주소복사

380835백절불굴2009/11/243710/230
제주 4.3 사건의 진상 18( 제주 4.28 평화협상)/이선교

 

 

제주 4.3 사건의 진상 18

 

제 4장 5.10선거 반대제주 4.3 폭동

 

9) 제주 4.28 평화협상

 

(1) 김익렬 평화협상 제의

 

딘 군정장관은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에게 폭도들과 접촉해서 항복할 기회를 주라고 지시하여 맨스필드는 9연대장에게 임무를 부여하였고, 오일균 대대장도 연대장 김익렬을 만나 김달삼과 협상을 건의하였다. 연대장은 즉시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에게 주선을 하게 하였고,오일균 대대장도 그에게 부탁을 하였다.

 

김달삼은 경비대가 중립을 지켜주고 이러한 경비대를 폭도들이 완전히 장악하여 경비대와 폭도들이 합동만 된다면 이보다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그래서 어떻게 하든 싸움은 경찰하고만 하고 경비대와는 협상하는 것이 김달삼의 전략이어서 문상길 중위의 레포가 전한 9연대장의 소식은 반갑고 기쁜 소식이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제주 인민군 대표와 회담하기 위해서는 중간 역할로 전 제주도지사 박경훈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였고 자문도 받았다. 문상길과 오일균은 김달삼을 만나는 루트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였다.

 

[현재로서는 누가 대표이며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평화협상을 하자고 전단지를 살포하여 저쪽에서 회신이 오면 거기에 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보장교의 제언에 따라 경비대에게는 전단지를 만들어 제주 전지역에 살포하였다.

 

전단지 내용은 (1) 군은 동족상쟁을 원치 않는다. (2) 불만을 무력수단으로 호소하는 것은 잘못이다. (3) 즉시 무기를 버리고 회담을 하자. 연락을 바란다.(4) 이에 응하지 않으면 철저한 무력응징을 할 것이다.이상이었다.

 

이 전단지가 살포된 지 오래지 않아 김익렬 연대장은 9연대 정보장교 인윤락 중위에게 저쪽에서 응답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곧이어 유격대의 회담조건이 연락되었다.그들은 회담은 양쪽 결정자이어야 하고,장소는 산 쪽으로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회담장소는 회담 2시간 전에 알려주겠다고 하여 김익렬 연대장은 협상을 위하여 모든 것을 양보하고 유격대의 조건을 들어주면서 맨스필드 대령에게 즉시즉시 보고하였고,맨스필드 대령은 졸게 생각하고 모든 권한을 김익렬 연대장에게 위임하였다.

 

(2) 김익렬과 김달삼의 평화협상

 

48년 4월 28일 오전 11시 우격대로부터 1시에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김익렬 연대장은 정보장교 이윤락 중위, 민간인 전 제주도지사 박경훈과 운전병 등과 함께 연대본부를 출발하기 앞서 부대 간부들을 모아놓고 유언하듯 명령을 내렸다.

 

[나는 오늘 유서를 써놓고 간다. 5시까지 오지 않으면 죽은 줄 알고 무력 진압하라]

연대장 일행은 연대를 출발하여 산길로 15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니 구억초등학교가 나왔다. 막 초등학교를 지나가려는데 농부 한 사람이 소를 몰고 오다가 지프차를 정지시켰다.

[9연대 연대장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그가 황색기를 흔들며 신호를 보내더니 연대장 일행을 초등하교로 안내하였다.

 

그들 일행이 초등학교 정문에 이르자 정문양쪽에서 있던 보초 두명이 목청이 떠나갈 듯 한 소리로 " 받들어~엇 총!"을 하였다. 이러한 행동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김 연대장은 '유격대가 정규군 같다'는 생각을 하고 긴장하였다. 운전병과 박경훈 씨는 차에 남고 연대장과 이윤락 정보장교는 운동장을 걸어서 회담장소인 교장실로 들어갔다.

 

운동장에는 500여 명의 유격대가 훈련을 받다가 김 연대장과 이윤락 중위가 오는 것을 일제히 보고 있었다. 김 연대장이 이들 유격대를 보니 반 정도는 여자들이었고,유격대 중 200여 명은 무기를 가진 것으로 짐작되었다. 김 연대장은 이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그러면서 속으로는 숫자가 많은데 놀랐다.

 

김익렬 연대장이 교장실로 들어가니 여섯 명이 있었다,이들은 창문을 통해 김 연대장이 들어 오는 것을 보고 있었던 듯 교장실에 들어가자마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이들은 격의 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김달삼 25세,김익렬 27세의 젊은 나이들이었다. 김익렬은 김달삼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질문을 하였다.

 

[당신이 진짜 김달삼이요?]

이 질문에 김달삼은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렇게 묻는 의도를 알겠습니다]

[하도 잚고 잘 생겨서 살인할 사람같이 보이지 않아 물어본 것입니다]

김달삼은 (본명 이승진 1924년 생)25세로 미남 배우같이 잘 생겼다. 그는 1941년 일본경도 성봉중학을 졸업,동경 중앙대 예과에 진학하였다가 중퇴하였다. 이때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위원 강문석의 딸(강영애)과 결혼하였다. 그는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 이었다.48년 4.3 사건 때 유격대 사령관이 되었다.

 

[산에서 살면 통신과 의.식.주가 불편히겠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그런 대로 지낼 만합니다]

[부상자도 많을 텐데 의료품을 도와주고 싶습니다.당신네들은 병원도 없으니 치료가 어려울 것이 아닙니까?]

[그런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왜 우리는 동족끼리 피를 흘려야 하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김익렬은 한숨 쉬듯 하는 말에 김달삼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였다.

[군대는 개인의 뜻과 관계 없이 명령이 내리면 복종해야 합니다.만일 오늘히  회담이 결렬되면 다음에는 당신과 나는 전투장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이 경찰과 교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돌담을 끼고 소총으로 싸워서는 효과가 없어 우리는 박격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박격포가 곧 연대에 도착할 것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삽니다. 아무리 내가 당신들의 궐기를 이해해도 그것은 한계가 있어요.명령이 내려지면 나는 박격포를 쏠 수밖에 없소]

 

김달삼은 김익렬의 박격포 이야기에 얼굴이 창백하여졌다.이렇게 회담은 1시간 정도 지나갔다.그리고 김달삼은 지금 왜 무기를 들었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을 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이 이념 싸움은 그만하고 자수하라고 하자 김달삼은 화를 내었다.

 

[그렇다면 좋습니다.우리 합의를 합시다.내가 먼저 제시할 테니 들어보시오. 첫째, 즉시 전투행위 중지.둘째,무장해제. 셋째.범법자 명단 제출과 즉각 자수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럼 저도 말씀을 드리겠습니다.첫째,미군철수 둘째 경찰무장 해제와 악질경찰과 서청을 제주도에서 추방.셋째,제주도민으로 곁찰이 편성될 때까지 진압 업무를  경비대가 수행할 것, 넷째,의거 첨여자에 대해 전원 불문에 부칠 것 등입니다.]

 

김익렬의 조건 제시에 김달삼도 조건을 제시하였다. 둘의 조건은 상이하여 타협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김익렬은 김달삼의 조건의 가부를 즉시 답하였다.

 

[김연대장의 첫번째는 우리가 다룰 수 없는 성질의 것이고,둘째는 약탈이나 범법을 하면 즉시 처벌하겠소.셋째,앞으로 제주도 경비는 경찰에서 경비대로 옮기질 것이오.그렇게 되면 경찰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오.넷째 교전중이 아닌 때 범한 살인 방화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그 외에는 전원 불문에 부치고 군에 귀순하면 생명과 재산 안전 자유를 보장하겠소. 살인 방화를 행한 범인이라도 귀순하면 극형은 면해주겠소.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범법자의 명단을 작성하여 책임한계를 분명히 해주시오. 명단에 기재된 사람들이 지수를 하든지 안하든 도망을 가든 그것은 자유스럽게 하겠습니다. 당신과 지도급들은 중벌을 면키 힘들 것입니다.그러나 입산자들의 귀순과 무장해제를 시켜준다면 당신들과 지도급에 대해서 도피할 수 있도록 배를 마련하여 해외나 (일본) 도외로 탈출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겠소]

 

김달삼은 김익렬 연대장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동하였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이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판단하였다.

[귀순과 무장해제가 끝나고 모든 약속이 준수 이행되면 나는 당당히 자수하여 이번 의거의 모든 책임을 질 것입니다.]

 

 (2)평화 협상합의

 

김달삼과 김익렬은 회담한지 4시간 30분만에 합의를 보았다.

 

*72시간 (3일) 내에 와전 전투중지.대정면과 중문면은 즉시 전투 중지할 것이며, 72시간이 지나서 전투를 하면 이것은 배신행위로 간주 합의를 무효로 한다.

*유격대 무장해제는 점차적으로 하되 약속을 위반하면 즉시 전투를 재개한다.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병을 보장한다.

 

이와 같이 합의할 때 김익렬은 "이 약속이 이행될 때까지 내 가족 전원을 당신들에게 이질로 맡기겠소!"하면서 김달삼에게 믿음을 보여주었다.

 

김익렬은 정보장교와 함게 김달삼과 헤어져 연대본부로 돌아와 참모들과 대재장들에게 회담결과를 설명하고 귀순자를 수용할 수 있게 수용소를 건설하게 하였다.특히 서귀포 성산포에 숭룡소를 건립하게 하였다. 김익렬 연대장은 맨스필드 대령에게 보고하였다. 그도 만족한 회담이라고 환영하였다.

 

맹스필드는 김익렬의 보고를 받고 즉시 경찰에 "경찰은 경찰서만 경비케하고 외부에서의 행동은 일체 중지한다"고 명령을 내렸다. 맨스필드는 김익렬을 적극 지원하였다.이 회담 내용은 전단지를 만들어 전 제주도 내에 뿌려졌다. 대정면과 중문면은 죽시 전투가 중지되었고,서귀포와 한림,제주읍에서는 점차 전투가 소가앙태가 되었으며,조천면에서만 전투가 계속되었다.

 

제주 마을들은 오랜만에 싸움이 중단되어 평화가 오는 것 같았고,4월 29일 12시부터 귀순자는점차 증가하여 천막이 모자랄 지경이었다.경비대는 수용소 건설에 정신이 없었다. 여자 유격대 중에는 "우리도 집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수집한 경찰은 깜작 놀랐다.

[경비대가 어떻게 우리를 무장 해제하는 협상을 폭도들과 했다는 말이요? 이거 경비대가 완전히 폭도들과 한패구만!!]

회담결과의 전단지를 보고야 경비대와 폭도들과의 회담을 알게 된 김정호 사령관은 분노하였고,이 소식을들은 제주경찰들은 분개하였다.

 

제주 경찰서에서는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즉시 보고하고 "경비대가 폭도들과 한 통속이다" 고 하면서 협상에 대비하고 있었다.

화가 난 김절호 사령관의 [경비대 안의 남로당 프락치들을 즉시 파악하라]는 말이 떨어지자 사찰과 형사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1996 특전사 요원들의 증언 3

2009.11.26 09:41 | 기본폴더 | kmj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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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특전사 요원들의 증언 (한국논단) 3
  2008/01/10 18:17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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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특전사 요원들 증언(한국논단) 3

 

 

교도소 습격은 4~~5차례

 

#사회; 광주사태를 지금 시민항쟁 또는 민주항쟁으로 용어가 정착이 된 듯한 느낌인데요,우리 정부에 대해서, 이런 부분들은 그때 당시에 장교분들의 대답을 해주셨으면 좋겠는데, 그게 절대로 그렇지 않다 하는,물론 법의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에 법정에서 진술하시는 경우도 있지만 신문이나 잡지 등 언론을 통해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 지금 심지어 법정에서 변호사가 폭도라고 썼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될 정도로 지금 상당히 흉흉한 분위기이지만 여러분들은 거기서 그야말로 폭도들을 상대로 해서 진압군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제가 묻습니다만 정부에 대해서 이 문제는 1988년 입니까, 노태우 정부에서 민화위를 만들어 가지고 민주항쟁이라고 해서 그 사람들한테 보상을 해주고 이런 것이 잘못됐다. 그러니까 시정을 해달라 하는 시정요구를 할 용의는 있읍니까? 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시정 요구를 하시겠읍니까? 예를 들면 우리는 군인으로서 명예회복을 받고 싶다든가, 보상을 받고 싶다든가,여태까지 노태우 정부 이래 역대 정부가 광주  피해자들에게 취한 조치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온당치가 않다. 그런 주장을 하실 수 있는 건지,또는 그렇게까지는 우리는 주장할 용의는 없는가 어떻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김대중과 유언비어가 사태 확대 요인

 

** 양대인:글쎄요 답변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질문입니다. 마음 속으로는

 

#사회: 마음을 털어 놓으라 이거지요, 용기있게.

 

**양대인:실질적으로 시민군이 그 당시에 보면 정부에 대한 반대파라고 이렇게 봐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 였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사실 광주라는 지역이 지역적으로 봤을 때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데모를 진압하러 갔을 때보다 사실 시민들아 더 과격한 면도 있었어요.

 

#사회: 진압을 몇 번 해 보셨어요?

 

** 양대인; 저는 6.3 데모 때부터 시작해서 70년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초반 위수령 당시부터 시작해서 계속 저는 출동을 했었읍니다.그 당시 그렇게 저희 군인들이 출동하면 서울지역에는 그렇게 부딪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사실은

 

#사회;일단 풀이 죽어버리지요

 

**양대인; 예, 그래서 우리가 직접 부딪히는 경우가 그렇게 없었는데 광주는 유달리 그런 경우가 있었고,

 

# 사회; 그건 ㅙ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양대인; 그것은 그 당시에 저희가 봤을 때에 정치적인 문제는 모르겠읍니다만도, 가장 큰 문제가 김대중씨라고 하면 김대중 선생이라고 해서 광주지역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었읍니까?

 

그런 문제 때문에 그렇고,그리고 유언비어가 그때 많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 또 시내에서 데모하다가 잡혀오는 사람을 제가 조선대학에 있으면서 인수를 해가지고 제가 경찰에 넘겨줬는데 쭉 물어보니까 심지어는 열 몇 살 먹은 애들도 와요 너는 어떻게 왔냐고 하니까, 누가 돈을 얼마주면서 리어카를 끌어라 해서 돌을  싣고, 앞에서 끌으라면서 뒤에서 미니까 조그마한 애가 앞으로 갈 수박에 없지 않읍니까.이렇게 했다 그러는데..

 

돈 받고 돌 실은 리어카 끈 소년

 

#사회; 그러면 불순세력이 배후에 있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양대인; 그런 식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단서가 없으니까 사실은 말을 못하지 않읍니까?  못하고, 만약에 그 사람들이 현 정권에 도전한다면 약탈행위라든가 도난행위는 없어야 될 것 아니냐,쉽게 말해서 민간인 약탈행위 그런 문제는 우리가 언급할 필요 없고요 저희들이 조선대학에서 철수를 하면서 저희들이 철수할 때 갔다가 다시 돌아오겠지 이렇게 생각을 했읍니다.

 

그래서 무거운 보급품이라든가 극히 필요없는 보급품은 조선대학 체육관에다 저희들이 보관을 해놓고 갔어요 갔다와 보니까 상당한 물건들이 없어졌읍니다 중화기류부터 시작해서 없어졌는데, 그럻다면 민주화를 부르짖는 일부 인원과 거기 합세해서 여러가지 복합적으로 상당히 문제점이 이었지 않느냐,이렇게 저희들은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광주민주화항쟁, 노태우 대통령 계실 때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문제가 저희들이 봤을  때는 상당히 석연치 않은 점이 있읍니다.저도 군에서 출세를 못하고나왔읍니다만도 군인으로서 생각할 때 사실 군인이 완전히 명예를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지 않읍니까 지금 현재에.그러다 보니까 구체적인 안을 제가 제시를 못하겠지만 그런 문제에 대해서 그 말 자체에 저는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회: 저희 설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어요 "계엄군으로 출동 했던 귀하에 대해 정부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으며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4가지 응답이 있는데요 ,"(가) 계엄군을 내란주동 집단으로 규정한 처사를 철회하고 군인으로서 본 분을 다한 나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기 바란다.그 다음에는 미미합니다. "명예 회복과 함게 그 동안 정신적 고통에 대하여 응분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 는 8% 밖에 안되고(가) (나)가 충족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을 하겠다 하는 분이 14%나 됐어요.

 

그렇다면 거기에 계엄군으로 참여 했던 군인들은 첫째 억울하다,그리고 명예가 실추된 것을 회복해주기 바란다는 일반적인 심정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걸로 해석이 되는데 , 여러분도 지금 말씀하신 게 아마 그런 맥락에서 파악이 되는 거죠?

 

**양대인; 예.

 

반정부시위 중화기도 훔치나

 

#사회; 그렇다면  이제 백보 양보해 가지고 공수부대가 과잉진압을 했다, 거기에 대한 과잉반응이 있었다.그렇다면 어째서 진압한 합법적인 쪽에 그 책임자들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되는지 거기에 대한 설명은 가능합니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 1조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이 유지 발전돼야 우리가 편안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개인과 세력을 보수세력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대한민국 체제를 지키자는 그런 입장에서 광주문제를 재조명 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재조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서 어떤 것이 진상인가,광주진상을 캐라, 진상을 밝혀라 밝혀아 해서 지금 진상을 밝히는 재판이 진행이되고 있읍니다만 그럼 과연,법절차를 저는 잘 모르겠읍니다만 그 한쪽이 언론에 인민재판식으로 단죄를 받고 있다면 과잉반응을 한 촉도들 쪽의 책임자도 있을 것이고 그것도 진상을 캐내야 공평하게 진상이 밝혀지는 것 아니냐,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는 아니지만 대표적인 몇 분이 모이신 이상에는 정말 우리가 진상을 알고 싶읍니다. 과연 광주시민들이 순수하게 민주항쟁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인지,여기 그런 설문이 있습니다., 귀하는 1980년 5월의 광주사태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가) 숭고한 민주항쟁이다. 여기는 한사람도 숭고한 민주항쟁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없어요. (나) 배후가 있는 폭동이다. 이것은 10%입니다. 그 다음에 (다) 순수한 데모를 불순한 배후세력이 조종, 폭동화됐다. 이것이 88%입니다.이게 말하자면 대다수이거든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동기는 순수한 민주회복을 위한 데모였다.그런데 불순세력이 거기에 가담해 가지고 폭동화 시켰다. 그렇게 보십니까? 현장에 있던 분들은 어떻게 보세요?

 

안그러면 처음부터 배후가 있는 폭동이었다 이게 10%나 나와 있는데, 또는 김대중씨가 조종한 폭동이다 이것은 2% 밖에 안됩니다다만 어느 쪽의 의견을 가지고 계시는지..

 

화해하고 돌아가는데 돌팔매질

 

** 김종수; 저희가 처음에 18일 데모진압을 나갔을 때는 데모대하고 저희하고 맞서가지고 가다가 아까 말씀하신 대로 공격앞으로 해가지고 앞에서 돌 던진 이를 붙잡으려고 간 상황인데 다 뿔뿔이 흩어졌죠.

 

흩어져서 건물위에 올라가고 도망가고 그 상황에 시민들은  옆으로 다녔어요 그러면 저희는 복장이 군인 복장으로 통일되었지만 시민들이야 누가 데모를 했는지 모르지 않읍니까 그러니까 젊은 사람들 위주로 체포를 하든가 아니면 건물에서 무슨 뭐 화분이고 역기고 던지니까 건물에 올라가서 붙잡아 내려오고, 처음 과정에서는 저희들이 볼 때 관련이 없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았거든요   

 

저희가 볼 때는 젊은 대학생들을 위주로 붙잡아다가 차에다가 실었지요 싣는 과정에서 붙잡아도 절대로 오지를 않아요 그러면 아까도 말씀하셨지만 진압봉으로 목 이하를 때릴때는 절대 끌려나오지를 않아요 힘이 얼마나 졿은지, 우리는 착용한 게 많지 않읍니까? 

 

방독면도 차고,총도 거꾸로 메고, 철모도 쓰고,x밴드도 하고 그래 갖디고 참 불편해요. 

 

그런데 붙잡아서 끌고 오면 목 이하를 맞아가지고는 전혀 꼼작을 안해요 ,힘이 황소 같아 가지고 머리를 때려야만 끌려와요 차차 하다보면 올라가는 거에요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된 거고 그다음에 2,3일후에  광주시민 전체가 한날 동시에 일어났다고 저는 봐요.  

 

동시에 꽹가리 치고 일어나가지고 경상도 군인이 와서 전라도 씨를 말리는데 어떻게 된거냐 그래가지고 우리 대대장도 전라도 사람이고 또 부관도 전라도 사람이다 확인을 시켰더니 맞다, 그게  아니다,유언비어였다. 막걸리 마시고 가라, 그래서 거기에서 저녁 때 철수를 하는데 그 다음 동네에서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 육교에서 찝차에 돌멩이 던지고 우리 위에다 돌멩이 던지고 이래가지고선 다치고 그랬거든요 그라런데 하여튼 동시에, 그날이 며칠이죠?  

 

배후세력이 군과 시민 충돌유발

 

*이길영; 19일

 

**김종수: 19일부터 폭동화 됐구만요.

 

**김종수; 그렇죠, 광주시민이 첫날인가 두번째 날인가 까지는 안그랬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광주시민 전체가 막일 어나가지고 저희한테 대항을 하기 시작했죠.

 

#사회; 제일 처음에 윤흥정 장군이 거기 계엄사령관이었죠?" 지역 계엄사령관,

 

**양대인; 예

 

#사회; 그 분이 소준열 장군으로 바?귄 게 며칠이었읍니까? 기억이 잘 안나십니까?

 

**안부웅; 23일입니다

 

#사회; 바뀐 배경을..

 

**안부웅; 그건 모르죠

 

**양대인; 그런건 모르죠

 

역사적 울분 누적에 유언비어 가미

 

**안부웅;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르죠.먼저 질문 하신 것 중에서 순수한 시위를 했느냐, 그렇지 않으면 배후세력이 있느냐라는 건 정책적인 큰 의미는 모르겠고, 단편적인 것으로 배후세력이 있다라고 제가 생각한 이유는 제가 18일 저녁에 내려가서 19일, 20일 아침까지는 그렇게 큰 충돌이 없었읍니다.

 

20일 여단으로부터 작전지시를 받아가지고 금남로 하고 도청거리 , 이쪽 상업은행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났데 나중에 지역대장들 보고를 들으니까 병사들이 쭉 서있으면 한사람 두사람 모여듭니다.

 

모여들어 가지고 자꾸 대화를 하려고 그러는데 사실 임무를 수행하니까 민간인들 하고 자꾸 대화를 하다보면 정신적인 해이가 있기 대문에 대화를 하지말도록 했읍니다.

 

자꾸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대화를 하려고 하면 답을 안하는데, 모인 사람 중에서 나이가 한 4,50대 되는 사람이 와가지고 자꾸 대화를 겁니다.

 

그러다가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모여요 자꾸 모이다가 보면 그 사람은 뒤로 슬슬 빠지면서 대답 안한다고 우우우 해가지고 사람들을 격분시켜가지고 자기는 뒤로 빠져버리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돌을 들어 가지고 덤비고 하는 이러한 보고를 받았는데 그런 것을 생각했을 적에 뭔가 뒤에 어떤 배후세력이 있어 가지고 고의적으로 군과 시민과의 충돌을 유발하지 않았느냐, 그렇게도 생각이 듭니다.

 

#사회; 그것은 1946년 10월 1일 대구폭동 때도 양상이 똑 같았어요.그래서 저는 배후세력이 있다고 보는 건데 현장에서는 그정도 바밖에 파악이 안되는 거죠.

 

**안부웅;그렇지요 그 이상은 저희가 알 수 없지요

 

**양대인; 한번은 이런게 있었어요 제가 조선대학에 쭉 있다가 그때 상황이 별로 그렇게 시끄럽지 않을 때 그냥 서로 투석전이 벌어지고 그 단계인데  제가 현장인 도청 앞에 나가 봤읍니다. 나가봤는데 도청 앞에서 1백미터 쯤 지나 건축물을 하나 짓고 있읍디다. 나이가 한 4,50대 된 분이 벽돌을 자꾸 던져주더라고요,내가 가서 아저씨 집을 지으려고 싸놓은 벽돌을 던져주면 그 벽돌이 다신 군인들한테 가고 하니까 사고나 나지 않읍니까 하니까 그분이 술을 좀 먹었더라고요

 

여보 당신, 난 경상도 말을 했죠. 그러니가 여보 내 벽돌 내가 던지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건 대화가 아닙니다.주변에 보니까 인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술먹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더라고요 전부 구경하다가 우우 합세하고 하는그런 상태를 제가 한 번 목격을 했읍니다.

 

그러니까 아까 안대령이 말한 대로 주변의 시민들이 그당시에 어떤 격분보다도 역사적으로 내려오면서, 거기에 대해 상당히 격분하고 있는 상태에서 유언비어가 가미됨으로써 감정이 더 커졌지 않았느냐, 이렇게 생각이 들었읍니다.

 

#사회; 그러니까 호님지방 특유의 누적된 피해의식 같은 데다가 유언비어가 경상도 사람등ㄹ이 와서 호남사람들을 폭력으로 어떻게 한다고 하는 유언비어를 믿어가지고 그것이 폭력화 돼서..

 

**양대인; 그렇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읍니다.

 

#사회; 그 후에 불순세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모르시고...

 

**양대인; 그 상황은 잘 모르겠읍니다.

 

#사회; 황선생님은 한 말씀도 안하셨는데 의견이 있으시다면...]

 

**황병철: 저ㄴ는 그 당시 졸병 하사였어요 졸병 하사여 가지고 뭐..

 

#사회; 그 나름대로 보고 느낀 점을 말씀해 주시죠.

 

각본대로 증언하라는 청문회

 

**황병철: 처음서부터 광주 송정리에서 올라올 때까지 다 있었습니다. 선배님들이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광주사태에 대해서 할 얘기가 없는 것 같아요 제나름대로는.

 

#사회; 저희가 어던 목적을 가지고 거기에 부합시키려는 게 아니라 지금 광주사태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거로는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도 있었고 여러가지 있었지만, 코리아 게이트다 그런 거 보시면서 어떨게 느꼈엉어요? 사실이다 느낍니까?

 

** 김종수; 다르죠.

 

#사회; 어떤 면에서 구체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이기회를 통해서 한번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김종수; 아니, 그 말씀이 아니고요. 제 동기들 중에서 아직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청문회 때요 그 친구가,그 때는 평민당이라고 그랬지요, 평민당에 청문회 때 증인으로 나가기 위해서 열 번을 올라갔다가 결국 증언을 못하고 내려왔어요 그 친구가 얘기를 하는 거에요, 그 친구가 고향이 전라도 임실이고,

 

#사회; 열 번  올랐다는 건 청문회에 열번 나갔다가,

 

** 김종수;아니,청문회에 나가기 위해서 열 번을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한 거애요. 처음에 올라와서 증언을 해라 그랬는데 내 임의대로 증언을 하는게 아니고 이렇게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라는 항목이 쭉 있어요

 

#사회; 아, 사전에 각본이 있다.

 

~~~~~~~~~~~~~계          속~~~~~~~~~~~~

 

실린곳:시국진단 12월 호

펴낸 곳:국민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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