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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2/23
 





[스크랩] 김유신과 연인사이?… 선덕여왕의 세가지 미스터리

2009.11.21 21:21 | 역사 자료 모음 | 고락산성

http://kr.blog.yahoo.com/kj87042003/64750 주소복사

원본 원본 : '성이네'

1 성공한 군주였나 - 재위 15년동안 패전 거듭 상대등 반란 등 내치도 불안
2 남편 있었나 - 삼국유사엔 음갈문왕 기록 김유신과의 로맨스는 허구
3 피살? 자연사? - 삼국사기엔 死因 언급없어 일부 학자는 “비담이 시해”


대구 부인사 숭모전에 있는 선덕여왕의 영정.
    1990년대 경북대 교수였던 유황 화백이 그린 작품이다.
국민의 95.6%가 MBC TV 월화극 '선덕여왕(善德女王)'을 한 번이라도 시청한 것으로 나타
났다.

"분통이 터져서 볼 수가 없다!" 많은 신라사 연구자들은 드라마 '선덕여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사극이라도 허구가 도를 넘었다는 얘기다.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역사적 인물
로 보기 힘든 미실(美室)이다.

미실은 학계에서 진짜 역사서로 공인받지 못한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만 나오는 인물
인데 실존인물인 것처럼 그려졌다. 한 술 더 떠서 '화랑세기'에도 없는 미실의 쿠데타가 사실
인 것처럼 버젓이 묘사된다.

드라마 내용과 섞여서 인터넷에 유포되는 선덕여왕 관련 글들은 7세기 신라사 전체가 뒤죽박죽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과연 어디까지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일까? 세 가지 미스터리를 중심
으로 추적해 본다.

덕만에게 남편이 있었나?

드라마에서 공주 덕만(德曼·선덕여왕)은 혼인을 거부하고 왕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연표에 해당하는
왕력(王曆)편에 수수께끼와도 같은 기록이 한 줄 등장한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飮葛文王)이었다." 오직 여기서만 언급된 이 내용을 토대로 다양한 해석
이 나왔다. 원래 '갈문왕'은 왕과 왕비의 아버지·동생 등 중요 왕족에게 주는 칭호다.
여기에서 '여왕의 남편'도 포함한다는 설이 생겼다.

'음갈문왕'은 누구였을까? '음'이 인명이라면 글자가 비슷한 반(飯)이란 이름을 잘못 썼을 가능
성이 있는데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이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갈문왕이었다.

이 때문에 이 두 사람 중 한 명이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설이 떠올랐으나 확증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는 정반대 기록이 나온다. 당 태종이 향기 없는 모란꽃의
그림을 보내자 여왕은 "내가 짝(��)이 없음을 놀린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음갈문왕'이 일찍 죽었거나 사실혼 관계에 그쳤다는 해석이 있다.
선덕여왕이 용수·용춘·흠반·을제 등 3~4명의 남편을 거느렸다는 이야기는 위서(僞書) 의심을
받고 있는 '화랑세기'에만 등장한다.

결국 현재로선 선덕여왕에게 '누구인지 불확실한 비공식 남편 한 명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물론 여왕이 즉위 전 김유신과 연인 관계였다는 드라마의 설정은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선덕여왕(이요원 분) 김유신(엄태웅 분) 비담(김남길 분)
선덕여왕이 실패한 군주였다고?

선덕여왕은 ▲한국사 최초의 여왕 ▲첨성대와 황룡사 9층탑을 세운 업적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왕으로 알려졌으며 드라마도 그렇게 긍정적인 톤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들은 "정치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 군주"라고 본다.

서기 632년부터 647년까지의 선덕여왕 재위기간 15년은 신라가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했던
시기였다. 즉위 초인 636년에도 수도 금성(金城·경북 경주)에서 불과 10㎞ 떨어진 여근곡
(女根谷)까지 백제군이 침투해 올 정도였다.

642년 서부 최대의 요새였던 대야성(大耶城·경남 합천)이 백제의 공격으로 함락당했다.
망국(亡國)의 위기가 코앞에 닥쳤다. 큰 돌이 저절로 옮겨가고 동해바다가 붉어지는 등의
기록이 민심이 대단히 불안했음을 말해 준다.

분황사와 황룡사 9층탑 등 예산이 많이 드는 토목공사는 단기적으로 도움이 되기 어려운 사업
이었다. 고구려와의 제휴가 실패한 뒤 당과 접촉했지만 당 태종은 643년 "여인이 임금을 할 바
에는 내 친족을 신라왕으로 보내겠다"는 '여왕 폐위론'을 제시했다. 여왕의 권위는 실추됐다.

이미 여왕 즉위 직전 이찬 칠숙(柒宿)이 모반하는 등 귀족들은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647년
최고 관직인 상대등 자리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군사를 일으켰다.
조선시대로 치면 영의정이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신형식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비담의 반란은 선덕여왕의 재위기간이 정치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며 "반란을 진압하고 나당연합을 추진한 세력은 김춘추·김유신이지 여왕
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사인(死因)은…피살? 자연사? 쇼크사?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비담의 반란이 실패로 끝났다는 내용 뒤에 선덕여왕의 죽음을 기록했다.
여왕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기록을 자세히 읽어 보면 의문이 생긴다.

비담의 반란은 647년 1월에 일어났다고 적혀 있는데 여왕이 죽은 것은 1월 8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김유신열전은 비담과 김유신의 군대가 10일 넘게 공방전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신라본기는 비담을 참한 것이 1월 17일이라고 했는데 이미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한 뒤
였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이 아직 진행되던 와중에 죽은 것이 된다. 이 때문에 여왕이
비담의 반군에 의해 시해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평소 '왕이 편치 못해 의약과
기도도 효험이 없었다'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병사했을 것
이며, 비담이 이를 예상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천년의 왕국 신라'를 쓴 김기흥 건국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성골(聖骨)로서 거룩한 존재
임을 의심해보지 않았을 여왕으로서는, 막상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신하들의 반란을 대하자
충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연구자들은 반란을 일으킨 주체가 비담이 아니라 오히려 선덕여왕과 김유신 측이었다고
본다. 비담이 주도하는 화백회의에서 여왕의 퇴위를 요구하거나 결정했고 여기에 김유신 등이
반발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설이다.

조선 Why

[스크랩] 고려의 매국노 '홍씨 3代'

2009.11.20 07:52 | 역사 자료 모음 | 고락산성

http://kr.blog.yahoo.com/kj87042003/64718 주소복사

원본 원본 : '성이네'

'몽골 앞잡이' 홍대순·홍복원·홍다구

배가 난파하려 하면 쥐들이 먼저 알고 도망친다고 했던가? 나라가 망할 때도 이와 비슷한 일
이 일어난다.

'조선의 매국노' 이완용이 조선의 멸망을 재촉했다면 고려가 몽골에 망할 때는 홍대순(洪大純)
홍복원(洪福源) 홍다구(洪茶丘) 3대(代)의 매국노가 있었다.
                                                                                                < 딸기... 꽃송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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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순은 평안도 의주 근처 군사요충지인 인주(麟州)의 지역사령관격인 도령(都令)으로 있으
면서 1218년(고려 고종 5년) 몽골이 거란을 압박할 때 자발적으로 몽골에 투항하였고 1231년
(고종 18년) 몽골이 장수 살례탑을 보내 고려를 침공할 때는 자발적으로 향도(嚮導)가 되어
몽골의 진격을 앞에서 이끌었다.

홍대순의 아들 홍복원(1206~1258년)도 아버지를 따라 무인(武人)의 길을 걸었다.

1232년 고려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하며 대몽(對蒙)항전에 들어가자 홍복원은 몽골군의 일원
으로서 서북지방을 책임지는 낭장으로 있었다.

이듬해(1233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이가 병사들을 보내 서경(西京·평양) 탈환작전을 펼칠 때
홍복원은 대패하고서 겨우 목숨만 건진 채 원나라로 숨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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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몽골은 다시 고려를 야금야금 침략하기 시작하는데 그 앞잡이가 홍복원이었다.

'고려사'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원(元·몽골)의 군사가 매년 침입해 주와 군들을 함락
했는데 이는 모두 홍복원이 인도한 것이다."

그 지역(北界·북계)현황을 홍복원이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릴 것 같던 홍복원은 복병을 만나 비명횡사 하게 된다.
당시 인질(禿魯花·독로화)로 몽골에 끌려와 있던 왕족인 영녕군 왕준(王·1223~1283년)이 바로
복병이었다.

왕준은 고려 8대왕 현종의 8세손으로 명목상의 왕족에 불과했다.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한 승화후 왕온은 그의 친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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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려가 고종 24년(1237년) 마침내 몽골에 항복하고 몽골이 고종의 친조
(親朝·직접 황제를 찾아와 알현하는 것)를 요구하자 그 대안으로 이듬해(1238년) 왕준을 고종의
친자식이라고 속여 몽골에 보내게 된다.

요동지방으로 끌려간 왕준은 홍복원의 집에 머무르게 된다.

'고려사'는 "홍복원은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길어지니 사이가 나빠지고 왕준은 점차 불평을 품게 되었다."

그 사이에도 고려가 조공(朝貢)을 제대로 바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1246년(고종 33년), 1247년
몽골은 고려를 침공하였는데 이때도 홍복원은 선봉에 설 만큼 몽골 황실의 든든한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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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복원과 왕준 사이의 사단은 1258년에 벌어졌다.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두 사람이 다투던
도중 홍복원은 왕준에게 "속담에 기르던 개가 도리어 주인을 문다더니 그 격"이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 말을 몽골 황족인 왕준의 부인이 들었다. "내가 개와 살고 있단 말이냐!" 부인은 즉각 황제에
게 고했고 황제는 칙사와 장사 수십명을 보내 홍복원을 발로 밟아 죽여버렸다.

홍복원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홍다구(1244~1291년)가 매국노의 피를 이어받았다.
1261년 몽골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황제도 홍다구에게 홍복원의
관직을 계승해 몽골 내 고려군민에 대한 관할권을 내려주었다.

홍다구가 고려에 끼친 해악은 아비 홍복원과 비교도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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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12년(1271년) 황제의 칙서를 갖고서 고려를 찾은 홍다구는 원종을 보고서 배례(拜禮)도
하지 않을 만큼 오만했다.

고려와 일본이 내통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황제에게 올려 몽골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
(東征·동정)에 나서게 만든 것도 홍다구의 공작이었다.

사실 지휘부 일부만 뺀다면 온전하게 고려의 국력을 동원한 정벌이었기에 고려 백성들이 겪어
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충렬왕 3년(1277년) 제3차 일본정벌을 획책했지만 몽골 내 상황으로 인해 실행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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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홍복원에게는 홍다구 같은 매국노 아들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홍다구의 아우인 홍군상(洪君祥·생몰년 미상)은 "영녕공은 원망할지언정 조국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충렬왕 18년(1292년) 몽골이 재차 일본정벌을 계획하며 고려로 하여금 배를 비롯한 군수물자
를 동원하려 하자 홍군상은 고려의 뜻을 존중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홍군상이 직접 사신이 되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갔고 최종적으로는 일본정벌 강행이
결정됐으나 배를 짓고 있던 도중 1294년 황제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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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상은 몽골 승상 완택(完澤)을 간곡하게 설득해 일본정벌은 중단됐다.
이에 고려조정에서는 홍군상에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칭호를 내려주었다.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스크랩] 東京國立博物館에 소장 되어 있는우리나라 보물

2009.11.18 19:12 | 역사 자료 모음 | 고락산성

http://kr.blog.yahoo.com/kj87042003/64693 주소복사

원본 원본 : '성이네'

 
東京國立博物館에 소장 되어 있는
 
우리나라 보물
 
 
 
紋飾板(じゅうもんかざりいた)
1個 銅製
慶北 慶州出土
長23.8 現幅17.8
初期?器 重美
TJ4939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車輪付?口形容器(しゃりんつきそうこうがたようき)
1개 土製 慶南昌寧出土
高15.6 三國時代 重美 TJ5339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ショウ斗(しょうと)

1口銅製 慶南 陜川出土
全長39.9 三國
時代(伽耶)
重文 TJ5307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冠?冠帽(かんむりかんぼう)
1個 金銅製 慶南梁山夫婦塚出土
外冠高32.9 三國時代(新羅)
透彫冠帽(すかしぼりかんぼう)
1個
金銅製
?慶?南道昌寧出土
高41.8 幅21.2
三?時代
重文
TJ5033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鬼紋環頭大刀(きもんかんとうたち
1口
金銀?製
?慶?南道出土
長84.2 環??5.2
三?時代
TJ5233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釉長頸壺(りょくゆうちょうけいこ)
1合
慶?北道慶州市出土
通高15.4
三?時代(新羅)
菩薩半跏思惟像(ぼさつはんかしいぞう)
銅造鍍金 ?高16.3
三? TC669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如來立像(にょらいりゅうぞう)
 銅製鍍金 江原道寺址石塔??見
?高13.9 像高8.4 統一新羅時代 TC663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觀音菩薩立像(かんのんぼさつりゅうぞう)
銅製鍍金 慶州出土
?高14.6 像高9.5 統一新羅時代 TC677
小倉コレクション保存寄贈

 
?釉フク(りょくゆうふく)
1口 高25.5 口?15.3 統一新羅時代

 
?磁瓢形水注?承盤(せいじひょうけいすいちゅうしょうばん)1組
(水注)高24.5 口?2.8 (承盤)高6.0 口?19.0 高台?11.7 高麗
 
 
?磁透彫唐草文箱(せいじすかしぼりからくさもんは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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