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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계획 실패, 10여년 유배돼 겨우 최충헌과 사돈 맺었으나 復位 도모한다고 몰려 또 유배고려 21대 국왕 희종(熙宗·1181~1237)은 1204년 아버지 신종(神宗)이 당시의 실권자 최충헌 에 의해 쫓겨나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즉 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가운데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때 희종의 나이 한창때인 스물네 살이었다. 최충헌이 이의민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명종 26)이니 최씨 정권도 10년쯤 돼가고 있었다.
희종은 유순했던 아버지와 달리 왕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다. 그것은 곧 언젠가는 최충헌과 정면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회를 노리던 희종은 마침내 재위 7년째를 맞은 1211년 12월 어느 날 내시낭중(內侍郎中) 왕준명(王濬明)을 중심으로 한 친위쿠데타를 결행 에 옮긴다.
참정 우승경, 추밀 사홍적, 장군 왕익 등 소수의 문무관리들도 이 계획에 동참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최충헌이 형식적이나마 인사문제에 관한 보고를 하러 수창궁 (壽昌宮)에 들어오는 것이 거사의 신호탄이었다. 최충헌이 희종에게 보고를 마치자 희종은 곧 내전(內殿)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환관이 최충헌의 종에게 이르기를 "임금께서 술과 음식을 하사토록 하라는 분부를 내리셨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 최충헌을 궁궐 깊숙한 장소로 유인했다. 모든 게 계획한 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대궐 내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던 10여명의 무장한 승려와 병사들이 기습을 가했다. 이에 놀란 최충헌은 일단 몸을 피해 희종이 있는 내전으로 나아갔다. "저를 구해 주십시오!" 아무리 외쳐도 희종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애당초 자신이 구상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물러나온 최충헌은 다시 한 건물의 구석진 곳에 몸을 숨겨야 했다.
희종을 돕던 한 승려는 최충헌이 숨어 있는 건물에 3번이나 찾아와 수색을 했지만 결국 찾아 내지 못했다. 여기서 운명이 바뀌고 있었다. 희종과 최충헌의 운명이 갈림으로써 이후 역사도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오게 된다.
최충헌의 집안 사람인 상장군 김약진(金躍珍)은 대궐을 도망쳐 나온 최충헌의 종들로부터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군사들을 이끌고 대궐로 달려와 최충헌을 구해냈다. 거사는 처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최충헌으로부터 그간의 상황을 전해 들은 김약진은 아예 희종도 제거하겠다고 길 길이 뛰었으나 최충헌이 만류했다. 그러나 최충헌으로서도 희종은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애걸했건만 싸늘하게 외면했던 희종이 아니던가?
이미 명종과 신종을 폐위시킨 경험이 있는 최충헌이었다. 다만 명종과 신종을 죽이지 않았던 것처럼 최충헌은 희종을 폐위시키면서도 죽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런 점에서 최충헌은 다른 무신들과 달리 절제(節制)의 힘을 아는 인물이었다. 31살의 나이에 왕권을 빼앗긴 불운 의 국왕 희종은 강화도를 거쳐 자연도(紫燕島·지금의 영종도)로 유배되었고 태자도 인주 (仁州·인천)로 추방됐다.
희종을 내쫓은 최충헌은 희종의 사촌형님이자 명종의 아들인 강종(康宗·1152~1213)을 22대 임금으로 추대한다. 이때 강종의 나이 61세였다. 아마도 명종이 강제 폐위되지 않았더라면 이미 15년 전쯤에 왕위에 올랐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강종은 고령으로 인해 1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한편 자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전왕(前王) 희종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아내야 했다. 유배 4년째인 1215년(고종 2) 8월 최충헌은 희종의 유배지를 다시 강화도로 바꾼다. 마음이 풀어진 때문인지 배려가 담긴 조처였다. 다시 4년 후인 1219년(고종 6) 3월에는 사람 을 보내 희종을 개경으로 맞아들인다. 희종에게는 딸이 5명이 있었다.
그중 덕창궁주를 최충헌은 아들 최전과 결혼시켜 자신의 며느리로 맞아들인다. 희종은 기구 하게도 최충헌과 사돈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해 9월 최충헌도 세상을 떠난다. 일단 최씨 집안과 인척관계를 맺게 된 희종은 목숨뿐만 아니라 부귀영화를 보장받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1227년(고종 14) 3월 복위(復位)를 도모하고 있다는 모략을 받아 최충헌의 아들 최우(崔瑀)가 희종을 다시 강화도로 유배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희종은 개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1237년(고종 24) 8월 5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영욕(榮辱)의 삶을 마감한다.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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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미국 유학생 (1883-1905) Early period Korean students in the US (1883-1905)
1883년 부터 1905년 까지 60명 미만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망명 혹은 유학왔는데 그 중 몇 분을 소개한다. Less than 60 Koreans came to the US to study during early years of 1883-1905, introducing some of them.
1900년에 미국에 유학한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 (1877-1955) (좌) 1919년 그가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을 기도하였다는 중국신문 기사(우)
고종의 아들이며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 동생인 이강이 2명의 시종을 대동하여 1900년 미국에 유학와서 버지니아주의 로아크대학 등에서 수학중 의친왕에 책봉되고 1905년 귀국하여 적십자총재를 역임하였다.
1919년 11월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기차를 타고가던 중 중국 안동에서 체포되어 귀국당하여 연금당하였다 . 한때 가수로 생계를 유지하던 아들 이석과 미국에 거주하는 딸 이해경이 있다.
King Kojong’s son Yi Kang studied at Roanoke College, Virginia in 1900, back to Korea in 1905 headed Korean Red Cross. He tried to join Korea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China in 1919 but on the way he was caught by Japanese police and forced to return to Korea by Japanese authorities.
유길준(1856-1914) 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1856-1914) 과 그의 1895년 저서 서유견문. 1882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유길준은 민영익을 수행하여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원으로 도미하여 보스턴대학에서 수학하고 1885년 유럽의 여러 나라를 시찰하고 귀국하여 서유견문기를 출판하였다 Yu Giljoon was first Korean studied in the US. He came to the US in 1883 among first Korean mission to the US, studied Boston University until 1885. He published the famous book about Western World he experienced.
변수((1861-1891)의 초기 묘비 기념비, 참배하는 기념회 임원 2003년 Original tombstone of Pen Su, dedication of new memorial monument in 2003 1883년 보빙사절단의 일행로으 도미한 변수(1861-1891)는 1891년에 매릴랜드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여 졸업하여 최초의 미국대학졸업자인데 교통사고로 1891년 숨졌다. Penn Su came to America in 1883 with first Korean mission to the US. He graduated from Maryland University in 1891, first Korean graduated in American University, but killed in a locomotive accident in 1891.
 임병구, 이범수, 김현식, 안정식, 여병현 등이 서광범 공사의 도움으로 하어드대학에 유학. Koreans studying at Howard University, Washington DC in 1896 with the help of Korean consul Soe GwangBum
 윤치호 는 일본에 유학 중 영어를 배워 초대 미국 주한 공사 후트의 통역으로 1883년 귀국하였다가 알렌의 주선으로 1888년 도미 유학하여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5년간 수학하였다.
안창호와 더불어 애국가 가사 작가로 알려졌다 . 일본에 협조한 것이 부끄러워 해방되자 자결하였다
Yoon, ChiHo(1865-1945) He studied Vanderbilt University & Emory University for 5 years from 1888. American missionary Allen sponsored his stay in the US.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여 1885년 미국으로 망명하여 1889년 와싱톤대학에 입학하고 1892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의사가된다.
1890년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기도 한 그는 1895년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창립하였지만 1898년 미국으로 추방당하여 1945년 해방될때 까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51년 타계하였다.
Phillip Jaisohn(1866-1951) He was first Korean naturalized American citizen in 1890, first Korean American medical doctor in1892.
김규식(1881-1950) Kim KyuShik(1881-1950)
1896년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도미하여 버지니아의 로노크대학(BA)과 1904년 프린스톤대학원(MA)을 마치고 귀국, 상해임시정부 부주석 역임. 한국전쟁때 납북. Sponsored by Underwood he came to the US in 1896, graduated Roanoke University in Virginia (BA) and Princeton University(MA) in 1904, Vice President of Shanghai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Kidnapped by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의 교장인 미국 선교사 밀러의 주례로 결혼하고 다음 날 부인 이혜련(미국 여 선교사 엘러스가 세운 정신여학교 출신)과 같이 1902년 도미유학.
언더우드가 세운 구세학당에서 수학, 샌프란시스코에서 초등학교 중퇴하고 친목회, 공립협회, 국민회 창립,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으로 기초 확립, 1938년 순국.
Arrived in SF in 1902 to study, instead he founded ChinmokHae(1903), KongLip Association(1905), KookMinHoe(1910), first acting prime minister of Korea Provisional Government in Shanghai.
 1903년 도미하여 오래곤의 포트랜드학교와 UC Berkeley, 태평양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로서 안창호와 같이 친목회, 공립협회, 흥사단, 국민회 창설에 이바지하고 상항감리교회 목사, 신한민보 편집국장 역임, 한글 인터타입식자기 발명,
미 국무장관 브라이언에게 청원하여 한일합방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한 한국 망명객 451명을 미국에 망명 유학생 자격으로 여권도 없이 오도록 하였다.
Arrived in SF in 1903 finished Portland Academy in Oregon, UC Berkeley & Pacific Seminary. Pastor of SF Korean Methodist Church & editor of New Korea newspaper, he invented new Korean intertype. He requested Secretary of State Bryant that Korean political exiles in China to come to the US as asylum student, 451 Koreans were allowed to come during 1913-1918
 1904년 도미유학, 1907년 죠지와싱톤대 졸업, 1910년 하바드대 석사, 1910년 프린스톤대 박사,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대통령직 사임, 1965년 하와이에서 운명.
Came to the US in 1905, graduated Georgetown University(BA), Harvard(MA) and Princeton(PhD) in 1910, Shanghai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President(1919), first President of Korea(1948), stepped down after 4.19 student revolution(1960), died in Hawaii(1965)

미국 선교사 스크랜톤이 세운 상동교회의 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5년 도미하여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서 군사학(BA)을 전공하고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사훈련을 시키며 군인개병설 제창, 국민회 하와이 총회장, 상해임시정부 외무부장 역임, 의형제였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북경에서 독립운동 중 암살범에게 피격 사망.
Sponsored by American missionary, came to the US in 1905, studied at Nebraska State University (BA), trained military skills for Korean at Young Korean Military School he founded in Hastings, Nebraska. President of Hawaii Korean National Association, killed by an assassin in Peking in 1928.
 1903년 도미하여 남가주대학교(BA) 졸업하고 1910년 귀국하여 배재학교 교장 역임, 일제 말기 친일 활동으로 배재학교 교장 퇴임, Came to US in 1903, studied at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USC, BA), return to Korea in 1910, later stepped down as principal of Paijai School due to his pro Japanese stance
이승만(좌) 신흥우(우) 1908년 LA Syngman Rhee(left) Hugh Cynn(right)1908 in LA Syngman Rhee(seft) & Hugh Cynn in 1919, They were PaiChai School alumni 신흥우는1904년 USC재학 중 LA한인감리교회를 설립하고 졸업 후 귀국하여 배재교장 역임.
이승만과 김규식 (1919)
민찬호 목사 1910 USC 졸업사진 Min, ChanHo in 1910 at USC graduation 배재학교 출신으로1910년USC졸업 후 초기 하와이와 LA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 Min ChanHo served as pastor at Korean churches in Hawaii & LA
양주삼 목사 부부, 양주삼 목사(우) Pastor Yang JuSam & wife 양주삼은 1905년 도미 유학, Yale대 졸업, 상항감리교회 설립, 귀국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 역임, 한국 전쟁 중 납북 Graduated from Yale, he founded SF Korean Methodist Church and later President of Korean Red Cross in Korea, kidnapped to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in 1950
송종익과 결혼식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JongIk Song & his marriage 송종익 (1887-1956) 1906년 유학차 도미하여 공립협회, 국민회, 특히 흥사단 경상도 대표 발기인으로 도산 안창호의 최 측근으로 주로 재무일을 보며 안창호가정의 살림살이를 책임졌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
JongIk Song was one closest aid of Ahn ChangHo, he helped found KongLip HupHoe, HungSaDan, Korean National Association with Ahn ChangHo
백일규(좌) 2001년 국립묘지로 이장하기 전 LA로즈데일묘지의 묘비(중) 백일규 영문지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백일규(1880-1962) 1905 도미 유학, 가주대 졸업, 대동보국회 창립회원, 국민회 총회장, 신한민보 주필 역임, Paik Il Kyu graduated from University of California, co founder of the United Korean Protection Society, president of Korean National Association, The New Korea chief editor, published English News letter
황사선 백일규 최정익 등 국민회 주역들 Key members of Korean National Association
윤병구 목사 가족 (1882-1947) Yoon Byung Kyu Family 윤병구 목사는 하와이 이민자들의 목사로 도미하여 하바드대학에서 수학하고 국민회 총회장 , 상항감리교회를 비롯하여 칼리포니아의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고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Came to the US as pastor for Korean Hawaiian immigrants, studied at Harvard, president of KNA, pastor of SF Korean Church
인삼장사와 친목회 (1903년) Ginseng Seller & Social Club (1903)
상항의 중국촌과 친목회를 설립한 와싱톤 거리 Chinatown, San Francisco & Washington St
중국인을 상대로 인삼장사를 하던 한인과 초기 유학생 25명이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의 Washington Ave에 있는 중국인 상점 광덕호 지하에서 친목회를 조직하니 최초의 한인단체로 기록된다. 안창호(회장)을 비롯하여 이대위 장경 등이 참여하였다.
1903 Ahn ChangHo, Lee Daewii and 25 Koreans organized Korean social club in San Francisco’s Washington Ave in Chinatown in 1903, This is the first Korean organization in the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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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정치는 여야의 공존이 전제조건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피력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공존의 요체다. 그러나 대립이 격화되는 정치 현실은 상대를 제거하고 싶은 독존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공존의 정치가 파괴되면 패자만 화를 입는 것이 아니다. 권불십년이란 말처럼 정권이 바뀌면 과거 상대를 찔렀던 창은 나를 겨누게 된다. 장희빈 초상 역관 집안의 서녀인 장희빈은 아들 균(훗날 경종)을 낳았으나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우승우(한국화가) |
| 숙종 14년(1688) 11월 21일. 8명의 노비가 메는 옥교(屋轎:지붕 있는 가마)가 궐 안에 들어섰다. 옥교에 탄 여인을 알아본 지평 이익수(李益壽)는 사헌부 금리(禁吏)와 조례(<7681>隷:관아 노비)를 시켜 여인을 끌어내리게 한 다음 노비들을 처벌하고 상소를 올렸다.
“신(臣)이 들으니 ‘장소의(張昭儀:장옥정)의 어미가 8인이 메는 옥교를 타고 대궐에 왕래한다’고 합니다. 소의의 어미는 한 천인(賤人)인데 어찌 감히 옥교를 이렇게 무엄(無嚴)하게 드나들 수 있습니까?”(『숙종실록』 14년 11월 21일)
숙종은 화가 났다. 그는 환관에게 ‘여인을 끌어내린 사헌부 금리와 조례를 잡아다 누가 사주했는지 엄한 형벌을 써서 알아내라’고 명했다. 숙종은 “연전(年前)에 귀인(貴人: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 사헌부에서 이렇게 모욕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 궁중의 시녀들도 일개 천인에 불과하지만 품계가 상궁에 오르면 법에 의거해 가마를 탄다. … 하물며 왕자 외가에서 전교(傳敎)로 출입하는데…”라고 화를 냈다. 혹독한 형신을 받은 금리와 조례 두 사람은 귀양을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섰다가 곧 죽고 말았다. 옥교에 탄 여인은 10월 27일 숙종이 바라던 왕자를 낳은 후궁 장씨의 모친 윤씨였다. 이 사건의 본질은 차기 왕위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다툼이었다.
장희빈이 묻힌 대빈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의 외진 자리에 있다. 사진가 권태균 |
| 훗날 장희빈이라 불리게 되는 소의 장씨는 중인 역관(譯官) 집안의 서녀(庶女)였다. 숙부 장현(張炫)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인 데다 수역(首譯:역관의 우두머리)으로서 숙종 3년(1677)에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그만큼 남인 정권과 가까웠는데 이 때문에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종친 복창군(福昌君)과 함께 유배당했다.
서인들은 소의 장씨(장옥정)를 남인들의 여인계로 보았고 실제로 그런 성격이 있었다. 장옥정은 남인들과 가까웠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전의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숙종실록』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전하고 있다. 대비의 후원을 업은 장옥정은 막 인경왕후 김씨를 잃은 청년 임금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제동이 걸렸다.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 김씨가 장씨를 강제로 출궁시킨 것이다. 서인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는 국왕의 승은을 입은 여인은 민간에 거주할 수 없다는 관례마저 깨고 궁에서 쫓아냈다. 명성왕후는 1681년(숙종 7년) 숙종을 서인 명가인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재혼시켰으니 그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다.
그러나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 9년(1683)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복상기간이 끝나자 자의대비의 권고를 받은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입궐시켰다. 서인들은 당황했다. 인현왕후 민씨가 왕자는커녕 공주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옥정이 왕자라도 생산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숙종 12년(1686) 7월 홍문관 부교리 이징명(李徵明)은 지진이 발생하자 『사기(史記)』에 ‘외척(外戚)이나 여알(女謁:궐내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이 극성하면 지진이 온다’고 써 있다면서 이렇게 상소했다.
“외간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궁인(宮人)으로서 은총을 받고 있는 자가 많은데, 그중의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가까운 친척이라고 합니다. 만일 외간의 말이 다 거짓이라면 다행이겠습니다마는 만약 비슷한 것이 있다면, 신은 종묘사직의 존망이 여기에 매어 있지 않으리라고 기필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장녀(張女:장옥정)를 내쫓아서 맑고 밝은 정치에 누를 끼치지 말게 하소서.”(『숙종실록』12년 7월 6일)
장옥정 때문에 재해가 발생했다는 주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숙종 6년(1680) 11월 혜성이 나타나자 『숙종실록』은 ‘장녀(張女)’가 ‘임금의 총애를 받기 시작할 무렵이 이때’였다며 ‘이로써 하늘이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 우연이 아님을 알겠다’라고 적을 정도였다.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어느 날 내전(內殿:인현왕후)이 명하여 (장씨의)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는 『숙종실록』(12년 12월 10일)의 기록처럼 민씨 역시 질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숙종실록』이 “내전(인현왕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인현왕후는 질투보다 당익(黨益)을 앞세울 줄 아는 냉혹한 정객이기도 했다. 인현왕후의 권유로 입궐한 여인은 숙종이 “연전에 귀인(貴人:귀인 김씨)의 어미가 출입할 때…”라고 예를 들은 김 귀인이다.
그러나 김 귀인이란 미인계는 장옥정의 상대가 되지 못해 숙종은 재위 12년 12월 장씨를 숙원(淑媛:내명부 종4품)으로 책봉했다. 내명부(內命婦)는 정5품 상궁까지는 궁녀, 종4품 숙원부터 정1품 빈(嬪)까지는 후궁이었다. 장씨가 숙원에 책봉되자 사간원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는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으로 인함이며 전하가 장씨를 책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臣民)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숙종실록』12년 12월 14일)라고 비난할 정도로 서인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장옥정은 서인들의 이런 반발을 비웃듯 버젓이 왕자를 생산했다. 숙종은 재위 14년 만에 처음으로 왕자를 낳았으나 집권 서인이 하례하지 않고 왕자의 외할머니까지 끌어내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숙종은 왕자 탄생 3개월이 채 안 된 재위 15년(1689) 1월 10일 전·현직 대신과 6경(六卿:판서), 판윤(判尹:서울시장), 삼사(三司) 장관을 명소했다. 신년 초의 느닷없는 명소였으므로 많은 대신이 모이지 못했다. 숙종은 “국본(國本:세자)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만약 지체시키고 어정거리고 관망(觀望)하면서 감히 이의(異議)가 있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국본(國本) 운운한 것은 갓 낳은 왕자를 후사로 결정할 속셈을 표명한 것이었다.
『숙종실록』은 “여러 신하가 대답할 바를 알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으니 물러가기는 하겠습니다만 또한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대한 것을 필두로 대부분이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단 하나였다. ‘중궁(中宮:인현왕후)께서 춘추가 한창이시니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남용익이 여러 대신과 2품 이상에게 널리 의논해 처리하자고 요청했으나 숙종은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고 거절하고 갓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했다. 닷새 후인 1월 15일에는 이 사실을 종묘·사직에 고묘(告廟)했다. 왕조 국가에서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하면 번복할 수 없으므로 장희빈이 낳은 아이가 숙종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묘 15일 후인 2월 1일 서인 영수 송시열이 재논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파란이 일었다. 송시열은 ‘송나라 철종(哲宗:재위 1085~1100)이 10세가 되도록 번왕(藩王)으로 있다가 신종(神宗:재위 1067~1085)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다’는 예를 들면서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처였다고 비판했다. 주장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라도 종묘에 고묘(告廟)한 사안에 이의를 제기한 자체가 왕권 도전이란 혐의를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숙종은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홍문관원들을 불러 노기 띤 목소리로 “일이 결정되기 전에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지만 이미 결정된 후에도 말하는 것은 그 뜻의 소재가 반드시 있다”고 비판했다.
숙종은 또 ‘명나라 황제도 황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封號)한 일이 있다’고 말해 송시열이 든 송나라 철종의 예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고 반박했다. 숙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소론 여성제(呂聖齊)로 대신했으며 남인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 남인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2월 4일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10년 전 경신환국 때 당한 정치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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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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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파랑... 상록수님방에서 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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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4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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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숙종부터 경종, 영조까지 이어지는데...
지금 많이 밀렸습니다. 매일 하나씩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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