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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휴와의 싸움
1659년 5월 효종이 갑자기 죽고, 현종이 즉위했다. 그리고 김장생 이래 송시열의 주전공이었던 예론(禮論)의 문제, 즉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났다. 이 문제로 송시열이 이끄는 서인은 남인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 남인의 이론가 윤휴는 송시열이 필사적인 집념을 가지고 타도하려는 대상이었다. 효종 때 송시열의 적이 청나라였는데, 이제 윤휴가 되었다. 송시열과 윤휴(尹 ; 白湖)는 매우 가까워야 할 사이였다. 병자호란 뒤 31살인 송시열이 속리산에 내려와서 공부할 무렵 윤휴를 만나서 서로 토론하며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10살 위인 송시열은 윤휴를 좋아했고, 3산(三山)에 있는 윤휴의 집에 찾아와 토론하면서 사흘씩이나 숙식을 같이 할 정도였다. 그 뒤 송준길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가 30년 닦은 학문이 윤휴에 비해 우습다고 했다. 이 무렵은 그 둘 뿐만 아니라 송준길 권시 이유태 윤선거 등 대전 중심의 20-30대인 충청도 지식인들이 함께 공부했던 것이다. 또한 권시(權 ; 炭翁)의 둘째 아들 권유(惟)는 송시열의 장녀와 결혼했고, 권시의 큰 딸은 윤휴의 큰아들 윤의제와 결혼했다. 따라서 송시열과 윤휴는 사돈 사이이다.
이후 송시열은 황간의 냉천리에 10여년 간 묻혀 살면서 스승 김장생의 예설(禮說)을 발전시켜서 '존주(尊周) 대의(大義)' '소중화(小中華)'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예가 완벽히 실현된 나라는 주나라이다. 그 주나라의 문화가 중국에 있었는데(中華) 이제 청나라가 중국을 점령하므로, 우리나라에만 주나라의 문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 문화는 '강상(綱常) 윤리(倫理)' '의리(義理) 명분(名分)'으로 나타나며, 이는 주희의 성리학에서 밝혀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율곡 이이에게 이어졌다. 이런 이론에 따라서 송시열은 갓 즉위한 효종의 북벌론에 이론/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윤휴는 주희의 학설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태도를 배격하고, 주희와 대등한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중용}에 대한 주희의 주석을 부정하고 자기가 새로 주석하여 가르친다거나, 주희의 학설이라도 틀릴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안단 말인가? 주자는 내 학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공자가 살아온다면 내 학설이 이길 것이다" "공자라 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공자도 잘못된 것이 있다" 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는 물론 경전에 대해서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해석이다. 그리고 단지 학설의 문제이다. 그런데 송시열은 이를 학문의 문제가 아니라, 효종의 통치 명분인 북벌론, 서인의 집권 명분인 소중화론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즉 정권을 국가를 뒤흔드는 반역의 이론이었다. 그래서 송시열은 윤휴를 찾아가서 엄중하게 항의하며 논박을 했으나, 윤휴는 한술 더 떠서 "경전의 깊은 뜻이 어찌 주희 혼자만 아는 일이고 우리는 모르느냐?" 하고 일소(一笑)에 붙여 버렸다. 그 뒤 송시열은 윤휴가 (1641년 무렵) 발표한 [이기설(理氣說)]에 대하여 편지로 문책했으나, 윤휴는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드디어 송시열은 윤휴와 절교하게 된 것이다.
송시열이 효종과 짝을 이루어 서인의 영수가 되어갔다면, 윤휴는 남인의 이론/이념적 근거를 제시했다. 송시열은 윤휴를 청나라에 못지 않은, 중화(中華; 문명)을 위협하는 야만으로 보았다. 반드시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송시열이 효종에게 "하시는 말씀마다 모두 옳으신 분이 주자(朱子; 주희)이며, 하시는 일마다 모두 정당하신 분이 주자"라고 할 정도로 절대시했던 '주자'란 기실은 서인의 집권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 주자를 부정하는 "윤휴가 끼친 해독은 사나운 맹수와 홍수보다 더 심하다" 하면서,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서 없애려 했다.
황산서원 모임 ; 그래서 효종 4년(1653; 47세) 윤7월에 송시열은 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 유계(兪棨) 등 10여명의 저명한 서인 학자들(대전 부근 지역 출신)과 황산서원(黃山書院; 논산 강경)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다. 황산서원은 조광조-이황-이이-성혼을 모신 곳이었다. 이 선현들 앞에서 송시열은 윤휴를 단죄하려 한 것이다. 윤선거는 윤휴를 높이 보며, 그 학문이 높고 깊다고 했다. 반면 송시열은 윤휴가 사문난적과 같다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윤선거는 "우리는 경전의 깊은 뜻을 다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물(公物; 모두가 소유하는 것)인데, 그대는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도 못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고. 주자 이후에도 경전에 대하여 조금씩 주해한 것이 많이 있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송시열 - "주자가 논한 바는 그 이후 지금까지 한가지 이치라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한 글자라도 흐린 것이 없다. 만일 여기에 의심이 있으면 주자의 글에 대하여 그 분명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면 될 것이지(이것이 송시열의 학문임), 윤휴는 왜 마음대로 주자의 {중용} 주석의 일부를 버리고 자기 주장을 대신 내세우는가?" 윤선거 - "그것은 윤휴가 고명(高明)함이 지나쳐서 실수한 것이다." 송시열이 이에 격노하여 "그대는 주자가 윤휴만큼 고명하지 못하단 말인가? 윤휴가 도리어 주자보다 더 고명하단 말인가?" 하고 따졌다. 윤선거 - "내가 말한 '고명(高明)'이란 말은 실수이고, 윤휴가 주석 만든 것은 다만 경솔한 소치일 것이다" 송시열 - "내가 사문난적이라 한 것은 바로 그 '경솔함'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대는 윤휴의 재주와 기지가 특히 고명하다고 탄복하는데, (옛날 중국의 역적들인) 왕망 동탁 조조 같은 무리가 다 고명했으니, 윤 휴도 그들과 같은 글-도둑이다. 그대도 그와 협조했으니, 이후에 만일 임금이 춘추의 법(春秋大義)에 따라 죄를 다스릴 때에는 (그 추종자를 먼저 치는 법인데), 그때 그대가 윤휴에 앞서 죄를 받을 것이다."
동학사 모임 ; 그 뒤에 송시열 윤선거 이유태 등 몇 사람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다시 윤휴에 대해서 종일 논쟁하다 해가 저물게 되었다. 이에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다그쳤다. "길게 논쟁할 것 없다. 간단히 말해서,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한마디로 말해라"라고 대들었다. 이에 윤선거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옳고 그름(是非) 보다도 흑백으로 본다면 주희는 백, 윤휴는 흑; 음양(陰陽)으로 본다면 주희는 양, 윤휴는 음이다." 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에 이유태는 윤선거가 원래 비겁한 사람으로, 오늘 그의 대답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에 윤선거가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서, 흑백론-음양론은 표현상 그런 것이고, 윤휴의 인격을 말한 것은 아니다 라고 했다. 이에 송시열은 윤선거에 대해서 풀기 어려운 악감정을 가졌다. 이에 송시열의 윤휴에 대한 전쟁은 이제 윤선거를 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 등으로 윤선거의 아들 윤증은 송시열과 대립하여 소론의 영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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