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굴욕을 아들이 앙갚음 누명 쓰고 권력에서 밀려나 초막에서 좌선한 채로 쓸쓸한 죽음
고려 때 여진을 정벌한 명장 윤관(尹瓘·?~1111)이 재상으로 있을 때 예종의 명을 받아 1101년 세상을 떠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의 비문(碑文)을 짓게 됐다. 그러나 문과 출신임에도 불구 하고 문재(文才)가 약했던지 비문 쓰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이 사실을 윤관의 수하에게 전해들 은 예종은 김부식(金富軾·1075년~1151)에게 비문 짓는 일을 맡겼다.
<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지은 북한 묘향산 보현사비의 최근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비문>
문제는 김부식이 예의상 재상이 맡았던 일을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사양하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글에 관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젊은 김부식 은 한 번도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비문을 지은 데서 갈등이 시작된다.
윤관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윤언이(?~1149)의 학식이 출중했다. 인종 때 문과에 급제해 탁월한 식견으로 인종의 총애를 받게 되는 윤언이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김부식의 무례 (無禮)를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1133년(인종 11) 어느 날 인종이 국자감(國子監)에 거둥해 김부식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토록 하고 윤언이에게는 질문을 맡겼다. 아버지의 굴욕을 잊지 않고 있던 윤언이는 '주역'에 능통한 터였다. '고려사'는 이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윤언이가 이모저모로 따지니 김부식이 대답하기 곤란하여 이마에 진땀을 흘렸다.'
<윤관>
윤언이의 이 같은 처사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 됐다. 2년 후인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윤언이는 토벌 책임을 맡은 김부식의 막료로 참여 해 공을 세웠다. 난이 진압되자 김부식은 묘청의 난 주동자였던 정지상(鄭知常·?~1135)과 윤언이가 깊은 연계를 맺고 있다며 몰아세웠다. 윤언이는 한직으로 밀려나야 했다.
윤언이와 정지상이 신참 관리 시절부터 가까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란을 함께 할 정도 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런 '혐의'를 받아야 했던 이유는 윤언이나 정지상 모두 칭제건원 (稱帝建元), 즉 고려 국왕을 황제로 격상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윤언이는 여기까지였고 정지상처럼 서경(西京·평양)을 천자의 땅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김부식은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 친분과 칭제건원을 근거로 삼아 윤언이가 정지상과 연계됐다고 주장해 좌천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국자감에서 윤언이에게 수모를 당한 김부식의 앙갚음이었다.
<윤관장군묘...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양주방어사를 거쳐 광주목사로 좌천되자 윤언이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난 지 6년째 되던 해에 인종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다. 자신의 칭제건원론은 묘청이나 정지상의 그것과 달리 국왕을 높이려는 순수한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이었다.
"우리 왕조에서도 태조, 광종 때 그러한 사실이 있었고 과거의 문건을 보면 신라와 발해도 그랬으나 대국이 일찍이 무력을 가하지 않았고 소국들도 감히 비난한 바 없었습니다." 칭제건원을 하다가 금나라 같은 강국으로부터 침공을 당할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현실론자들 에 대한 반박이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의 권세는 막강했다. 윤언이는 훗날 정당문학이라는 고위직으로 복직됐지만 김부식에게 밀려날 때부터 벼슬살이의 의욕은 사라졌다. '주역'에 관해 저서를 남길 만큼 주역에 뛰어났지만 정작 그 책으로 망신을 준 김부식으로 부터 철저한 견제의 대상이 돼야 했다. '주역'으로도 자기 삶을 꿰뚫어 볼 수 없었던 것일까?
▲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두 문중이 400년간 묘지 다툼을 벌였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윤관 장군 묘역(사적 323호) 주변
벼슬을 버린 윤언이는 고향인 파평으로 물러나 호를 금강거사(金剛居士)라고 자칭하였다. 불교의 세계로 숨어버린 것이다. 이때 관승(貫乘)이라는 스님과 어울려 지내며 함께 불교를 공부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초막을 지은 다음 먼저 죽는 사람이 그곳 에서 좌선(坐禪)하여 죽자고 약속하였다.
그후 어느날 윤언이는 소를 타고 관승을 찾아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초막에 들어가 앉아 좌선에 들어갔다. 그때 관승이 사람을 보냈다. 간접적인 작별 인사였다.
그 사람을 본 윤언이는 크게 웃으며 "스님이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구나"라고 말했다. 아마도 윤언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듯하다. 관승이 사람을 보낸 것도 윤언이는 충분히 좌선을 통한 죽음을 실천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기행 때문인지 유교적 시각의 '고려사'는 윤언이의 죽음에 대해 가혹한 평을 내리고 있다. "일국의 재상의 몸으로 국가의 교화에는 관심이 없이 허황하고 이상한 행동을 감행함으로써 우매한 속인들을 현혹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