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관련해 가장 잘못 알려진 것 중 하나는 이 사건이 무지한 일본 낭인(浪人) 집단에 의해 우발적으로 저질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 가담자들의 면면을 보면 전혀 다르다. 그 중엔 하버드대, 도쿄대를 졸업한 엘리트가 있는가 하면 훗날 일본 내각의 장관, 10선 국회의원, 외국 대사를 지낸 인물 등이 수두룩하다.
<명성황후 조난비... 경복궁내>
▶명성황후 암살 행동대 중에서도 주력은 규슈의 구마모토(熊本) 출신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 정계를 주무르던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 등이 각본을 짜고, 일인(日人) 신문사인 한성신보 조직이 행동에 나섰다.
이 한성신보의 사장 아다치 겐조와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가 바로 구마모토 출신이었다. 이에이리 가키치 등 경복궁 명성황후 방에 난입해 직접 칼을 휘두른 자들도 구마모토가 고향이었다.
▶1895년 10월 8일의 시해사건은 세계사에서도 드물 만큼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다. "여기저기서 '민비는 어디 있느냐'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떨고 있는 궁녀 중 용모가 아름다운 두 명을 참살했다… 그 중 한 명의 관자놀이에 희미한 마마자국이 있는 걸 보고 민비임을 확인했다.
" 행동대원 중 하나는 훗날 "정말로 이것은 쓰기 어려우나…"라며 황후를 난자한 뒤 그의 몸에 말 못할 만행이 저질러졌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쓰노다 후사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
<명성황후상... 경기도 여주>
▶일본은 사건 후 철저하게 일본의 책임을 은폐하려 했다. 황후의 시신을 불태우고 대원군과 황후 사이 권력다툼에서 비롯된 사고로 선전했다. 미우라 등 56명의 용의자에게 히로시마 법정은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그 결과 지금도 대부분 일본인들은 일본 정부와 민간이 합작해 조선의 정궁(正宮)에 난입해 국모를 살해하고 욕보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거의 모든 역사교과서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기술을 외면하고 있다.
<명성황후 탄강구리비...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경기유형문화재 제41호.>
▶일본 민영 아사히 TV가 어젯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내용과 암살범 후손들이 110년 만에 한국을 찾아 사죄하는 모습을 담은 특집 뉴스를 방영했다. 구마모토 행동대의 후손들이 2005년 한국에 와 고종의 후손에게 사죄하는 모습은 일본의 다른 방송에서도 방영하려 했으나 극우의 눈치를 보느라 미뤄져 왔다.
명성황후 시해는 지금도 한국인들의 대일 감정의 밑바닥에 살아있는 사건이다. 그에 대한 사죄는 행동대원 후손들 몫만도 아니다. 역사의 멍에는 그것의 진실을 대면할 용기가 있을 때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