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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트레킹
백두산 트레킹 4편:북파에서 광개토대왕비를 거쳐 단동까지(2006, 7, 30)
어제밤 박진석 친구로부터 메실과 약을 얻어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몇시에 잠이 들었는지..... 눈을 뜨니, 새벽 5시다. 중국 시간으로 새벽 4시인 셈이다. 옆 침대에서 잠을 자고있는 두 친구가 잠이 께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에서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하였다. 복도로 나와서 창문을 여니, 아직도 날이 완전히 밝지를 않았다. 백두산 줄기의 수십길 직벽으로 되어있는 산줄기를 디카에 담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친구들도 일어난다. 내가 모두 잠을 께우는 꼴이 되었다. 모두 세면을 하고,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온다. 백두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기 위함이다. 밖은 우리나라 초봄의 날씨를 방불케 한다. 추워서 반팔 차림으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상위를 긴팔로 갈아 입는다. 어제밤 가이드는 우리 시간으로 5시45분에 기상하여, 6시 30분에 출발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충분하여, 주위에 보이는 산세들을 디카에 담고, 어제밤 온천욕을 했던 곳으로 올라가서 장백폭포와 달문으로 올라가는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버스가 도착한다. 일반버스와 모델이 다른 대형버스다. 이정수 회장의 권유로 우리는 버스를 타고 출발시간이 촉박하였으나, 잠시 올라서 장백폭포와 달문길을 배경으로, 준비해 온 프랑카드를 앞세우고 단체사진을 찍은 다음에 숙소를 출발하였다.
 새벽에 창문을 열고 숙소 우측 백두산 줄기
 이 건물이 우리가 잠을 잤던 호텔이다
 날이 밝은 다음의 우측 산줄기
 숙소에서 좌측 천문봉 산줄기
 숙소에서 좌측 천문봉 산줄기 하단부
 장백폭포와 달문으로 올라가는 길
버스는 정확한 시간에 출발했고, 내려 오면서 천문봉으로 오르는 입구에 많은 짚차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짚차들은 백두산 일출을 보러가는 관광객을 천문봉까지 실어나르는 짚차다. 우리는 프로그렘이 개인 사비로 새벽3시에 일어나서 짚차를 타고 천문봉으로 오르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짚차요금이 개인당 우리 돈으로 2만 6천원이라고 한다. 중국 돈으로 환산한다면 엄청나게 비싼 돈이다. 우리는 백두산 트레킹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넘 폭리를 취하는 중국 당국이 못 마땅하여 모두 생략하기로 했었다.
천문봉을 올려다 보니, 능선상에는 안개가 자욱하였고, 동쪽 하늘에 구름이 많아서, 우리는 옳은 결정을 하였다고 생각하였다. 버스에는 우리가 잠을자고, 저녘식사를 했고, 온천욕을 했던 곳을 운영하는 여자분이 함께 타고 내려왔다. 얼굴에 화장기 하나 없는 여자는 금년 52세로 제주도가 고향이라고 했고, 오늘은 야채시장이 형성된 날이고, 가장 싸게 구입 할 수가 있는 날이라 이도백하에 야채를 구입하러 가는 길이라 한다. 중국의 세금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수가 있었다. 딸도 단동에서 식당을 운영 한다고 한다.
일행 중 한사람이 '소를 잡아서 먹을 수 있느냐?'고 묻자 미리 연락만 하면 딸에게 연락하여 준비시키면 가능 하단다. 중국은 된 것도 안된 것도 없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20여분후에 우리는 북파 문표소(매표소) 안쪽 주차장에서 모두 내렸다, 그리고 걸어서 매표소로 나간다.
 매표소 안쪽
 매표소 밖에서 매표소를 배경으로
다시 소형버스에 승차한다. 상 하로 흰색 신사복에, 백구두를 신은 남자 1명이, 핸폰으로 어느곳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폼을 잡더니, 우리차에 함께 승차한다. 한국말을 전혀 하지 않은것으로 봐서 아마도 한족인 모양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를 식당으로 인솔한 사람이였다. 복장과 생김새가 영 아니였다. 재멋에 사는것을.................
이도백하란 곳에서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였다. 메뉴는 좁쌀죽과 만두, 달걀 1개였다. 만두는 여유있게 준비 되였으나, 죽과 만두1개로 아침을 때웠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니, 잡상인들이 손에 인삼을 들고 나와서 산삼이라며 사라고 달려든다. 중국에 있는 산에는 산삼 천진가 보다.
마른산삼(현지인의 명칭) 5개담은 봉지가 만원이라 하더니, 나중에는 두봉지에 만원, 시간이 흐를수록 이제는 3봉지에 만원이란다. 가짜인 줄 알면서도 하도 사정하는 여자가 안쓰러워 3봉지에 만원을 주고 구입하였다. 그러나 버스에 탑승을 하니, 이제는 4봉지에 만원이란다.ㅎㅎㅎㅎ 혹시나 도라지뿌리나 황기가 아닌가 싶어서 입안에 넣고 씹어보니, 삼은 맞는 모양이다. 삼의 향기가 입안에 가득하다.
 아침식사를 했던 식당
버스안에서 밖을 내다보니, 길 양쪽에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이 소나무는 인위적으로 심은것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생성된 숲이며. 소나무 이름이 미인송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8시 10분에 우리는 기차여행을 위해서 이도백하역에 도착하였다. 역전에서 기다린 동안에 햇볕이 강하여 몸에 땀이 나기에 한쪽에서 반팔로 갈아입었다. 중국 남자들은 길거리나 운전중에 상의를 벗고 다니는것이 보통이였다. 그래도 나는 속에 런닝을 입었으니........
식수를 지급받고, 개찰로가 아닌, 뚫어진 울타리를 통과하여 기차 탑승장소로 이동한다. 62명에 대한 단체손님에게, 작은 역전의 혼잡을 덜고, 관광객의 특별 배려로 여겨진다. 그리고 2시간의 기차여행이 시작된다. 이도백하역에서 송강하역까지........
 이도백하역 건물
 이도 백하역 승강장
기차는 우리시간으로 8시30분이 지나서야 출발했다. 옛날 70년대초, 우리의 완행열차를 방불케 한다. 맞 쳐다본 의자 사이에 그래도 탁자가 설치되어 있었고, 등받이는 한개가 뒷사람과 같이 사용토록 되었으며, 천정은 선풍기가 돌고 있었다. 좌석번호가 없는 기차지만, 우리는 가이드의 활동으로 한칸에 모두 탈수가 있었다.
중국은 역무원이나 기타 공직자들이 여성들이 많았다. 가는도중 기차역에 기차가 설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열차에 오른다. 입석 인원들이 많았고, 4인석 좌석에는 중국인과 햡셕이 되곤한다. 우리 좌석은 2인석이어서 맞 쳐다본 자리에 친구부부, 내가 앉은 자리는 김교수와 앉았다. 통로옆에는 3인석에 우리 일행인 여자분 4명이 2명씩 앉아서 출발 하였으나, 결국 중국 여자분 2명이 합석하여, 6명이 서로 맞 쳐다보고 간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한 조선족 여자 2명은 50대로 보인다. 60년대 우리 엄마들이 얼굴에 동동구르무 한번 찍어 바르지 않은 순수한 맨 얼굴 그대로였다. 우리 일행의 화장한 여자분들 얼굴과 비교하면... 우리 일행과 무슨 말들을 주고 받는지 웃음바다다. 가이드는 통로를 지나면서, 자기 물건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내가 괜히 조선족 여자분들께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기차는 작은 시골역을 지나면서, 열차안은 콩나물 칸이되고,.... 차창밖을 내다보니, 산비탈 지역에 인삼밭이 많다. 우리나라는 좋은 토질에 검은 통퐁 햇빛 가리막을 사용한다. 중국은 파랑색 비니루를 사용하고 있었다. 저런 곳에서 생산 된 인삼을, 한국 관광객에게 산삼이라고 팔아먹는 잡상인이 많았다. 기차안에서 파는 먹거리는 한국 돈은 통하지 않았다.
2시간 40 여분을 열차안에서 보낸것 같다. 송강하역에서 내린다. 우리가 내릴려고 준비하자, 서서 온 중국인들이 자리를 잡을려고 바짝 닥아 서는것이, 우리나라 60~70년대와 다를것이 없어서 소리없는 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무질서 하게 내리고, 무질서하게 출구를 빠져 나온다. 송강하역에는 우리를 대련시에서부터 이동시킨 전용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얼마나 반가운지....
 송강하역
송강하역에서 우리의 전용버스에 올라서, 처음 송강하에 오면서 저녘식사를 했던 통화시에 있는 메아리 식당으로 향한다. 무려 3시간 30분을 버스를 타고.....점심은 역시 한식으로.....배가 고픈 줄을 전혀 느끼지 못한 나는, 먹어도 그만, 안먹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앞으로 몇시간 후에 저녘식사를 할 지 모른다.
 통하시 메아리 식당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가 넘은 시간에 출발을 할려고 인원점검을 하니. 한사람이 없다. 이발소를 갔단다. 가이드는 놀라서 뛰어간다. 일행중 유머가 풍부한 한분이, 우리 돈으로 1,000원짜리 이발을 했다며 익살스럽게 웃으며 차에 오른다. 현금가 650원인대, 팁으로 350원을 포함해서 1,000원을 주었단다. 물론 여자가 이발하는 곳에서...ㅎㅎㅎ 박수를 치며 한바탕 웃었다. 번개불에 콩 튀겨먹고 온 셈이다.
단동으로 향하는 길은, 시간을 측정 할 수가 없다. 갑작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가이드는 '광개토대왕비를 지나는대, 관람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입장료는 우리 돈으로 5,000원이란다. 엄청 비싼 입장료다. 중간에 누가 얼마나 가로 채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여늬 입장료보다 비싸다. 원하는 사람만 입장하기로 하고, 통화시를 출발한지 2시간만에 광개토대왕비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가이드는 광개토대왕비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으나, 모두 받아 들일 수가 없고, 집에 와서 많은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자세히 소개 된 글을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제19대왕으로서 재위 391∼412동안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므로 재위 시에는 영락대왕이라 일컬어졌으며, 사후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역을 크게 확장시켜 서로는 요하, 북으로는 개원(開原)∼영안(寧安), 동으로는 훈춘(琿春), 남으로는 임진강 유역에 이르렀다. 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중앙 관직을 신설했는가 하면, 역대 왕릉의 보호를 위해 수묘인(守墓人) 제도를 재정비하였으며, 393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한편, 아들 장수왕 때 단행되는 평양 천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러한 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비석이 광개토대왕비이다. 이 비석은 사면석 비(四面石 碑)로서 높이가 약 6.39m인데, 당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 동쪽 국강상(國岡上)에 대왕의 능과 함께 세워졌다.
비의 형상과 비문의 형태
비는 집안시(中國 吉林省 通化專區 集安市)의 시청소재지인 통구성(通構城)으로부터 동북쪽 약 4.5km 지점인 태왕촌 대비가(太王村 大碑街)에 서 있으며, 비의 서남쪽 약 300m 지점에 대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비 주위에는 철책으로 된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너비 1.35m∼2.0m, 높이 6.39m에 달하는 한국 최대의 크기로 개석(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다. 비신의 사면에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cm 정도 크기의 문자가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현재에는 5mm 깊이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비신의 4면에는 모두 44행 1,775자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비의 건립과 발견 및 조사
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 능비의 존재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문헌들이지만, 비가 고구려의 유적지로 인식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지봉유설 芝峰類說》에는 비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시조비로 오인되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비가 재발견된 것은 1880년을 전후하여 개간에 종사하던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되어 비의 부분적인 탁본이 북경(北京)의 금석학계에 소개됨으로써 그 실체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비가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 불량과 탁본 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 혹은 쌍구가묵본(雙鉤加默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18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 경 만주를 여행 중이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에 의하여 비문의 일부문자가 변조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를 기초로 한 쌍구가묵본이 일본에 반입되어 비문의 초기연구가 비밀리에 진행된 끝에 1889년에 그 내용이 세상에 공표 되었다. 거의 같은 시기인 1885년경부터는 중국 학계에서도 비에 대한 조사와 금석학적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그 뒤 1899년경부터는 일본, 청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매매를 위한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石恢付塗)을 감행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비면의 마멸과 일부 문자가 오독(誤讀)되기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쌍구본'이나 석회부도 후의 탁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1890년대 이전의 원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능비 연구에 난점을 안겨주고 있었으나, 현재 원탁본이 발견되어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의 증거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비문의 구성과 내용 및 성격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서문격으로 제1면 1행에서부터 1면 6행에 걸쳐 추모왕(鄒牟王 : 주몽)의 건국 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 : 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비문의 핵심을 이루는 2부는 제1면 7행에서부터 3면 8행에 걸쳐서 대왕의 정복 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 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다. 제3부는 제3면 8행에서부터 4면 9행에 걸쳐서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 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정복 기사는 정토와 복속 및 토경순수라는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역사적 사실이 유기적 관련을 갖고 논리적으로 서술되어 있어, 전제왕권의 확립을 통한 고구려의 국가적 성장을 알려주고 있다.
연구사
광개토대왕비가 재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1백여 년간 한국·중국·일본 3국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지금까지 약 200여 편의 연구 업적이 발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비의 연구는 문헌사료의 부족이라는 한국 고대사가 갖는 일반적인 한계와 고구려사 연구의 현실적 한계 및 3국 학계의 미묘한 관계에 따라 방대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비의 연구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고대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체질비판에까지 연결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비문의 올바른 판독과 해석은 곧 왜곡된 한국고대사의 재고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비연구는 일본의 등장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발전과정의 해명이라는 비 연구 본류에 도달하기 위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요망된다. 아직도 120 여자를 판독 못하고 있다는 대왕비는, 고구려 시대의 광활한 우리의 국토를 짐작 할수가 있었다. 누군가가 대왕비를 께어서 파괴를 할려고 하였단다. 바로 짐작이 간 대목이다. 훼손을 막기위해서 중국정부는 방탄 유리 창문의 건물속에 보호하고 있었다. 장대비 속에서도 우리는 돌비석을 보기위해서 5000원의 돈을 지불 해야만 했다.
돈은 입장하면서 내는 것이 아니고, 관람후에 버스안에서 거출하였다. 짐작이 간다. 삶은 찰 옥수수 3개를 천원에 샀다. 그리고 한개를 먹었다. 중국땅에 와서 처음으로 포만감을 느꼈다. 기념품 가게에서 기념품을 구입한 일행들도 있었다. 대왕비를 아에 떠미고 온 셈이다.
 주차장에서 본 대왕비 건물
 비를 맞으며 입장하고 있다
 건물 안에서 찍은 비의 하단부
 대왕비를 배경으로 친구부부
 대왕비의 상단부
 비가 그친다음 밖에서
오후 6시가 거의 다 되어서, 버스는 단동을 향하여 또 달리기 시작한다. 끝없는 옥수수 밭들을 지나며...잠이 들었다, 께었다를 반복하면서 시골길을 달린다. 대왕비 주차장을 출발한지, 1시간 30 여분후에 조용히 흐르는 강의 다리를 건너서, 나무뿌리 형식의 화장실이 있는 도로변의 소공원지역에서 잠시 쉼을 하였다. 겨울이면 이강이 꽁꽁 얼어붙어서 관광객을 상대로 갖은 썰매 놀이를 한다고 한다.(오토바이, 차량을 이용한)
 강가 도로변 소공원에 설치 된 화장실
 안개가 엾게 내린 강가는 한폭의 동양화다
또 다시 버스는 달린다. 지형이 한국 지형과 비슷하다. 가는 도중에 날은 이미 어두어 지고.... 어느때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고, 어느때는 길을 잘 못 들어서 헤메기도 했다. 왕복 2,000km를 달리는 길에, 버스 기사인들 어찌 혼동이 아니 되겠는가~! 고난의 여행길~! 버스는 우리 시간으로 11시 20분경에 단동시에 있는 평양 칠보산 식당앞에 우리를 내려 놓았다. 발걸음이 뛰어지지를 않는다.
밤 11시 30분에 먹는 저녘식사~! 식탁은 잉어찜을 비롯한 갖은 반찬이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였다. 그러나 .....난.... 3숫갈로 저녘을 맞히고 밖으로 나왔다. 가이드는 북한 아가씨의 공연을 보라고 한다. 작은 무대하나 없는 식당 맨바닥 카운터 앞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의 노래가 시작된다. 북한 노래의 18번지, 반갑습니다를 시작으로 신고산타령, 처녀 총각의 무슨 놀이인가~! 잘 모르지만....목소리는 북한 아가씨들의 특유한 목소리로 잘도 불렀다.
얼굴에 화장한 여자들을 중국에 와서 처음 본 것이다. 역시 여자는 화장을 해야만....ㅎㅎㅎ 공연도중 북한 아가씨의 요청으로 우리의 총무 정연호 대원은 노래 부르는 아가씨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행운도...ㅎㅎㅎ 공연이 끝나고 나온 자리에서 어느 나이가 지긋한 분의 중얼 거린말~ "한숨을 푹 쉬며~ 아이구~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냐~!"하는 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불쌍히 보인 모양이다.
 저녘식탁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1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2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3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4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5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6 (정연호와함께)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7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8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9
 북한 아가씨들의 공연 10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로 갔다. 단동은 발 맛사지로 유명하단다. 금액은 우리 돈으로 만원~! 그 돈도 맛사지 하는 사람이 다 먹는것이 아닌가보다. 배정된 방에 들어와서 문복식 회원이 건네준 약을 받아먹고,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단동에서 잠을 잤던 호텔방 (가장 깨끗했다)
샤워장에는 칫솔부터 시작해서 세면도구 한개한개가 모두 사용요금이 적힌 금액표가 있었다. 그래서 금액표를 보기전에 칫솔과 면도기, 비누등을 사용하였으나, 금액표를 본 이후는 우리가 가져온 세면도구를 사용하였는대,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에게는 공짜였다..ㅎㅎㅎㅎㅎ
다음편은 압록강, 끊어진 철교. 북한 압록강주변과 중국 단동 압록강 주변이 비교되고 대련시로 달리며 허허 옥수수벌판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긴~ 지루한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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