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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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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시리즈1-조선족을 분류해본다

드디여..조선족도 지역감정이 생겨나는것인가..아니면 원래부터 있었던것인가..

있었던것이던..생긴것이던..지역으로 가르는것이..과연 합리적인가를 생각하면서..

포퓰리션해석을 하려면 해석대상에 대한..카테고리를 정확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조선족을..연변조선족..길림조선족..흑룡강조선족 요녕조선족..등으로..지역으로 분류하는것이..정확한것일가?

혹은..조상들의..출신지역으로..경상도출신..함경도출신..평안도출신..으로 분류하는것이..정확한것일가?

이민 100여년에..서로 다른 출신지역이..모아사는 동네도 많고..서로 다른 환경에서자라던 사람들의..재이민도 많아진 조선족..과연..인구유동이 거의 없던..한반도식으로..분류하기는 어려울같은 느낌이다..

그래서..조선족의..이민을 사료하면서..시간축으로 하면 어떨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대한제국전..대한제국이..강제합방당한후..그리고..일본이 만주에서..완전한 지배를 확실히 한후로..나누는것이..그나마 합리적일 같은 생각이다..

또 이런 시간축으로의 분류가..조선족의..세차례이민고조와..합치되고..가정교육의 개인에게 주는 영향을 생각하여도..서로 다른 세차례의 이민목적과..그 이민들의..깊은 곳에 쌓인 문화적유전의 차이를 더 잘 표현할수 있고 현재의..조선족군체중의..지방차이의..해석에..더 부합되지 않을가 생각된다.

한반도로부터 만주로의 이민고조는 세차례가 있었다..

조선말기와..일한강제합방직후..그리고 일본주도하의 개척이민이다.

제일차이민고조는 19세기중후엽부터 시작된다.연속되는 흉작과 자연재해로 피페해진 조선북부의 농민들이 입싸리를 하기 위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서..개간을 시작하였다.당시 만주 특히 백두산부근은 청정부의 봉금지역으로 인적이 드물었엇다.또한 청정부의 행정력도 강하지 않았던 연고로 이동하기 쉬운 점도 한목 하였던것이다.

한편 로시아에 대한 청정부의 경계심도 인구가 적었던 만주에 대한 조선인의 이민에 한눈을 감게 해준 측면이 있었다.결국 봉금책은..허울뿐으로 변해가고 조선의 재해와 더불어 이민도 늘어나게 된다.

그후 청정부는..국자가(지금의 연길)에 감독기관을 설치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동화정책에 나서게 된다.삭발변복을 하지 않으면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앗던것이다.

일부 눈치빠른 사람들은 이때 삭발변복을 하고..청의 국적을 취득하여..지주계급으로 상승하기 시작한다.일부는..마을 사람들의 대표로..삭발변복하고..형식상의 지주로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 고조는 1910년까지 이어진다.

그 결과 연변 18만좌우 기타 지방 10만여로 29만명의 인구로 불어나게 되엿다.

제2차이민고조는..1910년의 한일강제합방으로부터 시작된다..20세기초두..한반도에서의..반일운동이..저조기에 처하면서..나라를 근심하는 지사들은 해외의..제일 큰 조선민족집거지역이였던..연변에서..계몽운동을 이미 시작하였었다..당시 간도는..이미 만주지역조선인들의..중심으로..거듭나기 시작하였다..제이차이민고조에서 이민온 사람들이..대부분 연변에..집중한 현상의..배경이기도..하다..

1905년 한일보호협의가..강제로 체결된후..이미 많은 지사들이..간도를 반일운동근거지로..활약하기 시작하였다..그러던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체결된후..망국노를 원하지 않는 지사들과..파산된 농민들의..대이동이 시작된다..

결과..1920년까지 간도의 조선인은..거의 10만명이나 증가되여..27만여를 기록하게 된다..1919년 3.1운동이후..독립지사들과..반일의병..반일군중들을..주축으로 하는 이민은 급속히 증가하게 된다..결과 1930년당시 간도의..조선인인구는..41만좌우를 기록하여..만주조선족의..64.9%를 점하게 되였다..

제3차이민고조는..일본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918사변이후..만주를 손에 쥐게 된 일본은..만주개발에..힘을 넣기 시작하엿다..엘리트 관료들을 만주에..보내여..만주를 자원기지로..건설하기 시작한것이엿다..

그 일환으로 조선척식회사와 만주척식회사의 만척프로젝트가 있엇다..

조선농민과 일본농민들에게..자금과 생산도구를 제공하여 만주를 개척하게 하는것이..그 핵심이엿다.

한일합방이..지난지 10여년 지난 이때는 이미 일본의 압박에..반일세력들과..독립지향의 세력들이..한반도에서..거의 종적을 감추었고..조선인들도..일본의..통치에..너무 큰 반감을..가지지 않고 있을때였다..즉..안심하고..이민을 조직할수 있엇던것이다..

일본측의..기록에 의하면..프로젝트초기엔..배률이..3.12이상이였다고 한다..312명이..신청하여..100명이 추첨되는 꼴이였으니 배률이..낮다고 할수는 없엇을것이다..이 배률은..1940년대에..9.8이라는 최고치를 기록한다..추첨에 당첨된 사람들은..행운과..행복을 꿈꾸면서..가족을 데리고..만주벌판으로..달려간다..


당시 연변과 연변외지구의 인구추이.

위그래프에서도 볼수 있듯이..만주의..조선인인구의 증장에..제일 큰공헌을 한사람들이..바로..개발이민이였던것을 알수 잇다..

세차례의 이민고조의..성격차이는..그 문화적사상적기초에도..큰 영향을 끼친다..

연변지구와..동변도(관전,장백,통화지구),그리고 압록강연안의..조기이민은..일본의..관리가 늦엇던 점과..그후의..이차이민고조시기..들어온 독립지향의..지사들의..영향을 많이 받은 탓에 반일감정이 높았다..대신 1930년이후..이민온 사람들은..일본에게 호감적인 사람들이 많았다..오히려..일본의 도움으로..행복을 찾앗다는 자각이 더 많앗을지도 모른다..그결과..경찰 등 직업으로..출세한 사람이 꽤나 많았다..당시 연변지구의..조선인경찰이 1000여명이였던데 비하여..흑룡강 3000여명 길장지구 2000여명 심양지구 1000여명으로..나온다..


지방별로 본 항일열사인수

위 그래프는 지방별로 본 항일열사인수이다..당시 인구 20여만을 자랑하던..흑룡강이 제일 적은것이 보인다..

대신 국공내전시기엔 흑룡강조선족의 열사인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국공내전시기의 열사인수

이런 데이터를 고려하면..조선족은..지방보다..1930년이전의 이민과..그 후손..1930년이후의..이민과 그 후손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는것이..비교적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또 이민연대의..부동함에 따라서..그들의..민족적인 정체성과..사유방식에도..많은..차이가 보인다..지역별보다..이민연대의..차이가..이런 차이를 낳은것으로 사료되는것은..각지역에서도..이민연대의..차이에 의하여..서로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