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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7/10/31
 

[화제의 책] 강철구의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1>

2009.09.05 00:18 | 논문 및 저서 | 강철구

http://kr.blog.yahoo.com/kangch07/177 주소복사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첫 걸음

[화제의 책] 강철구의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 1>

 

우리의 서양사 연구는 그리 역사가 길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1세대들이 서양사 연구를 시작하여, 20세기 한국이 그랬듯이 짧은 시간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1970년대까지도 서양사 연구를 위한 2차 연구서조차 구하지 못해 어렵게 복사해서 읽었고, 외국에 나가 1차 사료를 보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렇듯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1~2세대 학자들은 서양사 연구의 기본을 충실하게 다지는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들에게는 서양사의 큰 줄기를 이해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운 작업이었던 만큼, 서양학자들의 연구를 우리의 눈으로 비판하는 작업들은 어찌 보면 사치에 가까왔으리라.

80년대에 3세대 학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예전보다 수월해진 외국 유학길에 올랐다. 90년대부터는 외국 유학을 다녀온 해외유학파들이 서양사의 새로운 흐름들과 그동안 소홀했던 서양사의 영역들을 소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1차 사료 분석을 통한 예전보다 훨씬 깊은 연구물들을 생산해내었다.

또한 70~80년대의 국내문제에 천착하여 고민하고 있던 국내파들이 서양사의 사례들을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좀 더 세련되게 발전시킴으로써, 국내 서양사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3세대 학자들도 여전히 우리의 눈으로 서양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부족했다. 특히 해외유학파들은 유학국가에서 배운 새로운 서양사 영역들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에만 급급하였고, 서양학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강철구 교수가 유럽중심의 세계사를 비판하고 우리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보려는 노력을 해온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강교수는 국내파로 특히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문제를 중심으로 고민해오면서 오래전부터 서양사학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연구해왔다. 어쩌면 강교수가 서양사학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것은 그가 국내파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필자만 하더라도 오히려 프랑스 학자들의 연구에 매몰되어 유럽중심주의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 <우리 눈으로 보는 세계사>(강철구 지음, 용의숲 펴냄). ⓒ프레시안
강 교수는 이미 <역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저서를 통해 서양학자들의 역사학에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학계의 논쟁들을 국내학계에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그동안 외면해왔던 '우리 눈으로 서양사보기'에 불을 지핀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강 교수의 이번 저서는 <프레시안>을 통해 그동안 발표해왔던 칼럼들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첫 번째 장점은 서양학자들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해서 대중을 상대로 다양한 그림들과 사진들을 통해서 흥미롭고 알기 쉽게 서술했다는 점이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대형사진과 그림들, 친절한 설명은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두 번째 장점은 쉽게 서술하면서도 학계의 깊이 있는 논의들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을 상대로 글을 쓰다 보면 정작 학계에서 논의되는 중요한 논점들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을 남기곤 했는데, 강교수는 학계의 논의를 중심으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대중을 상대로 알기 쉽게 그러나 심도 있게 글을 썼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세 번째 장점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논의를 서양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골고루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제 1권에서 강교수는 고대 그리스문명, 유럽중세도시, 르네상스, 유럽의 해외 팽창, 근대 자본주의 발전, 근대 자연법의 형성과 식민주의와 같이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역사 전반에 걸쳐 어떤 논의가 있는지 소개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저자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서 매우 고무적이다.

그의 논의는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서양사에 대한 기본 상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기본 상식이 과연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를 묻는다. 예전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이다. 기본 상식 속에 유럽중심주의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나서, 강교수는 기본 상식에 대해 최근 학계의 비판적 논의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 기본상식을 뒤엎는 신선한 주장들을 펼친다.

예컨대 그리스문명은 서양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리스문명은 인류 역사에서 매우 독창적이며 인간중심적인 문명으로 서양문명의 본질을 차지한다고 그동안 알려져 있다. 과연 그렇게 독창적인 문명일까?

강 교수는 마틴 버널의 <블랙 아테나>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실제 그리스문명은 대부분 이집트문명으로부터 크게 영향 받은 것으로 이제 알고 있는 것처럼 독자적으로 발전한 문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1권 57~97쪽) 매우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이와 함께 마턴 버널의 주장에 대한 학계의 비판도 잊지 않고 소개하는 학문적 신중함을 더하여 학문적 논의를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그의 논의에서 아쉬움이 있다면, 그의 비판적 논의 대부분이 서양학자들의 비판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총론에서 칼 맑스, 헤겔, 막스 베버 등에 대한 비판도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서양학자들로부터, 그리스문명 비판도 마틴 버널로부터, 그리고 르네상스에 대한 비판도 서양학자들의 주장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강교수도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도 대체로 제 3세계 출신이기는 하나 서양학자들이 주도하고 있고, 서양 학문 체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이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1권 53쪽). 그러면서도 서양의 대표적인 역사가들의 "주장이나 이론에 지레 겁을 먹고 주눅이 들 것이 아니라 감연히 맞서려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시작단계인 현 상황에서 "당장은 서양 사람들이 해 놓은 자기반성의 수준이라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강교수의 입장에 약간 옹색해 보이는 점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도 규모나 연구수준에서 서양의 학계보다 턱없이 열등한 국내학계의 현실을 생각하면 지당한 주장이다. 사실 유럽중심주의 비판은 한국인으로서 서양사를 공부할 때에 가져야할 가장 기본적인 학문적 자세가 아닐까? 근, 현대 부문을 다루는 제 2권의 빠른 출간을 기대한다.

 

/백인호 서강대 사학과 교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71>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⑦

프랑스혁명은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혁명을 통해 민족주권과 민족의 자율성이 주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이론상으로는 민족 전체가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근대적 민족주의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주로 대외적인 전쟁을 통해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냈을 뿐 아니라 강화되었다. 프랑스가 1792년 4월부터 대외적인 혁명전쟁을 시작함으로써 프랑스뿐 아니라 그 상대편 나라들에게도 민족적 감정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이 시작되며 더 강해졌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정복했던 유럽 여러 나라에서 그 반발로서 저항민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영국은 이 시기에 프랑스와 22년간이나 지속적으로 싸워야 했다. 또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잉글랜드 침공의 위협 등으로 인해 이 시기에 민족 감정이 크게 증대되었다.

독일에서도 1806년 이후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으며 민족주의가 발전했다. 피히테, 슈타인 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독일인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 당시 독일의 민족주의는 아직은 문화적 민족주의이다. 그것은 독일이 수십 개의 나라로 분열되어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일어와 그 문화가 민족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탈리아도 나폴레옹이 그 상당부분에 이탈리아왕국을 세우고 지배함으로써 많은 고통을 받았다. 또 대륙봉쇄령으로 인한 경제적 고통, 많은 병사들의 징집, 이탈리아 예술품의 파리 반출 등에 분개했다. 그래서 일부 시인들이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외쳤으며 곧 지식인들이나 군사 엘리트들이 그 뒤를 따랐다.

빈회의에 의해 1815년에 확립된 메테르니히체제는 절대주의적인 구질서를 다시 복구하고 프랑스혁명이 열어 놓은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힘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이데올로기들이 전통적인 군주국가들을 붕괴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소수였던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에 대해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으나 어느 나라에서도 그 싹들은 아직 자라기도 전에 짓밟혔다. 그렇다고 민족주의 이념이 점차 유럽 각지로 확산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1820년대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중남미의 각 지역에서 식민지인들의 독립운동이 벌어졌다. 두 나라가 나폴레옹에게 오랫동안 지배되어 그것을 진압할 힘이 없었으므로 중남미의 거의 모든 나라는 1826년까지는 독립을 쟁취하는데 성공했다.

유럽에서는 터키의 지배를 받던 발칸반도에서 1815년 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리스가 1830년에 독립하고 세르비아, 왈라키아, 몰다비아, 이집트가 자치를 하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터키를 약화시키려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같은 나라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유럽의 중심부에서는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같은 중요한 나라들이 민족주의의 발전을 가로 막았으므로 그 운동은 느리게 진전했다. 그리하여 1848년의 독일 3월혁명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9세기의 민족주의 운동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다른 민족의 지배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독립, 분열되어 있는 민족이나 국가의 통합, 또 이미 정치적 통일을 이룬 민족국가의 경우에는 그 발전과 팽창을 추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가 오스트리아나 러시아와 같이 다민족국가로 구성된 나라에서 소수민족들이 분리, 독립을 추구한 운동이다. 두 번째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분열되어 있는 나라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운동이다. 세 번째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이 이미 형성된 민족-국가를 더욱 발전시키려 하는 움직임으로 이는 결국 제국주의와 연결되었다.

독일 3월혁명은 두 번째 경우이다. 독일은 중세 이래 분열되어 있었으나 이제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진 근대세계에서 분열을 유지한다는 것은 자멸을 의미했다. 나폴레옹의 통폐합에도 불구하고 31개 국가와 4개의 자유도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상태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혁명을 주도한 것은 대체로 부르주아 계급인데 그들은 민족통일과, 입헌군주제를 통한 국가의 자유화를 같이 추구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주도권 경쟁과, 또 아직 구지배계급이 완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통일은 당분간 뒤로 미뤄졌다.

혁명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던 마자르족, 여러 슬라브족들, 또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이 해방과 독립을 추구했다. 오스트리아황제도 이 힘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우선 헝가리인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이 탄생했다.

이탈리아도 독일과 같이 중세 이래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고 북부지역에서 가장 큰 나라가 사르디니아-삐에몽트였다. 베네치아와 주변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마는 교황령국가였다. 또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는 시실리왕국이 있었다.

통일작업을 정치적으로 실천한 것은 사르디니아-삐에몽트의 수상인 카부르이다. 그는 통일전쟁을 일으켜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막아내고 1860년에 롬바르드 등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여 일차적인 통일을 완수했다.

그 해에 민족주의자인 가리발디가 천여명의 붉은셔츠 단을 이끌고 시실리왕국으로 쳐들어가 이를 사르디니아에 통합시켰다. 베네치아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통해 확보했고 로마는 1870년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함에 따라 병합되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이미 1828년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 내 많은 나라들을 하나로 묶는 관세동맹이 맺어졌는데 이것이 통일을 위한 경제적 초석이 되었다. 통일과업을 떠맡은 것은 프로이센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그는 1866년에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북부 독일 국가를 북독일연맹으로 묶었다. 또 1871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남부의 4개 국가를 더 합쳐 독일제국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하나로 합쳐짐으로써 통일이 완수되었다. 이는 독일이 강대국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또 한편에서 중, 동부유럽의 많은 소수민족들이나 아일랜드 같은 억압민족들은 지배민족에게서 벗어나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두 나라는 이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억압을 강화하고 언어나 문화 등의 동화정책을 강행했다.

민족주의는 1848년에도 아직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일부 대중이 혁명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이 시기의 민족주의는 대체로 교양 있는 부르주아계급에 제한되었다. 그러나 1870년 이후에는 점점 대중적인 현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19세기 후반에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국가 사이의 다툼이 더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의 중요한 강대국들은 서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그 국민들의 충성심이나 통일성을 끌어내기 위해 민족주의 이념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관제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교육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의 경우 비스마르크는 통일 이후에 공립 초등학교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이는 유럽에서 가장 빠른 편에 속했다. 이 학교들에서 독일어 교육을 시킴으로써 문자해득자가 크게 늘어났다. 한 편에서는 덴마크어, 폴란드어, 알사스어 같은 소수민족 언어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러시아도 언어와 종교를 비롯한 문화적 통합을 국가의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비러시아계 민족들이 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폴란드의 카톨릭 교회,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발틱지역의 루터파 교회들이 그 종교정책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의 추구가 유럽에서 하나의 대세가 되었으며 19세기 말의 제국주의 팽창은 이러한 경쟁의 단순한 확대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해외 식민지의 확보는, 특히 대중적 민족주의의 시대에는 민족적 영광을 나타내는 필수적인 징표로 보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정책을 주로 추구해 나간 것은 우익세력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의 성격도 과거보다 보수화했다.

많은 국가의 우익 정치인들은 제국주의를 민족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 국내적인 긴장을 해외로 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족주의는 좌익과 싸우는 무기가 되며 보수화했다.

그래서 그들은 민족감정을 극단적으로 고취하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역자로 몰아 붙였는데 이런 태도는 외국인에 대한 혐오와 인종주의, 반유대주의를 가져오는데도 기여했다. 이런 극우민족주의의 발전은 1920년대에 파시즘이 자라나는 온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좌익이 민족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다.

제국주의적 지배와 억압은 식민지에서도 점차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하여 식민지인들은 민족의 자주성과 경제적 착취의 반대, 문화의 자율성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와 민족주의가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이유이다. 특히 1950, 60년대는 민족해방운동이 식민지역 각지에서 일어나며 민족주의를 크게 강화시킨 시기이다.

그러나 1947년 이후의 냉전체제는 한 편에서 새로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의 자율성도 크게 제약시켰다. 미국은 한국이나 베트남, 중남미 지역 등에서 끊임없이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부심했다. 민족주의가 자기네의 세계전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소련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영토내의 민족주의적 요구를 무차별적으로 짓눌렀다. 그러나 1991년에 소련이 무너지며 상황이 달라졌다. 갑자기 구소련 각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요구가 분출한 것이다. 이는 체첸의 독립요구 등 이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뒤 보스니아에서는 대규모 종족학살까지 벌어져 세계인의 주목을 집중시켰다. 이는 민족주의적 요구라는 것이 매우 뿌리 깊은 것으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1세기가 합리성의 시대이고 지구화의 시대라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종족이나 민족에 대한 요구가 종족성이라는 뿌리 깊은 힘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당연한 현상이다.


                                                                                                    강철구 / 이화여대 교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70>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⑥

 

프랑스혁명과 근대적 민족주의의 시작

근대 민족주의는 프랑스혁명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민족 개념은 이미 17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루소의 <사회계약론>의 영향으로 민족의 개념이 사회계약의 원리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족은 이제 인민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구성체로 생각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나온 '주권적인 것은 민족이다', 또는 '프랑스 민족은 사회계약이다'라는 이야기들은 그런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루이 15세는 1771년에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여 왕에게 대립하던 고등법원들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1774년에 그가 죽자 뒤를 이은 루이 16세는 그것들을 원상 복구시켰다. 그럼에도 고등법원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권위를 누릴 수 없었다. 이제 귀족을 배제한 프랑스인 전체로 생각되는 민족이 보다 중요하게 생각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혁명 직전인 1788년 5월에 자크 고다르라는 사람은 '이제 파리와 전 왕국에는 세 개의 당파 이름이 있다. 그것은 왕당파, 고등법원파, 민족파이다' 라고 쓰고 있다. 제3신분으로서의 민족이 독자성을 과시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1788년에 루이 16세는 왕실의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해에 삼부회를 소집하기로 약속했다. 이때 파리고등법원이 삼부회가 1614년의 각 부별 방식으로 소집되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분란을 일으켰다. 귀족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왕권과 싸우면서 맺어진 귀족과 제3신분 사이의 동맹관계가 깨졌다. 부르주아들은 이제 왕의 전제를 비판하는 대신 귀족계급을 새로이 적으로 돌리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새로운 민족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운동이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직전에, 사회계약설에 의존한 이 민족의 개념을 뚜렷한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발전시킨 사람이 당시에는 아직 무명의 신부였던 아베 씨예스였다.

그는 1789년 1월에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거기에서 '제3신분 대표는 인구의 대다수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므로 민족의 진실한 대표'라고 주장했다. 그 주장은 부르주아계급의 큰 호응을 받았다. 덕분에 그도 삼부회 대표로 선출될 수 있었다.

1789년 6월17일에 삼부회의 제3신분 대표들은 그의 발의에 따라 그들 회의체의 이름을 '국민의회'로 바꾸고 헌법을 만들기 전에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때 제3신분 대표들이 스스로를 민족의 대표로 자임했기 때문이다.

(영어불어의 nation을 동아시아에서는 '민족'과 '국민'의 두 단어로 사용하는데 이는 19세기 말에 일본인들이 nation 가운데 종족적 공동체의 의미를 민족으로, 사회계약적 공동체의 의미를 국민으로 구분하여 번역했기 때문이다. 서양 사람들이 사용하는 nation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원래는 종족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18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사회계약에 의한 민족의 개념이 만들어지며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서양인들이 nat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문맥을 잘 살필 필요가 있다. 1789년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전통적인 의미를 따른다면 '민족의회'라고 부르는 것이 옳겠으나 관용적으로 '국민의회'로 쓰므로 그대로 사용하겠다)

그래서 혁명 초기에 '프랑스는 1789년에 진실로 민족이 되었다'라든가 '프랑스는 마침내 진정한 조국이 되었다'라는 등 제3신분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국민의회는 민족의 이름으로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당시의 프랑스인 모두가 이런 태도에 찬성한 것은 아니다. 사회계약론적 민족 개념이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전통적 정치질서를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은 왕을 조국이나 민족과 분리시키는데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삼부회 소집 과정에서 작성된 까이에(청원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제3신분의 까이에들에는 인민주권을 키워드로 하여, 모든 권력은 민족에게서 나오고 제3신분이 민족을 구현한다는 주장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프랑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까이에는 그런 이야기가 거의 없다. 수만 개에 이르는 까이에 전체로 보면 민족의 구심점은 아직도 왕이었다.

그럼에도 혁명가들은 7월의 혁명이 성공한 후 인민주권을 새로운 체제의 이념적 기틀로 만드는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리하여 1789년 8월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그 제 3조에서 '모든 주권의 원리는 민족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개인도 분명히 민족에게서 나오지 않는 한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런 규정은 1791년 헌법, 국민공회의 1792년 9월 25일자 선언, 1795년 헌법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민족주권을 선언한 것이다. 이렇게 민족의 주권이 민족-국가를 구성하는 이론적 기반이 되며 이제 왕도 민족주권의 지배 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논리적 귀결은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인민의 자발적 의지'에 따른 사회계약이라는 허구만을 가지고 민족을 구성할 수는 없었다. 영토, 종족, 문화 등의 비자발적 요소들도 고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자발주의적 요소 가운데 우선 중요했던 것이 민족의 영토적 경계선 문제였다. 만약 인민의 '자발적 의지'에만 의존하면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사람들은 프랑스 민족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국가의 해체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혁명가들은 모든 주권이 민족에게 있다는 논리로부터 민족적 단일체의 불가침성을 내세웠다. 그리고 프랑스 민족이나 영토로부터의 어떤 분리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혁명 구호 가운데 '민족의 불가분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된 이유이다.

또 민족의 성원을 결정하는 데에는 종족적 기준이 적용되었다. 식민지에서 그런 상황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식민지 흑인들 가운데에는 프랑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하여 프랑스인의 자격기준으로 '자유에 대한 사랑이라는 피'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프랑스인으로 생각하며 프랑스인으로 끼워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프랑스 민족의 일원으로 식민지 의회에 참여하고자 하는 식민지인들의 요구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문화도 비자발적 요소로서 중요했다. 여기에서는 정치적, 문화적 연대성을 가져오는 수단으로서 언어가 특히 강조되었다. 그래서 혁명기의 문화정책을 주도했던 아베 그레고어는 '어떤 개인이 프랑스 민족에 속하고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가 프랑스의 심장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심장이란 바로 불어를 의미했다.

그러나 1790년의 언어조사에 의하면 불어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전체 2,500만 명의 인구 가운데 3/4에 불과했다. 또 불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인구는 300만 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혁명기의 많은 문서들은 오키탄어 등 각 지역 언어로 다시 번역되어야 했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실패하기는 했으나 다언어적인 프랑스 사회를 불어로 통일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혁명기 프랑스 민족의 탄생을 민족의 한 사람이 되려는 의지, 즉 자발주의에만 귀착시키고 거기에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의미를 덧붙이는 서양학자들의 상투적인 설명은 큰 한계를 갖는 것이다. 명목적으로는 종족적 요소들 대신 의지를 내세웠으나 공동의 기원에 기초한 역사적 정체성 없이 민족의 형성은 불가능했다.

그러면 당시의 프랑스인이 모두 자신을 민족의 일원으로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은 그것을 자신들과는 별 상관없는 일로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농촌은 반혁명 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런 반혁명 감정은 대외전쟁이 시작되며 더 커졌다.

그래서 식량이나 가축의 공출을 거부했고 징집도 가능하면 피하려 했다. 1793년에 서부지역에서 일어난 반란들은 강제 징집 때문이다. 또 병사들의 탈영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1794년 여름에 프랑스 군대의 총병력은 70여만 명이었으나 1797년에는 근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전쟁 사상자를 뺀 나머지는 탈영 때문이다. 프랑스 농민들이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것은 19세기 말에 들어와서이므로 혁명기의 민족의식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혁명기에는 많은 혁명축제들이 각지에서 벌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790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 함락 1주년을 기념하여 파리에서 열린 연맹제였다. 여기에는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다. 이런 축제들은 모두 혁명 열기를 고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혁명을 상징화한 마리안느 같은 여성상이 수없이 만들어져 세워졌다. 혁명을 선동하는 수많은 팜플렛이나 그림들이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민족은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이런 행위들이 필요했던 것은 민족이 되려는 의지만으로는 민족형성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은 근대적 민족과 민족주의 형성에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첫째, 민족을 이론적으로 프랑스인 전체 인구로 확장했다. 과거에 왕이나 귀족에 제한 되었던 민족 개념을 크게 확장함으로써 전체 인구를 포괄할 가능성을 갖게 했다. 그리 하여 민족에 평등주의적 개념이 들어갔다.

둘째, 민족주권 이론을 통해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형성된 민족을 정치권력의 유일 한 원천으로 만들었다.

셋째, 혁명기에 만들어진 민족자결권 개념은 민족의 자율성을 주장함으로써 19세기에 자율적 인 민족-국가가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되도록 했다.

넷째, 혁명전쟁은 프랑스의 민족주의를 고조시켰다. 또 혁명전쟁이 점차 프랑스의 정복전쟁으로 변질하며 유럽 각 지역에서도 이에 대응하는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19세기와 20세기를 민족주의의 시대로 이끌었다.

그러나 혁명기 프랑스 민족과 민족주의의 한계도 분명하다. 실제로 민족은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계층에만 한정되었다. 프랑스에서도 민족감정이나 민족주의가 전체 국민으로 확산되는 것은 제3공화국 시대인 19세기 말에 가서이다.

자발적인 의지만으로는 민족을 형성할 수 없었다. 그 민족 형성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족, 영토, 역사, 종교, 언어, 관습 등 과거 수백 년 동안 만들어져온 비자발적 요소들이다. 그렇다고 해도 언어에서 보듯 그 민족적 동질성이 충분했던 것도 아니다. 1864년에도 프랑스의 남부 1/3선 지역 사람의 40%는 불어를 하지 못했다. 브레타뉴나 알사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불가분의 민족을 정치권력의 원천으로 규정함으로써 정치적 폭력과 독재를 가능하게 했다. 프랑스 민족을 합의에 의한, 자유스러운 서유럽형 민족형성의 모델로 삼는 것은 허구의 산물이다. 또 말로는 민족자결을 주장했으나 실제로 그것은 곧 포기되었다. 그리고 이웃국가에 대한 병합주의, 나아가 제국주의로 발전했다.

 

                                                                                                       강철구 / 이화여대교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69>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⑤ -(3)


근대 초 프랑스의 민족형성과 민족주의

15세기 말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가장 기독교적인' 프랑스왕의 백성이라는 점, 프랑스어를 말하고 쓰는 것, 프랑스 영토, 살리 법, 고대로부터의 문화적 전통, 프랑스 정치제도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무엇보다도 왕 개인이었다.

이런 추세는 16세기 전반에도 계속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왕이 카톨릭교회의 '큰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로마교회로부터의 독립성을 추구해 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카톨릭의 1516년 볼로냐 공의회가 프랑스왕을 명목으로는 아니라 해도 실질적으로 갈리칸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함으로써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

16세기 전반에는 왕의 중앙집권도 강화되었다. 이는 프랑소아 1세가 시작한 관직이나 귀족 칭호의 판매 때문이다. 그래서 귀족의 권력이 약화되며 전문 관료집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이를 싫어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국가(etat)라는 단어도 그 이전의 '신분(身分)'이라는 뜻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정부'나 '정치영역'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1560년대에 이런 추세에 제동이 걸렸다. 신, 구교도 사이의 유그노 전쟁(1562-1598)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후 프랑스에는 유그노로 불린 칼뱅 교도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1562년에 는 그 교회가 약 2천 개를 헤아릴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러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1560년대 초부터 카톨릭연맹이 지방 단위에서 생기기 시작했고 1576년에 전국적인 카톨릭연맹이 조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559년에 국왕인 앙리 2세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혼란이 시작되었다.

이미 1560년이면 귀족이나, 삼부회의 제3신분은 중앙집권화와, 이탈리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곤란에 대해 왕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이것이 유그노에 대한 적대감과 결합하며 30여년에 걸친 유그노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 종교전쟁으로 프랑스인들은 1572년의 바톨로뮤 대학살을 포함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럼에도 카톨릭과 유그노의 두 세력은 모두 왕을 사악한 무리들로부터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웠을 뿐 왕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 전쟁은 두 세력의 타협으로 끝났다.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왕이 카톨릭 편만을 들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그노인 나바르공 앙리 3세가 1589년에 카톨릭으로 개종한 뒤 앙리 4세로 왕위에 오르고 그가 1598년에 낭트 칙령으로 유그노에게 관용을 베풂으로써 분란은 가라앉았다.

이때 앙리 4세는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나는 프랑스인으로서의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나의 왕국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똑같이 나의, 그리고 프랑스왕의 충실한 종복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모두 프랑스인이며 같은 나라의 동료-시민들이다"라고 말했다. 왕이 프랑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 앙리 4세

17세기에 들어오며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종교전쟁 가운데에서 고통을 겪은 프랑스인들이 왕의 강력한 권력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권신수설에 의존했는데 왕권신수설은 1588년에 Pierre de Belloy의 <왕의 권위>라는 글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 이론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왕에게서 나오며 백성에게는 복종 외에 다른 권리는 없었다. 정당한 통치자는 정의로우므로 왕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왕은 신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으므로 왕권에 저항하는 것은 십계명과 신의 명령에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왕권신수설은 그 후 한 세기반 동안 강력한 힘을 행사하며 프랑스 절대왕정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왕권신수설은 역설적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왕권을 파괴하고 민족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왕권신수설이 신에게 의존했으나 그때의 신은 탈카톨릭화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 신성이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추상화됨으로써 프랑스 왕의 권위가 세속성 위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들어오면 프랑스인의 정체성은 점차 종교로부터 떠나 정치로 옮겨가게 된다.

이는 루이 13세의 섭정으로서 국가이성을 추구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하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또 루이 14세(재위 1643-1715)시기에 가면 교황이나 예수조차 군주권의 우월성에 도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왕이 민족적 정체성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1715년에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파리 고등법원은 '전체 국가는 그의 안에 있으며 인민의 의지는 그의 의지 안에 있다'고 언명했는데 이는 왕이 최고 충성의 대상이고 신성함의 구현이며 개인화된 국가라는 점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17세기에 유럽국가들의 절대주의 체제하에서, 공화국에 대한 사랑과 공동의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인식되었던 고대로부터 내려온 공화주의적 애국주의가 쇠퇴하고 그것이 국가나 군주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된 것과 흐름을 같이 한다. 조국(patria)이 반드시 공화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애국주의(patriotism)가 공화국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1750년경부터 이런 사정이 바뀌게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하나는 이 시기에 민족의 주체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과 귀족이 서로가 민족을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루이 15세가 친정을 하기까지 섭정(1715-22)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은 절대왕정 하에서 크게 성장한 국가기구를 고위 귀족의 통제 하에 집어넣음으로써 왕권을 약화시켰다. 그리하여 과거에 스스로를, 왕권을 제약하는 불가결한 힘으로 간주해 왔던 고등법원들이 다시 전통적인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왕권에 비판적인 귀족들은 자신들을 민족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AD 5세기 이래 그들이 간직해 왔다고 믿은, 군주의 행위를 견제하거나 무효화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를 주장했고 그것을 민족의 권리로 포장했다. 그리하여 1730년대에는 고등법원을 민족의 '원로원'으로 부르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이에 대해 군주주의자들은 프랑스 '민족'을 부인하지는 않았으나 민족은 군주의 개인에 의해 표현되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은 이미 잘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1766년에 루이 15세가 고등법원들에 대해 그들이 '민족의 기관(organ)을 대표하고, 민족의 자유와 이익, 권리의 보호자인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잘못이며 반대로 민족의 권리와 이익은 - 일부 사람들이 그것을 군주와 분리시키려고 하지만 - 필연적으로 나에게 있다'고 선언한 것은 이런 상황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이미 왕이 민족의 구심점이었던 시기는 지난 것이다.

다른 하나의 요인은 영국과의 경쟁이다. 특히 여기에서는 7년전쟁(1756-63)에서의 패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이후에 유럽에서의 지도권을 점차 상실했으나 이제 아메리카와 인도에서 영국에게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꿈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 시기에 불붙은 민족주의에는 영국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이 큰 역할을 했다. 루소, 마블리, 디드로, 돌바흐, 마라 같은 지식인들이 모두 반영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특히 루소가 그렇다. 프랑스가 미국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에도 반영감정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참전 프랑스군의 사령관이었던 라파예트 장군이 '내가 아메리카의 대의에 참여한 것은 나의 조국에 대한 사랑, 그 적에게 굴욕을 주려는 나의 욕구' 때문이라고 말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1765년에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상연된 '깔레의 포위'라는 애국적 연극은 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또 이 시기의 언론들은 반영적인 태도와 함께 애국심을 매우 강조했고 대중들은 이에 열렬히 반응했다. 이렇게 1770, 80년대의 프랑스는 민족적 감정이 매우 고조되고 사회 전반적으로도 상당히 확산된 상태에 있었다.

이런 감정과 의식은 1789년의 프랑스혁명에 가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대중성이 훨씬 커지며 더 이상 왕이나 귀족이 민족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적 민족주의의 시대가 열린다. 혁명 속에서의 이런 변화를 살펴보자. 





                                                                                                                     강철구 / 이화여대교수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68>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⑤ - (2)

 
근대 초 잉글랜드의 민족 형성과 민족주의

근대 초 민족형성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종교이다. 유럽은 16세기 초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며 커다란 내적 갈등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럽사회가 신교와 구교로 갈라져 서로 경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 나라에서 국내적으로 큰 정치, 사회적 갈등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16, 17세기에 서유럽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스페인, 프랑스 사이에 지속적인 불화가 생겨났다.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 사이, 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신교 국가 사이에서도 갈등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또 17세기 전반에 독일 지역에서는 30년전쟁이라는 대규모의 국제적 종교전쟁까지 벌어졌는데 여기에는 독일 외에,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등 여러 나라들이 포함되었다.

이 종교적 갈등은 근대 초 각 나라의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뚜렷하다. 이미 1520-30년대에 종교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며 로마 카톨릭으로부터의 분리가 시작되었고 1534년 수장령에 의해 헨리 8세가 앵글리칸 처치(영국 국교회)의 기초를 마련한 후에는 로마교황 및 카톨릭국가인 스페인과의 대립이 노골화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런던 거주 외국인 수공업자에 대한 폭동을 비롯해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런 감정은 John Bale이나 Roger Ascham의 글에서 잘 볼 수 있다. 또 문화적으로도 14세기 후반 사람으로서 영어로 처음 제대로 된 문학작품을 쓴 초서의 글이 편집, 출간 되는 등 민족 문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많은 영어 번역판 성경이나 기도서들, 성경주해서들이다. 이것들이 민족의식을 고양하는데 공헌했다. 그리고 성경의 번역 과정에서 라틴어의 'natio'가 'nacyon'이나 'nacion'으로, 나중에는 'nation'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이 시기에 유럽 각 나라에서 영어를 비롯하여, 라틴어가 아닌 자국어(vernacular)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민족의식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1533년에 헨리 8세는 자신의 선조들이 '진정한 민족'을 만들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 그의 딸인 엘리자베스 여왕(치세 1558-1603) 때에 오면 왕과 민족은 더 긴밀하게 결합하고 있다. 특히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와의 전쟁과 그 승리는 잉글랜드의 대부분 지역에 잉글랜드 민족의 감각을 퍼뜨리는데 기여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고조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 역사와 잉글랜드적 생활방식, 잉글랜드의 땅이나 강 등 잉글랜드적인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새로이 조명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오는 애국적인 열정이 시나 소설, 희곡(섹스피어를 포함하여) 등으로 표현되었다.

▲ 그림 1. 엘리자베스 여왕. 엘리자베스 시대는 잉글랜드가 본격적으로 해외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때로 국민들의 자부심이 매우 높아진 시기이다. 민족의식이나 민족문화의 발전은 그런 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여기에 참여한 저자들이나 학자들 가운데에는 귀족 출신만이 아니라 평민 출신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민족 문화의 건설자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이런 민족문화적 경향의 폭발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민족은 점차 잉글랜드의 주권을 가진 '인민(pepole)'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조국(country)이나 국가(empire)라는 단어도 대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empire는 로마교황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같은 보편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권력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대략 1600년경이면 잉글랜드에서는 민족의식과 민족 정체성이 분명히 나타나고, 민족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공동체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리아 그린펠드 같은 학자는 잉글랜드에서는 이 시기까지는 민족이 탄생했다고 주장한다.

17세기에 가면 영국혁명(1642-1646)이 민족과 민족의식의 성장을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영국혁명은 스튜어트 왕조에 들어와 찰스 1세의 전제가 엘리자베스가 이룩한 잉글랜드인의 통합을 깸으로써 비롯된 것이다.

이에 의회가 반기를 들고 나서며 전국 방방곡곡이 왕당파와 의회파로 갈라져 싸우는 내전으로 발전했고, 결국 의회파의 승리로 찰스1세가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이 혁명기는 영국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뚜렷한 백가쟁명의 시기이다. 수많은 정치이론들이 나타나고 경쟁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혁명과정에서 직접 정치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의식은 더 넓은 지역으로 또 더 하층계급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으며 그와 함께 민족의식 자체에도 큰 변화가 생겨났다. 그것은 지금까지 민족의 구심점으로 존재해 온 왕이 처형당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제 민족과 관련된 문제는 종교나 왕의 권력과 분리되어 논의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이 제 1차적 충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민족이 그 자신의 힘만으로 설 수 있게 되었으므로 - 종교나 왕권 같은-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다른 요소는 더 이상 불필요해졌다.

18세기가 되면 민족이라는 말은 영국뿐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시작된 식민지 경쟁은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사람들의 민족의식을 강화시키고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했던 것이 18세기 중반의 7년 전쟁(1756-1763)이다. 두 나라 모두 전쟁에 대해 자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으므로 전쟁 과정에서 인쇄물에 의한 선전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 두 나라에서 1750, 60년대의 전쟁문학은 이 전쟁을 왕실이나 종교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두 민족 사이의 전쟁으로 묘사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민족감정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민족이라는 단어 외에 조국(patrie), 애국자(patriot), 애국주의(patriotism) 같은 단어들이 함께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애국주의라는 단어에는 고대적 전통에서 비롯하는 특유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이것은 뒤에 설명할 것이다) 그것을 반드시 민족주의와 등치시키기는 어려우나 그 안에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이면 두 나라 모두에서 민족주의가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주의라는 단어는 1790년대부터나 쓰이기 시작한다.
 
 
                                                                                                     강철구 / 이화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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