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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용 래 현대시 작품 해설
박용래는 한국 시사에서 매우 개성적인 서정 시인의 한 사람으로, 혹은 보기 드문 향토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저항한 시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무척 시어 선택에 예민하였다. 그는 최대한도로 언어를 절제하여 시적 압축미 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 그의 시는 대개 명사형 종결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지나친 시 형식의 압축은 때로 그의 시의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가 현대적 도시 문화를 외면 하고 오로지 향토적인 정서를 가꾸고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가?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 현실 앞에서 외부적인 삶의 양식이 어떻게 변천하든, 또는 인 간의 근원적인 고통이 그 속에서 어떻게 가중되든 일체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시가 어떻 게 감동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시는 이 시대에 시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향토에서의 삶을 주로 노래한 박용래의 작품들에서는 자연의 모습이 빈번하게 나타난 다. 그러나 그의 시의 자연은 여타의 시인의 그것과 구분된다. 그의 시에서 자연은 의식 적으로 찾아가 만나는 자연, 고답적인 명상의 대상물, 은둔자의 이상향이 아니다. 그의 자연은 향토에서 삶을 이어가면서 무심결에 만나게 되는 생활 속의 자연이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 밭에 눈은 쌓이리 /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
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 발목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음, / 고향집 마당귀 바
람은 잠을 자리 (《겨울밤》 전문)
박용래 시인의 시는 한결같이 소품이다. 이 시도 겨울밤에 떠오르는 고향의 모습을 간결 한 소묘법으로 그리고 있다. 이 소묘 속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여백으로 처리되고 있다. 시적 자아는 겨울 밤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는 ‘고향집 마늘밭 눈’과 ‘고향집 추녀밑 달빛’이 가득 쌓이는 정경을 생각한다. 그는 상상 속에서 고향 집에 달려 가 마당귀 가까이에ㅡ 이르러 보면 어느덧 고향의 밤바람은 잠을 자듯 고요히 머물러 있 다. 이 시는 전통적 농촌을 세밀한 감각과 절제된 감상, 그리고 정적 언어로 표현해 내고 있다. 향토적 시어의 사용은 이 시의 주제와 어울리며, 반복과 병치, 시각적 이미지의 활용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강화시키는 구실을 한다. 시적 자아가 서 있는 현재의 문명 세계에서 동떨어진 ‘마늘 밭’과 ‘추녀’는 ‘먼’이란 거리감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시는 전반적으로 소멸되어 가는 세계에 대한 쓸쓸하고 애틋한 정감, 그리고 삶의 무상감을 담고 있지만 그러한 정서가 감상적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고 절제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 된다.
또 박용래 시의 자연은 생활과 밀착되어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문명화된 세계에서 소외되어 살아가는 인간군들을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눈보라가 휘몰아간 밤 / 얼룩진 벽에 / 한참이나 / 맷돌 가는 소리 / 고산식물처
럼 /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 오리 오리 / 맷돌 가는 소리 (《설야》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를 그립게 회상하고 있다. 시적 자아가 그려내고 있는 어머니는 농사나 가사에 매달려 있는데, 그 모습이 소외된 인간의 전형적인 형상을 띠고 있다. 어머니는 눈보라가 휘돌아가면 금방 얼룩이 지는 허술한 집에서 가난 속에 살아간다. 어머니는 그 가난 속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하여 일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자니 온갖 고통ㆍ난관ㆍ절망을 고산식물처럼 강인하게 견뎌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 여 박용래의 시에는 농촌 사람들의 고달픈 일상이 녹아 드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지는 요소는 유년기의 회상 시점을 자주 사용한다는 점이다.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 굴렁쇠 아
이들의 달. / 자치기 아이들의 달. / 땅뺏기 아이들의 달. / 공깃돌 아이들의 달. /
개똥벌레 아이들의 달. / 갈래머리 아이들의 달. / 달아, 달아 / 어느덧 / 반백(半
白)이 된 달아. / 수염이 까슬한 달아. / 탁배기(濁盃器) 속 달아. (《탁배기》 전문)
덧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리고 또한 잊혀진 어린 시절의 자화상, 자기의 분신을 시인은 탁배기 속을 기웃거리며 찾아 헤매고 있다. 굴렁쇠ㆍ자치기ㆍ땅뺏기 등 놀이를 하고 있는 소년들의 모습이 시인 자신의 모습과 함께 탁배기 속에 중복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 시인은 이제 ‘반백이 된’ ‘수염이 까슬한’ 중년의 자신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나리. / 무슨 꽃으로 두드리면 솟아 나리’라는 탄식은 이제 과거의 시간으로 회귀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탄식인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잊혀진 시간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인 것이다.
박용래의 시에는 한국의 농촌, 그 전원적 풍경 묘사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런 풍경 묘사는 단순한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농촌 생활 실상의 한 단면을 보여 주기도 한다.
바닥난 통파 / 움 속의 강설(降雪) / 꼭두새벽부터 / 강설을 쓸고 / 동짓날 / 시
락죽이나 / 끓이며 / 휘젓고 있을 / 귀뿌리 가린 / 후살이의 / 목수건(木手巾)
(《시락죽》 전문)
이 시에서도 시인은 어느 농촌 여인의 고달픈 일상을 노래한다. 이 시의 시적 대상은 후살이〔改嫁〕를 살아가는 어느 가난한 여인이다. 이 여인은 경제 생활의 소외와 가정 생활의 소외라는 이중의 고달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러한 여인 의 삶에서 한의 정서는 자연스럽게 환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기구한 운명을 살 아가는 후살이 여인이 목수건으로 귀뿌리나 가리고 동짓날 팥죽 아닌 시락죽이나 휘젓 고 있는 정경은 우리에게 가난 속에서 한을 삭이며 살아가는 여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비쳐진다.
박용래는 우리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한의 정서를 담아내기 위해 우리의 일상적 삶과 친숙했던 사물들을 새롭게 찾아낸다. 하늘타리, 호박잎에 모이는 빗소리, 수레바퀴, 멍멍 이, 빈 잔, 우렁껍질, 먹감, 진눈깨비, 조랑말, 기적, 홍래 누이 등은 그가 즐겨 찾는 소재 들이다. 이것들은 시인의 내면화된 소회 의식에 상응하는 사물들이며, 그가 힘써 형상화 하고자 하는 향토 민중의 일상 생활에 상응하는 사물들이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말굽 밑에 붐비다 /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 늦
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저녁눈》 전문)
단조로움은 박용래 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형식의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흥분 과 그리움이 잔뜩 배어 있음이 또한 그의 시의 한 특징이다. 이 시는 주제와 관련된 심상 을 열거하고 시인의 그리움이 투사된 저녁 눈발이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정황을 그리고 있다. 박용래의 다른 시들처럼 이 시도 ‘말집 호롱불’ ‘조랑말 말굽’ ‘여물 써는 소리’ ‘변두리 빈터’처럼 사라져가는 전통적인 사물과 심상에 대한 회한의 정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소외된 사물의 형상화를 통해서 시인은 향토적이고 민속적인 정서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 시에서도 시인의 감상은 절제되어 있다. 이러한 절제는 그의 시의 단조로움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행간에 담긴 시인의 의도를 읽어내는 즐거움을 제공하기 도 한다. 이 시는 반복과 병렬의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시인은 통사구조의 반복과 병렬 의 바탕 위에 소재만을 대치시킴으로써 옛것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반복 강조하고 있다.
박용래의 시는 사물을 조용히 응시할 뿐 그것에 대해 해석하려는 들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시인의 목소리가 극히 축소되거나 배제되어 나타난다. 아울러 그의 시에는 전통적 율격이 축소되어 나타난다. 그는 시적 대상을 조용히 응시하면서 이미지의 기능 을 확대하고자 한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 논두렁 / 남은 발자국에 / 딩구는 / 우렁껍질 / 수레바
퀴로 끼는 살얼음 /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 하관(下棺) / 선상(線上)에서 운
다 / 첫 기러기떼 (《하관》 전문)
이 시는 만상이 사멸하는 향토에서의 초겨울의 정경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 시의 직접적 인 대상은 우렁껍질이다. 논바닥에 버려진 우렁의 잔해, 그것이 시인의 프리즘적 시선에 비친 것이다. 이 시는 죽음에 대한 상념을 담고 있지만 그것은 ‘우렁 껍질’ ‘살얼음’ ‘엷은 햇살’ ‘기러기떼 울음’등과 같은 몇 개의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다. 박목월의 시《하관》 이 명료한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면, 박용래의 이《하관》은 극히 함축적이며 상징적이 다. 그러나 그는 장황한 해석보다도 이미지 자체가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수 있다는 생각 을 가진듯하다.
하관이란, 생명체가 이승(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저승의 세계(지하)로 들어 가는 장례 의식을 말한다. 즉 생과 사의 경계를 의미한다. 그 간은 1행과 2행의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 논두렁’으로 보아 추수를 끝낸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의 시간이다. 또 7행에서의 ‘바닥에 지는 햇무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초저녁의 시간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다. 아침 ― 낮 ― 저녁 ― 밤은 각각 봄 ― 여름 ― 가을 ― 겨울과 대응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의식 은 인간의 탄생 ― 성장 ― 노쇠 ― 죽음과 일치한다. 따라서 하관 의식은 시간적으로 초저 녁,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시간과 상상력의 일치를 보인다.
시인은 죽음을 생각하며 추수 현장을 제시한다. 그것은 ‘걷힌’이라는 피동형으로 되어 있다.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은 이렇듯 보이지 않는 손(절대자)이 있어 씨 뿌리고 거두어 간다고 본다.
한 생명의 죽음 뒤에는 그를 거둔 농부의 ‘발자국’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승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영과 육이 분리된 ‘딩구는 / 우렁 껍질’ 뿐이다. ‘수레바퀴’는 한 인간의 생의 궤적을 보여 준다. 그리고 죽음은 그 경계에 획을 긋는다. 그럼에도 시인은 윤회적 상상력을 보인다.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은 생과 사의 순환, 반복의 질서를 뜻한다. 하관 순간 모두들 참았던 울음을 운다. 이승과 저승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마지막 정감 처럼, 그것은 죽은자에 대한 애도이면서 각기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첫 기러기떼’는 하관식에 모여 든 사람들을 기러기떼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기러기의 울음과 사람들의 울음은 동일시된다. 죽음은 고향을 찾아가는 행위라는 시인의 의식을 드러낸다.
박용래 시인은 향토적 공간과 소재를 통해 한국의 전통적 서정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의 소지를 안고 있으면서도, 자연과 사물에 대한 깊은 통찰 력을 통해 한국적 정한과 모랄을 아름다운 언어로 다듬어 왔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는 민중들의 삶의 단면이 녹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시를 단선적 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이러한 점을 간과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겠다. 그의 동양적 사유와 섬세한 감수성을 현대시가 잃어 가는 것은 아닐까?
출처 : http://www.esok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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