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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가새로쓰는미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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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거나 읽거나 들어본 온갖 문화적 경험의 감상 끄적이기.

42. 영화 그랜 토리노 Gran Torino

2009.05.06 12:17 | 보고읽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5012 주소복사

소문도 다양하고 평가도 여러가지였던 영화다.
나는 영화 체인질링의 감상 이후 비로소 호기심이 생겼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드러내고 있는 문제의식, 
20세기 초반에서 21세기를 넘어오며 미국이 경험한 변화들을 그러나 거칠거나 복잡하지 않게
다만 한 개인의 시선을 통해 조용히 나직히 웅변하는 그의 담담함이 다시 궁금했다. 

한번 뒤집어 생각해보자.
어릴적부터 오래 살아왔던 내 고향 동네에 어느날부터인가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이 하나씩 둘씩 옆집에 앞집으로 이사를 온다.
한국말은 서툴고 늘 뭔가 겁에 질린 표정들이어서 눈 마주치기도 즐겁지가 않다.
시간이 흘러 이방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동네 골목길이며 상가며 작은 병원이며 어디에서건 흔히 그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더구나 그들은 도무지 한국 사회의 습성을 배우려들지도 않고 어울리려들지도 않으며
이젠 아주 자기네 동네인양 활개를 치고 다닌다.
정들고 익숙한 이웃들은 하나 둘씩 이사를 떠나버려 동네는 거의 이방인의 마을이 되어버렸다...
아, 이게 우리 동네에서 벌어질 풍경이라니, 기분 참 별로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미국와 살다보니 나야 당연히 틈입자로서 조금의 백안시에도 심정 상하는 스탠스지만 솔직히 뒤집어 생각하면 그런거다.
주인공인 백인 남자 월트 코왈스키(코왈스키라는 이름 역시 그 또한 먼 옛날 러시아나 동유럽 어디쯤에서 이주한 조상의 후예임을 드러내는 상징일지도)가 오래 살아온 그 자신의 집 주변에서 수년간 겪어온 경험의 과정이 그거다.
다른 주변인들은 그냥 그런 변화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명성을 날리던 포드의 그랜 토리노 대신에 도요타의 랜드 크루저를 선뜻 고른다.
이방인들로 채워지는 고향 동네를 아쉬워하기 전에 그냥 일찌감치 벗어나 새동네에서 그들만의 풍요를 다시 일구며 살아간다.
싸울 필요 뭐 있나, 영리하게 현재에서 가장 유익한 것을 찾는 것이다.

허나 코왈스키는 제자리에 머물러있다.
자신의 젊은 날 조국의 명예와 숭고한 자유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신념으로 참전했던 한국 전쟁의 고통스런 기억을
평생 지니고 살아간다.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 기업인 포드 자동차에서 평생을 일하며 긍지와 자부심의 결정체인 72년형 그랜토리노를 늘 반짝반짝 쓸고 닦으며, 
그러나 흘러가는 현실의 변화에는 뒤쳐지는 외로운 인생을 살아간다.
그리고는
그 인생의 말미에 한국전 당시 자신이 쏜 총에 죽음을 당한 어린 소년의 환생과도 같은 어떤 아시안 소년과 그 가족들과의 교류를 통해 고해하듯, 자신의 아픈 과거를 참회하듯 죽음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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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난 뒤 나는 어쩐지 백인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들은 친구가 되어버린 이웃 베트남 몽족의 철부지 틴에이저 가족을 위해 장렬히 '순교' 하는 코왈스키에게서 자부심을 볼까.
그들 '아버지 세대'의 미국식 가치관과 오늘에 이르른 쓸쓸함에 아쉬워 공감할까.
내 눈에는 그것은 인종주의나 구원이나 정의감 혹은 숭고함과는 구별되어야 할, 다만 외로움의 표출이었다.
그 외로움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볼 것인가가 결국 이 영화의 색깔을 각자 결정짓는 기준이 될 것이었다.
영화를 관람한 그 어느 이민자도, 어떤 아시안도 백인이 그들 삶의 고난을 보호해 줄 존재라고 생각할 리 없다. 오히려 이 '아시안'의 눈에는 아무 염려도 걱정도 없을 것 같은 미국의 백인 시민이 시대를 관통해 살아오며 감내해야 했던 인간적 고뇌가 잡혀 안쓰러운 기분이다. 그들은 이민자의 나라, 그들의 조국에서 내내 새로이 적응하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다
몇몇 리뷰 속에서 미국인들은
이제 우리가 영화 속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인종주의적 농담을 들으며 소리내어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가려운 주제를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대로 긁어줬다, 식의 의견들을 보였다.
다양한 시선과 바라볼 포인트가 공존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아마도 그 점이 또 이 영화의 특별한 매력일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랜토리노는 미국 포드 자동사회사의 72년 모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이 옛날 모델이 우리 동네 어딘가에서도 돌아다니지 않을까 싶은 유치한 기대로
동네 몇바퀴를 돌아봤지만 찾지 못했다.
70년대 유명한 티비 형사물 시리즈인 스타스키와 허치에도 그랜 토리노가 출연했단다.
이른바 콜라병 차체 Coke Bottle Bodytle Body 라고 하는,
앞뒤가 길고 중간 부분이 상대적으로 좁은, 전형적인 미국차 스타일인 이 모델은 그저 과거 흔했던 대중차다. 
영화 속에서는 어린 친구들의 도둑질 타겟이 되고 손녀가 상속받고 싶어하는 자동차로 등장하길래
중고차 가격을 뒤져보니 그저 뭐 5천불 내외였다. 대중차 맞다.  

여하튼 그러나 그랜토리노는 당연히 하나의 상징이다. 그것은 어쩌면 코왈스키 자신이며 어떤 정의와 신념이 그래도 살아있다고 자부했던 미국의 얼굴인 셈이며 또한 내 보기엔 그냥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처럼도 보인다. 그 아이콘 하나만으로도 웅변하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나무랄데 없이 원숙한 이스트우드의 연기에 상대적으로 서툰 동양의 어린 배우들은 다소 안쓰러웠다.
미필적고의쯤 되는 의도된 캐스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에서 갱단을 구속하던 경찰이
'총을 지니지 않았던 그를 쏘았기 때문에 갱단들은 오래 감옥에서 썩어야 할 꺼다' 라고 던진 한마디 대사는 좀 사족스러웠다.
함축된 시어에 문득 설명문 한줄이 붙은 감이었다.

멋부리지 않은 배경에 일상이 편안히 담긴 화면은 헐리웃 스타일보다는 어쩌면 독일 영화스럽게 보인다.
M1 소총, 미국식 이발소, 지포 라이터, 엔딩화면 위에 흐르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노래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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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2009.04.21 16:20 | 보고읽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4997 주소복사




6억원의 상금이 걸린 퀴즈쇼에 참가한 인도 뭄베이의 18세 고아 청년 자말.
제대로 된 교육 한번 받아본 적 없는 전화 회사의 차심부름꾼이, 출제된 문제를 모조리 맞추고 최종단계에까지 진입한다.
속임수나 부정행위를 의심받고 만 하루동안 고문 수사를 받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문제의 정답을 알수밖에 없도록 해준 과거의 경험 하나하나들을 털어놓는다.

아주 흥미로운 설정이다.

하필이면 퀴즈쇼에 등장한 문제들이 자신이 살아온 짧지만 험난한 세월의 경험 안에 숨은 해답을 담고 있는 질문들로만 우연히 이어진다면?
신이 개입했다고 밖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러나 인생이 역전되는 그 짜릿한 기적을 꿈꾸는 대다수 우리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믿고 싶게 하는 그 기적의 유혹, 운명의 옷을 입은 판타지.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그 기적의 판타지인 셈이다.

부모를 잃고 형과 함께 거리를 뒹굴며 부랑자로 성장해온 소년 자말의 불우함이
가장 인텔리전트한 계층의 교양이랄만 한 (교양을 빙자한 일확천금의 판타지쇼가 그 본질의 정직한 얼굴이겠지만) 퀴즈쇼의 해답을 은연중 체득하도록 도왔다는 역설.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서건 어떤 환경에서건 결국 삶을 통해 배우며
운명의 수레바퀴는 어떤 길 위에서도 제 속도에 맞춰 구른다,라고 하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명료한 진리를 두 시간여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다시금 일깨우는 이야기다.

누구나 꿈꿀 법한 한 방의 인생 역전,
이에 대한 우리 모든 범부 필모들의 갈망을 엉뚱하게도 인도라는 사회 씬에서 의외로 확인시켜주는 이야기이며
어린 아이의 성장 과정을 통해 낯선 이국 사회의, 그러나 참 우리의 것과 어김없이 닮아있는 가난과 부조리와 폭력과 밑바닥 삶의 처절함을 더불어 투영하는 아픈 고발극이다.

그러나 그 어떤 모습에 앞서 이 영화는 순수한 어린 청년의 사랑 이야기로 이름지워진다.
어릴 적 한 소녀를 향해 품었던 사랑을 이루고자 견디어 살고, 우연찮은 삶의 '금전적' 행운을 맞이하며, 
결국 놓칠 뻔했던 사랑까지도 찾게 된다는 동화같은 이야기다. 
순결한 사랑을 지닌 자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날 거액의 상금을 거머쥐게 되고 아름다운 사랑까지 얻는 해피한 마감을 통해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안도와 흡족을 교과서처럼 선사하는 홀가분한, 이야기다.

3세계의 무대 배경과 전통 멜로디를 베이스로 한 음악이 일단 호기심을 끌고
뻔해도 확실히 보증받는 신데렐라의 신분 상승 스토리 구조가 흥미의 유지에 작용한다.
퍼즐의 조각을 맞추듯 해답을 알게된 과정을 풀어가는 흐름이 
퀴즈쇼의 생래적 박진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스토리를 따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한마디로 재미있다. 

2008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8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
최근 보았던 <벤자민 버튼>이나 <더 리더> 같은 작품들과 견주어 월등히 높은 성과를 거둔 셈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이색적인 풍경과 배경 음악의 독특함은 비교할 수 없어 우열을 가르기도 어려운 유니크함을 지닌다. 
하지만 재미보다는 철학과 의미를 고답적이리만치 따졌던 아카데미 수상작이라기엔 의아할 정도로 깊이감은 없다.
그것은 온 출연진들이 인도의 댄스곡에 맞춰 다함께 춤을 추는 엔딩 장면의 이미지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실은, 비극적 죽음으로 퇴장했던 주인공들이 막이 내린 뒤 무대에 다시 올라
웃고 박수치며 관객을 향하여 인사할 때 아주 찰나적인 당혹함 같은 것을 늘 좀 느껴온다, 촌스럽게도.
더구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이 캐릭터를 다 벗어던지고 한데 모여서,
말하자면 훈련된 '배우'로 얼굴 바꿔 등장해서 이미 충분히 연습된 군무를 보여주는 그 '보너스'가 나는 좀 불편했다. 
맘마미아의 유머러스한 엔딩과는 달랐다.

슬럼가의 개로 살아온 어린 청년 자말이 능란한 댄스 실력을 보여주는 다소 황당한 엔딩은
참을 수 없...다기 보다는 그러잖아도 좀 아쉬운 영화의 가벼움을 가중시킨 기분이다.
더구나 그들이 그렇게 '다같이' 행복할 상황을 맞았던가...
주인공 남녀가 앞으로 재미있게 살아갈 경제적 부를 한순간 거머쥐었다는 것 뿐 아닌가.
나머지 괴로운 인생들은 한치의 유익도 해당없다, 여전히.

어쩌면 탁월한 재미만큼 안으로 파고드는 공감이나 감동이 상대적으로 부족한데 대한 허전함의 푸념일 지 모르겠다.
선한 판타지는 이뤄졌지만 그 행운의 열쇠를 얻은 것으로 궁극의 선이 이뤄진 양 추앙하며 기뻐하는 얄팍함,
거기에 고개 끄덕이기가 좀 자존심 상했던 것이라고, 나는 그저 생각해본다.

모처럼 인도인들의 독특한 영어 억양을 듣노라니
다운타운에서 숱하게 만났던 인도 이민자들과 일치 혹은 오버랩되는 많은 장면들로 인해 내겐 한묶음 별도의 감상이 생겨났다. 그것은 호불호의 느낌과는 많이 다른 좀, 특별한 것이다.

쇼호스트가 미끼로 던진 오답을 통해 인간 심리의 복잡 미묘함을 엿보는 장면은 흥미로왔다.
1백달러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 누구인지를 내가 분명히 알고 있다는 사실도 스스로를 잠시 돌아볼 몇가지 의미가 되어줬다. 
마지막 씬에서 그녀 입술에 앞서 얼굴의 상처에 먼저 키스해주는 자말의 섬세한 사랑은 좀 마음에 들었다.

인도 영화의 거죽을 입고 있지만 실은 영국 영화이기에 아카데미에서의 인도영화 약진 운운은 어울리지 않는 평가다.
<트레인스포팅>으로 알려진 감독 대니 보일도 주인공 배우도 일단 영국인들이다.
오히려 엄청난 상금의 다양한 퀴즈쇼가 소개되는 미국 티비의 대중 정서와 문화적으로 공감 할 베이스를 깔고 있는 점이
그 호평의 바탕이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뭐 그렇다. 
복권이건 퀴즈쇼건 엘리베이터에 대한 인간의 수직상승 욕망은 이미 공용어다.
공감과 기대를 대리 만족으로 체험하게 하는 두 시간- 불평할 일이 없다. 불평할 것까진, 그렇다, 없다.





    

40. 영화 체인질링 The Changeling

2009.03.15 15:46 | 보고읽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4958 주소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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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eling :
a baby that is believed to have been secretly exchanged for another baby by fairies


문제는 어디에도 신비로운 요정의 개입 따윈 없었다는 거다.
어느날 갑자기 집에서 실종되어 버린 싱글맘의 일곱살 아들.
몇개월의 고통스런 수색 끝에 마침내 되찾은 아들이라고 경찰이 데려온 낯선 아이.
그 혼란과 분노가 어이없는 체인질링의 시작이다.

1928년의 미국 로스앤젤레스는 1928년 일본제국주의에 짓눌린 동시대 대한제국의 인권에 비해서는 훨씬 세련되고 열린 마인드로 보여지긴 한다. 전화 교환원인 그녀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며 교환수를 관리한다.
그래도 여자 혼자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갈 수 있고, 시민들의 힘으로 공권력의 치부가 드러내어지기도 하며
그나마 구축된 민주주의 시스템의 골격에 에 힘입어 불공정한 관례들이 개선되는 결과도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 '경찰' 로 샘플링 된 권력의 폭력성은 숨막히는 분노를 일으킨다.
수십차례의 어린이 실종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경찰의 무능력을 조작극으로 화장시켜 무마하려는 치졸한 발상은
봉건주의 구시대의 비상식을 능가한다.
정말이지 이럴 땐, 권력의 근처에서 혀끝으로도 맛을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권력이라는 몰약을 마신 이들이 하나같이 보이는 똑같은 행태들, 
오로지 권력의 유지에만 급급하게 되는 그 사이드 이펙트가 때로 아주 흥미롭게 보인다.
한번 정말 어떻게 되는지 그 물에 발 담가보고 싶다는 유혹도 생긴다. 

영화는 아들을 향한 지극한 모성과, 모성이 발휘하는 무한한 힘과 능력에 기대어서
국가와 정치와 권력과 개인의 권리, 또한 여성의 인권, 정신적 상해자들의 인권과
심지어는 사형수의 인권에 대한 물음까지도 나직한 목소리로 웅변한다. 아주 현명한 방법이다. 
그 웅변이 권력자의 큰 목청 아니라 그 단단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소시민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역설되는 모습이
안타까움과 공감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탓이다.
하지만 통쾌함이나 후련함보다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모성이 치러내야 하는 지독스런 인내가 거기 보여졌다.
그녀의 아들에 대한 희망은 영화의 뒤편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다.
스스로는 '희망' 이라고 이름 붙였음에도 그것은 가없이 고통스런 인내일 것이었으므로.
가슴 아팠다. 
또한 여전히 엄존하는 권력의 폭거. 거의 일세기가 지난 지금, 그저 안보이는 곳으로 숨어들어갔을 뿐,
어딘가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 뻔한 권력의 무제한급 횡포에 대한 허탈과 무력감이 전이되는 기분이었다. 

중요한 점은 이 스토리가 실화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빚어내는 픽션들은 오히려 상식선에서 머무르는 지도 모른다.
사실과 현실이 때로는 상상 이상의 놀라움으로 충격을 안겨주는 일이 허다하다. 실제 그렇다.

클린트이스트우드의 캐릭터, 혹은 관심사나 신념이 배어나는 플롯, 찬찬한 카메라의 시선을 역시- 하며 확인할 수 있다.
팔십이 다 되어간다는 이 노감독이 직접 카메라 앞에 나섰다는 영화 '그랜토리노'가 덩달아 궁금해졌다.
당대의 섹시 스타이며 뉴스 메이커인 안젤리나 졸리가 평범한 1세기 전의 모성 콜린스를 연기한다.
다 좋았는데 그녀의 도드라진 입술에 진한 립스틱 화장이 자꾸 눈에 띈다.
당시 스타일의 재현일 수도 있고, 주변인들로부터 뭔가 두드려져 보이게 하는 나름의 장치일 수도 있지만
이상하게 거슬렸다. 안 그래도 충분히 넘치도록 아름다운데.
묘하게도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영화를 연이어 보게 됐다.
그 때문인지 졸리가 피트의 러브신에 질투했다는 가십 기사가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체인질링에는 단한번의 키스 장면조차도 보여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더 억울했을까.

배우이자 감독인 존 말코비치가 여성이며 소수인 콜린스를 지원하는 목사역을 맡았다.
배우 출신 감독과 감독 출신 배우의 어울림이라는 건 참 솔직히 부러움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가는 거다.
거기에 또한 주목과 갈채까지 선물로 받아가면서! 쳇! 부럽다. 
직접 메가폰을 잡은 스타 배우의 능력이라는 것에 대해 새삼 경외심이 생겨난다.
전체를 아우른다는 것과 안쪽에 몰입한다는 것은 좀 다른 능력 아닌가.
감독은 조직과 구성자이며 배우는 그 하나는 엘레망이고 그 두가지의 능력은 사실 각자 다른 영역임에 분명한데
그들에게는 그 모두가 전부 가능하다니!
'흐르는 강물처럼' 의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상되면서 한 울타리에 그들이 어깨동무하는 그림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배우적 감성과 경험의 축적이 빚어내는 독특한 세계가 거기에 있을 것이었다. 
아, 그건 참... 멋지다, 멋진 일이다.

  

39. 티비 - 어, 재밌어! 분장실의 강선생님

2009.03.05 15:53 | 보고읽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4951 주소복사


두세가지 오락프로 챙겨보는 것이 요즘 내가 근근히 맛보는 한국 티비 문화인데
개그콘서트에 두주째 등장하고 있는 '분장실의 강선생님' 코너가 눈길을 확 끈다.

솔직히 나는 분장하고 나와 웃기는 포맷 진짜 별로다.

물론 난 코미디의 구성틀이나 '웃기기'의 정석 혹은 로직에 대해서 배운 적 공부한 적 하나도 없지만,
나름 오랜 시청자 신분의 상식으로나마 분장 코미디가 일종의 입지 분명한 장르쯤이라는 건 알고 있는데,
심형래 계열 코미디언들이 늘상 동물 탈을 쓰거나 바보스럽거나 기괴한 분장으로 등장하면서
그냥 그 자체만으로도 웃음을 이끌어내는, 말하자면 웃음 보장 티켓쯤으로 상용하는 그게 참 늘 이상했었다.
아니 연기로 웃기지 못하니까 분장으로 웃기려드는 얄팍함에 왜들 동조하는거야, 하며 외면했다.

그건 뇌주름 속의 유머 세포를 간지럽혀서 통렬히 웃기는 게 아니라 그냥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입장하는 것,
때문에 웃긴다는 인식의 주머니 아니라 그냥 좀 유치하고 어이없다는 자각으로 다소의 쓴웃음을 짓게 하는 것일뿐! 이라는
내 거만한 깡통지론을 고수해왔던 참인데
헌데 어허? 새로 등장한 요 분장개그는 뭔가 분명히 달랐다.

네명의 개그우먼들이 캐릭터 분장을 하고 등장할 때 나는, 아 뭐 이건 새삼 또 분장쇼야? 했다.
그런데 그 분장은 특별하게도 분명한 이유와 개연성을 달았다. 어린이 프로를 준비하는 배우들의 분장 - 이라는 설정이다.
이건 말하자면 분장 자체의 우스꽝스러움이 지닌 효과는 다 얻어가면서도 뭐 저런 유치한 짓꺼리로 웃기려 들어? 같은 평가로부턴 자유로울 수 있는거다. 그것은 분장실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아주 절묘하다.

아, 우린 지금 너네들 웃기려고 분장한 거 아니거덩?
이건 다른 목적이 있는 분장이니깐 관심두지 마- 라고 강변하며,
자신들의 몰골에 대해선 아예 인식조차 못하는 듯 태연히 생활인으로서의 자신들, 여자로서의 스스로를 얘기하고 주고 받는다.
서로 멀쩡히 마주보이는 그 어이없는 자신들의 모습은 웃음 꺼리가 아니라 일터에서 주어지는 자격 혹은 권리쯤으로
경외심을 갖고 소중히 여겨야 할 일종의 훈장으로 대접받는다.

흉물스런 골룸으로 분장하고서도 멀쩡히 새침한 걸음새로 오가며 여자로서 선배로서 자존심 날세운 훈계를 내리꽂는다.
야, 똑바로 해, 이것들아아~! 도저히 위엄 세울 몰골이 아닌 것쯤은 아랑곳없이 후배들의 군기를 잡고
앉은뱅이 걸음으로 등장하는 선배를 존경어린 태도로 바라봐주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지는거다.
그건 참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기 때문이다. 패러디의 쾌감이 있는 탓이다.

관객 혹은 시청자들에게는 늘 호기심의 대상인 무대 위 배우들의 비하인드 뒷담화가 엿보여진다는,
그 배경에서 이미 잔뜩 흥미진진을 먹고 들어가는 것은 물론인데
결국 그려지는 풍경은 단지 방송국 분장실만의 특수한 얘기가 아니라
어디서나, 어느 일하는 현장에서나 누구나 겪는 선후배 언니동생 위계질서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공감대가 넓은 보편적인 웃음을 이끌어낸다는 생각을 했다.
야아... 이걸 치밀하게 계산하고 의도해서 구성한거라면 정말이지 개그맨들은 최고의 심리조종사들인거야! 

첫회 보면서 아, 저거 재밌네! 했다.
야, 이것들아아~ 우리 땐 상상도 못할 일이야아~! 하는 안영미의 말투는 유행어 조짐도 느껴졌다.

달인, 안상태기자, 그건 니 생각일 뿐이고...! 가 익숙을 넘어서 숙성 발효 단계에 들어간 시점에
유쾌하고 재밌는 코너 하나 만났다.
뚱뚱하지 않고 못생기지 않고 남자 안 끼워줘도 우리끼리 무지하게 웃길 수 있다는 여자들 넷의 색다른 의기투합도 즐겁고
강유미와 안영미의 콤비 개그가 모처럼 반가운 기분도, 있고.


38.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 The Reader ** 스포일러 있다고 봄

2009.02.28 16:03 | 보고읽기 | 제니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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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길에
몸이 아파 고통받는 소년과 그를 도운 여자가 있다. 그들은 이후 재회하고 이어 사랑을 나눈다.
이야기의 시작은 늘 그렇듯 만남에서 출발한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과 즉시적인 이끌림은 타당한 이유 없이도 왠지 그저 받아들여졌다.
아니 어쩌면 무조건의 이끌림이 어떤 작위적인 필연보다 더 리얼할 수 있다. 우리 삶은 오히려 실제 그렇다.
그러나 처음 얼마간은 15세 소년과 36세 여성의 육체적 만남의 씬들이 편치는 않았다.
틴에이저에 대한 무조건의 연민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순전히 내 사정이다.
그들은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마주했고 여름의 몇달을 온전히 서로에게 몰입했다.
남김없는 솔직함이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살아갈수록 더 그걸 느낀다.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여자 한나 슈미츠와 책을 읽어주는 소년 마이클 버그.
사랑을 나누기 전에 그들은 책을 읽는다.
소년은 들려주고 여자는 듣는다.
사랑이라는 보상을 위해 열심히 책을 읽어주는 소년의 행위는 그러나 관계에서 무력한 소년의 불안정한 지위를 올려주고 있다.
책을 읽어주고 받는 작업으로 관객은 두 사람의 나이 차로 인한 불공정의 편견을 어느새 중화시킬 수 있다.
중화된 관계는 누군가 더주고 누가 덜받는 도식을 벗어나게 하며 그들의 사랑은 그로 인해 자유롭게 비춰진다.
그 이후로는 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문맹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한나가 감수해야 했던 시간은 가혹했다.
더구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가항력의 폭로를 요구받은 개인의 수치심은 너무나 무력했다.
그녀는 엄청난 죄를 거짓으로 인정하면서 간신히 그 자존심을 지키는 평생의 댓가를 치른다.
전쟁과 전쟁의 상처는, 마치 핵폭발의 가늠키 어려운 후유증과도 같이 예상치 못한 개인의 구석구석 인생 전부에 영향을 끼친다고 영화는 조용히 역설하고 있다.
상이 군인의 보여지는 상처 뒤에는 수면 아래 빙산과도 같은 그 뒷무대의 가려진 아픔들이 무한 증식하고 있음을 소리없이 외치는 것이다. 아무도 미처 모르지만 그러나 겪는 이에겐 온전한 고통임을.
한나는 그 안타까운 희생양이었다.
 
수감 중인 한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책을 읽어 녹음된 테이프를 보내주는 옛 연인 마이클의 시도는 
한나가 마침내 글을 깨우치고 마이클에게 편지를 띄우는 시점 이전까진 따뜻한 배려와 깊은 사랑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의 접근을 불허한다.
여자는 여전히 그의 사랑을 희망하지만 그는 주저한다.
순수한 첫사랑의 상실로 남자는 이후의 삶 전부에서 늘 불구자다.
그의 시도는 때문에 실은 사랑이 아니고 더이상의 배려도 용서도 아닌, 자기 상처의 치유를 위한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한나의 자살은 수십년만에 이뤄진 단 한번의 재회에서 감지한 좌절 때문이었다.

사랑은 온전한 영혼을 지닌 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사랑에 의한 상처는 또한 사랑을 제대로 보듬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게 아프지만 사실이다.
때문에 두 사람의 비극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 지워준 상처다, 안타깝게도.



2차 대전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만는 미국 영화답다.
로맨틱을 양념으로 장식하지 않은, 독일풍의 직설적인 담백함이 영화 전반의 컬러다. 그 사실감이 몰입을 부추긴다. 흔쾌히 따르고 싶었다. 

케이트 윈슬렛은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한, 강하면서도 감추어진 연약을 지닌 한나의 캐릭터와 일치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감탄을 이끌어낸다. 타이타닉의 철모르는 소녀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온전히 새 옷을 갈아입고 완벽한 한나로 재탄생하고 있다. 마이클과 재회하며 마음의 실망과 쓸쓸함이 내비치던 순간의 그녀의 표정은 잊히지 않는 아픔을 전해준다. 상징적인 책 'The Woman With a Dog' 을 들추어 첫 글자 'The' 를 깨우치던 장면- 그 감격과 회환이 뒤섞인 얼굴 또한 케이트 윈슬렛만의 파워로 읽혔다.
해리포터, 잉글리쉬 페이션트, 쉰들러 리스트의 스타 랄프 파인즈는 주변인으로 떠돌며 누구와도 감정의 몰입을 이루지 못하는 (심지어 자신의 딸조차도) 상처입은 한 중년 남자의 씁쓸함을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아주 그 얼굴이라야 할 듯하다고 믿게 한다. 다른 얼굴을 상상할 수 없도록.
소년 마이클역의 데이빗 크로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신인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독일이라는 배경의 멋과 맛을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1995년 발표된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로 뉴욕타임즈에 1위를 마크한 첫 독일 출생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했다고 한다. 2009년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과 며칠 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도 수상했단다. 모처럼 그럴만 하다. 

감독 스티븐 달드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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