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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혀진 기억을 추억으로 다듬어 서랍 속에 가지런히 넣기

라면땅과 티라미수 디저트

2009.08.23 15:29 | 옛날일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5077 주소복사

엊그제 회사 직원 집들이에 나서면서 뭘 가져갈까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아르메니안 베이커리 마지스에서 모양 예쁜 디저트를 샀다.
조각 케잌처럼 자그마한 포장으로 된 몇 종류의 무스와 티라미수, 타르트를 섞어서 포장 트레이에 담으니깐 이쁘고 재밌어서
여자들 모임엔 딱이겠다 싶었다.

휴지나 세제나 화분 사가려다가 겹치지 않을 걸로 사가자 싶어 결정한 품목.

디저트를 준비해왔다니깐 다들 어떤거냐 궁금하다 하면서 '미국 스타일' 이라고 한마디씩 한다.
그니깐 디저트를 준비하는 거가 미국 스타일이라는 말인거다.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동료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건너온 지 일이년 남짓 된 친구들이라 그런 것이 눈에 드나보다.
나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듣고보니 맞는 얘기다.

처음 미국 와서 나 역시도 사람들이 진짜 꼬박꼬박 디저트를 챙기는 걸 보면서
뭘 꼭 저렇게 디저트를 먹어야 하는걸까? 의아했던 기억이 분명히 있으니까.
한국에서도 후식을 먹긴 하지만 대개는 과일 한 두 조각쯤, 그것도 기분 좋고 여유있는 날 보너스로 티비 시청용으로 즐기는 것일 뿐
달콤한 맛의 디저트를 하나의 정식 코스로 즐기는 풍습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나 역시도 주변에 차고 넘치는 디저트 메뉴들에 그냥 젖다보니
평소 식사 때는 아니지만 모임 때는 디저트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참 벗어날 수 없이 한국식으로 사는 몸인 나조차도 그렇게-. 이 나라에서 살아온 세월이 그만큼은 흐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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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는 희찬이 간식 한다고 감자를 튀겼다.
버거집에서 파는 프렌치 프라이스보다야 바삭함은 덜하지만 그래도 새 식용유에 생감자만 튀겨 내는 것이 파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면서 한접시 만들어내는데,
이 녀석은 그러잖아도 좁은 부엌에 옆에서 대뜸 라면을 먹겠다고 수선이다.

펄펄 끓는 국물 속으로 풍덩 입수하는 라면, 그 옆에 부스러기가 남은 봉지를 입에 털어넣는 녀석을 보면서
슬그머니 미소가 나오다가 아, 이거 튀겨서 라면땅 해먹어보자 싶어진다.
저번부터 한번 해먹어야지 했다가 늘 지나가곤 했던 장난인데, 오늘은 아주 제대로 걸렸다.
온도 다 올린 기름팬 옆에 있겠다, 라면도 있겠다 말이지! 에헴.

라면땅.

아주아주 어릴 적에 즐겨먹던 10원짜리 과자.
라면 봉지 밑에 남은 부스러기를 봉지째 입에 탈탈 털어넣으며 아쉬워하던 그 입맛을 딱 제대로 겨냥해 출시되었던
라면 부스러기로 만드는 과자 라면땅.

손바닥만한 봉지에 한줌쯤이나 들었을까
끓여먹던 라면 봉지 속의 잔부스러기가 주는 아쉬움을 지금 생각하면 그닥 후련히 해소해주지도 못했을 쬐그만 과자지만
어릴 적 입맛은 평생 가는 법인건지 추억이 깃들어져 무조건 로망인건지
여튼 라면 끓일 때면 때때로 그 과자가 떠오르곤 했다.

워낙 대히트를 친 과자라 얼마 후에는 다소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자야' 라는 이름의 과자가 나왔는데
얘는 라면땅보다 좀 더 가늘고 긴 모양에 과자 봉지 모양도 직사각형으로 길게 좀 색다르게 포장했고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만화영화 사파이어 왕자가 캐릭터로 등장해서 눈길을 확 끌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여러가지 의미에서 여자애들을 겨냥한 컨셉이 아니었나 싶지만
과자쪽으로는 워낙 얼리어댑터였던 나는 지조도 없이 냉큼 자야로 변심을 하고
그 담부터 라면땅은 왠지 동네 남자 개구장이들용 간식
자야는 좀더 깔끔한 여자아이용 간식쯤으로 차별화를 선언, 두배나 비싼 20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해가며 먹었던 생각이 난다, 하하.

하지만 원조는 원조다.
원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후발주자는 늘 원조를 실컷 읊고 난 뒤에 잠깐 거들어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 어릴 적 라면과자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라면 부스러기 재활용 과자! 라고 하면 다이렉트로 '라면땅'을 떠올리게 되는 거다.
아마 이후에도 여러가지 다른 이름의 유사품이 등장했을텐데,
한가지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포장지에 북한 간첩들이 주고받는 암호가 숨겨져있다는 소문으로 한동안
어린이 커뮤니티에서 최대 이슈가 되었던 모 과자도 아마 라면과자 종류였던 생각이 난다.




여하튼 오늘의 초간단 오도독 추억씹기 버전 간식 제조에 착수한다.
되도록 날 밀가루 맛이 풀풀 나는 저렴한 식당용 번들 라면- 주로 삼양 브랜드였음 - 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므로 비싼 신라면을 사용했다.

봉지를 뜯지 않고 최대한 안에서 뽀개어주는 것이 중요한 첫 단계.
짧고 굵은 부스러기 형태로 만들어 원조의 모양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부스러진 모양을 보니 어쩌면 너구리 같은 우동면 버전이라면 아마 더 모양이 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만드는 방법은 뭐 간단하다.
잘게 부순 라면을 기름에 살짝 튀겨주는 것.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설탕을 듬뿍 뿌려주는 것, 이상!

이걸 갖고 제대로 간식스럽게 만들겠다고 좀 큼직한 덩어리를 유지하게 한 다음 튀겨서 물엿 같은 것에 뒹굴게 해서
일종의 그럴듯한 튀김간식으로 버전 업 하는 것은 예전에도 몇몇 요리 페이지들에서 보아온 바 있지만

내가 찾는 것은 라면 간식이 아니라 옛날 과자 라면땅이므로 최대한 공정이 단순하고 초저가로 출시되는 라면땅 스탈을 고수한다.

담고보니 모양은 그럭저럭 비슷한데 맛은... 흠.

 - 라면으로 끓여먹지...아깝게.

한 입 먹어본 녀석의 품평이다, 쳇.

 - 얘, 라면은 라면이고, 이건 그냥 간식이니깐.
 - 아 맛이 없다는 건 아니고, 같은 재료라면 그냥 라면으로 끓여 먹는게 더 맛있다는 말이야.
 
하긴, 어쩌면 라면 갖고 만드는 간식으로는 그냥 뽀개어서 그 안에 스프 털어넣고 다시 흔들어 섞어서
손가락에 입가에 스프 가루 잔뜩 묻혀가며 먹는 수동 즉흥식 라면과자가 더 간단하고 맛좋은 간식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오랜만의 라면땅이 즐거웠다.
색깔을 내느라 좀 오래 튀겨서 아주아주 조금, 씁쓸한 듯한 맛이 아주아주 조금 아쉽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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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누구네 모임에 나설 때면 무스에 초컬릿이 가득한 폼나는 유럽식 디저트를 심상하게 준비하는
그래도 이제 햇수 꽤 살아 어느새 모르는 새 조금씩 미국 물이 배어드는 얼치기 이주자라지만

가난하던 나라의 어린 국민으로 살던 시절의 후식 아닌 간식을 여전히 기억하고 사는 또 그렇게 구식인 한국인이기도 한거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안에서 이미 나름의 멜팅 팟으로 살아간다는 말인걸까.
오래묵은 구식의 추억과 취향과 한국 입맛에, 낯선 딴나라식 습성과 문화가 얼기설기 뒤섞여서 그렇게, 오락가락 사는걸까.
다양한 것이 어우러져 녹든 섞이든, 여하튼 그 한덩어리가 그냥 그대로 미국 문화- 라던 이에셀 클래스의 미세스 데이비슨의 코멘트가 생각난다. 그런건가.

 - 이거 라면땅을 라면 국물에 넣고 다시 끓이면 어떻게 될까?

미국 학교에서 꼬박꼬박 전혀 비 한국식인 점심밥을 먹으면서 입맛이 길들여지고 있으면서도
초코칩 쿠키나 브라우니 보다는 홈런볼에 초코파이, 에이스 크래커가 여전히 주력 아이템인 희찬이,
신라면에 뜬금없이 고추장 한숟갈을 떨궈넣고는, 이미 요상한 '멜팅 팟' 에 끓인 실험버전 라면을 후루룩거리던 녀석의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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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1학년 때의 나는 짧은 커트머리- 이른바 상고 머리였다. 그건 오롯이 이발소 작품이다. 
아빠와 함께 이발소에 들어서면 아저씨는 널판지를 꺼내어 팔걸이에 걸쳐 놓는다.
그리고는 나를 번쩍 안아서 급조된 어린이용 의자, 즉 널판지 위에 앉히고 목을 꼭 조이는 하얀 가운을 재빨리 둘러준다.

거울 속에 비치는 나는 동그만 얼굴 하나에 몸통은 유령처럼 하얀 덩어리다.
어둔 형광등의 차가운 불빛 아래, 겁먹은 내 얼굴이 어린 맘에도 몹시 추워보였다.
목을 조이는 갑갑한 가운의 압박에 반항도 못하고 고개 한번 돌릴 엄두를 못내는 마음 약한 어린 계집애로서는
거울 속으로 반사되는 이발소의 풍경에 시선을 두는 것만이 유쾌하지 않은 그 시간을 견뎌낼 유일한 유희였다.

왼편에서는 로봇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신기한 의자에 반쯤 누운, 낯선 아저씨의 얼굴이 거품으로 온통 뒤덮여 있고
의사 선생님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아저씨- 가끔은 언니였던 - 가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칼질을 한다.
마치 자동차 유리에 올라앉은 아침 서리를 거둬내는 새로 갈아 끼운 와이퍼처럼
사아악- 거품 안쪽으로 말갛게 드러나는 얼굴을 만족스럽게 점검하며 입맛을 다시듯 연신 수건에 칼날을 닦아댄다. 

나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한데 엉킨 묘한 긴장감으로 그 장면을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다.
말끔히 거품을 치워낸 얼굴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수건이 문득 철퍼덕 덮인다.
아저씨는 순간 작은 신음을 뽑아낸다. 나도 움찔한다.
그러는 사이 내 머리는 어느새 짧게 잘리워지고 뒷목덜미에선 면도날이 스윽스윽 잔머리 긁어내는 소리로 피날레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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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내게 남아있는 이발소의 기억이다.
아마도 봄이나 여름쯤까지 나는 그렇게 아빠 손에 이끌려 이발소엘 드나들었을 것이다.

1학년 가을 학예회 때 검둥이 삼보 이야기를 다룬 연극에서 타이틀롤(!)을 해야 했다.
그런 비중있는 역할이 주어지게 된 것은 순전히 같은 1학년 선생님으로 근무하셨던 엄마의 탓이다.
짧은 시간에 가장 효과적으로 훈련시켜서 무대에 올릴 인간으로는
담당 선생님 딸래미만큼 만만한 대상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유도 모른채 매일 저녁 노래를 외웠고 무용을 따라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비로소 이발소 아닌 미용실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디뎠다.
흑인 어린이였던 '검둥이 삼보'의 캐릭터로 분장시키기 위해 엄마는 나를 생애 처음 미용실이라는 곳에 데려가서
뜨거운 고데기 인두로 지글지글 지져서 뽀글뽀글 말린 요상한 머리를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주 공포스러운 미용실의 첫 경험이었다.
그 첫 경험 이후로 엄마는 나를 더이상 이발소 보내기를 멈췄다.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그 이후로 나는 머리를 길렀던 것 같고, 다시는 이발소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십년, 이발소라는 곳에 나는 가본 일이 없다.
성장기 때는 늘 아빠와 오빠와 남동생끼리 공중 목욕탕 다음 코스로 들러오는 '남자들만의 장소' 로 그냥 각인이 되어
그건 그냥 남자 목욕탕과 동일시 되는 장소 쯤으로 여겨왔다.

멋진 추억을 선사한 곳은 아니었으니 당연 가보고 싶은 생각도, 갈 일도 없는 곳이지만
동네 어귀 약국 옆, 저녁 어스름에 하염없이 돌아가던 그 파랑 빨강 무늬 형광등 사인의 묘한 유혹은
금지된 지역임을 신호하는 경고등처럼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경계했다.
그 불빛을 바라보며 나는
서걱대던 면도날과 묘하게 쾌감을 주던 거품 거두어진 맨 얼굴의 뽀송함과
사정없이 얼굴 위로 던져지던 뜨거운 수건을 기억했다. 그곳엔 뭔가 다른 것이 있었다고 되뇌었다.

바버샵에 앉은 두 백인 남자의 풍경은 편안하고 넉넉한, 자기들끼리만의 즐거움을 누리는 한가로움으로 비춰진다.
그들은 거기에 그들 '끼리' 앉아있다. 웃고 있다.
미용실에서 여자들 속에 섞여 여전히 다소 어색해하는 남자들의 그 조심스런 표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들은 그들이 '장악' 하고 있는 공간에 안전하게 있어 보인다.
그곳은 내가 들어갈 수 없다.
그들도 그것을 안다. 나도 안다.

하지만 오래 전 추억을 새로이 부르는 이발소의 회전등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 모습을 담고 싶었다.
바깥 멀찍이서 뷰파인더로 그 윈도우를 바라보며 무척 조심스런 기분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부족한 망원 렌즈로 잡아야 했다. 그냥 그랬다.
은밀한 어떤 불순함도 없이 다 바라보이는 공간이었지만, 나는 침입하지 않고 경건히 존중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서 최대한 서로가 '평등' 하게 살아가고자 하며 기실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젠더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이 '발전하는 현대적인' 사회 속에서 우리 여자들이 남자들이 독점해온 수많은 영역에 보다 넒은 공간을 확보하려 '투쟁' 하고 있음에도 한편으론 여전히 우리끼리의 공간을 갈망하고 요구하듯,
그들 역시 바버샵의 경광등을 밝히고 남성들만의 단단한 영역을, 과시함 없이 그저 '구분짓고' 싶어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이제 서로 적절히 섞이고 엉켜져서 물론 당연히 미용실을 여성들만의 공간이라고 터부시하는 남성들은 표면적으로는 사라졌다.
다행스런 일이다. 여성들이 그들을 그렇게 열린 마인드로 이끌었다. 장한 일이다.
하지만 바버숍.
그 여전한 쉐이빙 크림 냄새나는 대상이 거기 분명히 실존함을 확인하며, 나는 그 존재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사실 우리들과는 분명히 구획지어진 공간이, 그런 대상이 좀더 당당히 있기를 원하는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기꺼이 인정해주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지적 우애로써. 페어 플레이에 대한 믿음으로써.
그들에게는 언제나 그들만의 동굴이 필요하다는 걸, 소홀히 않고 기억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되살아났다.
자발적으로 그랬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예전에는 다르다는 것을 차별과 구별할 줄 몰라 발끈했더랬다. 지금은, 다른 것이 좋다.
아니, 달라야 한다. 틀림없이.
나는 그렇기에 동성끼리 이성애적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동감하지 못하고
철저히 남자와 여자로서 당당히 자기 존재'답게' 살기를 바란다.

사실, 그렇잖은가.
우리는 다르기에 서로에게 끌린다. 다르기에 존재한다. 그것이 진실이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경건한 손톱, 그리고 가락지

2008.11.11 10:44 | 옛날일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4845 주소복사

부러진 손톱 보기싫어 다 잘라버렸더니 아주 손가락이 짤뚝해졌다. 원터치 참치 캔 하나 걸어 당기기 힘겹다.  

알량하게 급조된 원타임용 아마추어 밴드에서 찬양 한 곡 키보드질 할 일이 얼마 전에 딱 한번 있었다.
어쿠스틱 피아노와는 달리 두드리는 만큼의 음량을 시원하게 뽑아주지 않는 디지털 피아노의 빌트인 스피커.
그 당연한 숙명적 한계를 체념 못하고 세게 누르면 센 소리 나올 줄 알고 마구 두드리니 어느새 손톱이 다 깨진거다. 아 뭐 칼슘 부족으로 부실한 퀄리티가 제일 큰 원인일테지만...쩝.

순간, 연주 때면 언제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손톱을 짧게 자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던 피아니스트가 불현듯 기억났다.
종일 연습하고 매일 연습하고, 거르지 않는 연습으로 손톱이 자랄 새도 없이 늘 뭉툭할 수밖에 없는 그임에도
연주 때는 다시 정갈하게 손톱을 자르고 비로소 피아노 앞에 앉는다고 했었다.

그런 대가들도 건반 앞에서는 겸허히 손톱을 자르고 거친 마음을 자르고 비로소 조심스레 건반과의 귀한 만남을 갖건만
난 대체 무슨 방자하고 겁대가리 없는 짓이었나 싶다.

10여년 전에 만났던 그의 손은 정말이지 겸손했다.
건반을 행여 상처낼까 염려하듯 손가락 안으로 모두 얌전히 들어앉아 말끔히 입다물고 있던 손톱들. 

 - 어느날, 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전람회의 그림' 을 연주하는데 친구가 내게 그러더라구. 왜 그렇게 세게 치느냐, 세게 치지 말고 세게 느껴라, 내가 커지면 큰 소리가 난다...

그가 들려주었던 그 말을 또박또박 기록하며 가슴 울리는 깨달음으로 삼켰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하건만.

마음이 급해져 부리나케 지나간 기록을 뒤적여 마침내 찾아낸 사진 속에는
바래가던 기억을 선명하게 해줄 그의 고백과 꾸밈없는 모습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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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그 이미지 속에서 의외로 내 가슴을 울리는 또 하나의 기억을 되살리게 됐다.
그의 뭉툭한 손가락에 얌전히 끼워져있던 낡은 가락지.

귀금속 감정에 일가견은 전혀 없지만
한눈에도 18K는 안 넘어보이는 오래된 금가락지 하나씩을 나란히 왼손 검지에 끼고 앉았던 그들은 50을 넘긴 관록의 부부였다.
국수 그릇을 앞에 두고 앉은 두 사람.
아내가 이윽고 젓가락을 집어들자 남편은 얼른 그녀의 소매가 국물에 닿지 않도록 두 번 접어 걷어주었다.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 손 내밀어 가만히 기다렸다가 비로소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왔던 두 사람의 가락지.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어, 아주 오래 전 그들이 어떤 '약속'의 의미로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던 것이 틀림없음을
스스로 자랑스레 웅변하고 있는 그 가락지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더우기, 화려한 보석 박힌 반지 하나쯤 못지닐 리 없는 명망가로서의 그들의 그 소박한 반지는
치장한 것 없이도 충분히 그윽한 자신감과 안정된 내면을 드러내는 부부의 모습과 아주 닮아 있어 더욱, 특별해보였었다.
그 모습에 새삼 시선이 멈추며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을 만났던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반지를 끼지 않은지 오래다.
반지를 빼고 지내는 것에 특별한 의도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설거지할 때, 요리할 때 알이 위로 도드라진 그 반지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 빼기 시작했던 것이 그 출발이었을테다.
매일의 일상이 낭만의 상징을 앞지르고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는 때 아마도 빈 손가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즈음엔 더이상 손가락에 맞지 않아... 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거기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개가 그렇다. 그렇게 살아간다.
생활이라는 굵어진 마디가 서서히 반지의 진입을 거부하게 될 때 우리는 그래, 그런거지...하며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 부부의 모습은 특별했다.
언제나, 항상- 이라는 참 쉽고 간단히 들리는 그 말이 우리의 하루하루에서는 실상 그닥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고,
매일의 수행과 인내로 점을 찍어 색을 채우는 지난함의 보상으로 간신히 주어진다는 사실을 나이 먹으며 깨달았다.
사진과 글 속에 기록된 그들 부부의 오랜 낡은 가락지, 그들을 그렇게 '가능하게 한 힘'이 새삼 궁금했다.
처음이 출발이 아예 특별했던 것인가. 세월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공로가 남달랐던 것인가.

그렇게, 뭉툭하게 말끔히 다듬어진 손가락과 상처난 반지 한 쌍의 소박한 풍경을 되뇌이며 어젯 밤,
아주 오랜만에 그의 라흐마니노프 앨범을 뒤적여 찾아냈다.
건반 위의 명상가- 로 불리우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98년 봄, 예술의 전당에서 모리스 라벨 전곡 연주 무대를 가졌던 그와 아내 윤정희 두 사람을 만났던 그 날의 기억을 새삼 새로이하며
그가 그려내는 한밤의 세레나데와 같은 가슴 저미는 선율에 침잠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장중하고도 현란한 건반을 종횡무진 오가는 그의 겸손하고 경건한 손가락과
그날에도 틀림없이 끼워져있었을 그 낡은 반지를 상상하며.
여러가지로 방자한 내 손가락을 주먹 쥐어 꼬옥 모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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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에서주인공이 비틀거리며 육교를 건너고 있다. 어... 저러다 떨어질라.. 싶은 불안감.
그러잖아도 불과 몇 시간 전, 내가 제일 싫어하는 134번에서 2번 노쓰로 갈아탈 때 지나가야 하는
초고가로 회전 구간을 엉금엉금 운전하면서 아... 여하간 공중에 놓인 길은 다 맘에 안들어.. 투덜대며 들어왔던 터라, 
문득,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허방다리 육교의 기억이 부스스, 오래된 다락방 먼지처럼 일어난다.

   - 희찬아... 너 우리 집 앞에 육교 건너던 기억 나니?
   - 엄마 나는 아주 높은 데 진짜 싫어. 아마 나 저거 못 건널껄...?

그렇군. 육교.
이 아이는 나의 아들이 맞군...

여기선 육교 볼 일이 없다.
옮겨 산 지 육년 반이 넘도록 글쎄... 한국같은, 특별히 횡단보도 대용으로 도로 위에 열린 문처럼 세워진 육교는 보지 못했다.
그걸 다행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육교라는 물건은 본질적으로 부자연의 오브제다.
이걸 이용한다라는 것은, 대세, 즉 자동차의 무리가 지어내는 속도의 메인스트림과는 정반대로
그들이 빠른 속도로 가로지를 때 애써 그걸 무시하고 그 박자와 그 멜로디를 다 귀막고
홀로 천천히 세로로 거스르며 옆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것들을 온전히 뿌리쳐야 하는 숙명에! 나를 내던지는 행위를 뜻한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상의 역모란 말인가!

뭣보다 한순간씩 일어나는 현기증.
대체 왜 단순히 길 이쪽편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단순한 행위가 이토록이나 복잡한
신체적 심리적 갈등의 극복을 내게 턱없이 요구하느냐 이 말이다.

나는 때문에 육교의 편의주의를 규탄하며 겁많은 내 본성을 최대한 합리화 하기에 주력하는 인간인데,
...... 음, 심하게 발끈하는 이 컴플렉스의 노출이란 .....
 
그럼에도 그걸 감수하며 살아야 했던 고난의 시간들이 보상처럼 내게 선물한 추억들이 몇가지 남아있음을 깨닫는다.   

아마도 네 개의 육교.
대략 그 정도가 자연스럽게 기억 밖으로 배어 나오는군.

우선은 흑석동 명수대국민학교 앞 육교다.
이건 아주아주... 어릴 적에
오빠따라 괜히 학교 쫓아가면서, 목숨을 건 어드벤처의 공포 체험을 안겨 주었던 내 생애 첫 육교다.
학교가는 오빠 따라 일하는 언니 손에 이끌려 육교의 수십 계단을 매일,
두 발로는 영 모자라 네 발로 엉금엉금 간신히 올라야 했던 그 너댓살 무렵,
나는 진실로 그를 통하여 아아... 삶은 참으로 녹녹치 않은 것이로구나,
인생은 진정 험난한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고해의 연속이구나, 하는
거의 뭐 싯달타의 대오각성에 근접한 삶의 철학을 온몸으로, 그 보리수 나무 아닌 보리수 육교에서 배웠다...헉.
 
두번째는 노량진 수산 시장 앞의 육교.
이 육교는 특히 계단이 노량진 역사와 인도 양쪽으로 갈라져 있어서 유난히 길고 복잡하다는 인상을 갖고 있는데,
사실 여기를 자주 이용할 일은 내겐 많지 않았고
다만 대학시절, 어느 초봄 늦은 밤의 짤막한 해프닝 덕분에 하나의 풍경으로 기억되어 있는 곳이다.
밤 10시 무렵 수산시장의 불빛이 휘황하던, 기차역을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하던 그 길 위에 놓인 육교에 올라서며  
아, 높은 곳에서 보니까 불빛이 참 이쁘네...하던 나를 불러세우던 목소리 하나. 
 
"같이가자! "
 
등 뒤에서 급히 쫓아오는 아는 목소리에 뒤돌아서던 순간
내 눈에 화악 들어온 육교 위에서 본 세상의 온통 반짝이던 불빛의 군무, 그 씬이
그 날의 엇갈림에 관한 잠깐의 소회와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정지된 화면처럼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오늘 새삼, 발견했다.

특별히 그 육교는, 올라서 걸어갈 때도 흔들리거나 휘청이는 느낌 없이 아주 단단하고 견고하다고 느껴졌던 기억이 있는데
트래픽이 많은 지역이라 좀더 단단한 구조를 유지했던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여하튼, 높은 곳에 올라서면 가로등의 불빛도 가까이 보이고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유일하게 더하기 효과를 선물한 장소다.

또 하나는 서초동 뱅뱅사거리 근처 두루넷 빌딩 (지금도...?) 앞의 육교.
그나마 미국 오기 가장 최근 과거의 기억에 남은 장소인 셈인데,
매일 아침 버스에서 내려 계단 입구의 포장마차에서 계란 샌드위치 하나를 서둘러 사들고 부지런히 건너던 그 육교.
그곳에는 두 개의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회사 방향과 다소 먼 쪽 계단 앞의 포장마차 샌드위치가 맛있어서
늘 계단을 오르기 직전 잠시 갈등하며 아침 샌드위치를 선택할 것인가,
단 1분이라도 빨리 출근하는 일에 전력질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던(!)
아이를 돌보며 일하느라 늘 종종걸음이었던 시절의 줄곧 바빴던 아침과 함께 각인된 육교다. 

당시에는 핸드폰을 목에 거는 것이 새로운 유행이었는데
얘가 정상적으로 걸어다닐 때는 문제 없는데 좀 바삐 걷거나 뛸 때면 가슴 앞에서 통통 튀며 덜렁거리기 때문에
육교를 건널 때마다 나는 이걸 손에 잡고 부지런히 그 관문을 통과해야 했었다.
왠지 모르지만 육교 위에서 이걸 떨어뜨릴 것 같은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던 듯한데...
...쓰다 보니 나 참 무지하게 유약한 인간이군...

마지막 하나는 평촌 안양남초등학교 버스 정류장 앞 육교.
특별히 8월의 땡볕 따가운 여름날,
서울행 버스를 타기 위해 아파트 단지에서부터 달궈진 콘크리트길을 구둣발 소리 또각거리며 걸어나오면 
다시 거대한 육교가 앞에 장애물처럼 턱 놓여있다.

땡볕에 육교에 올라선 사람들이라면 혹 다들 느껴보지 않았을까?
지상에서도 이미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열이 그리도 강렬하여 어떻게든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찾기 원하건만
이걸 부러 계단을 올라 높은 곳에, 더욱 가까이 찾아올라 더 뜨겁게 온몸으로 샤워하는 그 몹쓸 부조리에 관하여 말이다! 

여튼 그 뜨겁고 습한 8월의 육교 횡단은
묘하게도 어린 시절 명수대 육교의 기억과 교묘히 오버랩되어 더욱 나를 힘겹게 했던 기억이다.
이윽고 잡아타는 좌석버스의 에어컨에 대한 기대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수십번은 더 육교 밑 도로를 무단 횡단하고 싶은 열망에 몸을 맡겼을테다, 분명히.
 

문득 오늘 육교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짐작컨대 명수대나 평촌 육교는 학교 앞이니까
(이게 참 아이러니컬 한 거다. 횡단보도보다 육교가 안전하다는 건데, 아이들이 육교를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쩝) 
그래도 아직 살아있지 않을까 싶고,
서초동 육교는 그간 도로 정비가 크게 이뤄졌고 특별히 강남쪽은 변화가 많았다고 하니 혹 없어졌을지도 모르겠군.

노량진 역사 앞의 육교는 그대로겠지 설마?
여전히 분주한 밤 시간과 이른 새벽의 빠른 풍경, 그 불빛 한 가운데 뼈대처럼 버티고 있을까?
그렇게 시시콜콜 연예인 등속의 떨어뜨린 실밥 하나도 뉴스로 읊어대는 웹뉴스에서조차
육교의 안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이건 또 무슨 한 술 더뜨는 미친 소린가!)
 
4개의 육교.
직접 몸으로 체험한 그 움직임의 기억으로 각인된 세 개의 육교와 
밤의 불빛 세례와 더불어 하나의 정지된 씬으로, 이미지로 자리잡은 노량진역 앞의 육교-. 
시멘트 콘크리트 구조물도 그렇게 시간과 함께 얘기가 담긴 의미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나 진짜 늙었나보다.

근데, 옛날 일기는 컨셉에서 이미 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림을 달기가 어렵다.
글만 나열해 붙이려면 요즘엔 자꾸 민망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비주얼은 앞에 놓인 인생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탓에, 아무래도.

그나마 열독의 지루함을 덜고자 최선을 다한 것이 저 정도.
짧게 쓰기에 관한 웹질의 숙명적인 요구로 점점 얄팍해지는 글들을 다 갈아치우고 싶은 충동에 괴로와하다가
다시, 나의 정체성이 더 중요해! 하며 긴 글 눈 질끈 감고 써내려가기 시작한 최근의 내 결심이
이렇게 한가득 화면을 글자로만 채우고 확인 버튼을 누르게 될 땐 조금은 흔들린다...흔들흔들.  



나는 국민학교 시절 글짓기를 무척 싫어했다.

국민학교 때 쓰는 '글' 이란 구조적으로 이미 자발적인 경우는 거의 있을 수 없고
그림 일기부터 시작해서 각종 행사용 기념 글짓기 - 대략 육이오나 현충일이나 어버이날 등등의 기념일 행사용으로 
교훈과 반성의 염원을 담아 끄적거려야 하는-  글들이란 전부 '써 내야 하는 글'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숙제적! 글들은 반드시 모조지에 빨간 잉크로 금 그어진 원고지에 담아내야 하는 것인데,
나는 정말이지 그 원고지 쓰기란 것에 상당한 압박감을 받았더랬다.

규칙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선생님이 하라는 건 빠짐없이 정확히 해야한다는 정직 순진한 여린 마음의 계집아이라
원고지에 쓰는 글은 늘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룰에 대한 다소의 부담으로 시작되곤 했다.

거기엔 분명한 원칙이 존재했고 나는 그것을 먼저 '외워서 숙지' 해야 했다.

제목은 맨 위에서 두 줄 내려와 기록하되 그 줄의 정 가운데 제목이 들어가야 하므로 제목의 글자 수를 헤아려 스무 칸 중 어디에서부터 첫 글자를 기록해야할 지를 계산해야 한다.
이럴 때 긴 제목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일이 되므로 자꾸 말을 줄여 붙이게 된다.

다음 줄에는 이름을 써야 하는데, 이건 또 맨 끝에서 두 칸 앞 자리에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끝나야 하니
늘 뒤에서부터 이름을 거꾸로 써 올라가야 했다.
물론 성과 이름은 모두 한 칸씩 떼어 써야 한다.
만약 전교생에게 주어진 과제물이라 이름 앞에 학교 이름과 학년 반 까지 써야할 입장이 되면 진짜 골치 아파진다.
늘 칸이 모자랄까 전전긍긍.

그리고는 다시 한 줄을 비우고 다음 줄, 글의 맨 첫 시작은 두 칸을 비우고 시작한다.
그 다음부터 새로 단락을 시작할 때는 한칸만 띄우도록 되어 있다.

여하간 지금 생각하니 새삼 가슴 갑갑한 이 규칙을 준수하는데 골몰하느라
정작 글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와야 할 생각의 흐름 혹은 발전 같은 과정은 늘 태클이 걸리기 일쑤였고,
한번 돌부리에 걸린 생각은 올가미처럼 '의식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결국 글짓기란 그저 사고의 경직을 체감하는 고역의 시간이 되어버리곤 했다.

국민학교 시절의 글짓기는 그래서, 그야말로 '숙제'였다.

규칙에 맞추고 깨끗이 정서하고 다섯 장 써오라면 다섯장, 일곱장 써오라면 일곱장에 맞춰서 '써 내야 하는' 숙제, 그 뿐이었다.
때문에 그 어린 시절 나는 가끔, 동시를 써가야 하는 숙제가 있는 날은
마해송 전집 같은 곳에서 대충 간단한 동시를 베껴서 슬쩍 들이미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고
기념일용 글짓기는 일단은 반성하는 자세로 엎드려 출발했다가 앞으로 우리는 잘해야 한다! 는 식의
두주먹 불끈 뻔한 결론이면 대충 무난하게 넘어간다는 잔꾀를 터득해서는
천편일률적인 틀에 맞추는 글짓기로 그야말로 숙제를 치러냈다는 기억을 한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하필이면 담임선생님이 국어과목 담당이라,
특별히 자기 반 아이들의 글짓기 독후감 노트만은 철저히 챙겨서 실력을 키우리라- 는 다짐의 미션으로
우리에게 거의 일주일에 한번씩 필독 도서를 읽고 독후감 노트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셨다.

사실 말하면 나는 중고등학교 때는 클래식을 새로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나는 국민학교 6학년의 겨울방학, 12월에 시작해서 2월을 다 채우도록 그저 졸업식에 하루 얼굴 내미는 외에는
숙제도 없고 할 일도 없어 지루하도록 길고 길었던 그 겨울 방학 때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집 서고를 탐닉했다.

한쪽 벽을 다 채우도록 진열된 삼중당의 한국 문학전집, 그 두툼한 백과사전 사이즈의 양장본 12권을
이광수 박종화에서 이상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떼었고,
토지 1부 첫 전집 10권을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책상 밑에 기어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고 탐독했으며
7권짜리 셰익스피어 전집, 10권짜리 세계 문학 전집,
(그러고 보니 부모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 두툼한 전집들을 그렇게 진열해 두었던 것일까... 싶다. 읽으라고 한번 요구하는 일도 없이 말이다)
집에 더이상은 읽을 책이 없어서 읽을 거리를 찾다찾다 나중엔
아마도 전집류를 비축할 때 사은품으로 곁들여 왔었을 백과사전과 인명사전들을 마치 빈 접시 핥아먹듯 샅샅이 훑어내려갔을만큼,
마치 책귀신에 씌인 아이처럼 그 겨울을 책 속에 파묻혀 보냈었다.
그리곤 중고교 시절, 독후감을 쓰거나 교과용으로 레퍼런스가 필요할 때면 한번씩 떠들어보며
비축해둔 곶감 야금야금 빼먹듯 되새김질로 6년을 버텼던 것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양장본으로 되어있던 괴테의 작품 모음집 - 파우스트를 필두로 대략 3-4편이 묶여져 있었을 것이다 - 가운데, 제일 분량도 많지 않고 만만했다. 
그래 이전에 읽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한번 더 훑고 독후감 노트에 줄거리를 쓰고
책 말미에 역자가 붙여둔 비하인드 스토리를 체크하여 덧붙이면서 심드렁하게 그 '숙제'를 제출했던 것인데.

다만, 더이상 원고지에 정서해가며 쓸 필요 없이 대학 노트에 빠르게 써내려 가는
- 이건 참 중요하다! 원고지에 쓸 때는 절대로 '빠르게' 써 내려갈 수가 없었으므로 -
독후감 쓰기가 의외로 가볍고 만만한 기분을 주었었다는 기억이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 내겐 그저 또 하나의 숙제에 지나지 않았던 그 독후감을 읽고
그런데 선생님은 내겐 너무나도 뜻밖의, 전혀 예상치 못해 차라리 충격에 가까웠던, 칭찬의 코멘트를 노트에 적어 주셨던 것이다.
그리곤 노트를 걷으러 온 내게 따로이, 독후감 잘 썼더라- 면서 앞으로도 열심히 써봐라, 고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는데,

나는 그 때 뒷통수가 뜨끈해지며 뭔가가 한대 땅 때리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냥 쓴 건데? 별 감동없이 그냥? 해설 부분은 번역자가 쓴 것을 따다가 인용한 거고? 룰대로 짜맞추듯이 그냥...?

왠지 모르는 죄책감과 면구스러움이 내 속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지만 어쩐지 그와 동시에 나는 문득,
글짓기에 대한 내 꽉 막힌 무관심의 문이 신비롭게도 스르르 삐걱- 열리는 그 나직한 소리를 얼핏, 들었다.
어어? 그런가? 그렇게 쓰면 되는건가? 아니 나도 잘 쓸 수 있나? 내가 쓴 게 괜찮은 거란 말이지? 저렇게 써도 된다 이말이지?
 
갸웃거리며 자문하며 노트에 적힌 선생님의 코멘트를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내가 쓴 독후감을 다시 읽어보며
나는 아마도 그 때 비로소 글을 쓰는 것이 어쩌면 내게 그닥 괴로움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혹시라도 새로운 유희의 자극이 될 수도 있을 지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후로도 독후감 쓰기는 매주 거듭되었고 나는 여전히 짤막하게 한 페이짜리 독후감을 제출해갔지만
그 무렵부터 나는 왠일인지 자진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사춘기 여중생의 치기어린 감상이 흘러 넘치는 유치한 일기를 단짝 친구와 쓰고 교환하고, 그것도 모라자 쪽지를 써서 주고받고,
그 일기에는 당연히 책을 읽고 난 감상이나 그 날 겪은 새로운 일의 기록, 떠오르는 생각의 움직임, 사유 등을 기록하면서
비로소 '자발적인 글 쓰기'의 맛을 터득해나갔고
이후로부터 글짓기는 더 이상 어떤 목적을 위한 '짓기'의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원해서 하는 '쓰기'의 유희로 내 안에 자리잡았다.
 
스스로의 글쓰기가 익숙해지고 난 이후로는
요구되는 글짓기, 필요한 글짓기의 작업 또한 더이상 지루한 '숙제' 가 아니었고
신기하게도 그 모든 글 작업은 다 자발적인 즐거움으로 내겐 전부 비슷비슷한 얼굴의 한 식구가 되어 버렸다.
 
직장에 들어가면서 다시 나는 원고지와 씨름해야 할 숙명에 처했지만,
이제 규칙의 강박에서는 다소 자유로워진 '성인'이 된 내게 원고지의 네모칸은 더이상 나의 생각의 흐름을 가두는 도랑이 되지 못했다.
작은 칸에 빠르게 글자를 채워나가는 방법을 터득했고,
띄어쓰기나 칸 비우기 같은 모양 갖추기의 스트레스는 퇴고를 하면서 다소 거칠게 손보아도 된다는 특권을 남용하며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오히려 이제는 원고지의 기억은 잡냄새를 전부 휘발시키고 오롯이 추억이라는 선물로 포장되어 서랍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최근 몇십년 만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을 새로 읽으며
나는 참 오래 잊고 있었던 선생님의 존재와 그 분의 한마디가 내게 종을 울렸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지금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숙제는 커녕 그 어느 누구도 내게 요구하지 않는 글 쓰기의 작업을
단지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마음을 쏟으며 거듭하고 있는 현재의 나,
지금으로 와있는 길의 그 희미했던 출발점을 모처럼 되새기며 기분이, 좋았다. 

모든 것에는 미약하지만 분명 빛이었던 출발의 순간이 간직되어 있다.
채 눈에 띄지 않았고 얼핏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분명 그 존재가 있었기에 시간의 양분으로 뒷날 놀랍도록 반짝이는 그런 빛.

그 숨결처럼 가녀린 출발이, 중요하다. 
그것은 대부분 가능성의 나이인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 세월의 양육을 세례받아 오래 키워지지만
하지만 뒤늦게 수줍어 떠오르는 빛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어린 생각도 고개를 든다.
이즈음의 나는 실은  그 희미한 가능성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언제나 내리막길이 될테니, 그건 그래야 한다고, 아니 틀림없이 꼭 그럴 것이라고

최면을 걸듯, 믿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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