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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봉지 두개 들고 주차장으로 나서는데 그만 열쇠 꾸러미를 떨어뜨렸다. 집어드는데 뒤에서 누군가 한마디 한다.
"암 쏘리"
돌아보니 웬 남자가 양손에 비닐 봉지 세개쯤 들고 걸어오는 중이다.
괜찮아, 고마워, 대꾸하니깐 자기가 지금 물건을 많이 들고 있어서 도와줄 수 없다, 오늘 이것저것 사다보니 짐이 많다, 하면서 미안하다, 조심해, 하고는 자기 차로 가는거다.
아니, 뭐... 내 열쇠 내가 떨어뜨렸는데 본인이 그렇게 미안해하실 껀, 별로 없는데? 게다가 그까짓 열쇠꾸러미 떨군거야 그냥 집어들면 되는 거, 크게 도와줄 일도 아니고 말이지... 누구신지 모르는 동네 이웃님이신데 그 참 면구스럽게 친절하셔서 이런 반응들에는 그래도 이젠 많이 익숙해졌는데도 오늘은 아주 조금 당황됐다.
엊그제 클래스 시간에 안쏘니 티처가 작문과 토론 주제로 "Culture Shock' 에 대해서 말해봐라 했을 때 한 아르메니안 남자가 여기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낯선 사람들 보고 웃느냐,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모르는 남녀가 웃는 거는 관심있다- 는 표현이다, 절대로 모르는 사이에는 보고 웃지 않는다, 하며 의아해하니까 다들 공감한다며 한마디씩 하더라는 거다. 아르메니안들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 줄은 몰랐었다.
우리나라에서야말로 도저히 이해 못할 태도 아닐까. '함부로' 누굴 보고 웃는 거는 관심있다 내지 일종의 플러팅 flirting쯤으로 이해되어서 어쩌면 여자들 입장에선 오히려 불쾌하게 생각하기도 하는 액션이지 않던가? 아마도 내가 겪은 심상한 저 마켓씬이 어디 이마트 주차장쯤에서 연출되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라나? 반쯤 째려보며 뭐야..? 쟤... 쯤 아닐까 싶은데 말이지. 아, 근데 이건 단언 못한다. 나도 떠나온지 이미 칠년 지난 버전의 기억 뿐이라...아님 말고.
헌데 여기선 도리어 안그러는 게 무례다. 나는 하나도 미쿡 살람식으로 안사는 인간인데도 나 역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내리려고 통로를 걸어나오다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짓게 되고 운전기사에게 땡큐 인사를 안하고 내리려면 뭔가 꺼림칙하며 건널목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는 눈인사가 당연하고 집으로 가는 길 정류장 벤치에 앉아있는 할아버지에게 자진해서 하이- 인사하게 된다는 거다.
사실 뭐... 좋은거 아닌가? 내 열쇠 꾸러미에 자진해서 못도와 줘 미안하다는 남자의 의례적인 호의 또한 그렇다. 안해도 그만 누가 뭐랄 사람 하나 없지만 한마디 해주는 것으로 아, 내가 사람끼리 어울려 사는 동네에 살고 있구나, 하는 기분좋은 확인의 순간을 맛본다면 그거 가능한 한 해봄직한 몸짓이다. 좋은 건 좋은 거 분명 맞다구.
속마음까지 우러날 필요도 없다. 드러나는 것만으로도 까칠한 외연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공기를 만들어주니까. 그 정도만으로도 가치는 있으니까.
못도와주는 건 미안한 거...? 맞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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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길에 몸이 아파 고통받는 소년과 그를 도운 여자가 있다. 그들은 이후 재회하고 이어 사랑을 나눈다. 이야기의 시작은 늘 그렇듯 만남에서 출발한다. 두 사람의 우연한 만남과 즉시적인 이끌림은 타당한 이유 없이도 왠지 그저 받아들여졌다. 아니 어쩌면 무조건의 이끌림이 어떤 작위적인 필연보다 더 리얼할 수 있다. 우리 삶은 오히려 실제 그렇다. 그러나 처음 얼마간은 15세 소년과 36세 여성의 육체적 만남의 씬들이 편치는 않았다. 틴에이저에 대한 무조건의 연민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순전히 내 사정이다. 그들은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마주했고 여름의 몇달을 온전히 서로에게 몰입했다. 남김없는 솔직함이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살아갈수록 더 그걸 느낀다.
책을 읽을 줄 모르는 여자 한나 슈미츠와 책을 읽어주는 소년 마이클 버그. 사랑을 나누기 전에 그들은 책을 읽는다. 소년은 들려주고 여자는 듣는다. 사랑이라는 보상을 위해 열심히 책을 읽어주는 소년의 행위는 그러나 관계에서 무력한 소년의 불안정한 지위를 올려주고 있다. 책을 읽어주고 받는 작업으로 관객은 두 사람의 나이 차로 인한 불공정의 편견을 어느새 중화시킬 수 있다. 중화된 관계는 누군가 더주고 누가 덜받는 도식을 벗어나게 하며 그들의 사랑은 그로 인해 자유롭게 비춰진다. 그 이후로는 나 역시 마음이 편해졌다.

문맹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한나가 감수해야 했던 시간은 가혹했다. 더구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가항력의 폭로를 요구받은 개인의 수치심은 너무나 무력했다. 그녀는 엄청난 죄를 거짓으로 인정하면서 간신히 그 자존심을 지키는 평생의 댓가를 치른다. 전쟁과 전쟁의 상처는, 마치 핵폭발의 가늠키 어려운 후유증과도 같이 예상치 못한 개인의 구석구석 인생 전부에 영향을 끼친다고 영화는 조용히 역설하고 있다. 상이 군인의 보여지는 상처 뒤에는 수면 아래 빙산과도 같은 그 뒷무대의 가려진 아픔들이 무한 증식하고 있음을 소리없이 외치는 것이다. 아무도 미처 모르지만 그러나 겪는 이에겐 온전한 고통임을. 한나는 그 안타까운 희생양이었다. 수감 중인 한나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책을 읽어 녹음된 테이프를 보내주는 옛 연인 마이클의 시도는 한나가 마침내 글을 깨우치고 마이클에게 편지를 띄우는 시점 이전까진 따뜻한 배려와 깊은 사랑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그는 더이상의 접근을 불허한다. 여자는 여전히 그의 사랑을 희망하지만 그는 주저한다. 순수한 첫사랑의 상실로 남자는 이후의 삶 전부에서 늘 불구자다. 그의 시도는 때문에 실은 사랑이 아니고 더이상의 배려도 용서도 아닌, 자기 상처의 치유를 위한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한나의 자살은 수십년만에 이뤄진 단 한번의 재회에서 감지한 좌절 때문이었다.
사랑은 온전한 영혼을 지닌 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사랑에 의한 상처는 또한 사랑을 제대로 보듬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게 아프지만 사실이다. 때문에 두 사람의 비극은 누구의 잘못도 아닌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 지워준 상처다, 안타깝게도.

2차 대전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만는 미국 영화답다. 로맨틱을 양념으로 장식하지 않은, 독일풍의 직설적인 담백함이 영화 전반의 컬러다. 그 사실감이 몰입을 부추긴다. 흔쾌히 따르고 싶었다.
케이트 윈슬렛은 관능적이면서도 순수한, 강하면서도 감추어진 연약을 지닌 한나의 캐릭터와 일치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감탄을 이끌어낸다. 타이타닉의 철모르는 소녀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온전히 새 옷을 갈아입고 완벽한 한나로 재탄생하고 있다. 마이클과 재회하며 마음의 실망과 쓸쓸함이 내비치던 순간의 그녀의 표정은 잊히지 않는 아픔을 전해준다. 상징적인 책 'The Woman With a Dog' 을 들추어 첫 글자 'The' 를 깨우치던 장면- 그 감격과 회환이 뒤섞인 얼굴 또한 케이트 윈슬렛만의 파워로 읽혔다. 해리포터, 잉글리쉬 페이션트, 쉰들러 리스트의 스타 랄프 파인즈는 주변인으로 떠돌며 누구와도 감정의 몰입을 이루지 못하는 (심지어 자신의 딸조차도) 상처입은 한 중년 남자의 씁쓸함을 그냥 존재 자체만으로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아주 그 얼굴이라야 할 듯하다고 믿게 한다. 다른 얼굴을 상상할 수 없도록. 소년 마이클역의 데이빗 크로스. 어쩌면 이 영화는 이 신인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독일이라는 배경의 멋과 맛을 드러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1995년 발표된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로 뉴욕타임즈에 1위를 마크한 첫 독일 출생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 했다고 한다. 2009년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과 며칠 전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도 수상했단다. 모처럼 그럴만 하다.
감독 스티븐 달드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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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장조림 만들고 닭갈비을 볶고 못난이 도넛 튀기고 김치부침개를 부치고 국수장국을 말면서-.
깨,달,았,다.
생활이 단순해지면
먹는 궁리가 늘어난다는 사실.
이건 뭔 나비효과 아우성치는 소리냐 싶지만,
진짜 그렇다.
자고 일어나 씻고 학교가고 이러는 하루를 지탱하는 굵은 기둥 몇가지 사이로
나풀나풀 날아다니는 상큼 새로운 것들이 있어줘야 생활이 다채로와지는 법인데
가만 들여다보니 결국 먹는 것 하나, 그나마 메뉴 바꾼다고 이리저리 엎어치고 메치는 와중에
가장 버라이어티한 일상의 변화가 되어주고 있더라는 거다. 딴 건 없고.
그래서 그런거군.
그렇다면 생활의 작은 변화 한토막씩 일기장에 적어두는 내 블로깅 사정을 위해서라면 이제!
블로그에 밥상을 차려야 할려나. 으흠.
아참, 그래도 재밌었던 거 한가지는 닭갈비에 넣을 양배추가 부족해서 에라 콩나물을 넣었더니 어라? 괜히 아구찜스러운 것이 괜찮은 대용품이더라구. 매운 양념에 워낙 어울리는 야채라서인가. 빈약한 냉장고 사정 봐주느라 잔머리 쓴거 얼떨결에 통할 때! 은근 통쾌하다구.
..........
객소리 그만두고 읽은 책 두권, 영화 두편, 잊어먹기 전에 점찍을 엄두나 내보자고 글쓰기 창을 열은건데 잘 안써지네. 내일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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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에도 급수가 있다. 다중의 보편성을 훌쩍 뛰어넘는, 그야말로 상상 불가의 무한 영역으로 독자 혹은 관객을 이끄는 궁극의 판타지가 있는가 하면 한번쯤 가정해보는, '만약에..."로 시작하는 현실 기반의 희망 노래랄 만한 대중 공감의 '환타지'도 있다. 1918년 80세로 태어나 1살 빼기 오메가로 생을 마감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 여행은 누구나 한번쯤 '어떨까...'로 눈망울을 굴려봤음직한 '거꾸로 나이 먹기' 내지는 '점점 젊어지는 인생' 에 대한 설레는 환타지를 품고 시작된다. 시간이라는 테마는 인간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하는 신의 영역과 존재를 매일의 일상에서 깨닫게 하는 절대자의 최전방 대변인이다. 그렇기에 늘 관심의 대상이 되고 늘 논의의 주제로 거론되고 여전히 결론은 미궁이다. 어떻게 하면 시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도발적인 논의가 한쪽에서 지치지도 않고 투쟁적으로 반복된다면 한쪽에서는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순응과 그 호혜 평등한 파워에 겸허히 머리숙인 명상 또한 이어지고 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는 그런 점에서 솔깃한 환타지의 가상 체험에 대한 기대로 시작한다. 우리의 삶이란 아주아주 잘게 나뉘어진 시간 시간의 장면들을 일정한 배열로 모아놓은 일종의 퍼즐과도 같은 것이며 따라서 그 배열이 왼쪽에서 시작되건 오른편에서 비롯되건 전체의 모습은 결국 같다는 깨달음을, 깨달음의 체험으로 퇴장하게 해주는 영화다. 그런 점에서 시간에 대한 두가지 접근 논의를 모두 지닌다. 노인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영혼은 아기로 출발하는 남자. 현명한 노인으로 태어나 순백의 아기로 마감하는 수순이 아니라 몸과 영혼의 인간 존재를 껍질과 알맹이처럼 실험적으로 분리해 다루는, 색다른 상상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외롭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은 거꾸로 젊어지고 정신은 성숙의 단계를 거쳐 결국 퇴행의 마지막 강을 건너게 되는 기적의 인물 벤자민의 3시간짜리 독백 - 찬란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가눌 수 없는 슬픔을 나직히 말하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과 같은 방향의 시간 여행을 함께 하고 있다면 거기엔 깨달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신기하고 색다른 상상의 그림을 한번 구경하는 것일 뿐. 하지만 그는 세상에 홀로 맞바람 맞으며 거꾸로 여행을 하면서 그의 곁을 결국 스쳐 지나고 마는 수많은 사람들과 늘 작별하는 모습을 오랜 세월을 거쳐 보여주고 있다. 거슬러 오르기에 누구와도 나란히 갈 수 없기에 그에게 모든 존재는 엄밀히 그저 찰나다. 마주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라 시간의 속도로 각자 움직이는 인생 가운데선 그저 잠깐의 마주침만이 그들과의 삶을 공유하는 유일한 기회다. 얼마나 가슴 저린 현실인가. 함께 움직일 때는 속도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거슬러 오를 때는 그 반대편의 존재로 인해 너무나 극명한 찰나의 존재감을 전율로서 깨닫게 되는 법이다. 그는 그 아픔으로 인생을 내내 견뎌야 했다. 우리 삶은 그렇게 스틸 컷의 장면 장면을 주욱 이어붙여 만든 움직이는 필름과도 같은 것이다. 바로 돌리건 거꾸로 돌리건 그 안에 담긴 장면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놓여진 바로 여기, 지금, 그 불변의 장면이 되어줄 현재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2시간47분의 러닝타임은 더구나, 산책하듯 움직이는 영화의 크지 않은 보폭으로 인해 짧게 쉽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그가 삶에서 인생과 사랑을 배워가는 여러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그 변화의 높낮이와 농도는 대개의 우리 삶의 그것과 특별히 다르지 않기에 다소 지루한 중간 단계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르면서 어느 순간, 이것이 시간 여행의 우화임을 깨닫게 되면서 나는, 3시간의 침잠은 어쩌면 충분한 몰입과 이해의 체험을 위한 필수 함량이라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남녀가 40대 중후반의 나이에 비로소 엇비슷한 교차점에 이르러 안타까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퍽 아름다왔다. 교차점에서 잠시 마주침만이 허용될 수 있음을 아는 두 사람이기에 보기에 더욱 애틋했다. 델마와 루이스의 설익은 어린 청년 브레드 피트를 여전히 기억하는 나로서는 음역 넓은 인생의 처음과 끝을, 정해진 시간의 옷을 끊임없이 갈아입으며 순응하듯 연기하는 그의 담백함이 좋았다. 성장과 성숙의 변화가 읽혔다. 상대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이나 대역 없이 홀로 2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데이지역을 모조리 소화한 케이트 블란쳇의 고요한 카리스마 또한 강한 흡인력을 보여줬다.
양로원이라는 배경은 거꾸로 인생을 부여받은 벤자민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요람이었다. 삶과 죽음이 일상으로 오가는 곳. 아기이며 동시에 어른인 존재들이 모여있는 곳. 삶의 어쩌면 처음과 끝이 공존하는 곳으로서의 무대 장치는 절묘하다 싶게 주인공의 운명과 어울렸다. 허리케인 경보로 불안한 상황의 설정 또한 죽음을 맞이하는 데이지의 위태로운 마지막 순간을 상징하며 끊어질 듯 간신히 이어지는 다이어리 속의 독백에 긴장감을 얹어준다. 거기엔 엄연한 현실과 거스를 수 없는 현재가 드러난다.
스콧 피츠제랄드의 원작을 영화화 했다고 한다. 영문 원제목은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벤자민 버튼의 신기한 얘기, 혹은 흥미로운 얘기- 쯤으로 읽을 때 여기선 그가 거꾸로 시간 여행을 한다는 힌트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새로 만들어 붙인 우리말 제목이 어쩌면 관심을 끌어내는 데는 분명 도움이 된다. 그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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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중국 음식 먹었더니 포춘 쿠키가 계산서 트레이에 딸려 나온다. 늘 보는 거 신기할 꺼도 없는 심상한 서비슨데 어쩐지 열어보지 않을 순 없지, 그게 또.
행운의 숫자 몇개와 함께 앞면에 적인 메시지 하나.
A lifetime friend shall soon be made.
기뻐했더니 희찬이가 교회 나가는 사람이 뭘 이런거에 기뻐하느냐 반문하길래 그랬다.
- 얘, 하나님이 어떤 메시지를 어떻게 전해주실 지는 아무도 모르는거야!
혹시 아남? 하나님이 노란 연필 들고 열심 근사한 멘트들 골똘히 생각해서 잘 적어뒀다가 손가락만한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프린트하고 쿠키 속에 꽁꽁 숨긴 다음에 이윽고 짐짓 흐뭇한 미소로 손바닥 비벼가며 두근두근, 얘덜이 얼른 열어보길 숨죽여 기다리고 계실지 말야!
내가 알기론 틀림없다. 즐거워하는 얼굴 보는 거 얼마나 즐거운 일인데!
그나저나 평생의 친구라... 기대된다. 하하.
아, 쿠키는 먹어버려서 사진에 없음. 그냥 센베이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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