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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회사 직원 집들이에 나서면서 뭘 가져갈까 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아르메니안 베이커리 마지스에서 모양 예쁜 디저트를 샀다. 조각 케잌처럼 자그마한 포장으로 된 몇 종류의 무스와 티라미수, 타르트를 섞어서 포장 트레이에 담으니깐 이쁘고 재밌어서 여자들 모임엔 딱이겠다 싶었다.
휴지나 세제나 화분 사가려다가 겹치지 않을 걸로 사가자 싶어 결정한 품목.
디저트를 준비해왔다니깐 다들 어떤거냐 궁금하다 하면서 '미국 스타일' 이라고 한마디씩 한다. 그니깐 디저트를 준비하는 거가 미국 스타일이라는 말인거다.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동료들 대부분이 한국에서 건너온 지 일이년 남짓 된 친구들이라 그런 것이 눈에 드나보다. 나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듣고보니 맞는 얘기다.
처음 미국 와서 나 역시도 사람들이 진짜 꼬박꼬박 디저트를 챙기는 걸 보면서 뭘 꼭 저렇게 디저트를 먹어야 하는걸까? 의아했던 기억이 분명히 있으니까. 한국에서도 후식을 먹긴 하지만 대개는 과일 한 두 조각쯤, 그것도 기분 좋고 여유있는 날 보너스로 티비 시청용으로 즐기는 것일 뿐 달콤한 맛의 디저트를 하나의 정식 코스로 즐기는 풍습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나 역시도 주변에 차고 넘치는 디저트 메뉴들에 그냥 젖다보니 평소 식사 때는 아니지만 모임 때는 디저트 준비하는 것이 자연스런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렇게 그렇게 참 벗어날 수 없이 한국식으로 사는 몸인 나조차도 그렇게-. 이 나라에서 살아온 세월이 그만큼은 흐른 셈이다.

오늘 낮에는 희찬이 간식 한다고 감자를 튀겼다. 버거집에서 파는 프렌치 프라이스보다야 바삭함은 덜하지만 그래도 새 식용유에 생감자만 튀겨 내는 것이 파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면서 한접시 만들어내는데, 이 녀석은 그러잖아도 좁은 부엌에 옆에서 대뜸 라면을 먹겠다고 수선이다.
펄펄 끓는 국물 속으로 풍덩 입수하는 라면, 그 옆에 부스러기가 남은 봉지를 입에 털어넣는 녀석을 보면서 슬그머니 미소가 나오다가 아, 이거 튀겨서 라면땅 해먹어보자 싶어진다. 저번부터 한번 해먹어야지 했다가 늘 지나가곤 했던 장난인데, 오늘은 아주 제대로 걸렸다. 온도 다 올린 기름팬 옆에 있겠다, 라면도 있겠다 말이지! 에헴.
라면땅.
아주아주 어릴 적에 즐겨먹던 10원짜리 과자. 라면 봉지 밑에 남은 부스러기를 봉지째 입에 탈탈 털어넣으며 아쉬워하던 그 입맛을 딱 제대로 겨냥해 출시되었던 라면 부스러기로 만드는 과자 라면땅.
손바닥만한 봉지에 한줌쯤이나 들었을까 끓여먹던 라면 봉지 속의 잔부스러기가 주는 아쉬움을 지금 생각하면 그닥 후련히 해소해주지도 못했을 쬐그만 과자지만 어릴 적 입맛은 평생 가는 법인건지 추억이 깃들어져 무조건 로망인건지 여튼 라면 끓일 때면 때때로 그 과자가 떠오르곤 했다.
워낙 대히트를 친 과자라 얼마 후에는 다소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자야' 라는 이름의 과자가 나왔는데 얘는 라면땅보다 좀 더 가늘고 긴 모양에 과자 봉지 모양도 직사각형으로 길게 좀 색다르게 포장했고 당시에 한창 유행하던 만화영화 사파이어 왕자가 캐릭터로 등장해서 눈길을 확 끌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여러가지 의미에서 여자애들을 겨냥한 컨셉이 아니었나 싶지만 과자쪽으로는 워낙 얼리어댑터였던 나는 지조도 없이 냉큼 자야로 변심을 하고 그 담부터 라면땅은 왠지 동네 남자 개구장이들용 간식 자야는 좀더 깔끔한 여자아이용 간식쯤으로 차별화를 선언, 두배나 비싼 20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해가며 먹었던 생각이 난다, 하하.
하지만 원조는 원조다. 원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후발주자는 늘 원조를 실컷 읊고 난 뒤에 잠깐 거들어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최소한 어릴 적 라면과자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라면 부스러기 재활용 과자! 라고 하면 다이렉트로 '라면땅'을 떠올리게 되는 거다. 아마 이후에도 여러가지 다른 이름의 유사품이 등장했을텐데, 한가지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포장지에 북한 간첩들이 주고받는 암호가 숨겨져있다는 소문으로 한동안 어린이 커뮤니티에서 최대 이슈가 되었던 모 과자도 아마 라면과자 종류였던 생각이 난다.
여하튼 오늘의 초간단 오도독 추억씹기 버전 간식 제조에 착수한다. 되도록 날 밀가루 맛이 풀풀 나는 저렴한 식당용 번들 라면- 주로 삼양 브랜드였음 - 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므로 비싼 신라면을 사용했다.
봉지를 뜯지 않고 최대한 안에서 뽀개어주는 것이 중요한 첫 단계. 짧고 굵은 부스러기 형태로 만들어 원조의 모양을 살리고자 노력했다. 부스러진 모양을 보니 어쩌면 너구리 같은 우동면 버전이라면 아마 더 모양이 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만드는 방법은 뭐 간단하다. 잘게 부순 라면을 기름에 살짝 튀겨주는 것.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설탕을 듬뿍 뿌려주는 것, 이상!
이걸 갖고 제대로 간식스럽게 만들겠다고 좀 큼직한 덩어리를 유지하게 한 다음 튀겨서 물엿 같은 것에 뒹굴게 해서 일종의 그럴듯한 튀김간식으로 버전 업 하는 것은 예전에도 몇몇 요리 페이지들에서 보아온 바 있지만
내가 찾는 것은 라면 간식이 아니라 옛날 과자 라면땅이므로 최대한 공정이 단순하고 초저가로 출시되는 라면땅 스탈을 고수한다.
담고보니 모양은 그럭저럭 비슷한데 맛은... 흠.
- 라면으로 끓여먹지...아깝게.
한 입 먹어본 녀석의 품평이다, 쳇.
- 얘, 라면은 라면이고, 이건 그냥 간식이니깐. - 아 맛이 없다는 건 아니고, 같은 재료라면 그냥 라면으로 끓여 먹는게 더 맛있다는 말이야. 하긴, 어쩌면 라면 갖고 만드는 간식으로는 그냥 뽀개어서 그 안에 스프 털어넣고 다시 흔들어 섞어서 손가락에 입가에 스프 가루 잔뜩 묻혀가며 먹는 수동 즉흥식 라면과자가 더 간단하고 맛좋은 간식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오랜만의 라면땅이 즐거웠다. 색깔을 내느라 좀 오래 튀겨서 아주아주 조금, 씁쓸한 듯한 맛이 아주아주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렇다. 누구네 모임에 나설 때면 무스에 초컬릿이 가득한 폼나는 유럽식 디저트를 심상하게 준비하는 그래도 이제 햇수 꽤 살아 어느새 모르는 새 조금씩 미국 물이 배어드는 얼치기 이주자라지만
가난하던 나라의 어린 국민으로 살던 시절의 후식 아닌 간식을 여전히 기억하고 사는 또 그렇게 구식인 한국인이기도 한거다. 그렇다면 나는 내 안에서 이미 나름의 멜팅 팟으로 살아간다는 말인걸까. 오래묵은 구식의 추억과 취향과 한국 입맛에, 낯선 딴나라식 습성과 문화가 얼기설기 뒤섞여서 그렇게, 오락가락 사는걸까. 다양한 것이 어우러져 녹든 섞이든, 여하튼 그 한덩어리가 그냥 그대로 미국 문화- 라던 이에셀 클래스의 미세스 데이비슨의 코멘트가 생각난다. 그런건가.
- 이거 라면땅을 라면 국물에 넣고 다시 끓이면 어떻게 될까?
미국 학교에서 꼬박꼬박 전혀 비 한국식인 점심밥을 먹으면서 입맛이 길들여지고 있으면서도 초코칩 쿠키나 브라우니 보다는 홈런볼에 초코파이, 에이스 크래커가 여전히 주력 아이템인 희찬이, 신라면에 뜬금없이 고추장 한숟갈을 떨궈넣고는, 이미 요상한 '멜팅 팟' 에 끓인 실험버전 라면을 후루룩거리던 녀석의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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