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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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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스먼트 placement 테스트를 위해 모여 앉은 교실은 퍽 낯설었다. 의자와 책상이 붙어있는 그, 대학 때 전공 과목 수업용 작은 교실에서 주로 써먹던 그 향수어린 책상 하나를 골라 앉았다. 아홉시 반에 시작한다던 시험은 하나씩 둘씩 찾아와 교실을 채우는 사람들로 열시를 훌쩍 넘기며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멀뚱히 앉아 낡은 교실 풍경을 촌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보며 나는 생각한다.
벌써 7년이 되었다. 갓 미국 오자마자 무슨 일을 하게 될 지 뭘 해먹고 살게 될지도 아직 불투명했던 그 시절, 오직 아는 거 하나는 영어가 필요하다는 사실 뿐이었을 그 때, 이에스엘 ESL 클래스에 등록하려고 찾아왔던 저녁 무렵 커뮤니티 칼리지의 몹시도 을씨년스러웠던 어둔 풍경이 떠오른다.  

    - 그 테스트는 문법 문제라서 한국 사람들은 대개 성적이 잘 나와요. 우리가 학교에서 문법 공부는 다들 해본
      가락이 있잖아. 근데 그 레벨에 맞춰서 클래스에 들어가게 되면 회화가 안되기 때문에 이게 밸런스가 
      안 맞는다구. 그러니깐 회화가 부족하다 싶으면 너무 열심히 맞출 생각하지 말고 적당히 시험 보는 게 더 낫지.
 
이것이 엘에이 랜딩 두어달 사이 얻어들은 나름 제자리 찾아가기의 생존 요령이었다. 그도 그렇군.
근데 나는 학교 때 문법도 제대로 못했었으니깐 그나마도 정신 차리고 문제 풀어야할꺼다...싶어지니 문득 서글펐다.
내 영어의 첫 단추가 어디에서부터 잘못 끼워졌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여튼 나는 중학 시절 이후로 내내 영어가 참 힘들었다. 그런데 그 못하는 영어를 중얼대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 동네로 덜커덕 자진 슬라이딩을 해버렸으니 이건 또 무슨 인생의 장난인지.
 
테스트 결과는 열흘 후 건물 밖에 붙여질 거라고 했었다. 그렇게 레벨 확인을 받고 다음 학기 클래스에 등록할 셈이었다. 그 때가 2월이었으니 지금보면 봄 학기 시작을 한달 쯤 앞둔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리고서 나는 얼마 안있어 다운타운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일단 매일의 분주한 일에서 스타트 라인을 끊고나니 이에셀클래스에서 서너시간씩 정신을 '고양'하는 일 따윈 도저히 내 몫이 아니었다. 더듬대는 영어로 장사라는 걸 난생 처음 해보면서 모든 낯선 것들과 친해지느라 시간을 쏟으면서 아이 학교 적응 문제에 집중하면서 공부 같은 건 지금 때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았다.   
그리고서 결국, 앞만 보고 달려오며 수년의 세월을 지낸 셈이다.

지내오면서 내내, 여기서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의 갭이 분명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라고 하는 다급한 당면의 문제가 나를 붙잡았다고, 핑계라는 것이 너무나 뻔한 그 핑계에 합리화의 명분을 매달고 스스로의 태만을 이어온 시간을 거듭했다.
요지경 속인 미국 나라는 영어가 없으면 죽을 줄 알았더니 영어 없이도 안 죽고 안 죽을 뿐 아니라 대충 먹고 살기도 하고 그 먹고 살 수 있다라는 달큰한 타협의 빌미에 기대서 나는 그냥저냥 적당히 듣고 적당히 맞추는 대화로 그렁저렁 지내왔던 셈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맨처음으로 맨몸이던 때로 되돌아가고 나서야 다시 이렇게 교실에 앉게 되었다. 
원래 움켜쥔 손으로는 다른 어떤 것도 새로 쥘 수 없는 법이다. 쥐고 있던 걸 내려놓고 빈손이라야 한다. 그런 거다, 뭐 세상.

모여앉은 사십명 남짓한 사람들의 면면은 참 제각각이었다.
글렌데일이라는 지역적인 특성 때문에 대부분 아르메니안 이민자들로 보였지만 간간히 멕시칸이나 흑인이나 필리핀계로 보이는 각색의 얼굴들이 모여들었다.
답안지를 나누어주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기록했다.
내 옆자리, 그 날 테스트의 유일한 한국인 동지인 아가씨가 답안지에 적은 생년월일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이건 내 학번이잖아! 순간 아찔한 기분이다.
오른편 앞쪽에서 테스트 방법에 대해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내내 인스트럭터에게 질문 공세였던 머리 하얗게 센 덩치 커다란 남자의 답안지도 슬쩍 보인다. 어엇! 이 분은 나랑 동갑일세! 내가 저만큼 나이를 먹은 거라 이거지!
갑자기 문득 그 세월의 갭이 현실감있게 등줄기를 타고 온 몸으로 느껴진다. 이거 참... 당황스럽군.

이민자라 영어는 유치원생 수준이지만 아마도 지적 수준이나 생활의 경험은 나름 어느만큼 이상 될 것이 분명한 응시자들임에도 인스트럭터는 아주 걸음마 가르치듯 그 잘난 오엠알 카드에 번호 기입하는 방법을 장황하게 늘어지도록 설명한다. 아 그정도는 다 안다구...
지루한 기분이 되니 볼펜 돌리는 습관이 뭔 깨어난 기억 상실처럼 손가락에서 살아난다. 어? 나 아직도 이거 하네... 시험 보러 와서 회상신만 줄줄이 이어진다.
문제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멀티플 초이스 형식이라 몰라도 답은 쓸 수 있다.  
7년 세월동안 테스트 방법은 변한 것이 없는데, 채점만은 기술적으로 진일보했는지, 바로 옆에 놓인 카드 리더에 넣고 금세 채점을 하더니 레벨 테스트 확인서에 적어준다. 음... 내가 이정도 레벨의 인간이군.
 
보름 후 새벽 시간, 웹 레지스터가 오픈할 때 얼른 들어가서 등록하라고 일러준다. 경쟁이 치열하다는 얘기다.
무료로 지원하는 Non- credit 클래스라 수강을 한다고 해서 대학 가기 위한 성적 기록으로 써먹을 수는 없지만 수업 내용이나 커리큘럼은 크레딧 클래스나 마찬가지라 실질적으로 영어가 필요한 이민자들에게는 굉장히 유용한 혜택인 셈이다. 그러니 한정된 클래스에 지원자 경쟁은 당연한 일이다.
약속한 날짜 새벽 5시에 웹 레지스터가 열린다고 했다. 작정하고 밤을 도모했다.
접수 창구 선점하는 경험이야 코리안의 전공 분야 아닌가. 순위에서 밀려 등록을 못한다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되는 마인드라, 일찌감치 사이트를 오픈해두고 아직 이른 새벽 4시반에 혹시나 하고 들어가본다. 아앗! 오픈되어 있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고즈넉한 교실 문 한쪽을 살짝 밀어제치니 문이 스르륵 열린 기분이다. 올타꾸나 하고 얼른 등록을 했다.
집에서 가까운 몬트로즈의 PDC 캠퍼스에 개설된 유일한 클래스에 등록을 했다. 하루 세시간 반 - 돈 벌 때는 엄두도 낼 수 없는 분량의 시간이다. 주머니 바닥났다는 빨간 경보가 때르릉 요란하게 울려댔지만 그 대신 시간은 좀 채워졌다는 위로의 낭보가 함께 날아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는데까지 가보자구, 맺힌 한이나 풀어보지 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속 쓰린 클로즈 아웃의 상처를 패치하는 기분으로 나는 첫 날을 기다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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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2009.04.11  17:14

사용되지 않는게 존재목적인 비상벨.. 한국에선 영어가 비상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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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9.04.12  15:58

아하... 이거참, 절묘한 통찰이십니다! 오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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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5.30  16:44  [69.235.153.13]

오크님 말씀을 풀거나 통역하면 대개 이 정도일까요? 누구를 위하여 종은 달렸나. 지금도 영어는 여전히 지진아 수준이지만 그리워요. 열심히 ESL 하던 그 시절이. 틀리는 문법 가지고 우기는 흑인 여선생과 싸우다, '선장이 싫으면 배에서 나가라' 그런 류의 칠판 글씨를 받아 적던 그 시절이. 그때도 아마 자카란타-왜 이 꽃나무 가지 사이로 이우는 달 사진은 제니퍼 님 블로그에 없을까- 필 무렵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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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9.05.31  13:32

그 선생님도 한 터프하는 분이셨군요, 하하. 근데 저희 동네에는 달뜨는 거리에 자카란타가 잘 안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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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5.31  17:05  [69.235.129.139]

선생님도 한터프하셨지만, 저 역시... 당시 유관순 누나의 아우답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얼마 전 책에서 읽은 글귀를 적어 한인 학생들을 선동해 조직적으로 저항하던 생각이... 이런 귀절이었어요. "네 손에 들고 있는 횃불이 진리라면, 열 손가락이 다 타들어 가더라도 그것을 놓지 말라." 직접 목적어와 간접 목적어를 착각하는 ESL 교사로부터의 독립운동치고는 너무 거창했다는 생각이. 헤헤헤.... 그런데 그토록 완벽한 카나다 인근 초생달 동네에도 한 가지 흠은 있군요. ^^

오크 2009.07.29  22:23  [211.54.23.3]

오늘의 메시지 보고서는 미국"일기" 들어왔습니다. 근데 휴가는 일기장 안가지고 가신 모양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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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9.07.31  05:03

음... 요즘 좀 이리저리 바빴습니다.
휴가 떠나서 한가로이 바쁜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요,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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