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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백건우의 경건한 손톱, 그리고 가락지

2008.11.11 10:44 | 옛날일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4845 주소복사

부러진 손톱 보기싫어 다 잘라버렸더니 아주 손가락이 짤뚝해졌다. 원터치 참치 캔 하나 걸어 당기기 힘겹다.  

알량하게 급조된 원타임용 아마추어 밴드에서 찬양 한 곡 키보드질 할 일이 얼마 전에 딱 한번 있었다.
어쿠스틱 피아노와는 달리 두드리는 만큼의 음량을 시원하게 뽑아주지 않는 디지털 피아노의 빌트인 스피커.
그 당연한 숙명적 한계를 체념 못하고 세게 누르면 센 소리 나올 줄 알고 마구 두드리니 어느새 손톱이 다 깨진거다. 아 뭐 칼슘 부족으로 부실한 퀄리티가 제일 큰 원인일테지만...쩝.

순간, 연주 때면 언제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손톱을 짧게 자르며 마음을 가다듬는다던 피아니스트가 불현듯 기억났다.
종일 연습하고 매일 연습하고, 거르지 않는 연습으로 손톱이 자랄 새도 없이 늘 뭉툭할 수밖에 없는 그임에도
연주 때는 다시 정갈하게 손톱을 자르고 비로소 피아노 앞에 앉는다고 했었다.

그런 대가들도 건반 앞에서는 겸허히 손톱을 자르고 거친 마음을 자르고 비로소 조심스레 건반과의 귀한 만남을 갖건만
난 대체 무슨 방자하고 겁대가리 없는 짓이었나 싶다.

10여년 전에 만났던 그의 손은 정말이지 겸손했다.
건반을 행여 상처낼까 염려하듯 손가락 안으로 모두 얌전히 들어앉아 말끔히 입다물고 있던 손톱들. 

 - 어느날, 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전람회의 그림' 을 연주하는데 친구가 내게 그러더라구. 왜 그렇게 세게 치느냐, 세게 치지 말고 세게 느껴라, 내가 커지면 큰 소리가 난다...

그가 들려주었던 그 말을 또박또박 기록하며 가슴 울리는 깨달음으로 삼켰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하건만.

마음이 급해져 부리나케 지나간 기록을 뒤적여 마침내 찾아낸 사진 속에는
바래가던 기억을 선명하게 해줄 그의 고백과 꾸밈없는 모습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그런데 나는 그 이미지 속에서 의외로 내 가슴을 울리는 또 하나의 기억을 되살리게 됐다.
그의 뭉툭한 손가락에 얌전히 끼워져있던 낡은 가락지.

귀금속 감정에 일가견은 전혀 없지만
한눈에도 18K는 안 넘어보이는 오래된 금가락지 하나씩을 나란히 왼손 검지에 끼고 앉았던 그들은 50을 넘긴 관록의 부부였다.
국수 그릇을 앞에 두고 앉은 두 사람.
아내가 이윽고 젓가락을 집어들자 남편은 얼른 그녀의 소매가 국물에 닿지 않도록 두 번 접어 걷어주었다.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 손 내밀어 가만히 기다렸다가 비로소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 때 내 눈에 들어왔던 두 사람의 가락지.

군데군데 상처가 나 있어, 아주 오래 전 그들이 어떤 '약속'의 의미로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던 것이 틀림없음을
스스로 자랑스레 웅변하고 있는 그 가락지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더우기, 화려한 보석 박힌 반지 하나쯤 못지닐 리 없는 명망가로서의 그들의 그 소박한 반지는
치장한 것 없이도 충분히 그윽한 자신감과 안정된 내면을 드러내는 부부의 모습과 아주 닮아 있어 더욱, 특별해보였었다.
그 모습에 새삼 시선이 멈추며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었다.

나는 그들을 만났던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반지를 끼지 않은지 오래다.
반지를 빼고 지내는 것에 특별한 의도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설거지할 때, 요리할 때 알이 위로 도드라진 그 반지가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 빼기 시작했던 것이 그 출발이었을테다.
매일의 일상이 낭만의 상징을 앞지르고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는 때 아마도 빈 손가락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즈음엔 더이상 손가락에 맞지 않아... 라는 현실적인 이유가 거기에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개가 그렇다. 그렇게 살아간다.
생활이라는 굵어진 마디가 서서히 반지의 진입을 거부하게 될 때 우리는 그래, 그런거지...하며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 부부의 모습은 특별했다.
언제나, 항상- 이라는 참 쉽고 간단히 들리는 그 말이 우리의 하루하루에서는 실상 그닥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고,
매일의 수행과 인내로 점을 찍어 색을 채우는 지난함의 보상으로 간신히 주어진다는 사실을 나이 먹으며 깨달았다.
사진과 글 속에 기록된 그들 부부의 오랜 낡은 가락지, 그들을 그렇게 '가능하게 한 힘'이 새삼 궁금했다.
처음이 출발이 아예 특별했던 것인가. 세월에 대한 그들의 헌신과 공로가 남달랐던 것인가.

그렇게, 뭉툭하게 말끔히 다듬어진 손가락과 상처난 반지 한 쌍의 소박한 풍경을 되뇌이며 어젯 밤,
아주 오랜만에 그의 라흐마니노프 앨범을 뒤적여 찾아냈다.
건반 위의 명상가- 로 불리우는 피아니스트 백건우.
98년 봄, 예술의 전당에서 모리스 라벨 전곡 연주 무대를 가졌던 그와 아내 윤정희 두 사람을 만났던 그 날의 기억을 새삼 새로이하며
그가 그려내는 한밤의 세레나데와 같은 가슴 저미는 선율에 침잠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장중하고도 현란한 건반을 종횡무진 오가는 그의 겸손하고 경건한 손가락과
그날에도 틀림없이 끼워져있었을 그 낡은 반지를 상상하며.
여러가지로 방자한 내 손가락을 주먹 쥐어 꼬옥 모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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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클린 2008.11.11  15:02

아~ 백건우 선생님. 멋진 분이시죠~ 근데 전 아직 그분 연주를 실제로 들어본 일이 없어서..
작년에 저희 동네에 연주하러 오셨던 적이 있었는데.. 아쉽게 못 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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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8.11.12  08:31

그러고보니 언젠가 쟈클린님 블로그에서 그 공연 얘기 본 기억이 있어요. 놓쳐서 안타까와 했던 그 스토리.
저도 오래 전에 뵌 분인데 모처럼 옛날 생각 해봤네요. 미국 오면서 예전 잡지들 다 버렸는데 이거 딱 한권 실려왔더군요-^^ 다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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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락 2008.11.12  08:59

"그들을 그렇게 가능하게 한 힘... 그게 뭐였을까.. " 저도 속으로 되물어 보았어요.. ㅎㅎ
제니퍼님.. 글 참 좋아요, 차분하고 따뜻해요~^^
정 모시기님 블로그에서 뵜을때랑 무지 다른 느낌~ 히힛!
소심한 인사글에 다정하게 인사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차근차근 풍성한 제니퍼님댁 이야기들 둘러볼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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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닙허 2008.11.12  16:54  [66.215.14.189]

하하, 정모시기 블로그는 야후의 폴리시 위반으로 정지를 먹었답니다... 누가 그랬을까요? ㅎㅎ
여튼 그런 짓은 연4회,계절 바뀔 때쯤 한번씩 펼쳐지는 아주 드문 구경꺼리인데,
모두락님이 참 타이밍을 잘 맞추신 겁니다! ㅎㅎ
근데, 그 첫인상으로 여기까지 오신 셈인데, 그쪽 모드로 계속 가야 실망을 안하실듯도...?
이걸 어쩌죠? 저는 그냥 이런 여잔데요... 하하.
반갑구요, 아, 제가 가끔 이렇게 로긴 안하고 제집을 남의 집처럼 구경다닐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냥 저게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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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락 2008.11.19  04:55

어맛!! 그게 누굴까... 저는 정말 누가 정모시기 정지처분 시키셨는지..
도저히 알수가 없다눈.. (능청!! 캬캬!!)
마져요, 마죠.. 제닙허님~(이제야.. 지대로 접수) 이런 장난꾸러기(?) 이실거란 느낌에
마구 친해지고 싶었다눈~!! 헤헤!!
실망 안할터이니~ 가끔씩 새로운 모습 보여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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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8.11.19  09:54

앗! 사정의 칼날을 사정없이 빼어서 휘두르는 일지매 블로거가 누군지를 모두락님은 알고 계시다는 거죠? ㅋㅋ
친해지십시다, 특일급 기밀도 공유하는 사인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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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5.30  17:11  [69.235.153.13]

시각물이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본인의 반지 안 낀 방자한 손가락을 찍어 올리심이. ㅋㅋㅋ~ 밑에서 네번 째 패러그랩이 아주 쓸쓸하게 다가오네요. 안톡 쉬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읽을 때의 느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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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9.06.02  01:40

쓸쓸보다는 담담히로 가주시면 좋겠는데요 153님. 왜냐하면 사실 빈 손가락인 이유가 그게 ... 귀찮아서! 거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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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6.02  07:11  [12.146.192.91]

<하지만 대개가 그렇다. 그렇게 살아간다. 생활이라는 굵어진 마디가 서서히 반지의 진입을 거부하게 될 때 우리는 그래, 그런거지...하며 담담히 받아들일 뿐이다.> 이 부분은 체념과 달관의 고요한, 혹은 쓸쓸한 경지를 느끼게 하는데요? 목월의 '나그네'를 읽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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