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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아니 감상문, 아니 그냥 영화 보고 나서 머리 속 청소, 내지 정리- 가 내 영화 후기의 컨셉인데 때문에 두 줄 짜리 기록으로 남기거나 가끔 긴 품평을 적어내려가거나 또 그냥 영화가 유발시킨 어떤 생각을 끄적대거나 여튼 지 맘대로다.
어찌 되었건 바탕은 <비디오 여행>이다. 대략 적당한 외출복 갖춰 입고 영화관을 방문해서 돈을 지불하고 표를 받아들고 자리를 찾아 앉고 숨을 고르면서 자아! 이제 두 시간은 다 잊어먹고 의자에 파묻혀서 몰입해보자구! 이런 마인드로 화면을 바라보는 게 아닌 거다. 집에서 밥먹고 잠자고 대충 오가다가 리모컨 단추 하나 누르면 바로 시작되는 영화를, 집중이 떨어져 잠시 놓치면 되돌리고 재미없으면 빨리 돌리면서, 가능한 모든 '시청자'의 폭력을 다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이 비디오 여행이다. 영화처럼 강제적인 일방적인 시간의 저당에서 훨씬 자유로운, 리모컨 파워를 확보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만 그래도, 적어도 영화를 볼 때는 머리 속에 대략 두 시간짜리 코인을 딸깍딸깍 넣어두고 타이머를 돌린다. 거실 조명을 끄고 소파에 '앉아서' 본다. 손에는 리모컨이 쥐어져 있다 해도, 적어도 최소한은 고만큼은 한다.
이 영화.
고집스런 가부장적 가치관에 '사로잡힌'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들에서 첨부터 짜증이 좀 났다. 예전에는 그런 설정이 상황의 절실함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그냥 봐줄 만 했던 것 같은데, 이젠 왜그런지 점점 화가 난다.
그런 가치관을 무표정한 - 수애의 무표정이 드러내는 그 지독스런 갑갑함이란! - 태도로 받아들이고 적응해 사는 젊은 며느리의 삶을 바라보며 아, 저 영화가 지금 월남 파병하던 시절 얘기지, 그 시절 고루한 삶의 루틴을 그닥 바꿀 이유 없이 살아가는 시골 어느 '뼈대있는' 집안의 얘기지, 라는 사실을 자꾸 학습시키듯 되새겨야 했다.
삼십 몇년 전의 과거를 분명한 과거로, 지금의 세상과는 확실히 차별된 과거로 인식하기엔 그러나 시간이 너무 짧다. 아니 어쩌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짧은 시간에 급변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급 진보했는지도. 허나 그렇다면 이 영화는 진실로, 한국 땅에서 그 삼십몇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함께 겪어온 친밀한 동족들이 아니라면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영화인겐가. 당황스럽다. 고루한 집안의 왜곡된 가치관은 무수한 인간의 연쇄적 소외를 가져올 뿐이다. 3대 독자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사명에 사로잡힌 홀로된 시어머니의 인생은 소외 그 자체다. 그의 일그러진 소외는 사랑하는 애인을 두고 무표정한 어떤 상대와 결혼해야 했던 아들의 소외를 불러왔다. 억지 결혼에서 도망치듯 군대로, 월남으로 줄달음치는 유약한 아들의 소외는 당연 희생양이 된 아내의 소외를 유발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소외로부터 한풀이 하듯, 남편이라고 이름 붙은 어떤 인간의 따귀를 올려붙이기 위해 사선을 넘는다는 거다.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 자유로운 상황은 한조각도 찾아볼 수 없다. 아, 정말, 불쾌하다. 사는 게 뭐 그런가.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실은 남편이라는 실존적인 대상이 아니라 그녀가 온 인생을 걸고 매달릴 그 무엇이었다- 뭐 그런 적절한 결론을 내려줄 수도 있다. 하지만, 월남에 가야했던 이유가, 막무가내인 시어머니를 말리다가 하는 수 없이, 무조건 보내달라고 군 부대 앞에서 조르다가 얼떨결에, 로 설정되면서 나는 흥미를 잃었다. 대체 저 여자는 왜 저렇게 거길 가려드는거야? 가서 뭘 하겠다고?
상식적으로 감독의 의도대로라면, 이같은 '발끈함'이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연결되며 끝까지 영화를 추적하는 열심으로 이어져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리모컨을 두 번 정도 빨리 돌려야 했다. 좀 지루했다. 무가치한 인간을 찾아가느라 처절한 시간을 겪어야 하는 주인공을 오롯이 따르기엔 좀 편치 않은 기분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가끔씩,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거란다, 그럴 땐 나는 '내면화'라는 방법을 써먹지, 내가 의도해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래! 그 안에서 당위를 의미를 찾아보는 거다, 그리곤 거기에 흥미를 재미를 붙이는거야, 내가 선택한 시작은 아니었지만 중간쯤 가면 이제 그 출발의 촉매는 불분명해지고 나는 이 일의 의미를 내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더이상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닌 게 되지... 라고 아들내미에게 도통한 인생인 양 잔소리를 해댔던 나건만.
그녀의 내면화에는 의구심이 일었다. 과연 그녀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를 알기나 하고 덤벼드는 걸까?
그럼에도 영화의 후반부에는 그녀의 지독한 집착에 동화된 밴드의 일원들이, 사랑, 그것도 도덕적 사회적으로 일순위로 보호되는 부부간의 사랑, 을 향해 온 목숨을 내건 구원의 여신을 존경하듯 그녀를 엄호하고 지원한다.
하지만 그건 남자들의 로망일 뿐이다. 그런 여자가 존재하길 원하고 기대하는, 그런 여자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은 남자 감독의 로망.
나는 남자들이 이제 그런 어리석은 로망은 그만 벗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만뒀으면 좋겠다. 다른 그림으로도 얼마든지 여성에 대한 그들의 천사표 로망을 구현할 수 있다. 제발 그만, 고루한 가치관을 뒷배경으로 하는 순종적 여성상을 내세우며 그것이 그녀에게조차 의미있는 것인 양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월남으로 도망간 나약한 남자를 죽기살기로 목숨 걸고 쫓아가 전쟁터 한 복판에서 따귀 올려붙이는 아내의 스토리. 그거잖은가. 그 험난한 로드 위에서 순이가 경험하고 변모하는 과정들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다. 허나 과연 그 '과정'이 순이을 '성장' 시켰는가? 깨웠는가? 일으켜세웠는가? 달리게 했는가? 전혀. 그녀는 삼류 밴드의 위문공연 앞자리에서 눈요기 롤을 맡아 고군분투하며 그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건 그냥 또다른 왜곡일 뿐이다. 애초부터 출발의 당위를 놓쳤기에 그 과정의 의미도 이미 힘을 잃고 내겐 무가치했다. 진짜 우스운 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와 남편이 눈물 흘리며 회한에 젖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눈물이 났다는 거다. 눈물이!
대체 무슨 심정이었던가! 나는 내가 어이없었다. 억울해서, 허무해서, 기막히게 원망스러워서- 라는 그녀의 심정이 툴툴거리며 뒤쫓는 과정에서 어느새 이입된 것인가. 그도 우습다. 영화 관람 최대의 희극이다. 하지만 눈물이 났던 이유는 좀 더 생각해보고 싶다. 그나마, 따귀를 때리는 액션이 가장 어울린다고는 보였다. 다른 어떤 행위로도, 대체하기는 힘들거였다. 그래서 더욱 갑갑했지만. 김추자의 노래들. 늦기 전에. 간다고 말해주오(... 맞나?)는 정말 오랜만에 들었다. 대체 그 노래들이 몇년도 산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 전축을 통해 흘러나오던 그 노래들에 귀를 기울였던 어린 날이 되살아난다. 엘피 음반의 재킷에 등장했던 그녀의 긴 머리, 짙은 눈화장, 재킷 뒤에 적혀있던 노래 가사들, 을 떠올렸다, 덕분에, 오랜만에.
아, 한가지 더. 시어머니가 월남가겠다고 생떼쓰며 걸치고 나온 그 대나무 가방( 대나무인지도 자신은 없다). 엄마의 가방을 몰래 열어볼 때 가슴 두근거리던 기억이 한꺼번에 살아났다. 내게 그 가방은 성숙한, 또한 정숙한 여자의 보물 창고 같은 이미지다. 잘 차려입고 우아하게 외출하는 엄마의 비단 양산과 원피스, 그리고 아릿한 냄새가 떠오른다. 하지만 거기엔 범접할 수 없는 묘한 권위가 있다. 꽤 적절한 소품이었다... 헌데, 시대적으로 걸맞긴 한건가...? 부유한 집안이라 해도 시골 종부의 소품이라기엔 좀 과하게 얼리 어댑터용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아마 대개가 일본 수입품이었던 기억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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