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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사인보드 뒷면에 마커로 큼직하게 쓴다. Close Out - SALE . 통로를 내려오며 삐죽 보여질 자리에 엉성하게 기우뚱 걸어둔다. 러프한 손글씨가 오히려 제대로 클로즈 아웃스럽게 처연한 사인판을 멀끄러미 바라보면서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체감을 꿀꺽 삼킨다. 아, 나 지금 클로즈아웃 하고 있지. 내걸어두고 거의 삼주 이상을 미적거리다보니 안녕- 하고 헤어진 손님을 다시 보는 면구스러운 일이 종종 생기는 요즘이다.
- 어, 아직 안닫았네. - 아니 뭐... 안 닫아서 불만이세요오...?
괜한 심술로 대꾸하면서도 어찌 되었건 가게를 파는 거 아니라 닫는 거라 있는 재고를 모두 처분해야 하는데 그게 만만찮게 시간이 걸리는 거라 속은 불편하다. 마음 먹고 차근차근 준비한 마감이 아니었기에 구석구석 쌓인 물건이 줄줄이 밀려나온다. 예전에 보면 남들은 상황 나빠졌다 하면 주말 사이에 후다닥, 보따리 싸악- 거둬가지고 자취도 없이 사라져서 미수금 있는 서플라이어들 발 동동 구르고 뒤에서 욕하고 한동안 그 후유증으로 주변들 웅성웅성 그러더구만 나는 도망도 못가고 보따리도 못 싸고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 앉아서 온동네 문 닫는다 광고까지 해대며 꼼짝을 못하고 있으니 참, 재주도 없다. 한 방에 날려버리고 잡신경 쓰지말고 쉽게 끝내라-는 조언에 에라, 그러자- 하고 가뿐히 미련 떨치지 못하는 건 그렇게 '날려버리고' 나면 남아있는 결재대금 얼마씩이라도 나누어서 성의 표시라도 하고자 했던 목표에 턱없이 못 미칠 뿐 아니라 남는 것 하나 없는 빈손이 되어버린다.
클로즈 아웃 물건만 취급하는 중간 거래상들에게 의뢰를 하면 하다못해 가게 쓰레기통까지 싹- 치워 가져가주겠다는데 그런 경우 물건 값은 값이라기 보다는 그냥 치우고 운송하는 돈이다.
너무 헐값이라 내가 리테일러들이나 일반 손님들에게 아무리 값싸게 처분한다고 해도 최소한 다섯배 이상 차이가 난다. 재고가 대략 5천피스쯤 된다고 치면 만불 이상 수입이 달라지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 매일 나와서 이렇게 시간 끌기 질질. 그래 요즘은 묵은 재고들 먼지 닦고 모양 갖춰서 재포장하고 가게 디스플레이도 재고 소진용으로 재정비하느라 손이 제일 고생 중이시다. 저녁 식사 준비 하는데 캔뚜껑 따다가 포기했다.
긴 글 쓰기에 우선은 마음 여유도 부족하지만 늦은 밤 여전히 얼얼한 손가락 움직이고 나면 다음 날 아침 마디 마디 뻣뻣하게 붓는거 보며 아하... 허접한 블로깅조차도 절대적으로 몸 바쁜 인간에게는 버거운 사치일 수 있구나, 깨닫는다. 멋지고 유쾌한 노동자, 쿨~한 블루컬러란 마음과는 별개로 녹녹치 않고, 그 앞 뒷말들 전혀 실상에선 어울리지 않고 가끔은 철없고 우스운... 겉멋인거다.
여튼 올드타이머용 리바이벌 무대 엉성히 마련해두고 한데 뒤엉켜 잠겨서 창고 구석에 숨죽이고 있던 묵은 가방들 하나씩 커튼 밖으로 불러내며 인사 나누다보니 그 하나하나에 얼비쳐 지난 시간들이 알알이 떠오른다.
마치 그건 마악 연애를 시작하기 직전 온 몸으로 감지하는 미묘한 설레임과도 같은, 세일즈맨의 손에 들린 첫 가방을 대면할 때 화악 다가들던 이미지, 받은 물건 품에 안고 선반에 정리하던 그, 무념무상의 단순 작업 중에 떠오르던 생각, 그 시간 귓전을 울리며 백뮤직이 되어주던 오래된 팝송의 지루한 멜로디까지도 기적처럼 한꺼번에 되살아나 시간 여행을 강제하는 체험을 요즘, 하고 있다. 큰 돈 비싼 물건도 아니고 공들인 작품도 아니고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자식처럼 내놓은 분신도 명품도 아닌 그냥, 저렴하게 만들어져 내 손에 들어왔다가 적당한 가격에 팔아치워지는 가방들, 얼마간 쓰다가 싫증나면 쉽게 버려지는 흔한 가방들일 뿐인데 그 얼굴얼굴 오랜만에 대하니 떠오르는 자잘한 기억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무수한건지. 그 기분이 신기하기도 어이없기도 그런데 속 깊은 곳에서는 왠지 나 자신에게 못마땅하고 화가 나는 이 복잡한 심경은 뭐라 이름지어야 하나. 난 지금 가방 따위 뒤도 안 돌아볼 결심으로 문닫아거는 인간인데.
다만, 깨끗이 닦고 만져주고 새옷 입혀주고 선반에 말끔히 올려주면
박스 속에 뒹굴던 그 얼굴과는 싹 다른 자신감으로 손님들의 눈에 단박 어필하고 제값 제몫 해가며 전진하는 가방눔들의 행보를 보며 이건 그냥, 나 살아야 하는 인생 다시보기 혹은 미리보기쯤 해주는 모냥인가보다고, 새삼, 낮게 서성이는 요즘의 내 마음에 색다른 깨달음 하나를 얻고는 있다. 느린 걸음으로 오늘 가게 앞에 멈춰선 멕시칸 남자 하나.
습관처럼 무심히 헬로- 인사를 건네는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 하이, 아미가- - 어허? 너... 너구나! 오랜만이야! 145B 시장백을 사가던 그 멕고모자의 남자-. 그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대체 몇년 만인가.
나는 너무나 깜짝 놀라서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가슴이 쩌릿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알아보리라고 생각 못했는지, 내 놀란 얼굴에 좀 머쓱해하는 표정이다. 그 모습에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하니까, 내 이런 반응이 당황스러울 수도 있을거...라는 걸 깨달았다. - 어떻게 지내? 요즘도 거기 윌셔쪽에서 장사하니? - 아니... 지금은 알라미다쪽으로 옮겼어. - 아, 그래애...잘됐다. 그쪽이 더 좋을거야. - 응. 멕시칸 친구들도 많고, 더 나아. 근데 너 문 닫는거니? - 응. 그렇게 됐다. 여전히 어눌한 말씨에 여전히 검게 그을린 얼굴. 요즘엔 주로 옷하고 액세서리를 팔고 있다는 그는 내가 추억처럼 145B를 집어들어 그 앞에 내밀어보이자 씨익- 웃으며 가방 매무새를 다듬듯 오래오래 만지작거린다.
그에게도 일사오비의 추억이 있는걸까. 내가 가방 내밀어 건넨 소리없는 인사를 그도 알아들은걸까. 말은 없다.
6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사 불인, 그래서 여전히 두 장 골라가는 싸구려 가방, 145B. 아니 그렇다면 지금이 다시 그 시작인가, 끝이면서 출발인가- 문득 멍한 기분.
-굿 럭! 그는 그렇게 수년만에 불쑥 나타나 물러나는 내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 가장 절실히 행운, 이란 것이 내게 필요한지도 모르는, 지금 이 때에. 대체 이 사람은...누굴까. - 그래, 너두. 잘 지내. 잘 될거야.
나 역시 그의 행운을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며 또한 나직히 고마워... 인사했다. 왜 내게 고마운 존재인지 그가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그는 내게 그런 의미이므로. 팍팍한 하루가 덕분에 다소 촉촉해졌다.
늘 어떤 시간, 좋건 싫건 마음에 점 하나 찍게되는 순간이면 훗날 이 모든 것들 다 추억의 블러- 한 가운 걸쳐입고 아련하게 채색될테니 그저 담담히 가자, 이쁘게 여기자... 며 한발 물러선 심정이려드는 거 나쁜 일 아니지만
지극히 사소하고, 거칠고 때묻어 초라한 일상조차 그렇게 뽀얀 그림으로 갈피 속에 끼워넣는 내 습성이 요즘엔 부쩍 못마땅해서 아니라고 도리질 치고 싶다.
추억? 빌어먹을 추억이라니. 이런게 무슨 추억이 될꺼라고, 헛꿈 꾸지마... 힘든 건 힘든거고 싫은 건 싫은거지. 분홍 포장 입힌다고 속엣 것 말랑해지지 않아. 추억이 될거니까 일단 견디자는 거? 오히려 나약하고 구차스러운 자기 최면이라구...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망각과 체념의 마취에 힘입어 나는 또다시 그 퍽퍽한 시간들을 어느새 추억의 호주머니에 챙겨넣었음을 뒤늦게 발견하곤 한다.
그러면서 뒤돌아 가슴 저리고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막을 수 없는 후회의 한숨이 주춤대며 새어나는 걸 그저 내버려둬야 한다. 내 유약한 감상주의의 안 끝나는 업보다.
태생적으로 유전자에 찍혀나온 낙인인 걸 어쩌겠나. 운명을 바꾸려들다가 이미 정해진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운명이 바뀌는 소리를 들었다 - 던 어떤 시인의 고백을 위안 삼으며 선선히 엎드릴밖에.
그렇게 추억이 될 고단한 오늘 하루도 지나갔다.
이제 정말 다 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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