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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카피라이터 이만재와 날아간 편지

2008.03.26 06:16 | 옛날일기 | 제니퍼

http://kr.blog.yahoo.com/joomic/4532 주소복사


90년대 초반쯤, 카피라이터 이만재 선생을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는 내 기명 인터뷰 컬럼의 세번째 초대 손님이었는데 -첫번에는 코미디언 쟈니윤, 두번째는 추성춘 앵커였다 -
당시 이미 워낙 유명 인사였기도 하지만 뭣보다 프로페셔널 글쟁이, 첫째가는 방송 패널,
그 자신 다종 매체의 능란한 인터뷰어로 다방면에 종횡무진 활동하는 인물이었던 탓에
어린 스물 몇살짜리 꼬마가 대들어 그라는 인물을 연구 -컬럼 타이틀이 남성연구였다- 한다고 들이닥친 그 액션부터가 사실 좀 한계를 안고 출발한 일이긴 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더욱 기죽지 않으려,
좀 당돌한 질문도 하고 그가 보기엔 참 어이없었을 아는 척 도 해가며 아마도,
정말 아마도 딱 한 줌 밖에는 안되어보였을 작고 어린 여자애- 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긴장하고 애썼던 기억이 있다.

그는 대략 줄잡아 스무해 쯤의 치열하고 분주한 사회 활동으로
카피 1 100만원 - 당시 화폐 가치를 지금과 정확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냥 '장당 1백만원' 이라는 말 자체가 건방지도록 비싼 카피라는 하나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을 요구하는 겁없는 톱클래스 카피라이터로 자리매김하고
충무로에서 카피파워라는 독립 카피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광고라 하는 물건이 딱히 카피 하나 만으로 시작과 끝을 이룰 수 있는 종목 아니라
기획에서 제작까지가 다 유기적으로 한데 엉킨 완성물을 요구하는 프로세스,
누구의 무슨 작업 때문에 성공한 캠페인이 됐다- 는 구분이 애매하기 십상인 그런 분야인지라,
전문 광고 회사에서 떨어져나와 독립 카피라이터로 활동한다는 것이
좀 메인 스트림에서는 튀는 행동이었던 당시 분위기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주변 시선에 아랑곳 없이, 오히려 그 자유분방한 포지션을 즐기듯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적으로 그 이름을 알리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뒤에 감추고 있는 레프트 훅 한 방에 대한 각오와 의욕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무골충으로 살기를 원한다- 하는,
아주 솔직히 말해서 20, 좋고 싫은 게 분명하고
내 주장이 남의 시선이나 간섭에 영향 받는 걸 거부하는 나이의 그 당시의 나로서는
쏙 들어오게 이해되지는 않았던 인생관을 피력한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주장하는 캐주얼한 인생과 다소의 맥이 통하는 가치관이었을까싶기도 하지만.

어찌어찌 인터뷰를 하고, 전문가에게 책잡히기 싫은 자존심으로 정말 끙끙대며 기사를 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지가 인쇄되어 나왔을 때 나는 차마 들고가지도 못하고 우편으로 그에게 책을 부쳤더랬다.

 

얼마 후, 이만재 선생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타이핑한 다섯줄 짜리 편지에 담긴 여섯줄의 문장.

카피라이터답게 그는 그 짤막한 글 안에서 감사와 칭찬과 격려와 요청과 담날에 대한 기약까지를 모두 말끔히 해결하는,
아주 산뜻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취재원에게 작건 크건 어떤 반응과 인사를 받는 일은, 진행자 입장에서는 그 무엇보다 고맙고 몹시 기쁜 보상이다.
무플의 공포는 단지 21세기 웹동네만의 문화는 아닌 것이다.

줄곧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던 나로서는 정말 감사하며 꾸벅- 절이라도 하고 싶게 만드는 한장의 독자엽서 였고
취재원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의미있는 응답이었던 셈이라 보관함에 넣어 간직해왔다.

일전에 황지우 옛날 시집을 찾느라 창고방의 책들과 다이어리들을 뒤적거리다가
오래된 상자 안에서 새삼 그의 옛날 편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아하이게 여기 들어있었구나…”

뜻하지 않은 반가운 친구 우연히 길에서 만난 기분으로, 큼직하게 붓펜으로 주소를 적어내려간 봉투를 열고 속 편지를 꺼냈는데- 

그냥 흰종이다.

 

어엇! 이게 무슨 일이지? 그냥 백지네…”

깜짝 놀라 편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주 희미하게 글자 찍힌 흔적이 보였다.
나는 창고에서 나와 환한 불빛 아래 편지를 비춰가며 간신히 그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편지는, 일반용지 프린터가 보급 되기 전 팩스머신이나 워드 프로세서에서 주로 사용했던 감열지라고 하는 특수 용지에 인쇄된 편지였던 탓에, 시간이 흐르면서 잉크는 다 날아가 버리고,
이젠 그저 찍혔던 흔적만 그 위에, 마치 얼룩처럼, 문질러 다 사라진 낙인처럼, 그림자 글씨처럼 남아있었던 거다.

문득 가슴 한켠이 싸아해왔다.
그렇구나... 그렇게 되는구나... 시간의 휘발성이란 이렇게도 강력한 것이구나.

하긴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그만하면, 기억은 기억들만이 휴식하는 공간으로 날아가버릴 만하다.

그의 편지를 가만 들여다보며 나는 새삼 다시, 스스로 남는 기억과 흔적없이 사라지는 기억의,
언제인지조차 나 자신도 알 수 없도록, 뉴런에서 스스로 오가나이즈 하는 그,
세이브와 딜리트, 자동으로 돌아가는 프로세스의 불규칙한 룰과 오묘함에 대해 다소의 무력감과 신비감을 되새겼다.

그건 마치 마치 감열지에 찍힌 편지와도 같다.

잉크 냄새 선연하던 그 새 종이, 새 글자들이 주던 가벼운 흥분들은 연기처럼 날아가고, 편지를 받았던 기억도 희미해지고,
이제 손에 들고 들여다보는 종이쪽에서조차 검은 잉크빛 모두 사라지고
간신히 불빛의 도움을 받아 점점 사그라지는 메시지를 되새겨야 하는 그

기억과 편지의 그 닮은 행적이 보여주는 상징을 곱씹으며 나는 한편 아쉽기도, 한편 서글프기도 했다. 
그는 40대에 품고 있던 꿈을 이뤘을까.
마침내 이 갑갑한 세상을 향해 신나게 '한 방' 을 먹이고 통쾌한 충족감을 과연 맛봤을까.

그로부터 세월과 나이를 먹은 지금의 나는 그런 꿈과 희망의 성취란 건 절대 저절로 이뤄지지 않고, 
맘 먹은 것처럼 쉽게, 내 맘대로 운전하게 되지도 않는다는 걸 어리석게도 깨닫고 있는데. 
그저 희미해진 편지처럼, 흐려지는 추억과 기억의 흔적들로 헛헛해하는 딱한 경험만 늘어나는 중인데... 


................

엊그제 오랜만에 올림픽길에 있는 '생명의 말씀'사에 들러 몇가지 책들을 훑어보는 중에

막 쪄낸 찐빵 이라는 책 하나를 만났다.

교회 나간지 어느새 3년차지만,
아직도 초신자 수준의 신앙을 더이상 키우지도 못하고 제자리걸음으로 머뭇거리는 내게 초신자를 위한 '開眼 百日記' 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은 더구나 포동포동 따끈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제목 때문에 당장 내 눈길을 끌었는데,

책을 집어들고 보니, 다름아닌 카피라이터 이만재 선생이 수년 전 쓴 책이었다.

가수 윤형주씨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문한 지 얼마되지 않는다는 그가,
교회 나가기 시작한 첫 1백일의 기록을 일기처럼 써내려간 책이었다.

굉장히 의외였기도,
그 콧대높은 백만원짜리 카피라이터 이만재가 머뭇거리며 십자가 앞에 나아가 예배의 무리 속에 섞여서,
남들 하는 모양 흘낏거려가며 두 손 모으고 기도문을 입술 움직여 외우고
하나님 앞에 지극히 모자란 어린아이가 되어 마음 내려놓는 그 그림을 떠올리며 그러나 무척 감동하기도 했다.

그의 글 속에는 내가 처음 6개월, 아니 1,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내 겪고 있는,
세상의 영욕에 몹시 시달린 초신자가 간신히 하나님을 만나고 그와 대화하고 묻고 의문하며 원망하고 대들며 한걸음씩 앞으로 흔들리며 내딛어가는 서툰 걸음 걸음새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가 꿈꾸었던 '한 방'은 결국 이거였나?
아니, 허망한 '한 방'의 욕심을 벗고 비로소 다른 세상을 보게 된걸까?

그 이후로도'세상 속의 찐빵' '찐빵 비망록'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 등을 연이어 써내며 이번엔 기독교계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하니 이게 결국 '한 방' 이 되어버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십수년 전 희미해져가는 몇시간의 만남의 기억을 오버랩하며 나는 새삼,
이제 비로소 얘기 통할 것 같은 동지를 만난 기분으로 마음이 촉촉해졌다.
뭣보다, 담담히 머리 긁적이며 초신자로 걸음마했던 그의 하루하루가 내 일상과도 너무 닮아 있어 반가웠다.
그렇구나...그렇게 처음으로 되돌아가 시작할 수 있구나, 그렇게 다 이룬 사람들도.
그리고 거기서 또 뭔가를 이루는구나, 그렇게...

지나가는 것은 지나가야 하고 지워질 것은 지워져야 하고 잊혀질 것은 역시 잊혀져야 당연이며 필연인 거 분명 맞다.
그러니 지워지는 것들을 되살리려기 보다
앞에 놓인 새로운 것에 마음을 쏟고 거기에 한번 몸을 던져보는 것
나이 먹을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새로움에의 관심,`어린아이처럼 처음을 겪어보는 무모함,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사실은 그거라는 생각을 한다.

서슴없이 다 내려놓은 지각생 초신자가 되어 그 시간을 또한 꾸밈없이 털어놓고 홀가분히 엎드린 이만재 선생의 '막 쪄낸 찐빵'이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서슴없이 새로 태어나 그 새로움의 경험을 나눔으로 또한 한가지를 더 이룬 그가, 무척, 부러웠다.

그러고보면,
기억을 추억으로 분류하고 추억에 등재되지 못한 것들은 허드렛 서랍으로 '이동' 시키고
대신 비어진 자리에 새 경험들, 새 도전들, 새 희망과 꿈을 주섬주섬
그렇게, 저절로 움직이게 내버려두지 말고 움직여 스스로 정리하는 액션이 필요하다- 고

게으른 일상으로 새 봄 한 달을 속절없이 다 보내고 있는 오늘,
깨닫고 깨닫는다.

오늘은 정말, 서랍 정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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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2008.03.27  06:22

찐빵 맛있게 하는데 추천해주세요. 근데 통만두가 더 맛있는데 요즘 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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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2008.03.27  10:01

29살 먹고 우습게도 세상 다 산 사람 마냥 흘러간 청춘을 아쉬워하고 있었던 찰라에 제니퍼님 글을 읽고 보니 참 부끄럽기 그지없어요~(서른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해놓은 것 하나 없는 현실은 여전히 두려울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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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8.03.27  14:42

음. 저 막 쪄낸 찐빵은 온누리 분식집 제품인 듯하구요, 찐빵은 역시 안흥찐빵인데... 요즘에 안 파나요? 오크님이 모르실 리 없는데...?
근데, 괜히 통만두 얘기는 꺼내갖고... 쫄깃하고 도톰한 만두피 호호 불어가며 통만두 먹고 싶자나요...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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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8.03.27  14:47

아니요. 감자님 부끄러워하실 일 하나 없죠. 해놓은 거 지금은 안 보이구, 이담에 다 보입니다... 서른 코앞? 에구... 서른은 무슨 낭떠러지 같은 거 아니구요, 이제 간신히 번잡스런 유원지 다 지나서 제대로 된 등산코스 시작하는 입구인 거 곧 알게 될겁니다. 감자님은 멋진 여성이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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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powder2000 2008.03.28  03:36

히야, 남성연구 리포터이셨구나.
앞으로 조심하겠슴다. 제니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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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8.03.28  03:40

에이...지금은 연구 끊었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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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5.29  16:51  [69.235.156.201]

그 찐빵이 막 쪄셔 가마솥 밖으로 나왔을 때
바로 사 먹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가슴 속까지 따끈따끈해지던...

그런데 이 글을 써 내려가는 젠 이뻐 님의 글을 보면
내공이 이만재 씨 못지 않다는 느낌이 절로 드네요.

대개 여자들은 나이를 잘 안 밝히는데
여기서 노출하셨군요.
신앙생활 나이(물론 신앙의 정신연령과는 절대 무관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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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5.29  16:52  [69.235.156.201]

옛날일기, 옛날찐빵, 옛날짜장... 그리운 그 옛날(Good Old D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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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2009.05.30  08:53

아, 그런게 노출이 되었던가요... 신앙생활 나이는 아직 달리기도 이릅니다. 가릴 것도 없이 속이 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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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5.30  10:32  [69.235.153.13]

그래서 예수님은 남겨 놓으신 것 아닐까요? 마1930을. 제니퍼 님을 위해... http://www.biblegateway.com/passage/?book_id=47&chapter=19&version=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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