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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발렌타인스 데이. 인종 모호한 키 큰 남자 하나가 빨강 분홍 색색이 섞인 풍선 무더기를 휘날리며 가게에 들어선다.
물건을 찬찬히 살피더니만 새틴천으로 된 조그만 이브닝 백을 발견, 보여달란다.
빨강색과 핑크색 두개를 놓고 한참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자기 풍선 끝에다 매달 요량인지 대어보고 재보고 고민이다. 이럴 땐 참견 안 하고 그냥 가만 놓아둔다, 나는 차라리 모니터 들여다보고 노는 게 낫다.
"혹시 여기 가운데 꽃 대신 하트 코사지 붙은 건 없니?" "그런 건 없는데...발렌타인 데이 선물하려고 그러는구나?"
이쯤에선 슬슬 아는 척 들어가주신다. 참고로, 미국서는 발렌타인스 데이에는 남녀 구분 없이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다. 아니 오히려 여자들이 꽃이나 선물이나 풍선이나 뭐 로맨틱한 걸 받지. 친구들끼리도 서로 선물하고, 아이들에게도 주고, 한국처럼 꼭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 화살표 같은 거 없다. 당연 화이트 데이 같은 것도 없고.
"어떤 게 나아보이냐? 여기 풍선 끝에 매달건데." "글쎄... 백 안에 뭐 선물 넣어서 주려고 하는거야?" "응. 란제리."
오호...이분이 나름 로맨틱한 아이디어를 내셨군.
"그래? 너무 멋진 생각이야. 무슨 색깔인데? " "저쪽 란제리 가게에서 봐둔 게 있는데 빨강색. 근데 가방까지 빨강이면... 너무 과하지?" "그러게... 풍선에 매단 모양은 빨강이 이쁘긴 한데..." "얼마니?" "육불에 가져가라. 발렌타인데이니까." "오불엔 어찌 안되겠니...?"
흠... 조금씩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귀찮으면 바로 까칠해지는 내 심사. "벌써 선물 사려는 거 같아서 깎아준 거거덩? 여긴 홀세일 가게라 원래 하나 두개는 안팔아..." "알았어. 그럼 란제리 사갖고 다시 올께-" "오케이"
그러더니 삼십분쯤 있다가 다시 풍선 한 무더기가 버스럭거리며 가게에 나타났다.
"나 다시 왔어. 근데 핑크색으로 줘. 왜냐하면 빨강 백은 나중에 안 들게 될거 같아. 분홍색은 몰라도...그렇지 않니? 너라면 어떻겠어?" "여자 나이가 어떻게 되냐?' "음, 미들 에이지.내 나이 또래-." ...미들 에이지...내 나이 또래라... 아니 이 분이 그냥 직진하시지 왜 유턴을 시켜..나랑 스무고개 하자구...? 더 어렵다 얘, 너 나이가 몇살이나 됐을런지 내 도통 모르겠거덩...콧수염까지 길렀으면서.
"그럼 20대?... 30대?"
에이, 대충 내려서 오퍼넣는다. 아님 말구.
"30대쯤이지."
30대란다... 나같으면, 난 둘 다 안들어...그 백은 말이지... 고등학교 애들 프롬파티에 주로 쓰이는 틴에이저용 가벼운 스탈이라구...라고 말했다간 장사 망치는 소리니 그 소리는 쑥- 집어넣고.
"이봐, 친구. 내가 하나 알려줄께. 여자들은 말야, 그거 나중에 들고 안들고 쓸모 있는지 별로 안 중요해. 그냥 그렇게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꺼야. 너한테 받은 선물이잖아."
솔직히 말하면 나중에도 계속 쓸 수 있는 쓸모가 있는 게 당연 더 좋지, 헌데, 이 백은 너무 장난감 같아서 어차피 무슨 색깔을 줘도, 거의 안 들게 될거거든... 그러니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니까 자네 마음이나 편하게 해주겠다구... 속으로 중얼중얼.
여튼 그 말에 이 남자 얼굴이 밝아지더니, 그래? 그렇구나...하면서 사온 속옷을 꺼낸다.
허어... 진짜 정직한 빨강에 검정 트림이 된 레이스 속옷 윗도리와 아래. 한줌밖에 안되는 티라인 팬티에 대충 가리는 웃도리를 보니... 30대 그녀가 엄청나게 날씬하신가보다... 여튼간에.
그리하여 마음을 결정한 이 풍선맨, 선물 갖춰진 모양이 맘에 드는지 휘파람 불며 땡큐를 연발하며 이번엔 그리팅 카드 사야 한다며 어느 가게 가야하는지까지 물어보고 - 참 너무 많은 걸 나한테 기대하시면서, 다시 풍선 더미 버스럭버스럭 끌고 사라졌다.
그러고 다시 30분쯤 지났을까? 울상이 되어 그 남자 다시 나타났다.
"나 다시왔어-."
몇마디 주고 받았다고 이젠 아주 친구먹자는 태세다.
"왜? 무슨 일 있어?" "버스 스톱에서 썸바디가 내 선물 가져갔어." "뭐? 가져가다니? 너...도둑맞았단 말야?" "응..."
에구 이런 얼빵한 사람같으니라구...
"어쩌다가? 너 그걸 땅바닥에 내려놨냐?" "아냐, 땅에다 내려놓은 건 아니구, 벤치에 앉아서 옆에 놔뒀는데 좀 있다 보니까 없어졌어..." "허허..참, 이봐, 여기 다운타운에서는 그런 거 조심해야 돼. 꼭 몸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구...어쩌면 좋으니?"
훌쩍 키는 얼추 내 두 배 길이는 되겠구만, 참...딱하신 분이셔.
"하나 더 사야지 뭐. 그대신 5불에 주라...넘 억울해 나." "...5불? 그래, 알았어. 그렇게 줄께. 근데 너 속옷 거기다 집어넣었더랬어?" "음...잘 집어넣었지. 그러니깐 그 놈이 완전히 선물 하나를 통째로 수지 맞은거야." "그럼, 속옷도 다시 사야되는거네?... 어쩌니... 쯪쯪. 쏘쏘 쏘리다 얘..." 그래도 풍선은 손에 꼭 쥐고 있었는지, 여나믄개는 되어보이는 큼직한 알미늄 풍선들 오늘따라 바람 많이 부는 날, 왔다갔다 분주하신 주인 손에 시달려서 이미 벌써 슬슬 바람이 좀 새기 시작해보이는 그 덩치들만 여전히 그의 머리 위에서 붕붕 날며 버스럭거린다.
1불 깎아줬더니, 열받고 속상한 제 맘 알아줬다고 느꼈는지, 땡큐에 해피 발렌타인! 멘트 날리며 다시 사라졌다.
여자 기쁘게 해주려고 무지 고생한다. 여기 남자들 좀 그런 거 있긴 하지... 여자들 이상으로 섬세하게 준비하고 뭐 이런 마인드. 선물은 해줘야겠는데, 좀 어떻게 비용 덜 들여서 해볼려구 나름 아이디어 내어서 풍선 사서 만들고 선물 고르고 컬러 매치까지 마음쓰고 하느라 아마 서너시간 족히 거리에서 보냈을텐데, 다 도둑맞고 결국 돈 두 배 쓰고 떠난 버스럭 풍선맨...
안됐긴 한데
여자 눈에는 그래도 기특해 보여. 30대 날씬한 그녀가, 이 고생을 얼마나 알아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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