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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두 해쯤 후에, 미국 산다는 애인을 찾아 떠났다. 노처녀 언제 시집가냐 소리 들을 때면 막연한 얼굴로 미국 사는 애인이 부르면 언제든 갈거라며, 마치 고도를 기다리는 연극배우처럼,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그 여자. 마침내 그렇게 사,라,졌,다.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를 그렇게 오래도록 ‘싫어’ 해 본 경험으로는 유일무이한 존재. 같은 부서에서 부딪치지 않으니 더이상은 그 여자로 상처받을 일이 없었음에도, 이제는 충분히 인정받고 자신있게 일하며 자기 자리를 찾았음에도, 그가 일터에 더이상 없다는 사실이 제이에게는 내심 말 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어두운 인생의 장막이 걷히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후로 십수년, 일터에서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시야를 넓히고 생각의 폭을 넓혀오며 심지어 발딛은 땅을 바꿔 이방인의 나라에 옮겨와 전혀 다른 종자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어쩌다 한번씩 그 여자가 생각날 때면, 참, 그 나이가 뭐라고, 그 어린 사람을 두려워하며 힘겨워했을까, 생각하며 제이는 바보스러웠던 지난날을 부끄러워했다.
그 때 좀더 당당하고 자신감있게 맞섰을 수는 없었을까, 뭐가 두려웠던걸까, 좀더 약게 굴며 적당히 칭찬하고 추켜세워줘가며 피해갔다면 어땠을까, 정말 어렸다, 떠올리면 여전히 유쾌하지 않은 얼굴이지만, 그래도 다 지나왔다, 그런 사람도 인생에 어떤 양분이 되었을거야…그렇게 생각해왔다. 덕분에-라고.
연휴동안 먹을거리를 사둘 요량으로 동네 한국 마켓에 갔다.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잔뜩 웅크린 품새로 서둘러 한 바구니 장을 보고 계산대 앞에서 점원이 스캔하는 걸 바라보다 무심히 고개를 든 순간, 건너 저쪽 열 발자욱쯤 앞에 한 얼굴을 보았다. 팔짱을 끼고, 무심한 얼굴로 제이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여자.
1초도 되지 않는 순간, 제이는 그 여자가 이십대 초반의 자신을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했던 바로 그 얼굴 오래도록 잊고 싶어했던 그 사람임을 단박에 감지했고, 판단하고 표정이 변할 새도 없이 순간 고개를 돌렸다.
그 여자 역시 제이를 알아봤을 거였다. 하지만 이윽고 다가온 남자와 함께 아무 말없이 가게를 떠났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고개를 돌려버린 제이처럼, 설마 제이가 여기 미국땅에 와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한다는 몸짓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여기서.
이 넓은 땅 미국에서, 엘에이 근교 널린 수많은 한인 타운 가운데 하필 내 동네에서, 지난 5년간 그토록 자주 드나든 그 장소에서 어쩌면 그 날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 얼굴을 다시 보다니! 다시 보다니!
대체 이 사람은 내게 뭘까. 내 인생의 그 많은 사이클 어딘가에 늘 머물러야 하는 존재인가. 난 지금 이렇게 멀리 와 있는데, 어린 시절의 나와는 이미 한참 멀어져 있는데, 이렇게 다시 대면해야 하는 이 사람. 대체 누구인가.
중요한 건 몇초도 되지 않던 그 순간 제이의 마음의 움직임이다. 그 얼굴에 잠시 시선이 머무는 것조차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고개를 돌리던 그 순간의 심정,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한눈에 알아보고 가슴이 철렁하던 그 순간의 마음을 저멀리 종종 사라지는 그 뒷모습에 나이와 세월을 느끼면서도 한푼의 연민도 일어나지 않던 그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마음의 자신을 보았다.
그 여자가 이웃 동네에 살고 있다면 어떻게 하지? 앞으로도 또 마주칠 일 생기면 어쩌지? 이성적으로는 부질없음을 다 아는 그 불안감이 휘저어진 앙금처럼 부스스 다 떠오르는 참 어리석은 스스로를 만났다.
치유되지 않고 덮어졌을 뿐인 상처는 여전히 남는다는 엄중한 진실이 거기에 있었다. 용서하지 않은 것은 언제고 되살아난다는 사실을, 세월이 그렇게 지났는데도 그 얼굴을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도 마음 속에서 분노와 불쾌가 떠오르는 체험을 통해 뼈아프도록 알게 되었다.
미국까지 건너와서, 오랜 세월을 먹고도 알지 못한 깊은 내면의 진실을 참 멀리도 와서, 순식간에 흘러가는 찰나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어리석고 나약한 자신의 속사람을 부끄럽게 만나며 가슴이 아팠다.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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