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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98년 4월. 아이엠에프라는 된서리로 온 나라가 정신없이 어수선하게 돌아갈 때였다. 너도나도 실직 혹은 도산의 두려움에 떨던 시기다.
광고가 절반 이하로 줄어 졸지에 볼륨감없이 날씬해진 우리 잡지의 특집기사 주제도 Jobless였다. 나는 그 가운데 여자 직장인의 1백일 실직 체험이라는 특집 기획을 진행해야 했다. 말하자면 실직한 20대 여성의 실직 이후 하루하루의 일상을 리포트하는 기사다.
광고대행사에 근무하는 친구의 소개로 만난 그녀. 굴지의 대기업 하우스에이전시에서 카피라이터로 만3년 일하다가 이른바 기업 구조 조정 작업에 의해 실직한 상태였다.
사실, 이런 기획에 선뜻 얼굴 내밀겠다는 취재원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잖은가,뭐 좋은 일 겪은 처지라고… 헌데 그녀는 아주 선선히 어렵잖게 승낙을 했고, 백수라는 이름을 붙이기 미안하도록 유쾌한 얼굴로 동행 취재에 응해줬다. 당연 구석구석 사진 촬영 포함해서.
만 이틀 동안을 함께 다니며 그녀의 집에서,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한낮의 버스 안에서, 노동부 직업안정과에 찾아가 실업급여 수령도 함께 하며 명동 거리에서 촬영한답시고 함께 휘적대며-내가 밥 한끼는 사줬었는지 모르겠다 - 그렇게 쏘다녔다.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데 취재 응해준다고 해서 돈 생기는 거 없다. 그런데도 그녀는 취재 약속한 첫 날, 아주 깜찍한 메모를 준비해왔다. 이름하여 백수 분류사전-.
1. 신입백수 -자신의 처지에 적응을 못한 상태. 퇴직금 받은 걸로 한 턱 낸다고 친구들과 어울려 여기저기 돈을 흩뿌리며 다니는 백수. 이 사람은 정신 차릴 때까지 집안에 가두거나 때려줘야 한다.
2. 로뎅백수 - 나에게 이런 일이, 앞으로 어떻게 살까? 뭘해야 돈 안 벌면서 살 수 있나 등등 끊임없이 인생과 직업과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백수. 이런 사람에겐 고민 말고 생각을! 하라고 충고해줘야 한다, 더불어 행동도 같이.
3. 구미호 백수 -겉으론 완연한 백수지만 속으론 여러 가지 잘 나가는 아르바이트를 뛰면서 실속을 챙기는 꼬리 아홉 개 달린 백수. 이런 사람을 잡으면 바람만 불어도 매일 압구정동에 놀러갈 수 있지-.
4. 고참 백수 - 이력서를 질릴 때까지 쓰고 주변의 모든 구박도 초월해 이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백수. 이런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면 정말정말 일 잘할텐데.
이외에 잠자고 먹고 숨쉬기만 하는 5.나무늘보 백수, 여기저기 밥과 술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6.빈대 백수, 하루종일 일자리 찾는다는 핑계로 통신하면서 전화비 축내는 7. 사이버 백수가 있을 수 있음. 카피라이터다운 이 깜찍하고도 재치 넘치는 발상에 나는 반했다.
덕분에 기사 반페이지 거저 먹은 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자신의 현재를 그렇게 담담하게 한걸음 떨어져서 유머러스하게 바라볼 줄 아는 그 열린 마인드가 썩 매력있었다.
그녀는 며칠 후에 뉴질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한국에 남아서 비적거려봤자 별 비전도 없고, 아직 나이 젊을 때, 퇴직금 좀 남아있을 때 세상 구경하고 체험도 넓혀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책이 나오면 보내달라고 누구 주소까지 적어주었던 것 같다.
짧은 만남이었는데, 나보다 나이 어린 그녀에게서 나는 아주 신선한 자극과 감동을 받았다.
가녀린 외모에도 거침없이 씩씩하고 늘 다음 순간 미소 지을 준비가 잘 되어있는, 실직자가 되었다고 실직자를 재료삼아 카피를 쓰고 있는, 이런 참 괜찮은 인재가 왜 밀려나 아웃사이더가 되어야 하는지 나는 정말로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많은 실직자들과 구직자들을 만나면서 마음 무거웠던 한 달을 지내고, 책을 내고, 참으로 아이러닉하게도 나는, 그 다음 달부터 그녀에게서 배운대로 노동부 직업안정과를 찾아가서 구직신청을 하고, 실업급여를 수령하는 처지가 되었다. 제대로 아이엠에프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밀려들었다가 결국 밖으로 튕겨져 나갔던 셈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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