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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오시면 늘 미뤄두고 못했던 환경 미화 벼락치기로 하는 게 내 게으른 습관인데- 상자에 잔뜩 담겨있기만 한 사진 몇 개 추려서 액자에 담아 걸어볼 생각으로 빛도 못 보고 썩는 사진들 뒤적뒤적대다가 밑바닥에서 6학년 때 한국일보사 12층 강당에서 가졌던 피아노 발표회 사진을 발견했다.
대개 내 옛날 사진들은 엄마가 사진첩에 잘 정리해두셨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나와 돌아다닐 일이 없는데
가만 보니 이건 따로 액자에 담아 세워놓았던 걸 미국 오면서 프레임 빼고 몽땅그리 한데 모아 챙겨오는 바람에 이제는 그 때의 나보다 더 커버린 아들내미 사진들 속에 때도 모르고 주제 넘게 섞여 있었던 거다.
노란 공단 드레스를 입고 열심히 건반을 눌러대고 있는 그 모습이 참 새롭기도 하고, 무대에 오르기 전 떨리는 가슴으로 찾아갔던 한국일보사 12층 대강당의 그 긴장된 공기가, 냄새가 새삼 떠오르기도 한다. 세월이 수십년 흘렀는데도.
한국일보사 12층 대강당.
나에게는 두 번이나 콩쿨을 치른 곳이고 매년 우리 피아노 학원 발표회가 열리던 곳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총 천연색 장편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 브이 시사회를 보았던 장소, 이원복의 '사랑의 학교' 하드커버 초판본을 선물받았던 장소로 유난히 특별한 추억들이 한꺼번에 깃든 곳이다.
그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 신기하고 낯설기만 한 엘리베이터라는 걸 타고 자그마치 12층씩이나 올라갈 때 가슴 두근거리던 기분까지 설레도록 덧입혀져
여하간 한국일보라는 회사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한국 언론 중에서는 그닥 메인 스트림이랄 수 없는 그 신문 포지션 다 알고 다 평가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이 아마도 죽을 때까지 최고의 신문이며 고향같은 존재로 남을 거다.
어린 사람들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나는 절감한다. SK가 지금 자리에 이른 것은 모두 다 '장학퀴즈' 때문이라고 단언하는 나니까.
그 중 한국일보사 12층 강당과 연결되어 내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아이콘은 단연 '사랑의 학교'.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된 만화였다는데 사실 나는 신문을 통해서는 본 적이 없었고, 이걸 모두 묶어서 하얀색 하드커버 장정을 입혀 백과사전처럼 두툼하게 출판했던 최초의 단행본 버전이 있었는데
비둘기기자 된 기념으로 한국일보사를 방문했을 때 엄마가 이제 마악 출간되어서 뜨끈뜨끈하고 묵직했던 그 신간을 처억- 안겨주었던 내게는 일생일대 최고의 감격의 선물이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몇가지가 컬러로 프린트 되어있던 그 하얀 표지를 열고 야곰야곰 아끼며 읽어내려가는 스토리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렇게도 맛깔스럽고도 감동스러웠던지.
이후로도 나는 참 오랫동안, 튼튼한 커버가 다 떨어져 테이프로 붙이고 그러고도 한참을 보고 또 보고 외우다시피하며 아꼈더랬는데,
어느날엔가, 내 손에서 사라져버린 그 책을 나도 모르게 오랜동안 잊고 살다가 결혼 후에 서점에 나온 두 권짜리 페이퍼백 버전을 발견하고는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구입했었다.
그리고, 희찬이가 글자를 읽게 되었을 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아이에게 강요하듯 이 만화책을 안겨주었다.
그 때 나를 매혹시켰던 그 하얀 하드커버 버전이 지금도 그립다.
일전에 시트콤 'Friends'에서 아마도, 시즌 2-3쯤이었던 것 같은데, 챈들러가 조이의 여자친구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그녀가 어릴 때 즐겨읽었던 동화책의 초판본을 애써 구해다 선물하는 씬이 있었는데
나는 하마트면 울 뻔했다. 사랑의 학교 하드커버판이 문득 그리워서. 초판본을 다시 만나는 그 가슴 벅찬 행복을 배려해줄 줄 아는 그 남자가 너무 귀해 보여서 그 담부터 완전 챈들러 팬이 되버렸다는 거 아닌가, 내가.
그래 어제, 혹시나 해서 이원복 교수 사이트엘 찾아들어가봤는데 이 초판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흔적도 없더군. 오랫동안 마음에 담은 행복으로 자신의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작가는 모르고 있나보다....
만화 두 장만 가져왔다.
 ......
너무 깊숙한 골목 안쪽까지 와버렸나보다.
피아노 발표 사진 한 장이 한국일보사 강당이 되고, 로보트 태권브이가 되고 비둘기 기자가 되고 사랑의 학교까지로 릴레이한다...
내일이라도 당장 안국동에 가볼 수 있다면 뭐 이렇게 꼬불꼬불 타고 들어가기까지 안될테지.
갈증이란 건 때로 지극히 작은 것의 절실함을 깨닫게 하는 때가 있으니.
가끔 뒤적여 찾아내는 추억의 열쇠는 대부분 허름하고, 초라하게 작거나 녹슬거나 가끔 찌그러져 있기도 하지만
마법처럼 어김없이 구멍에 들어가고 잠긴 문을 여는 힘이 있다.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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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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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앞에서 버스타면 늘 경복궁을 지나 한국일보사로 가는데 이젠 거기 지나댕길떄마다 제니퍼님 콩쿨(전 한번도 못나가봤죠), 비둘기 기자, 사랑의 학교가 줄줄이 생각날듯 하네요~저는 왜 사랑의 학교란 만화를 못보고 자랐는지 ;;;; 초판본 중고서적에서 하나 나오면 좋으련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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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샘 2007.04.04 13:24 [76.169.16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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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제니퍼님도 저런시절이 있었군요"
뭐 이런 감탄보다는 웬지 숙연해지면서 울컥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세월 앞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누버진 내자신을 또 보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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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4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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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님이 기억해주신다니 무지 따뜻한 기분이 듭니다... 감자님이 개발하신 이쁜 중고책방에는 혹시...없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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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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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숙연하고 울컥...;;; 그냥 뽀샤시한 추억 여행이여요... 샘님.
감탄하시라는 거 절대 아니지만 뭐 그리 우울모드일 것 없는뎀...
기분 전환하게, 사랑의 학교 함 보실래여? 빌려드릴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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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2007.04.0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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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학교, 불현듯 생각나네요. 한국일보 강당 거기 송현클럽인가 그거랑 같이 있는거 맞죠, 몇번 가봤는데, 제니퍼님껜 그런 뜻깊은 장소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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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5 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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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클럽은 어릴 적에는 못가보고, 엘르 코리아 한국일보 있을 때 선배 만나러 가면 쫌 근사한 라운지 같은 곳을 뭐 자기네 직원식당처럼 들락날락하길래 쳇-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근데, 오크님도 사랑의 학교를 기억하시는군요? 반가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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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샘 2007.04.05 10:09 [76.169.165.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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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드로 된 하얀색 그 책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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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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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퍼백 두 권 붙여서 한 권 만들고 하얀 커버 씌우고 그림까정 그려서 아예 만들어볼까요...그런 거 잘 하는 사람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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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9999 2007.04.0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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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죠...제니퍼님^^
저두 한국일보 비둘기기자로 나름대로 심각하게 학교 소식을 전하던 기억이 납니다..그곳에서 부모님과 맛있게 먹던 양식도 생각나구요...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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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07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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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세요, 준님. 새 사업으로 많이 바쁘시지요? 요즘도 헬멧에 스쿠터로 타운을 질주하시는가요...? ^^
근데, 비둘기기자 동문이시라니ㅡ 진~짜 반가운데요? 게다가 그 시절에 송현클럽도 가보셨던 귀족이시구낭...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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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lekr 2008.01.1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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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때 친구집에 가서..친구랑 놀 생각은 안하고 마냥 혼자 잼있게 읽었었던 책..사랑의 학교..
그 책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어찌나 부러웠던지..
이제..그때 그 나이의 딸을 가지고 있는 엄마가 되어서..불현듯 그 책을 생각하고..아이에게 구해주려고 합니다..
나의 딸에게도 그때 그 감동이 전해질런지 모르겠지만요..^^
근데..초판은 구하기 어렵겠지요?
페이퍼백 버전도 내용은 같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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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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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학교 초판을 알고 계시는군요! 페이퍼백 버전도 내용은 같습니다.
웬지 소중하게 천천히 음미하는 기분은 좀 떨어지지만-^^
따님에게 꼭 사주세요. 틀림없이 좋아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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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153 2009.05.29 16:00 [69.235.156.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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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한켠을 따스하게 밝히는
등불 같은 추억이네요.
전 재주가 메주인 데다 천민출신이라서,
사랑의학교 만화책, 비둘기 기자, 콩쿠르 등등과는 거리가 멀지만,
집에서 아버지가 구독하시던 한국일보에서
매주 월요일 1면의 詩를 읽고 또 읽고 스크랩하던 기억이 선연해요.
그 스크랩은 저와 함께 산 설고 물 선 땅까지 이민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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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30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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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스크랩할 때 그 사각하는 가위질 손맛을 아실 듯한 생각이 듭니다...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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