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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사회의 관심이 8·30 총선에서 일본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한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총리(이하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 창설 구상에 쏠리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동아시아에서의 집단안보체제와 공동통화 구축이라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그는 앞으로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이 두 가지 로드맵을 추진하면서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까지 목표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구상은 한마디로 ‘동아시아판 EU(유럽연합)’를 만들자는 얘기다. 그는 이를 위해 ‘우애(友愛)’라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통해 동아시아 각국이 상호 신뢰를 구축하자고 밝혔다. 그는 우애를 통해 국가 간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서로 돕고 사이 좋게 지내는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토야마 총리의 정치철학은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1883~1959년)가 물려준 유산이다.
야당이었던 민주당 대표인 하토야마 총리의 조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난 54년간 집권한 ‘만년 여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초대 총재를 지냈다. 1915년 중의원 의원에 처음 당선된 이후 문부상까지 역임했던 하토야마 전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도조 히데키 총리를 비판했던 일본의 극소수 정치인들 중 한 명이었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주창한 하토야마 전 총리의 정치 철학이 바로 ‘우애’였다.
- ▲ 하토야마 유키오 차기 총리가 선거 지원 유세 중 지지자들에게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photo AP
‘우애’로 동아시아를 하나로 묶겠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유럽 통합의 대부인 리하르트 니콜라스 에이치로 폰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1894~1972년)이 1935년 출판한 ‘인간 대 전체주의 국가(Totalitarian State Against Man)’라는 책을 읽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이 책을 직접 번역, ‘자유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면서 ‘박애’라는 단어를 ‘우애’로 바꾸었다.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은 오스트리아의 주일 공사를 지낸 하인리히와 일본인 부인 아오야마 미츠코의 차남이었다.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은 이 책에서 자본주의가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평등을 추구하는 공산주의가 태동했으며, 나아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 대항하는 국가사회주의가 탄생했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은 평등만을 추구하는 전체주의도, 방종에 빠진 자본주의도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켰다면서 자유와 평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지 못하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가 필요하며, 이는 프랑스 혁명의 3대 이념인 ‘자유·평등·박애’ 가운데 박애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은 1923년 ‘범유럽(Pan Europe)’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등 유럽 공동체에 대한 운동을 줄기차게 벌여온 정치가 겸 철학자였다.
“과거사·영토문제, 공동체 속에서 답을 찾자”
하토야마 총리도 시사월간지 보이스(Voice) 9월호에 기고한 ‘나의 정치철학’이란 글에서 조부의 우애 사상을 현대적 의미의 ‘자립과 공생의 원리’로 새롭게 정의하고, 우애의 가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우애에 입각해 동아시아 공동체를 창설하자고 주창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토야마 총리가 동아시아 공동체 창설을 추진하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하토야마 총리에 따르면 첫째, 21세기 국제 질서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일극 지배체제는 이라크 전쟁의 실패와 글로벌 금융위기로 수명을 다했고 대신 새로운 패권국가가 되려는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앞으로 두 강대국의 치열한 패권 경쟁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회원국들을 비롯한 아시아의 중·소규모 국가들이 국익을 지키는 것이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은 향후 20~30년간 세계 유일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반면 중국은 군사 및 경제 대국이 되기 위해 강력하게 도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과 아시아 각국은 자칫하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셋째,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와 글로벌리즘(세계화)이라는 초국가적인 정치·경제 이념이 좌절된 상황에서 민족주의가 모든 국가의 정책결정을 크게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또 인터넷의 보급이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의 결합을 가속시켜 제어 불능의 정치적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민족주의는 영토 분쟁과 역사 문제를 놓고 아시아 각국의 갈등과 대립을 악화시키는 촉매제라는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군사력 증강이나 영토와 과거사 문제는 한·일이나 중·일 양국 차원이 아닌 지역통합을 통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 공동체 창설이 불가피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 ▲ (좌)하토야마 이치로 전 일본 총리(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손자 하토야마 유키오(오른쪽)와 함께 있는 모습. photo AP (우)옛 일본군 복장을 한 사람들이 패전일인 지난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행진하고 있다. photo AP
한·중·일 단일통화 도입 위한 공동연구 추진
하토야마 총리는 EU가 경제통합을 통해 단일 화폐인 유로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경제 통합을 위한 기반은 마련됐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일본, 중국, 한국, 대만, 아세안을 합치면 세계 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만큼, 단일통화를 만들어내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일본 세계평화연구소는 ‘2030년대 국제경제·금융체제 전망’이라는 보고서(3월 10일자)에서 세계적 금융위기와 경기악화에 따른 대책으로 2030년대 이후에 아시아 공동통화를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를 위해 2010년대 일본, 중국, 한국을 중심으로 아세안과 공동통화를 도입하는 데 합의하고, 2020년대 무역 자유화와 경제 연대를 강화해 ‘아시아 공동통화 단위(ACU)’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기축통화로서 미국 달러화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무역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지역 통화체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느끼고 있다. 한·중·일 3국은 2006년 5월 재무장관 회담에서 공동통화 도입을 위해 공동 연구를 추진하고 이를 점진적으로 아세안으로 확산시켜 나가기로 합의한 바 있다. 3국은 이미 아세안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완료했다. 또 현재 아시아개발은행(ADB) 등에서도 공동통화 구축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북핵 해결 없인 경제통합 불가능
문제는 EU가 단일 통화를 만드는 데 50년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시아의 통화 통합이 결코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과 일본 중 어느 국가가 주도권을 가질지도 핵심 쟁점이다. 중국은 앞으로 위안화를 아시아 지역의 기축통화로 삼아 달러화와 경쟁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반면 일본도 지난 수십 년 동안 경제 규모에 걸맞은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미국 다음으로 많은 자금을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출연하는 등 총력을 기울여온 만큼 당연히 자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왔다.
EU는 역사·문화적 공통분모가 상당하고 경제 규모가 비슷한 국가가 많아 경제 통합이 쉽게 이루어졌지만, 아시아는 중·일의 팽팽한 대립 때문에 하토야마 총리라고 하더라도 이를 양보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중·일 3국은 경제 통합에 대한 인식과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어 있지 않다. 3국은 또 FTA 등의 전략적 논의를 하기에는 자국 산업 보호, 기술이전 등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게다가 북한의 핵 개발에 따른 지정학적 긴장 관계를 고려하면 안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통합은 불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아세안 회원국들도 마찬가지이다.
각 회원국마다 중국·일본과의 관계가 다르다. 또 경제발전 정도와 통화의 구매력, 인플레이션 수준도 서로 상이하다. 때문에 이런 점들을 극복하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먼델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아시아 공동통화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도 아시아에서 유로화와 같은 단일통화가 마련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했다.
- ▲ (좌)총선에서 패배한 아소 다로 자민당 총재가 사퇴를 선언하면서 절하고 있다. photo 로이터 (우)지난 6월 5일 방한한 하토야마 유키오(오른쪽) 당시 일본 민주당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DB
‘집단안보체제 구축’은 꿈으로 끝나나
하토야마 총리가 주창하는 동아시아 집단안보체제 구축 문제는 공동통화 창설보다 더욱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토야마 총리는 앞으로 50년간 일본의 국가 목표를 동아시아의 집단안보체제 구축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동북아 비핵화’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한국·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미국·중국·러시아는 각각 핵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장하는 체제를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하토야마 총리가 일본은 ‘비핵 3원칙’을 앞으로도 강력히 유지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제조하지 않고, 보유하지 않으며,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내용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또 “미국이 일본 국내로 핵무기를 반입하지 않도록 미국을 설득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8월 23일 기자회견) 이에 대해 미국의 안보 전문가들은 중국이 핵무기 보유를 확대하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핵만 문제 삼는 것은 자민당과의 차별화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극우파 정치인들은 이미 노골적으로 하토야마 총리의 동북아 비핵화 구상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의 안보가 중국과 북한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는데 미국의 핵 우산이나 핵 억지력 제공을 거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본 국내의 여론을 감안할 때 하토야마 총리가 미국과 일본 군사·외교 동맹의 기본 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집단안보체제 구축도 현 단계에선 비현실적인 구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중국은 현재 국방 예산을 매년 큰 폭으로 증액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또 대만의 경우 마잉주 정부가 친중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적대적인 양안 관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대규모 재래식 무기 감축을 하지 않는다면 한반도의 긴장 상태는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특히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려면 각국 간의 적대 관계 청산이 선결돼야 하는데 각국 간에 통일 문제를 비롯해 영토와 과거사 등이 얽혀 있는 상태이다.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나토와 같은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려는 구상은 먼 훗날의 얘기라고 볼 수 있다.
중국, 일본 주도 공동체 구상 견제… 미국도 부정적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하토야마 총리는 자신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상징적 제스처로 2차 대전 당시의 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신사를 대체할 국립추도시설 건설을 제시했다. 이는 한국과 중국 등 인접국가들과 마찰 요인을 줄이고, 상호 신뢰 구축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하토야마 총리는 또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공식 사죄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지난 5월 민주당 대표로 선출된 뒤 선택한 첫 해외 방문국가도 한국이었으며,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주의의 포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토야마 총리와 민주당 정부가 탈(脫)민족주의 외교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과거 식민 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이 이를 진정으로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실제로 독도영유권과 관련해 하토야마 총리와 민주당 정부는 일본에 영토 주권이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모든 나라가 그렇듯 영토문제에선 일본도 여야와 이념의 차원을 넘어 한목소리다. 언제든 이 문제는 한·일, 중·일 관계의 악재가 될 수 있다.
류장융(劉江永) 중국 칭화대 교수가 “동아시아 공동체는 중·일 간 우호관계 없이는 세워질 수 없다”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중국의 일본 전문가들 중 상당수는 하토야마 총리가 이런 구상을 제시한 것은 자국을 견제하고 일본 주도로 동아시아를 통합하기 위한 속셈이라면서 경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 일각에서도 하토야마 총리의 구상에 대해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마이클 그린 조지타운대 교수는 “미·일 관계의 변화가 오바마 정부에 혼란스러운 요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이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하토야마 총리는 “2차 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는 석탄철광개발 공동회사를 만들어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면서 “이런 우애 정신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 아시아가 공생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만약 동아시아 공동체가 창설된다면, 제레미 리프킨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의 말대로 막강한 경제·정치 세력이 될 것이다.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은 “모든 위대한 역사적 사건은 유토피아로 시작되어 현실로서 끝났다”고 밝힌 바 있다. 쿠덴호프-칼레르기 백작이 유럽통합을 제창했을 때 이는 이상론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이 됐다. 하토야마 총리의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꿈이 과연 현실이 될지 주목된다.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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