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해설 허 생원은 거느린 가족도 없는 장돌뱅이였다. 그는 얼금뱅이에다가 왼손잡이로 그나마 재산까지 날려 갈 곳이 없이 동업자인 조 선달과 떠도는 중이었다. 어느 여름날 둘은 술집에서 여자와 놀아나고 있는 젊은 총각 동이를 보게된다. 그것을 보고 괜히 화가 치민 허 생원은 따귀를 한 대 갈기고는 욕을 하고 쫓아 버렸다. 나중에야 허 생원과 동이가 부자지간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아마 이 때도 아버지같은 마음으로 혼낸 것이 아닐까?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부자간의 정은 끊을 수 없는 것이니까. 그것은 아마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은 근원적 원리일 것이다. 그렇게 호되게 혼이 나고도 아무 소리 못하고 밖으로 나간 동이도 그랬다. 아마 나 같았으면 남의 일에 무슨 상관이냐며 대들었을 것이다. 동이 역시 자식된 마음으로 대들지 않고 뜻대로 하였으며 잘못을 인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허 생원은 이런 동이의 모습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그 때 동이가 뛰어들어와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고 야단이에요." 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걸었다. 나는 동이의 이 인품도 부러웠다. 자신의 허물을 들추었다고 무시하거나 화내지 않고 오히려 받아들이는 마음이었다. 이런 성격이라면 나도 친구들과 싸우는 일이 없고 선생님께 야단을 듣거나 충고를 들어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허 생원의 당나귀는 그와 함께 생을 살은 유일한 동반자였다. 비록 지금은 가스러진 목뒤털과 눈꼽이 흐르는 눈이 주인처럼 볼품없는 모습이나 나귀는 생원에게 있어 짐승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늙은 나귀가 어느 암당나귀를 꾀어 제 새끼를 얻었다고 한다. 생원에게도 딱 한 번 여자가 있었다. 물레방앗간에서 성 서방네 처녀를 만난 것이었다. 그 후 처녀는 생원의 아이를 낳고 결국 집안에서 쫓겨났다고 했다. 그런데 동이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안 계셨다. 어머니가 처녀적에 제천에서 동이를 낳고 쫓겨나 아비도 없고 성도 없는 채로 살아온 것이었다. 허 생원도 동이도 의지 할 데 없이 외로운 몸이었다. 허 생원은 동이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이가 측은한 마음도 들고…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생원은 그만 발을 헛디뎌 개울 한 가운데서 넘어지고 말았다. 동이는 생원을 얼른 부축해 업었다. 동이는 생원을 업은 채로 개울을 건넜다. 개울을 건너고서도 생원은 계속 업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살을 부대끼는 생원에게 동이 등허리의 따뜻함은 정겹고 반가웠을 것이다. 나귀가 걷기 시작했을 때 채찍이 동이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동이 역시 허 생원처럼 왼손잡이였던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허 생원은 동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되었다. 몸도 마음도 외로운 두 사람은 친 부자가 아닐지라도 함께라는 사실이 많은 힘을 줄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은 참 소중한 것인 것 같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힘들거나 아플 때 내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은 같은 피를 나눈 나의 가족들인 것이다. 그리고 꼭 같은 핏줄이 아니더라도 내 주위의 이웃과 친구들의 소중함도 알게 되었다. 모두들 이 당연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부모에게서 버려지는 아이들이나 자식들에게서 버려지는 불우한 노인들이 없는 따뜻한 사회가 될텐데……. 이효석 李孝石 : 1907~1942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 호는 가산(可山).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봄>이 선외가작으로 뽑힌 일이 있으나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28년 <도시와 유령>을 발표한 다음부터이다. 대학 졸업 후 1931년 경제적 곤란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으나 주위의 지탄을 받자 처가가 있는 경성(鏡城)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경향문학(傾向文學)의 성격이 짙은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 등이 있다. 1932년경부터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향토적 ? 이국적 ? 성적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특이한 작품세계를 시적 문체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1933년에는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여 순수문학의 방향을 더욱 분명히 하였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로 이듬해에 전임하였다. 이 시기에 <산>, <들>, <메밀꽃 필 무렵>, <석류>, <개살구>, <장미 병들다>, <황제>등을 발표했다. 1942년 뇌막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고, 29여일 후 36세로 요절하였다. 이효석의 작품세계의 특징은 한마디로 향수의 문학이라 요약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