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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as our body needs daily food, so does our spirit. 육신에 매일 양식이 필요한 것 같이 영혼에도 매일 양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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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6/25
 

30억 개의 네 가지 염기(base), ATGC로 구성된 사람 유전체(genome)의 염기배열(排列)이 2001년
2월 공식적으로 완성되었고 2002년 5월에 실험동물의 대표격인 생쥐(mouse)의 유전체(게놈)도
완성되어 과학자들이 이를 비교할 때 깜짝 놀라고 있다.
1980년대 초 만해도 게놈은(미국 사람들은 유전체를 지놈으로 발음한다.) 사람의 유전자 DNA가 마치
폐백을 드릴 때 신부에게 던지는 대추(유전자)가 계속되어 고리를 만드는 것과 같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유전자(gene)와 유전자 사이에(대추와 대추 사이에 밤이 끼어
들어가는 것과 같이) 심지어는 유전자 안에도 존재이유를 알 수 없는 염기들(silence DNA, 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전자(대추)는 생체의 모든 화학적 작용을 하는 기능을 가진 단백질을
만드는 부분이고 이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DNA(밤)는 유전자가 아니므로 별 볼일이 없기에 당연히
진화과정 중 많이 변형되어 있을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과 생쥐의 게놈을 비교할 때
이 쓸데없는 밤 같은 부분까지도 사람과 생쥐의 두개의 환상이 거의 똑 같은 것이다.
대추와 밤이 섞인 순서까지도 거의 두 생물체가 완벽하게 서로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전자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유전체를 전체로 보는 새로운 관점이 열리게 되어
사람과 생쥐의 게놈을 전체적으로 측정하여 보았다.
게놈을 크게 유전자가 밀집한 부분(gene jungle)과 거의 없는 사막 부분(gene deserts)으로 나누어
놓을 수 있었고 놀랍게도 사람과 생쥐 두 생물체가 정확히 178개의 ‘사막’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뿐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이 사막 부분이 변형(mutation)되는 속도도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왜 유전체가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It’s an absolutely intriguing puzzle.”

가장 궁극적인 문제는 사람이 생쥐와 달리 사람다운 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이 생쥐와 9억년 전에 또 종(種)이 비슷한 쥐(rat)와 생쥐(mouse)가 1.5억년
전에 서로 변형되어 다른 길로 진화되어 왔다. 사람과 생쥐가 그렇게도 다른 것은 수 억년의 오랜
지난 세월간 서로 진화되어 사람과 생쥐가 구별된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은 당연히 유전자 수도 다른 생체들보다 우월하게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놈 지도가 완성되기 직전까지도 효모인 이스트의 유전자가 3만개 정도이므로 사람은 못해도
10만개 정도는 될 것으로 측정하였다. 그러나 진화론에 친화(親和)한 이런 생각도 허상으로 박살
나버렸다. 2001년 2월 이후 오늘까지도 3만개 이상의 사람의 유전자를 찾지 못하였다.
생쥐와 사람도 유전자로 수로만 본다면 호형호제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진정 사람다운 것인가?
내가 찾을 수 있는 대답은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形狀)대로’ 창조되어진 것 뿐이다.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氣運)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
우리가 지닌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Spirit)”이 바로 사람과 생쥐의 다른 점이다.
아무리 다른 곳에서 찾아보아야 찾을 수 없다. 그 ‘생명의 기운’ 때문에 사람은 사람다운 것이다.

문화, 감동, 치유를 위한 "낮은 울타리" 2004년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길에 자신이 생겼어요."
자동차로 길을 찾아 다니는 데 스트레스를 받던 사람이 1,200 달러를 투자해 막 시판을 시작한
'자동 길안내 장치'를 사서 자동차에 부착하고 나서 하는 소리다. 찾아가는 장소가 지도로 잘 나타나서 보일 뿐만 아니라 음성을 통하여 "직진하세요, 우회전하세요" 하고 친절하게 말하는 요긴한 장치다.

미국방성의 최고급 비밀이며 미군만 사용하던 GPS(Global Positioning System)를 레이건 대통령이
민간 항공기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이후, 점차적으로 비행기뿐만 아니라 자동차에까지 부착하여 '길' 모르는 사람들의 천사가 되어졌다. GPS란 24개의 인공위성과 컴퓨터를 이용한 복잡한 계산을
통하여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의 위치를 1 미터의 오차 안에서 정확히 판별하는 장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GPS를 차가 아닌 몸에 부착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을 '주'와
'구원자'로 고백할 때 마음속에 들어온 '성령'이라는 장치는 '예수님의 피'로 산 값비싼 장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광을 향한 경주'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12:1)
문제들과 장애들이 점점 높아질 때, 믿음이 비생산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쉽게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고픈 충동을 느낀다. 그래도 내일은 찾아오고 경주는 계속된다. 경주의 중단은 곧 우리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믿음의 경주 코스에서 벗어나 흘러 떠내려가는 것을 경고한다.
아무리 GPS가 '길'을 잘 안내해도 그 소리에 집중하지 안으면 목적지에서 벗어난다.
이와 같이 성령도 경주에 끝까지 집중하라고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해준다.
그뿐인가 우리가 만나는 갈림길마다 어느쪽이 안전한 길인가도 말해 준다.

우리의 종착지인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경주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기 위치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위치는 항상 절대적인 것에 대한 상대적인 것이다. 그 절대적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GPS가 정해놓은 인공위성에 신호를 계속 보내어 지상에서의 위치를 아는 것처럼,
절대적인 성경을 계속 읽어 그 말씀에 비추어 나의 현 위치를 성령이 알게 한다. 그러기에 성경의 말씀을
알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GPS(성령)의
인도를 계속하여 받는 것이다. 인도를 계속 받기 위하여 GPS(성령)이 계속해서 켜져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치스러운 장식물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 갈 수가 없고 '영광을 향한
경주'를 계속할 수 없다. 성령이 인도 하시는 삶, 절대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삶만이
"인생의 '길'에 자신이 있어요" 라고 대답 할 수 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히12:2)
면류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GPS가 있으세요? '길'에 자신이 있으세요?

문화, 감동, 치유를 위한 "낮은 울타리" 2004년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목수라는 직업에서 연상되는 건 나무에 못으로 망치질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목수의 아들(마13:55)로 태어나셔서 목수 노릇을 하셨다.
망치질 잘하는 그 목수의 손에 못이 박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예수님은 언제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의 손이 못 박히는 구원사의 마지막 과정을 아셨을까?

유대인들은 만 13세가 되면 성년식(Bar Mitzbah)을 한다. 어른이 되는 것이다.
열 두살 때에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성전에서 랍비들과 오래 논쟁하시다가 육신의
부모들에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눅2:49)라고 대답하신 것을 보면 바로 그 나이쯤이 아닐까?
그렇다면 20년간을 목수라는 직업을 가지셨을 것이다.
20년 목수생활에 얼마나 많은 망치질을 하셨나? 1분에 한번 망치질을 했어도 2백40만번이다.
죽으러 오신 예수님의 전 생애가 바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한 ‘죽는 연습’의 고통이 계속되는 순간순간
이었다. 하나의 못이 나무에 박히는 그 망치소리 하나하나가 예수님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을 것이다.
그 망치 소리 때문에 당신과 나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다.
망치를 잡던 그 손이 우리를 고친 손이다. 망치질하는 그 손은 못자국이 있는 피흘린 손이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26:39) 하는 겟세마네의 번민의 그 기도도
예수님이 망치소리와 병행해서 계속적으로 드려진 기도가 아닐까?
그 번뇌의 순간순간이 결정(結晶)으로 이루어졌기에 우리의 구원이 더 값진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갈보리 언덕의 그 순간만이 아니라 목수로 살아간 일생이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일생이었다. 망치소리와 함께한 예수님의 그 고뇌가 우리에게 평화를 주었다.
피묻은 못자국이 있는 ‘예수의 손’을 붙잡을 때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
아니 망치와 못을 든 그 목수 예수에게 내 손을 내밀 때 바로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 이것이 바로 ‘Co-Crucifixion’ 이다.

문화, 감동, 치유를 위한 "낮은 울타리" 2004년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IMAGE 1 =-

제12회 호암상 수상자 다섯 명을 지난 4월 10일 발표했다. 예술부문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 씨가 상금
1억원을 받게 되었다. 우연히 강수진씨의 발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세계 5개 발레단인 독일 슈투트가르트(Stuttgart)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인 강수진 씨는 ‘강철나비처럼 강하고 아름답다’는 평을 받는다. 세계적인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춤 속에 감춰진 그 발은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지를 예기하고 있다.
예쁘고 화려함 뒤에 이렇게 끊임없는 연습과 노력으로 형편없이 변한 발 모양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생각케 했고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강수진 씨는 어느날 갑자기 자고 일어나니 신데렐라가 된 사람이 아니다. 1986년에 슈투트가르트의
최연소 단원으로 들어가서 10년만에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었다. 하루 10시간을 넘게 연습하는 날이
허다해(18시간도 기록한 강철나비다) 한 시즌에 토슈즈가 무려 150여 개나 닳아 없어진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녀의 말이 기억난다. “매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면 어딘가가 아파요.
아픈 것도 무용수 생활의 일부분이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은 날은 오히려 ‘내가 어제 무엇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움 뒤에는 아픔이 있다. 여자 골퍼 구옥희가 하루에 1,000개 이상의 골프공을 쳤다는 기사를
오래 전에 본적이 있다. 마이클 조르단이 농구 코트를 날랐지만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별로 이름 없는 선수였다. 타고 난 신동은 아니었다. 그는 단지 “프랙티스(practice), 프랙티스, 프랙티스.” 라고 답하였다.
지름길은 없다. 지겨운 반복, 피나는 반복이 있어야 프로가 되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대학생이 배구를
잘하기 위하여(단지 서전트 점프를 높이기 위하여) 겨울 방학 내내 하체 운동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강수진은 무용을 대단히 사랑하였고 조르단은 농구를, 그 대학생은 배구를 무척이나 사랑하였다.
프로에게는 사랑이 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지겹게 피나게 반복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매겨진 그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은 누구를 위한 흔적인가?
그 흔적은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허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6인치 짜리 대못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하신 그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준다. 사랑도 연습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욕하는 사람을 품어주고 냄새 나는 그 사람의 발을 씻는 사랑의 연습이다.
나의 손과 발에도 자국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몸에서 저절로 나오기까지 연습해야 한다.

“인생의 유일한 가치는 절대적인 성실성이라고 생각한다.” 강수진 씨의 말이다.
그 성실성을 가지고 남을 사랑하자.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보기 싫게 변형된 발은 아닐지라도 굳은 살이 박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살아갈 때
1억원의 호암상과 백만불의 노벨상과도 비교될 수 없는 “면류관”이 나의 머리에 쓰여질 것이다.

문화, 감동, 치유를 위한 "낮은 울타리" 2004년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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