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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as our body needs daily food, so does our spirit. 육신에 매일 양식이 필요한 것 같이 영혼에도 매일 양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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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6/25
 

지난 수요일 ‘관계 소그룹 훈련’을 받았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 누구입니까?” 라는 첫 질문이었다.
나는 서슴지 안고 ‘나의 할머니’라고 대답을 썼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경로는
우리가 ‘신화’처럼 잘못 알고 있는 낯선 사람에 의하여 즉각적인 회심이 아니란다.
통계에 의하면 75~90%가 친구, 이웃, 직장 동료 그리고 친척들 영향 때문에 시간이 지나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고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가까운 이들에게 사랑과 기도를 집중하여야 한다.

나의 할머니 박기반 전도사는 이화학당을 다니던 1906년 길에서 ‘성결(Holiness)’에 관해 듣고
그 진리를 더 배우기 위해 그 다음해 처녀의 몸으로 모든 것을 뒤에 두고 홀로 ‘도쿄성서학원’으로
떠났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와 그 곳에서 만난 후배인 나의 할아버지와 1911년에 결혼하여
성결교회 최초의 여전도사가 되어 목회생활 50여년의 길을 걸으시다 88세에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두 마디는 “예수! 예수!”였다.
무엇보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가정예배’다. 할머니가 오시면 언제나 어느 곳이나,
우리집이나 고모님 댁이나 작은집이건, 제일 처음 드리는 것이 ‘가정예배’다.
성가시게 성경/찬송을 찾아가지고 올 필요도 없다.
찬송은 항상 459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이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 모두는 3절까지 찬송가 없이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다. 말씀은 본인이 직접 성경을 크게
읽으시고 간단하게 설명을 하신다. 그리고 기도하시기를 시작하시면 이 부분은 좀 길다.
어려서는 언제 기도가 끝나는가를 항상 기다렸다. 기도는 온 식구들을 위해 하신다.
한국에서 일본 땅을 건너서 미국 땅에도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오신다.
임신한 손녀의 뱃속에도 들어가시고 시험을 앞둔 손자의 머리에도 들어 가신다.
할머니의 기도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주기도문을 쏜살같이 외운다. ‘야~’, 드디어 해방이다.

또 하나의 기억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할머니가 목회에서 은퇴하시자 거의 일년 이상
나와 내 동생은 매일 학교가 끝나자 마자 가까이 사셨던 두 분을 꼭 찾아가야 했다.
다른 일 때문에 늦어도 달빛을 따라 무서움을 가지고 갔다 온 기억도 있다.
할머니의 재미있는 성경 이야기 - 찬송가 가사와 똑같이 용맹스럽던 다니엘의 이야기와 다윗왕의
역사를 듣고 나서 꼭 무릎을 꿇고 두 분을 위해 기도를 드려야 했다.
이때 매일 반 강제로 드린 기도의 연습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 신앙이 바로 섰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어머니들이 나의 할머니와 같은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미국에 사는 이민자의 비극이 여기에도 있다.
언어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가정예배를 자유롭게 드리기가 어렵다.
영어를 잘 구사하는 어머니들도 아이들과 함께 영어로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전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러니 할머니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이들(손자/손녀)을 위해 먼저 간절히 지속적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예수 안에서 아이들을 사랑 하는 것을 나타내며 말없는 삶으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언제나 인자한 웃음과 넉넉한 포용력으로 언어가 아닌 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양지의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처럼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가 건강하게 자란다.
말이 아닌 몸으로 하기에 이민자의 어머니(할머니) 노릇은 더 더욱이 힘든 것이다.
어머니들이여 일어나라!

50721

나의 죄 때문에....
[아래 영어로 쓴 글은 동양선교회에서 매월 발행한 Electric Messages의 1908년 2월호 제3면에
실린 나의 할머니 박기반 전도사의 영문 간증이다.
성결신학대학교 교수인 조갑진 목사님이 영국의 한 박물관에서 찾아낸 자료이다.
100년 전에 영어로 쓰여 진 것에 의미가 있다.]

Hallelujah! All praise be to God!
From my birth sin abode in my heart: I grew up in sin, and again. When ability to transgress
came within my power, I became a great sinner.
I was doomed to punishment and God’s wrath was hanging over
me, but Jesus Christ died on Calvary for all. Who like I was are sinking in sin, and through
the shed Blood of cross I was saved.
I learned something about sanctification, and was much blessed through reading and
studying Heb. 9:13-14.
Last July I heard the Gospel preached at the Gospel-Mission at Seoul, which is a branch of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and understood more perfectly the way of Full Salvation.
I prayed that God might give me this blessing, and in answer to my prayers.
He sanctified my soul.
I also heard at the Mission about the Bible School, where those desiring to become workers
might prepare themselves. God had been impressing Luke 10:1-3 and John 21:15-23 upon
my heart and I was desirous of telling the glad news of what God had done for me to my
own people, and so began to implore God earnestly for Him to open my way to Bible School
in Tokyo. He answered prayer again, and open the way, and last month I came to this place
to study His Word and equipped myself to preach to the women of my own country.
My desire is to bear pure and good fruit for His glory, and thus magnify holy name.
Please, pray for me.

1975년 5월 19일은 화창한 봄 날씨의 월요일이었다.
낮 12시 명동성당 건너의 YWCA강당 입구에는 신랑 배진건과 신부 김수정의 이름이 하얀 종이 위에 붓글씨로 쓰여 있었다. 30년 전 오늘 김영백 목사님의 주례로 나와 아내가 결혼식을 올렸다.
토요일이 아니라 월요일로 잡힌 것은 결혼의 모든 일정이 빠르게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던 장모님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바꾸고 나서는 모든 것이 초고속이었다.
4월 19일 약혼, 5월 19일 결혼, 그리고 비자 받는 데로 출국….
그 당시 네 명의 누이는 미국에서 살기에 나머지 가족인 부모님과 나와 여동생은 전가족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의 아버님은 나이가 좀 어리지만 그래도 공부를 위해서는 결혼을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장모님은 오랫동안 둘이 친구로 사귀는 것은 아셨지만 막상 큰 딸이 나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반대를 하신 것이다. 가진 것이 없고 장래가 불분명한 것도 이유였지만 미국으로 이민 가는 사위가 싫으셨다.
어린 나이 열 아홉에 동네 오빠를 따라 평양에 모든 가족을 남기고 홀홀 단신 남한으로 온 본인 처지를 생각할 때 큰 딸이 본인처럼 가족을 모두 남기고 미국으로 가는 것이 더 싫으셨다.
나의 아내는 처음으로 가진 장모님의 핏줄이었기에 애착이 크셨다. 모든 좋은 것은 큰 딸이 우선이었다. 그런 큰 딸을 멀리 미국으로 보내려고 하니 마음이 좋지 않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빨리 결혼을 한 터라 결혼식에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을 하였다.
결혼 축하로 바이올린을 연주한 마우스 최응상, 김남희, 서종민, 임남빈, 우종상, 그리고 신랑 신부와 친구들이 사진을 찍을 때 남자 쪽이라고 남자들 옆에 혼자 서있는 여자 임상희……등 여러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서병일은 마침 방위병 훈련을 받고 있기에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멀리 가지 않았다.
곧 미국으로 떠나는데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오라는 양가의 명령(?)이었다.
그래서 한강이 바로 밑에 흐르는 워커힐의 한 방갈로가 신혼여행 지였다.
결혼식에 참석 못한 애석함을 대신해 우리 가정을 처음으로 방문해 준 사람이 서병일이다.
방위병 훈련이 지금 기억에 성남비행장 이었다. 친구는 그날의 훈련을 끝내고 신혼 방에 들어 오자 마자 하루 종일 흘린 땀을 씻기 위해 먼저 샤워를 하였다.
아직 신혼 부부가 사용하지 않은 샤워를 제일 먼저 한 손님이었다.
아직도 사업차 뉴욕 방문 시 첫날에는 호텔보다도 꼭 우리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서병일이다. 그 다음 날의 방문객은 혼자가 아니었다. 우종상(우갑상의 사촌)은 사귄 지 몇일 되지 않은 경숙씨를 모든 결혼행사에 데리고 왔다. 함을 지기 위해 등촌동 우리 집에서 아내의 수유리 집으로, 약혼식을 하였던 수유리 집과 결혼식에 이어 신혼여행 길에도 데리고 왔다. 결혼 다음 날의 명분은 사진 촬영이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6년 만에 결혼을 하였다.
우리 집 뿐만 아니라 뉴저지에 같이 살고 있는 종상이네 집에 가도 아직도 작품처럼 멋있는 사진이 바로 그날 찍은 사진이다. 신혼여행을 그렇게 친구들과 재미있게 보냈기에 돈을 쓰지 않았다.
선물로 여행비용을 다 담당하신 큰 외삼촌에게 나중에 야단(?)을 맞았다.
“너 신혼여행에서 너무 돈을 쓰지 않았더라.”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창세기 2:24)”.
30년 전 오늘은 나와 아내 두(二) 사람(人)이 하나가 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인 원(元)이었고, 가정(집, 完)을 이루게 하신 완(完)이었다. 그 시작이며 완성의 날로부터 30년이면 오랜 세월이다.
이제는 네 명의 부모님 중에서 나의 어머니만 빼고는 다 하늘 나라로 가셨다.
네 분의 땅의 부모님 뿐만 아니라 30년 동안 우리 가정을 늘 지켜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 드린다. 무엇보다도 나의 다른 쪽이 되어서 나를 늘 완성시켜주는 아내에게 감사 드린다.
앞으로 30년이 될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30년 전 오늘의 약속이 하늘나라로 계속 이어지기를……
I love YOU !!!

50519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2556번)가 우리 사랑방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 게시판을 보고 여러 분들이 감동적(?)이라고 이야기를 주었다.
내가 장로라 그런지 누구는 아부 아님 하고 댓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어느 자매가 자기가 꼭 댓글을 달겠다고 하더니 드디어 달았다.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다.

배진건 장로님

작년에 한국에 다녀오던 중 비행기 안에서 최인호의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를 읽었습니다.
작가는 온유함이나 인내, 고결한 품성 등 어머니가 갖추어야 마땅한 자질을 갖춘 추상적인 어머니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감정이 살아있는 어머니를 애증과 함께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작가의 애증 속에서도 절절한 그리움이 느껴졌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딸들이 느끼는 어머니와는 또다른, 아들이 느끼는 어머니였습니다.

엊그제는 어버이 주일이었습니다.
해마다 어버이 날 수없이 불러 온 "나실제 괴로움..."하는 노래를 처음으로 온전히 3절까지 부르며 하릴없이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절이야 너무도 익숙하여 그저 감정을 가라앉히며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 낼 수 있었지만, 2절을 넘어가며 커서는 문기대어 기다리는 어머니를 노래할 때,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뼈에 사무치게 잘 드러낸 이 글을 작사한 분은 아무래도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한 분이거나 또는 어머니 속을 너무나 썩혀 드렸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엄마가 되어 아이를 키우면서 내 어머니도 끊임없이 생의 고민을 안고 살아 가는, 삶의 과정 속에 있는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나의 엄마가 왜 날마다 새벽기도회에 가서 똑같은 기도를 수도 없이 되풀이 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올해 70세가 되신 엄마가 앞으로 30년 동안 아니 30년도 넘게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엄마와 함께 자매지간 처럼 찜질방에 다니시는 80세를 바라보는 시어머니도 30년이 넘게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속 병원에 다니시느라 힘드실텐데도 매주일 이 권사님께서는 특유의 당당함을 잃지 않으시고 화사한 모습으로 비전의 집 앞자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멀리서 뵙기만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권사님을 항상 지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같은 아주 화창한 날에는 여러 해 전에 그렇게 했듯이 엄마와 함께 등산이라도 하고 싶어집니다.
성격은 서로 많이 다르지만, 마음맞는 친구처럼 잘 지낼 수 있었던 엄마, 그저께도 어제도 전화 통화를 했어도 또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5월이라 더 그런가 봅니다.

조성아 드림

법(法) 안에서 아버지(Father-in-law)

2005.04.15 09:18 | 내 가족 이야기 | jinkpai

http://kr.blog.yahoo.com/jinkpai/945100 주소복사

-= IMAGE 1 =-

“이모부, 왜 미국 결혼식은 사회자가 없어요?” 지난 17일 상훈이와 수진이의 결혼식이 끝난 직후 미국식 결혼식을 처음 본 서울에서 온 조카딸 은영이가 물었다. 결혼식의 주례를 맡으신 목사님이 사회와 예식을 함께 진행하기에 없다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한국에서는 주례자가 고매한 분이면 어느 분이나 가능하지만 미국은 클러지(clergy; 목사, 신부 혹은 스님)나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만이 결혼주례를 설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주례자가 두 사람이 결혼을 하였다는 라이센스에 서명을 하여 결혼의 법적인 효과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날 두 사람의 결혼식을 주례한 목사님이 바로 신부(新婦) 수진의 막내 삼촌 정태호 목사님이셨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같은 플로리다에 사시지만 탬파(Tampa)에서 펜사콜라(Pensacola)까지는 자동차로 8시간이나 걸리기에 주례 목사님은 그 다음날 주일설교 때문에 사진만 찍으시고 저녁도 못 잡수시고 떠나야 하셨다. 가시기 전에 인사를 나누며 “두 사람의 결혼 라이센스는 그냥 아버지인 형님 목사님이 사인하시면 되니 걱정 마세요.” 하고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그 말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결혼의 법적인 것 까지는 생각 못 했지만 주례자는 달랐다. 그래서 생각하니 주례자의 “Please, congratulate the first march of Mr. & Mrs. Thomas Pai” 라는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이제는 신부 정수진이 아니고 며느리 배수진이 되어 나는 법적으로 ‘시아버지’가 된 것이다. 물론 지난 몇 달은 수진이가 전화 할 때마다 “아버님, 안녕하셨어요?” 하고 문안하며 실제적인 시아버지 노릇을 하였지만 이제는 법적으로도 시아버지가 된 것이다. 영어의 시아버지 표현인 ‘Father-in-law’ 라는 말이 ‘법 아래서(안에서) 아버지’ 라고 표현한 것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아무 관계가 없던 나와 수진이가 나의 아들 상훈과 결혼이라는 특별한 관계 때문에 법 안에서 아버지가 되었고 딸이 되었다. 이 관계는 실제 상훈과 수진의 결합이 법적으로 유효할 때는 계속 지속되는 관계이다.

식이 끝나자 마자 결혼사진을 찍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 같았다. 미국 사진사의 지시에 따라 신랑, 신부를 중심으로 먼저 부모가 된 우리 부부와 한 컷을 찍고 그 다음에는 할머니와 동생 상준이 포함된 실질적인 ‘배’씨들이 찍었다. 그리고 나서야 고모들과, 고모부, 사촌들이 또 들어왔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법적인 관계를 쉽게 나타내는 ‘촌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롭게 인식했다. 부부는 결혼이라는 특별한 관계 때문에 촌수가 없다.

로마서는 구원의 핵심 단어인 ‘예수 안에서(In Christ)’를 설명하기 위해 ‘법’과 ‘은혜’를 대조하며 물론 결혼의 예도 들고 있다. 바울은 변호사답게 구원의 법적인 예를 들어 알기 쉽게 잘 설명한다. 구원은 바로 ‘예수 안에서’ 라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와 예수님의 그 새로운 관계가 우리를 과거에서 자유롭게 하며 그 관계가 우리를 현재 즐겁게 하며 그 관계가 미래의 소망을 불어 넣어주며 그 관계가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원천이며 또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근거인 것이다. ‘샬롬’ 이라는 유대인의 인사는 그저 평안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평의 관계를 의미한다. ‘법 안에서’ 나의 큰 며느리 수진이와 나는 ‘아버지와 딸’로 새로운 아름다운 관계를 영원에 이어나아갈 것이다. 결혼의 비밀은 바로 ‘감추어진 비밀’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누가 감히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하나? 결혼은 정말로 아름다운 것이다.

040122

2월 17일 어머니는 집 사람과 함께 신장전문의를 만나셨다.
주치의인 안 박사님을 만나고 연이어 잡아놓은 약속이었다.
이틀 전 혈액검사 결과가 크레아틴이 8이 넘었기에(정상은 0.5 ~ 1.5)
이제는 더 이상은 지탱할 수 없다는 김 박사의 소견이었다.
85년 동안 쉼이 없이 움직여 온 어머니의 신장이 이제는 작동을 거부한 것이다.
오늘로 당장 응급실로 들어가라는 의사의 명령이었다.
내가 퇴근하기 전에 어머니와 집 사람은 입원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온 나도 병원에서 읽을 책을 뒤적거렸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라는 소설가 최인호의 책을 빼냈다.
20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쓴 이야기가 이런 경우에 걸맞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박 장로님 댁에서 매우 맛있는 저녁을 드시고 우리는 응급실로 직접 갔다.
응급실은 말처럼 급(急)한 곳이 아니어서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머니의 병상 옆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유전학적으로 아들은 어머니를 더 닮게 돼 있어서 그런지 나는 외탁을 많이 하였다.
벌써 15년 전인가?
럿거스대학 한인기독학생회가 근처의 대학생들을 부활절 잔치에 초대하였을 때 줄리아드에 다니던 막내 외삼촌의 쌍둥이 두 딸이 오랜만에 만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자기들 아빠를 너무 닮아 쌍둥이들이 엄청 놀란 것이었다.
‘어머.., 어머…’ 라는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외모뿐만 아니라 O형의 혈액형도 태음인의 체질도 닮았다.
또한 강한 성격과 숫자에 밝은 것까지 모두 어머니를 닮았다.
어떤 때는 강한 성격의 내가 싫었기에 나에게 유전자를 준 어머니도 싫었다.
자기보다 먼저 젊은 나이의 딸을 하늘나라에 보내면서도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셨고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울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남편이 있던 양로원에 더 이상 매일 갈 필요가 없는데도
병원에 입원하기 이틀 전까지 7년 동안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씩 양로원에 봉사하러 가셨다. 일상을 바꾸지 않는 특별한 성격이다.
2002년과 2003년에 찬양교회에 온 신입교우를 위해서 빚으신 케이크의 숫자가 1백33개가 신입교우 숫자와 일치한다고 재미있어 하시는 분이다.
새로 태어난 교회 아이들에게 직접 손으로 짜신 포대기를 15개 주었다고 자랑하신다.
어머니의 장부는 그렇게 정확했다.
어머니는 찬양교회가 시작한 후부터 꾸준히 신입교우가 오면 케이크를 구워주는 것을 자기만의 일로 알았다. 한번 시작한 것은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줄로 아신다.
그런 꾸준함도 내가 닮았다.
1989년 어떤 분이 무명으로 7천 달러를 처음 건축헌금으로 내놓으시며 그 돈의 백배가 모아져 찬양교회가 건축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밝혔을 때, 당신이 3천 달러를 마련하시어 1만 달러 채어 놓으셔야 속이 풀리는 그런 분이다.
그 나이의 노인이 건축헌금을 2만 불 작정하여 적어 내었고 용돈으로 드리는 돈을 다 모아 기간 내에 완납하셨다.

시끄럽고 분주한 응급실에서 작가의 고백에 조용히 동의를 하며 한편 어머니의 동태를 살피며 책을 계속 읽어갔다.
어머니는 나를 향해 외롭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어머니의 고통과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였던 비정한 아들이었다.
언제부턴가 아들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배 장로’ 하고 부르셔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아들이었다.
어제까지도 나는 강한 어머니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지금 침대에 누우신 어머니는 힘없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이제 수술 후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하여야 하는 어머니, 그는 내가 돌보아야 할 힘없는 아이로 바뀌었다.
밤 12시가 넘었는데도 입원실로 옮길 아무 변화가 없자 어머니는 집에 빨리 가라고 재촉하신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나이 드신 어머니를 둔 아들과 며느리는 꼭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어머니는 돌아 가신지 이십 년이 되어도 아들의 마음속 깊이 심어있기에 책으로 쓸 수 있고
어머니의 체질과 성격이 아들에게 그대로 남아있기에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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