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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세상을 왔다갔다하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모아 봤읍니다. 하늘이야기는 믿음과 관련된 모음이고 세상이야기는 삶과 관련된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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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옥자 규장각관장이 본 퇴계-남명
[원본 : http://kr.blog.yahoo.com/hhl917/1463657 ]
2009/02/15 10:10
정옥자 규장각관장이 본 퇴계-남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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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선생과 남명 조식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선생은 70세, 남명선생은 72세까지 장수하였다. 퇴계가 경북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나 경상좌도를 대표하는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남 삼가현 토동에서 출생하여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사림의 영수로서, 16세기 학파형성기에 있어서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었다. 그들의 제자들은 동인으로 한 정파를 이루었다가 퇴계학파는 남인으로, 남명학파는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16세기는 사림이 사회적으로 성장하면서 기성정치세력인 훈구파와의 대립 갈등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예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하였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어서 중종 후반기에 이르면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다시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한 흐름에 힘입어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사대부의 길을 걷게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에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로 인정받아 헌릉참봉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하면 당연히 치인의 단계로 가 학자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 퇴계는 그 길을 걷게 된 것임에 비하여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퇴계는 명종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전횡하는 혼란기를 당하여 계속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상경과 낙향을 반복하면서도 사대부의 길을 걸어 성균관 대사성, 양관 대제학 등 청직의 최고직과 각조 판서를 고루 역임하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학문이 토대가 되어 율곡 이이에 의하여 조선에 토착화된 성리학은 시대사상으로서 가치관의 정립을 통하여 사회정의 구현의 이론적 기준을 마련하였다.

반면 남명은 지속적인 국가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재야의 우국지사로서 비판자 역할을 고수하였다. 1554년 54세에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퇴계의 권유를 물리치고 처가가 있던 김해에 자리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면서 경의에 근본을 둔 실천우선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퇴계가 조광조의 실패를 거울삼아 현실참여를 통하여 점진적인 개혁의 씨앗을 뿌리며 신정치세력인 사림의 입지를 다져놓아 다음 시대인 선조대에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는데 교두보를 놓았다면, 남명은 강직하고 굳센 기상의 재야사림으로서 강렬한 비판의식으로 무장하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사회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정치의식이 지나치게 투철하여 현실정치판에 뛰어들지 못한 현실부적응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다 함께 사회정의를 구현하려는 이상 아래 교육에 기대를 걸고 새 시대를 준비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퇴계나 남명은 다 함께 개인의 안위와 영달에 안주하지 않고 이상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갖고 강렬한 사회개혁 의지를 다지면서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의 학파가 모집단이 된 이념붕당들이 다음 시대에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 가게되었던 바, 혼란의 시대인 오늘날 시사하는 바 크다.

(정옥자ㆍ서울대 규장각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