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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자정과 인내의 개인사
[원본 : http://kr.blog.yahoo.com/hhl917/1463653 ]
2009/02/15 09:27
 
  
 퇴계 이황의 자정(慈情)과 인내의 개인사

조선조 최고의 도학자이자 시인으로, 또 서예가로서 후대의 우리들이 여전히 매달려야 할 준령으로 남아있는 퇴계선생의 보다 인간적인, 그러나 사사로이 여겨지기 쉬운 삶의 일편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듯하다. 퇴계선생의 가정사는 어떠하였을까...
퇴계선생은 평생 두 번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두 번의 결혼생활 모두 불행하였다. 퇴계선생은 21세 때 동갑인 김해 허씨와 결혼을 하였다. 허씨 부인은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으로 현숙한 여인이었다. 어른을 잘 공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퇴계선생과의 금슬도 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던지 27세 때 둘째 아들을 출산한 후 한 달 만에 별세하였다. 이때 퇴계선생은 허씨 부인의 죽음 외에도, 한 달도 안 된 둘째 아들과 그때 겨우 5살밖에 안 된 맏아들의 양육 문제 등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이렇듯 퇴계선생의 첫 결혼생활은 허씨 부인의 죽음으로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퇴계선생은 허씨 부인과 사별한지 3년이 경과한 30세에 안동 권씨와 재혼을 하였다. 그리고 한 해 뒤인 31세 때 허씨 부인과 살던 집을 버리고 새로 살림집을 마련하였는데, 영지산 기슭 양곡에 지었던 지산와사(芝山蝸舍)가 그것이다. 이처럼 살림집도 새로 마련한 것을 볼 때, 퇴계선생은 두 번째 결혼생활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권씨 부인과의 결혼생활은 첫 번째 결혼생활보다 훨씬 더 불행한 것이었다.

권씨 부인은 광흥창 봉사 권질의 따님이며 갑자사화에 희생된 권주의 손녀이다. 권주는 갑자사화 때에 평해로 귀양을 갔다가 곧이어 사약을 받았다. 이때 할머니 고성 이씨는 사약이 평해로 내려갔다는 기별을 듣고 자결하였으며, 아버지 권질도 거제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아버지 권질이 풀려나 권씨 부인의 집안이 안정되는가 싶더니, 신사년(1521년)에 일어난 무옥(誣獄)으로 또 한 차례 풍파를 겪었다. 숙부 권전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형장에서 곤장을 맞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아버지 권질은 예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숙모는 관비로 끌려가게 되었다. 권씨 부인은 이때 어린 나이였는데, 이와 같은 참극을 목격하고는 그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더니 영영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퇴계선생이 당시 예안에 귀양와 있던 권씨 부인의 아버지 권질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권씨 부인과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질은 예안에 귀양와 있으면서 상처한 퇴계선생에게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하여 아직 시집을 못가고 있는 형편을 말하고는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고, 퇴계선생도 승낙하였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정신이 혼미한 부인과의 결혼생활은 불행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전해온다. 하루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종가에 모여 신위 앞에 제사상을 차려놓았는데, 권씨 부인이 제사도 지내기 전에 제사상에 놓여있는 음식을 마구 먹더라는 것이다. 물론 퇴계선생이 권씨 부인을 위해 그 자리에 모인 일가 친척들에게 변명하였을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또 퇴계선생이 서울에서 벼슬을 할 때, 출타하려고 도포를 입다 보니 도포자락 한 군데가 헤어져 있었다. 그래서 퇴계선생이 꿰매달라고 했더니, 권씨 부인이 하얀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고 꿰매주더라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퇴계선생은 아무 말 없이 그 도포를 입고 출타하였다고 한다.
이 두 일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퇴계선생이 권씨 부인 때문에 일상에서 겪었을 어려움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퇴계선생은 벼슬길에 나간 처음, 권씨 부인 때문에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퇴계선생은 34세에 과거 급제로 벼슬길에 나가서 곧바로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 사관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김안로(金安老)가 언관(言官)들을 사주해서 퇴계선생이 역적 권전의 형인 권질의 사위이기 때문에 사관이 될 수 없다고 탄핵하였다. 벼슬길에 나간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퇴계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김안로의 훼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퇴계선생은 36세 때 6품의 선무랑에 오른 뒤로 지방 수령 자리를 얻어 홀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안로는 퇴계선생을 지방 수령으로 내보내는 것도 불안하였던지 그것조차 저지하였다. 퇴계선생의 어머니 춘천 박씨는 그 한 해 뒤인 퇴계선생 37세에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끝내 홀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실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권씨 부인은 퇴계선생 46세 때 소생도 두지 못한 채 별세하였다. 그러니까 퇴계선생은 권씨 부인과 17년간 결혼생활을 한 것이다. 그간의 인간적인 고통과 심적인 갈등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선생은 홀어머니에게 두 번씩 며느리를 잃게 하는 슬픔을 안겨줄 수 없었기에 감내하기 어려운 인간적인 고통을 견디며 지내왔다고 하였다. 여기에 권씨 부인이 정신이 혼미한 데다 소생도 두지 못하였기에 그 가련한 처지를 깊이 연민하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특히 자정(慈情)이 유달랐던 퇴계선생으로서는 자식들에게 두 번씩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게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간의 사정은 퇴계선생이 69세 때 제자 이함형(李咸亨)에게 준 편지(여이평숙(與李平叔))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일찍이 두 번 장가를 들었는데 하나같이 심한 불행을 당하였소. 그러나 이러한 처지에서도 마음을 감히 스스로 박하게 갖지 않고 잘 처리하는 데 힘을 쓴 지 수십 년이었소. 그 사이에 극도로 마음이 번거롭고 생각이 산란하여 어지럽고 고민스러움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어찌 감정만 좇아 큰 인륜을 무시하여 홀어머니께 근심을 끼칠 수 있었겠소.”
퇴계선생은 이함형이 부부간에 금슬이 좋지 않아 서로 상면하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도산서당에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에게 편지 한 통을 건네주었는데, 그 겉봉에는 “길을 가다가 가만히 열어보라 [道次密啓看]”라는 말이 써 있었다. 위의 글은 그 편지 중의 일부이다. 이함형이 돌아가는 길에 그 편지를 펴보니, 퇴계선생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감내해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들어 부인을 소박하지 말 것을 간곡히 충고하는 것이 아닌가. 집으로 돌아온 이함형은 부인에게 퇴계선생의 편지 내용을 일러주었다. 그 날부터 이함형 내외는 누구보다도 금슬이 좋은 부부가 되어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후일 퇴계선생이 돌아가시자 이함형 내외와 그 자손들은 친자식이나 다름없이 퇴계선생의 삼년상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며 퇴계선생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가정이란 부부간에 화락하며 위로는 부모를 모시고 아래로는 자녀를 양육하는 터전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이혼한 가정을 찾기 어렵지 않다. 물론 현대에는 과거처럼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으므로 부모를 모시는 문제는 잠깐 도외시하더라도, 자녀양육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서구 사회처럼 결손 가정의 자녀들을 양육해줄 제도적 장치가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혼율은 해마다 증가하여 이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고 있다. 퇴계선생의 경우에 비추어서 이 문제를 한번쯤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글 : 정석태 (퇴계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