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퇴계 이황의 현실인식과 서원교육 퇴계선생 유묵전(遺墨展)에 부쳐
흔히, 퇴계는 당시의 현실을 떠나 산림에서 도학(道學)만을 닦고 있었던 분으로, 도학자(道學者)로서는 높이 우러러 보이지만 현실적 관점-정치·사회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별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여기고 있다. 특히 오늘의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퇴계의 이미지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이다. 그것은 퇴계의 정신과 현실 대처의 자세를 전혀 모르고 있는 데서 오는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는 먼저 퇴계의 현실 인식-시대관과 그 시대에 대해서 어떠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알아야 한다. 퇴계의 시대, 즉 16세기 초·중엽은 우리 나라 정치사·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의 시대이다. 조선의 건국에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던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관료학자들은 건국 1백 년 동안 국가의 기반을 굳히고 문화적으로 전장제도(典章制度)를 정비하고, 역사 및 기타 국고문헌(國故文獻)을 편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집현전을 비롯한 관각기구(館閣機構)에서 산출된 이 문화업적을 우리는 ‘관학적 아카데미즘’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선 초기 관각문화의 주도자 가운데 차차 공신·척신 등 권력과 부에 집착하는 자들이 끼여들게 되고 관학적 아카데미즘은 차츰 빛을 잃어갔다. 공신·척신 등 훈구파(勳舊派) 세력은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정치를 더욱 부패시킬 뿐 아니라 당시 지방에서 새로 등장한 사림(士林)들을 정적(政敵)으로 박해하여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일으켰다. 사림파(士林派) 출신인 퇴계가 이 시대를 ‘말세’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동시에 이 말세적 현상을 극복하고 새 세운(世運)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사림파로서의 퇴계의 신념이다. 중앙에서의 관학적 아카데미즘의 퇴화와 지방에서의 신진사림파 철학의 대두, 이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며 퇴계의 역사적 위치가 설정될 근거가 되었다. 퇴계는 말세적 현상으로 무엇보다 당시 인심의 타락을 개탄하였다. 중앙정계를 굳이 떠나면서 국왕에게 올린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오늘날의 인심은 부정(不正)함이 매우 심하다”고 하여 당시 각계 각층의 인심의 부정을 가차없이 지적하고 정치를 바로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심의 개선, 즉 정신풍토의 시정이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인심의 개선이 없이는 어떠한 법제도를 만들더라도, 또 어떤 사람이 정국을 담당하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조정암(趙靜庵)의 선례를 들기도 하였다. 퇴계는 여기에서 자기 사명을 알았다. 말세를 극복하고 조국을 이상국화시키려고 한 그의 문명지향적 의욕은, 그러나 성급한 미봉책으로서가 아니라 근본적 방책으로서 인심의 개선 즉 정신풍토의 시정 작업에 착수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사림파 철학-성리학의 교육 보급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퇴계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수양을 통한 참다운 인간 형성의 학문이었다. 당시 지방에는 신진사림의 자제들이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퇴계는 이 젊은 자제들에게 참다운 인간 형성의 학문을 가르쳐주어야 했다. 그런데 기존 교육기관인 향교와 국학(成均館)은 읍내(邑內)와 수도(首都)에 있어 번잡스러울 뿐 아니라 과거(科擧)와의 관련에서 출세주의·공리주의(功利主義)가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퇴계는 젊은 자제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환경 조성의 필요성을 통감하였다. 이것이 퇴계가 지방에서 전력을 다해 서원(書院) 창설운동을 벌이게 된 까닭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듯이 보였던 퇴계가 이상하리만큼 서원 창설운동에 사회적·문화적 관심을 집중시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근래 학자들 중에는 사림정치를 찬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림정치는 퇴계의 이러한 교육운동에 의해 배출된 인재들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의 관직을 버리고 지방 향리로 물러난 것을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는 소극적 인생관으로 평가하는 잘못된 인식과는 달리, 사림파 철학의 완성에 의한 관학적 아카데미즘의 지양, 새로운 교육운동에 의한 정치 에너지의 개발 등으로 새 세운을 맞이하려는 그의 적극적 가치 창조의 생애를 우리는 사려 깊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글씨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즉 글씨에서 그 사람의 인품이 가장 잘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즘의 서예(書藝)와 같이 중국법첩(中國法帖)에 의한 전문적 학습(專門的學習)으로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는 사람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지만 특히 근대 이전 학자들의 경우에는 서예를 전문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학문과 수양의 결과, 교양의 한 부분으로 글씨가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글씨에 그 인품이 더욱 형상화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퇴계선생의 글씨를 오늘날 우리가 높이 평가하고 귀중하게 보존하는 이유는 그것이 일반 서예가들의 글씨와 달리, 선생의 숭고하면서도 자상한 인품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퇴계선생은 그의 초년 박학역행(博學力行)의 과정에서 글씨에도 유의(留意)하여 적지 않은 공력(功力)을 쌓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다. 선생의 글씨는 그의 시문학(詩文學)과 같은 바가 있다. 일찍이 허균(許筠)이 선생의 시(詩)를 평하면서 선생의 시는 “높은 경지에 들려고 애쓰지 않는데도 저절로 높아져 있다 [先生詩 不冀高而自高]”라고 한 바 있는데 나는 선생의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선생의 글씨에는 기발(奇拔) 경한(勁悍) 화수(華秀) 미려(美麗)한 곳을 보기 드물다. 그러나 평범한 듯하면서도 격(格)이 지극히 높고, 담백한 듯하면서도 신채(神采)가 드러나고, 온유(溫柔)한 듯하면서도 엄정(嚴整)한 기상이 배어 있고, 정상(正常) 그대로이면서 변화가 잠재(潛在)해 있어서 보면 볼수록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고개를 숙이게 된다. 선생의 시와 글씨에 대하여 당시 제자들 가운데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 같은 분은 별로 찬성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선생께서 납작 글씨와 담박 풍월을 조금 줄이시면 도학이 더욱 빛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후세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선생의 시를 몇 수 예로 들어 송계를 반박하면서도 선생의 글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여기 성호를 대신하여 선생의 글씨를 예로 들어 송계를 반박하고 싶지만 지금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글 : 이우성 (학술원회원, 민족문화추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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