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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
[원본2 : http://kr.blog.yahoo.com/hhl917/1463668 ]
2009/05/11 15:13

성리학 (性理學)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로서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줄임말이다.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BC 213년과 BC 212년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이(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이(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태극이라는 말은 성리학 이전에도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데, 그것에 의하면 태극을 만물의 근원, 우주의 본체로 보고 “태극은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는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은 팔괘(八卦;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를 낳고 팔괘에서 만물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우주관을 계승하고 여기에 오행설(五行說)을 가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수립한 것이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태극도설》은 만물 생성의 과정을 ‘태극―음양―오행―만물’로 보고 또 태극의 본체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말로 표현하였다. 그 본체는 무성무취(無聲無臭)한 것이므로 이를 무극이라 하는 동시에 우주 만물이 이에 조화(造化)하는 근원이므로 태극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자는 이것을 해석하여 태극 외에 무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만일 무극을 빼놓고 태극만을 논한다면 태극이 마치 한 물체처럼 되어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고, 반대로 태극을 빼놓고 무극만을 논한다면 무극이 공허(空虛)가 되어 역시 조화의 근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같이 무극과 태극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유(有)가 즉 무(無)이며, 절대적 무는 절대적 유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소옹은 태극이 곧 도(道)라 하였다. 만물의 근원적 이치가 도 또는 도리(道理)라 한다면 태극은 곧 태초부터 영원까지, 극소에서 극대까지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치라 하였으니, 다시 말하면 공간적으로 대 ·소가 있을 수 없고, 시간적으로 장(長) ·단(短)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천지도 하나의 태극이요 만물 하나하나가 모두 태극이라 하였고, 이 태극에서 음양으로의 이행(移行)은 태극의 동정(動靜)에 의하는 것이며 동정은 곧 음양의 두 기운을 내포하고 있어, 만물의 근원적인 생성(生成)이 전개된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이기설은 우주 ·인간의 성립 ·구성을 이(理)와 기(氣)의 두 원칙에서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이 이 ·기라는 말은 성리학이 성립되기 이전에도 있었으니, 《역경(易經)》에서는 천지만물을 음양 2기의 활동에서 성립된 것이라 하여 이 ·기의 개념을 말하였다. 송대에 이르러 주돈이는 그의 《태극도설》에서 모든 근원인 태극이 2기를 낳고, 2기에서 수 ·화 ·목 ·금 ·토의 5행을 낳고, 5행에서 남 ·녀가 생겨 거기에서 만물이 화생(化生)하였다고 논하였다.

  장재는 우주의 본체를 태허(太虛)라 하였고 그 작용으로서 음양의 2기가 있어 여기에서 천지만물이 만들어졌다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을 폈으며, 정호도 기의 통일체로서의 건원(乾元)을 내세웠으나 그의 아우 정이는 기의 세계에서 출발하면서도 기와는 별도로 이의 세계를 생각하여 이와 기를 확실히 구별함으로써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단서를 열었다.

  《역경》에 “일음일양(一陰一陽)을 도(道)라 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정이는 이 도를 ‘음양의 원인이 되는 것이 도’라고 보았다. 즉, 형이상(形而上)의 도를 형이하의 기에서 구별하여 도를 기의 현상(現象) 속에 존재하는 원리로 하여 새로운 우주관을 세운 것이다. 이 도가 곧 이이다. 그러나 이와 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어느 것이 빠져도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 양자는 동시존재이며 다만 그 질(質)을 달리할 뿐, 경중(輕重)의 차는 없는 것이나, 기는 항상 변화하는 데 대하여 이는 법칙성을 지니고 부동(不動)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연히 경중이 부여된다. 특히 그것이 윤리(倫理)에 관련될 경우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천(天)은 이(理)이다’ ‘마음은 이이다’라고 하는 이면(裏面)에는 이가 법칙적 성격이 부여된 데 대하여 기는 항상 물적(物的)인 것, 그리고 자칫하면 이의 발현(發現)을 방해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내재하게 된다. 이것을 일방적으로 말하자면 종래의 성선설(性善說)에 명확한 설명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으니, 즉 ‘성은 이이다(性卽理)’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이의 이기철학은 주자에게로 계승되어 이 ·기의 성격은 더욱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주자는 이에 ‘소이연(所以然:존재론적 의미를 가진다)’과 ‘소당연(所當然:법칙론적 의미를 가진다)’이라는 두 가지 성격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것은 기의 내부에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가 형질(形質)을 지니고 운동하는 것에 대하여, 이(理)는 형질도 없고 운동도 하지 않고, 그 실재는 기를 통하여 관념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기가 형질을 갖고자 할 때, 또는 운동을 일으키려 할 때, 이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의 이러한 작용은 전혀 불가능하며, 기의 존재 자체도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자는 이것을 윤리에 적용시켰을 때, 이 ·기에 경중을 두면서도 기를 악(惡)으로만 단정하지 않고, 기의 청탁(淸濁)에 의한 결과에서 선악을 인정하려 하였다. 인간의 신체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정(情)은 기에서 성립되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善)한 성(性)은 이(理)가 마음에 내재화(內在化)된 것으로 보았다. 이 이기설은 그 후 오랫동안 철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윤리적 입장에서 기에 중점을 두느냐, 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일 뿐, 우주관 자체는 부동의 것이 되었다.

  성리학의 이기설이 우주를 논한 것이라면 심성론은 인생에 관한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인간은 우주 내에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기설과 심성론은 상호 관련성을 갖게 된다. 중국 유학에서는 맹자 이후 인간의 성(性)이 선(善)이냐 악(惡)이냐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분규를 거듭하였고 오랫동안 중국 철학의 큰 문제로 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荀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으나 송대에 이르러 순자의 성악설은 배척되고 성선설은 당시 새로 대두된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다시 의리(義理)의 성과 기질의 성으로 나누어져, 전자는 본래 완전한 선이라 하고 후자는 기질의 양부(良否)에 따라 선악으로 갈린다는 성리학설이 정립되었다.

  즉, 정이는 이(理)가 인간에 들어와 성(性)이 되고 기는 인간에 들어와 재(才)가 된다고 하였다. 이는 만물의 본체이므로 순선(純善)하고, 따라서 사람의 성은 모두 선하여 악한 것이 없으며, 기에서는 청탁과 정편(正偏)이 있다 하였고, 그 때문에 사람의 재에는 지혜(智慧)와 우둔(愚鈍)이 있고, 현명(賢明)과 불초(不肖)가 있는 것이라 하였다. 정호는 《주역》을 인용하여 형상(形狀)이 없는 것을 도리(道理)라 하고, 형상이 있는 것은 기(器)라 하여 하늘의 도리는 음 ·양이요, 땅의 도리는 유(柔) ·강(剛)이요, 인간의 도리는 인(仁) ·의(義)라 하여, 비록 천 ·지 ·인의 삼재(三才)가 음양 ·강유 ·인의로 다른 것 같으나 도리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귀일된다고 하였다.

  주자는 인간의 심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본연지성은 이(理)요, 선(善)이라 하였고, 기질지성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청탁과 정편이 있어 반드시 선한 것만은 아니고 때로는 악하게도 된다 하였다. 정(情)은 반드시 악한 것만은 아니지만 때로는 선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즉 기질을 맑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情)이 선하게 되지만 이것을 탁하게 타고난 사람은 그 정(情)이 악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에 따라 청탁 ·지우(智愚) 등 여러 차별이 있으나, 이 정은 불변이 아니므로 인간의 노력과 수양에 따라 우(愚)가 지(智)로도 변하고 탁함을 청으로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니 여기에 인간의 윤리성 및 도덕성이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리하여 인간이 지켜야 할 규범으로서 성리학자들은 성(誠) ·경(敬)을 공통의 진리로 파악하였다.

  인간이 자연의 진리와 진정한 자아를 추궁하여 근원적 도리에 도달하는 요체로서 주돈이는 이것을 정(靜)에 두었고, 정호는 성(誠)에 두었으며 정이와 주자는 경(敬)에 두었다. 정이는 “수양에는 경이 필요하며 학문의 발전에는 치지(致知)가 중요하다”고 하였으니, 이들 성리학자들의 정(靜) ·성(誠) ·경은 필연코 인(仁)과 의(義)로 귀일되는 것이다. 즉, 인 ·의의 인식 파악은 성 ·경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함을 말하였다.

  성리학은 주자 생존시에는 이것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박해를 받았으나 송나라 멸망 후 원대(元代)에 이르러 관학(官學)으로 채택되고 과거(科擧)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청대(淸代)에 이르러 고증학(考證學:實學)이 대두되면서 귀족의 학문이니 실속 없는 공론(空論)이니 하여 배척되었으나 교과 과목으로서의 성리학은 여전히 그 지위가 높았다

  한편, 한국에 성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말기, 충렬왕을 호종하여 원(元)나라에 갔던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성균관의 유학자들에게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사상으로서 새로운 학풍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로서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정도전(鄭道傳) 등을 들 수 있다.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은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는 데 그쳤고, 또 신왕조에 협력하지도 않았으나 정도전 ·하륜(河崙) ·권근(權近) 등의 성리학자는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교리(敎理) 자체를 논리적으로 변척(辨斥)하는 동시에 이태조를 도와 법전(法典)의 제정과 기본정책의 결정을 통하여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는 조선조가 성립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고, 그 학통은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그리고 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면서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희생을 겪었으나 도학의 의리정신은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이 땅에 전래된 지 300년 가까이 되어서였다.

  즉, 이때 한국 유학의 쌍벽인 이퇴계(李退溪)이율곡(李栗谷)이 태어났으며, 서화담(徐花潭)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기대승(奇大升), 그리고 성혼(成渾)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성리학자들이다. 그들은 성리학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함에 있어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 내면의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더 추구하였으니, 이퇴계와 기대승 및 이율곡과 성혼의 사단 칠정(四端七情)에 관한 논변(論辨)이 바로 그것이며, 그들은 이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을 활발히 전개시켰다.

  즉, 사단(四端)이란 맹자(孟子)가 실천도덕의 근간으로 삼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을 말한다.

  이황은, 4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 하였으며, 인간의 마음은 이와 기를 함께 지니고 있지만, 마음의 작용은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선과 악이 섞이지 않은 마음의 작용인 4단은 이의 발동에 속하는 것으로, 이것은 인성(人性)에 있어 본연의 성(性)과 기질(氣質)의 성(性)이 다른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른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하였다.

  이황의 이러한 학설은 그 후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켜 200여 년 간에 걸쳐 유명한 사칠변론(四七辯論)을 일으킨 서막이 되었다. 즉 기대승(奇大升)은 이황에게 질문서를 보내어,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 이기공발설(理氣共發說)을 내세웠으며, 이를 다시 이이(李珥)가 뒷받침하여 이기이원론적 일원론(理氣二元論的一元論)을 말하여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 부단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서인(西人) 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내면적 도덕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 ·김장생(金長生) 등에 의하여 유교의 행동규범인 예설(禮說)로 발전하였다. 이퇴계와 이율곡에 앞선 서화담은 그 이론이 송나라 장재와 같은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할 수 있으니, 곧 “태허(太虛)는 맑고 무형(無形)이나 이름하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가 바깥이 없으며, 거슬러 올라가도 시작이 없다”고 하며 기(氣)의 본체를 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화담은 이러한 기 가운데 “갑자기 뛰고 흘연히 열림이 있으니 이것은 누가 시키는 것인가? 저절로 그렇게 되며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곧 이치(理致)가 시간으로 나타남인 것이다”라고 기의 작용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화담은 기라는 것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만 있을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퇴계는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본 학자였다. 그는 정통 정주학의 계통을 따라서 항상 이우위설(理優位說)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으며,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무릇 옛날이나 오늘날의 학문과 도술(道術)이 다른 까닭은 오직 이 이를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극히 허(虛)하지만 지극히 실(實)하고 지극히 없는 것(無) 같지만 지극하게 있는 것(有)이다. …능히 음양 ·오행 ·만물 ·만사(萬事)의 근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 기와 섞어서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유(萬有)를 명령하는 자리요, 어느 것에서 명령을 받는 것이 아니다”.

  퇴계는 이와 기를 엄격히 구별하여 그 혼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극 또는 이로 표현되는 것을 다름 아닌 인간의 선한 본성의 궁극적 근원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리란 곧 인간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확충하고 발휘함으로써 인간이 인간된 소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체적 ·물질적 조건에서 유래하는 것과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는 당시에 사화(士禍)가 연달아 일어나서 올바른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 진실로 선악과 정사(正邪)를 밝히고 올바른 진리를 천명함으로써 사람들이 나아갈 바 표준과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퇴계의 이같은 성리학설은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고,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퇴계보다 35년 후에 태어난 이율곡도 퇴계와 마찬가지로 정통 성리학파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성리학만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철학(老莊哲學)을 위시한 제자(諸子)의 학설과 양명학(陽明學) 등 여러 학파의 사상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러면서도 율곡은 유학의 본령(本領)을 들어 그 기본정신에 투철하였으며, 이를 철학적으로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현실문제에까지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는 논하기를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녔다 하더라도 공자(孔子)가 가르친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든지 인의(仁義)와 같은 일상적으로 인간이 행할 도리를 떠나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규범(規範:所當然)만을 알고 근본원리[所以然]를 알지 못하면 그 행위가 결과적으로 선행(善行)에 합치한다 하더라도 도학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자애(慈愛)와 효도와 충성과 우애라 하더라도 그것을 행하는 이유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율곡성리학의 요령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실(경험성)에 근거하여 그 까닭을 추구함(논리성)에 있어 논리적인 모순이나 비약을 배제하고 그 본원성(本源性)을 체계적으로 나타내는 철학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율곡은 진정한 학문이란 내적(內的)으로 반드시 인륜(人倫)에 바탕을 둔 덕성(德性)의 함양과 외적으로 물리(物理)에 밝은 경제의 부강(富强)을 겸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의 피폐한 현실을 역사적 갱장기(更張期)로 파악하고 국방력의 강화, 경제적 부강, 사회정의의 확립 등을 주장하는 동시에 이러한 실리를 주장하다 보면 의리(義理)에 어긋나고 의리를 추궁하다 보면 실리를 망각하기 쉬우므로 이러한 모순을 원만히 타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권능(權能)과 의리가 상황에 따라서 창의적으로 그 마땅함[宜]과 알맞음[中]을 얻는다면 의(義)와 이(利)는 그 가운데 융화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퇴계 ·율곡의 성리학은 인간성의 문제를 매우 높은 철학적 수준에서 구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공허한 관념을 벗어나 역사적 ·사회적인 현실과 연관을 가지고 영향을 주었으며, 후세에 실학사상(實學思想)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 차석찬의 역사창고 홈으로 -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원본2 : http://kr.blog.yahoo.com/hhl917/1463660 ]
2009/02/15 12:10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

<선생의 문필 감상 >

선생은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업적을 남겨 동방 성리학의 거벽(巨擘)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時)와 문장에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필법도 뛰어난 명필이기도 했다. 특히 선생의 편지글은 우리나라 제일이라 평가되고 있다. 선생은 오직 도학에 정진하는 학자의 전형이었으면서도 문장과 시가(時歌)를 결코 경시하지 않아 이 방면에도 매우 뛰어난 재주와 솜씨를 발휘했다.
선생은 말하기를 "말은 뜻을 전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학자는 문장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문장을 알지 못하면 비록 글을 약간 안다할지라도 그 뜻을 말로 나타내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학자, 아니 모든 인간에게 문장에 대한 수련이 없이는 자기의 사상, 감정이나 의사 표시를 명확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은 본래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이 섬세하며 기상이 청정고일(淸靜高逸)하고 운치가 있어 자연을 사랑하고 전원(田園)을 즐기어 때때로 사시풍물의 변화와 사물과 인정에 접하여 감회가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시를 읊었다. 이렇게 하여 모인 시는 그의 문집에 모두 9권, 2천여 수나 되는 분량이 남아있을 정도로 많다.

다음에 몇 수의 시를 소개해 보기로 한다.

< 시냇가에서 산을 넘어 걸어가 서당에 이르다. >

化發巖崖春寂寂   바위에 꽃이 피어 봄날은 적적하고
鳥鳴澗樹水潺潺   나무에 새가 울고 시냇소리 잔잔해라
偶從山後携童冠   우연히 아이들 데리고 산을 돌아거닐다가
閒到山前問考槃   매 앞에 한가히 와서 선경을 보노라.

< 봄 날 시냇가에서>

雪消氷泮록生溪   눈 녹고 얼음 풀려 푸른 물 흐르는데
淡淡和風양柳堤   살랑살랑 실바람에 버들가지 휘날린다
病起來看幽興足   앓다가 일어나 보매 그윽한 흥이 넘치노니
更憐芳草欲抽荑   꽃다운 풀 새싹트니 귀 더욱 어여뻐라.

< 춘일한거 (春日閒居)>

不禁山花亂   산꽃의 어지러움은 싫지 않으며
還憐徑草多   길섶의 풀 우거짐은 사랑스러라
可人期不至   다정한 사람은 끝내 오지 않으니
柰此綠尊何   이 푸른빛 술두루미를 어찌 할거나.

綠染千條柳   푸르게 물든 것은 천 가지 버들이요
紅燃萬朶花   붉게 타는 것은 송이 꽃이로다
雄豪山稚性   웅장하고 호탕한 것은 산꿩의 성질이요
奢麗野人家   사치하고 고운 것은 들 사랑의 집일러라.

< 기상과 기백과 지조에 관하여>

生當絶壑臨無底   말없는 깊은 골, 벼랑에 사는 노송나무!
氣拂層소壓峻峰   기개는 하늘을 떨치고 메뿌리를 위압한다.
不願靑紅장本性   울긋불긋한 게 본성 해침 원치 않아
肯隨桃李媚芳蓉   복숭아 오얏따라 어찌 아양피우랴!

< 도산십이곡 >

연하(煙霞)로 지붕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늙어가네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其二)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봐
고인(古人)을 못 봐도 녀던 길 앞에 있네
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녀고 엇절고. (其三)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 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其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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