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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as our body needs daily food, so does our spirit. 육신에 매일 양식이 필요한 것 같이 영혼에도 매일 양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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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 : 2004/06/25
 

1987년 2월 1일의 Experience X 이후 회사의 일도 변화가 생겼다.
4월에 열리는 실험생물학회(FASEB) 미팅의 한 초록(Abstract)을 그대로 재현하라는 프로젝트를
새로 받았다. 나도 3주후에 그 초록과 똑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결론이 내 마음에 안 들었다. 내 생각에는 모든 결과가 Phospholipase C (PLC)로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PLD가 더 올바른 결론이었다.
이 간단한 생각 하나가 나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이 생각이 떠오른 것도 바로 X 이후 나의 마음에
있던 평화가 인도한 것이다. 회사(Schering-Plough)에 온 후 일년동안 잊고 있었던 위스콘신에서
했던 일을 재현하면 내 결론이 맞는다는 것을 분명히 증명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대가 되고 흥분이 되었다. 이미 3년의 경험이 있었으므로 2주만에 쉽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세포(cell)의 활성에 아주 중요한 PLC라는 고정관념에 고착되어 있었기에
그 당시에는 그저 식물에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PLD라는 내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회사 안의 보스들에게 눈에 보이는 더 확실한 증명을 해주어야 했다.
그것을 위해 다시 석 달을 보낸 후 이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더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세포의 신호전달에 PLD가 아주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분명하게
눈에 보이게 증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이것이 새로운 기전작용의 알레르기 약이나 항암제를
개발할 수 있는 새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논문발표를 많이 하여야 이름이 알려지고 그의 실력이 인정된다.
그러기에 ‘발표를 못하면 학계에서 없어진다(Publish or Perish)’ 는 말이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으므로 내가 하는 실험의 거의 모든 결과가 발표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었다. 나의 보스는 처음 논문을 같이 쓴 후 학계에 발표하기 전에 회사의
‘사장상(Presidential Award)’을 먼저 신청하자고 제의하였다.
일년에 한 번씩 회사 안에서 가장 좋은 연구를 한 그룹이 만 달러($10,000)의 상금과 함께 상장을
사장에게 받는 것이었다. 그 때의 규칙에 의하면 아직 포스트 닥터(Post Doc)인 나는 받을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회사는 먼저 규칙을 바꾸고 나와 내 보스에게 1988년 상을 주었고 아내와 함께 회장을 비롯한
높은 사람들과 멋있는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3개월 후 선임 과학자(Senior Scientist)로 발령을
내었다. 그 해 실험생물학회(FASEP) 회의에서 처음으로 발표를 하였다.
그 발표로 인하여 동창 유영제 교수를 포함한 다른 연사들이 이미 다 결정된 그 해 여름 서울에서
열리는 재외과학기술자 대회에 급히 연사로 추가되어 국내에도 PLD라는 것을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모든 것이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 후 논문 수로 보나 질로 보나 한국은 PLD 강국이
되어 15년이 지난 아직도 그 분야에 관한 좋은 논문들이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X 바로 이전의 나의 마음 상태는 벌써 회사에 온 지 일년이 지났고 앞으로 일년 계약만이 남았는데
일년동안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내 스스로 한번도 과학자로 내가 적격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지원한 의과대학이 아니고
2차 지망으로 생화학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대학에 입학하였다. 미국에 이민을 와 아버님이 원하시는
것이라 어쩌다가 박사학위를 하였지만 나의 지도교수 말대로 나는 별로 과학적이 아니었고 좋은
과학자처럼 과학에 모든 것을 기울이지는 못했다.
교회가 더 중요하여 박사학위가 끝난 후 다른 새로운 곳에서 포스트 닥터를 해야 하는데 내가 떠나면
학생들이 중심인 작은 교회가 안 될것 같은 착각 때문에 그냥 매디슨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3년 반 동안의 포스트 닥터 생활도 과학에 모든 것을 바치지는 못하고 그저
직업으로 여겼으나 8년 8개월의 추운 위스콘신 생활이 너무 지겹다는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장래를
가름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손에 돈 한푼 없이 뉴저지로 우연히 이사오게 되었다.

뉴저지에 온 나는 왜 하나님이 이곳으로 보내셨는가를 생각하였다.
처음 일년 동안 얻은 자신감은 과학을 당장 그만두고 무엇을 해도 뉴저지에서 먹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직장에 꼭 들어가서 일을 안 해도 세탁소나 옷 가게를 차린다면 도와 줄 사람들도
있었고 수입도 더 나아 보였다.
그러나 아직 분명한 직장도 없지만 박사와 장로라는 외관상의 타이틀만으로도 이곳에서 자란
2세들에게 역할 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장로가 됐다는
것 때문에 교회에서 이상한 눈으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마침 럿거스 대학의 한인기독학생회 (KCF)와
연관이 되어 매주 한 두 번씩 젊은 그들과 같이 어울려 성경을 공부하고 찬양을 같이 하는
새로운 사역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미 럿거스 KCF 학생들은 캠퍼스에서 리벤젤 수양관으로 향하였기에 1987년 1월30일 밤
나는 혼자 리벤절을 처음으로 찾아갔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도하신 ‘나의 이야기(My X Story)’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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